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달 그림자 1

2006.01.13 23:4001.13

긴 숨을 몰아쉬며 방문에 기대어 섰다. 흐린 장지문 사이로 햇빛이 길게 여울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간밤의 일이 기억나질 않아 여태 고심하던 참.
모르는 곳이다. 전혀 모르는 곳이다. 낯도 설고 물도 설고 머리위로 내리쬐는 햇살조차 못보던 것 같다. 미리 초칠을 해둔 듯 소리 없이 열리는 문이 매끈하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만 내딛으면 긴 복도가 있고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칸칸이 이어지는 문들. 모두 내 방의-벌써부터 이런 소유격 명사를 쓰다니!-것과 같은 모양새다. 매한가지다. 거기에는 특징지을 무엇도 없고 구분지을 무엇도 없다. 그저 문일 뿐이다. 그러나 문의 생김새만은 매우 아름답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흔히 보는 격자무늬의 그것일 뿐이지만 나무의 결은 유난히 부드럽고 더구나 그 위로 길게 드리워진 대나무의 모양새는 불안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장유 특유의 부드러운 머릿결에 검은 먹을 듬뿍 먹여 흩날린 모양새는 그것을 그린 이의 능숙함과 처연한 마음가짐을 일러준다. 보지 않아도 그것을 떠올릴 수 있다. 붓을 바투 잡은 장인의 손놀림이며 미끄러지듯 이어지는 붓머리의 흔들림! 그런 것들을 떠올리는 사이 나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내 자신만은 그대로인 것이다. 아무런 연유도 없이 이런 기묘한 상황에 빠져버렸지만 적어도 내 자신만은 그대로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이런 부질없는 것들을 떠올릴 수 있는 내 자신만은.

  그러나 다시 소스라치듯 놀란다. 정말로 그대로인가, 나 자신은? 아니, 아니다. 나는 이런 아이가 아니다. 나는 뜨거운 도시의 열기 위에 태어난 아이. 매연과 소음이 만들어낸 열섬위로 돋아난 목숨. 사는 길도, 죽는 길도 알 지 못해 그 틈바구니 위로 위태위태하게 걸음질치던 열 여덟의 나.

나는 본디 장지문 따위는 알 지 못한다. 내 손에 익숙한 것은 차갑고 온기없는 인위적인 것들. 생명을 벗어난 것들. 붓머리에 검은 물을 들여 농담을 주는 일 따위 알 지 못한다. 그것이 도야지의 털로 되었건 말의 알몸 털로 되었건 나는 들은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어느 섣부른 영상이 지워버린 그 목숨처럼 나도 그리 된 것인가. 기구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달음질 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가. 가슴 속 심장이 자꾸만 발딱거린다. 뜨거운 숨결이 인중 위를 드나든다. 결국 현실과 꿈을 구분짓지 못한 채 여기 이렇게 드리워져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러나 가슴 속에 뜨겁게 뛰는 심장도, 피부를 차갑게 파고 드는 감각도 아직은 모두가 진짜. 아니면 진짜 같은 꿈. 어찌되었거나 의미없는 짓.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 했던가. 그 속에 내가 있다. 꿈 속에 내가 있건, 꿈 밖에 내가 있건. 그러나 나의 모든 오감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져 주위의 모든 사물들을 관찰하고 주시하고 있다.



스삭

스삭 스삭 스삭



그러던 중에 귓가를 자극하는 것은 무언가 살아숨쉬는 것이 만들어 내는 잔향(殘響). 조금 전 뜨악한 창으로나마 내다본 중에 깨달은 것이 이 곳이 내가 듣도 보도 못한 깊은 산 중이라는 것. 그러니 이것이 설치류 과의 작은 짐승이라해도 놀랄 것은 없지만 나는 왠지 이 소리가 사람의 그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거기, 누구?"

꿈이라면, 연극이라면, 그 아무려나 상관없다. 내게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그 역할에 충실해 주리라. 나는 밭은 소리를 게워내며 소리의 임자를 찾아나선다. 다다다다. 내 두터운 발이 매끄러운 마루와 둔탁한 마찰음을 낼 때마다 누군가의 소리도 함께 빨라진다. 닿을 듯, 닿을 듯 소리는 어느 새 저만치. 그리고서 어느 모퉁이를 획, 하고 돌아선 순간, 결국 아무도 없다. 다만 그 곳에 자리한 넓다란 대청만이 휘영청, 달빛을 반사해 낼 뿐. 긴 숨, 짧은 숨을 갈아쉬며 자리에 주저 앉아 버린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어디선가 그 뉘이든 숨어있을 것만 같아. 나는 못내 의심스런 마음을 끼치지 못한 채 사방을 휘젓고 다닌다. 그러나 적요한 공기만이 폐부를 적셔올 뿐 사람 흔적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 온기 그리운 내 마음이 저지른 한깟 장난질일까.

다시 한 번 주위를 휘이 둘러본다. 한 번쯤 본 것도 같은 풍경. 어쩐지 눈에 익은 풍경들. 잊혀진 기억 한 자락이 어디선가 불쑥 그 낯을 들어 나를 바라볼 듯도 한데. 꿈도 기억도 가슴 속에서만 꾸물거릴 뿐 쉽사리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내 못난 착각일지도. 하기야 이 시절 그 흔한 화면으로나마 이러한 장면을 보지 못한 이가 어디있으리요, 마는.

그리고 한참 후에야, 차가운 대청 위로 고개를 늘어뜨린 후에야 나는 내 안에 까무라치려는 기억들 중 한조각을 추스려낸다. 그러나 그것은 차마 이어내지 않는 편이 나았을 기억. 나는 쫓겨온 것이다. 낯설고 물설은 이 곳에.  왕왕한 소음과 현란한 음악들이 나부끼던 그 곳에 적응하지 못하던 나는 이 곳으로 귀향을 왔다. 이 집의 연고는, 알 지 못한다. 그저 나 같이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던 이들이 가끔 묵어가는 곳이라 했다. 여자애를 정신병원에 보낼 수는 없잖아요. 아득한 음성. 그것이 당신이었나? 어머니. 당신이 그리 말했나? 나를 병원에 보낼 수는 없어 선택한 이 곳. 새벽을 달려 밤을 꿰뚫어 도달한 이 곳. 어머니,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나? 그것만은 기억할 수 없다. 뿌연 안개마냥 가려진 당신의 얼굴. 나는 갑자기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명치가 뻐근해와 자리에 꼬구라지고. 알 수 없는 분노와 열기가 들끓듯이 치밀어 오른다. 나는 미쳤는가? 그러한가?

눈물이 흐르나 어둠이 덮는다. 달빛이 시리도록 내려앉는 이 곳은, 그래도 어둡다. 달빛에 의지하여 산을 탔다는, 과거의 그 이들은 차라리 이인(異人)이었을지. 달하, 달하 높이곰 돋으샤. 과거의 그 이들처럼 뜬금없는 누그름을 해본다. 이대로 날이 새지 않았으면도 싶다. 나는 어찌하다 홀로 이곳에 버려졌는지.


*딱히 환상문학이라 하기는 무어합디다만, 그래도 제 가슴 속에 담겨이는 환상이랄지요. 그저 혼자 묻어두자니 좀 섭해서. 그나마라도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감사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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