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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0. 엘리시아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자신을 믿어라. 너라면 할 수 있다.>

  소년은 앞을 향해 걸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소년의 발 아래에는 수 천개의 공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바뀌는 영상들과 기묘한 빛깔의 색들이 꿈틀 거리고 있었다. 무형의 공간들이었다. 조금이라도 발을 삐끗하면 추락해 버릴 듯한. 소년은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없이 일정한 속도로 걸어갔다.

  소년이 걷고 있는 공간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차원이었다. 소년은 지금 차원의 틈새를 걷고 있었다.

  이윽고 소년은 걸음을 멈춘다. 단단한 바닥이 느껴진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그렇게 소년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팔을 뻗었다.




  물컹?

  생전 처음 느껴본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소년은 새롭게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피부를 가진 소녀가 누워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순백의 잠옷이 입고 있다. 푸른색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닿아 보인다. 살짝만 손대도 부서질 것 같이 여린 몸을 가진 어린 소녀였다.

  ‘그런데 이 부드러운 감촉은 뭐지?’

  소년은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봉긋 솟은 소녀의 가슴에 닿아 있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는 순간, 잠자고 있던 소녀가 눈을 떴다.

  꺄아아아아악!

  소녀가 비명을 내지르자 소년은 당황한 나머지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야야. 침대? 왜 내가 침대로 이동한 거지?’

  “누, 누구세요?”

  “그러니까 전…….”

  소년은 소녀의 맑고 큰 눈망울이 보이자 할 말을 잃었다. 얇고 가냘픈 음성이 울렸다.

  “나, 나가주세요. 겨, 경비를 부를 거예요…….”

  “자, 잠깐만요. 전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전 마법사라고요.”

  소녀는 이불을 가슴께로 끌어당겨서 몸을 가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법사요? 그런데 왜 제 침실에 들어온 거죠?”

  소년은 어리숙한 모습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있었다.

  “그,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공간 이동을 시도했는데, 여기에 도착했네요.”

  소녀는 잠시 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무것도 아닌 동작이었지만, 소년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당황한 소녀의 눈빛, 얼굴, 몸짓 하나하나가 눈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아무튼 당장 나가주세요!”

  앙칼진 소녀의 외침에 소년은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정말 어떻게 보상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소년은 소녀가 잠시 말이 없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소녀의 고개가 천천히 좌우로 움직인다.

  “……실수니까, 죄를 묻지 않겠어요. 그대신 빨리 나가주세요.”

  소년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아까 보상이라니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써요.”

  “아, 그것도 죄송합니다.”

  소년은 자꾸 시선을 이러지러 옮기고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등뒤로 모았다. 소녀는 그런 소년의 행동 때문인지 픽하고 웃었다.

  “저…….”

  “웃어서 미안해요. 그럼 어서 가보세요.”

  “네. 저, 그런데, 그게, 음, 여기가 그러니까, 어디죠?”

  소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 침실이요.”

  “아, 저 그게 아니라, 여기가 무슨 마을인가요?”

  소녀는 이번에는 쿡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여긴 로첸디아 왕국의 수도, 알펜이에요. 그런 것도 모른다고요? 좀 이상하네요. 당신 도대체 어디서 온 거죠?”

  “전 토랑즈에서 왔습니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년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고 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소녀는 말없이 소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막 문고리를 잡은 소년이 돌연 소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다음에 꼭 이 실수를 갚고 싶습니다.”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엘리시아 디 세그로제이 드류메시안드예요.”

  “네? 세그로 드류이드 뭐, 뭐라고요?”

  “쓸데없이 긴 이름이죠.”

  “아뇨. 그런 긴 이름은 처음 들어서…….”

  소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엘리시아라고 기억하세요.”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정말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레이디 엘리시아.”

  소년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눈앞엔 나선계단이 아래를 향해 펼쳐져 있었다. 탑인 것 같았다. 탑의 최상층인지, 계단은 문부터 시작하여 지상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얼마나 높은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소년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앞에 뚫린 창문을 통해 몸을 허공에 띄웠다. 소년의 몸은 너무나 사뿐히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소년은 탑의 꼭대기로 몸을 이동했다. 그러자 어둠에 잠긴 도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온 거야. 진짜 세계로.’

  소년은 벅찬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에 반쯤 잠긴 희붐한 달빛이 보였다. 새카만 하늘 곳곳에 박혀 있는 별빛들도 볼 수 있었다. 소년이 살던 토랑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늘이다.

  ‘반드시, 토랑즈를 이 세계로 되돌리고 말겠어.’

  소년은 몸을 띄워 하늘을 날아올랐다. 발밑으로 수많은 집들이 지나갔다.




  소녀는 한 동안 멍하니 소년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누구였을까?’

  그러고 보니 소녀는 소년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에 온다면, 물어봐야지.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사람은 시녀를 빼고는 그 아이가 처음이구나.’

  소녀는 문에서 시선을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둠이다. 소녀는 달빛이나 별빛을 보기 위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교교한 달빛이 눈에 들어왔다.

  ‘착해 보였어. 다음에 또 오면 좋을 텐데……. 여긴 아무도 찾지 않으니까.’

  소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달빛도 이 탑도 자신의 한숨을 기억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똑같은 자리에서 한숨을 내쉬곤 했으니까.

  ‘난 왜 속마음과 반대로 말한 거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기뻤어. 다시 온다고 했을 때…….’

  소녀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았다. 잠깐이긴 했지만, 자기 또래의 아이를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격식을 갖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한 것은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 다음에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

  소녀는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매일 보긴 하지만 하늘은 항상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소녀는 매번 달라지는 하늘의 모습을 찾았다. 이번에도 위치가 달라진 별빛을 살피던 소녀의 시선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밤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까 그 아이?’

  그 순간 허공을 나는 소년의 뒤쪽에 희뿌연 것이 따라붙는 게 보였다. 마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 같았다. 불길해 보였다.

  ‘뭐, 뭐지? 위험해 보여.’

  “위험해!”

  소녀는 밤의 정적을 깨트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 소리가 소년의 귀에까지 전달 될 리는 없었다. 소녀는 애타는 얼굴로 그 정체 모를 기체를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소녀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아니면 소년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포기한 것일까? 그것은 소년을 따라잡는 것을 멈췄다. 소녀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것은 갑자기 위로 솟구쳐 오르더니 소녀 쪽을 향해 무섭게 날아왔다. 소녀는 당황해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금세 그것은 창문에 나타났다.

  ‘무, 무서워…….’

  그것은 무방비 상태로 넘어진 소녀를 덮쳤다. 소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카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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