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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높은 성에서(5) - 구멍

2005.11.02 06:4111.02




*

우물 안을 들여다본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깊고 어둡다.




*

"물론 각자의 사정이 있는거겠죠, 각자의 얘기가 있는거겠죠"

나의 말에 상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직히 웃었다.
상담자가 물었다.

"왜 웃는거죠?"

"그냥요. 너무 진부한 얘기같아서요."

상담자가 놀라며 말했다.

"진부하다뇨? 다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고, 다름 사람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은 굉장히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요? 왜 그걸 진부하다고 느끼는거죠?"

"...."




*

나는 흡혈귀가 불멸에 걸맞는 인내심을 획득하지 못한 종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낭만적인 말을 덧붙인다고 해도, 결국 파트너는 특별한 희생자일 뿐이다.
본능적으로 우리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빚어내는 불꽃은
그가 먹었던 것이 그 자신이 되는 과정이고, 매혹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건
굉장히 순간적인 것이다. 나를 들뜨게 하던 그 많은 여자들을 기억한다. 그네들을
바라보게 만든 그 모습들은 그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유혹과 사냥의 과정에서
노련함과 영원한 존재라는 이점을 팽개치게 만드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

"아무튼 고리타분한 노인네. 형, 우리 아버지 말 심각하게 듣지마.
파트너라니? 결국은 먹고 사는 문제인데 말야."

사촌동생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옛 세대들의 위선을 비웃었다.
영원이라니. 어휴, 그래 놓고 버려진 파트너들이 얼마나 많은데.

흡혈귀가 되면, 인간일 때의 신진대사율이 변화한다. 흡혈귀들이 매혹당했던,
흡혈귀들을 추동하는 표식들은 곧 사라져버린다. 감정을 끌어낸 이유들은
과거가 된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서로를 원하고, 잊지 못하고, 감정에 자신을
매어두고, 비극적인 모양새를 유지하며 누군가를 그리는거지?"

나는 사촌누나를 염두에 두고 물었다. 사촌동생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허세겠지..아무튼 근본적으론 자기문제일꺼야. 처음의 눈물은 타인때문이라 해도
계속되는 눈물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닐까?"

녀석의 냉소는 누구를 향한 것일까.


  


*

보통, 대상이란 자기가치감의 반영이다. 나는 그녀를 생각해본다.
나는 이미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상태였다.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변명따윈 하지 않으리라.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감의 회복이 아니었을까. 감정이 발달하기도 전에, 난
그녀에게 나를 시험해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조금 더 온건하게 들리까. 분명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걸 알아볼
수 있을만큼 내가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

삶이란 충분히, 언제나 충분히 길다. 왜곡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충분히.
나는 상담자에게 내 지난한 역사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 나 자신도
그것을 모두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많은 문제들을 기억해본다.
내가 원했던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문제들은 그때 그때
달랐을 것이다. 다양한 시대와 상황에서, 사랑하고, 거절하고, 의심하고,
헤어졌다. 그렇다, 내 삶은 충분히 길어서, 언제나 돌아보면, 그 많은 일들을
요약할 수 밖에 없고, 요약하면 삶은 뻔해진다.
우리는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졌다. 언젠가의 그녀는 모두, 항상 나를 거절하고,
받아들이고, 다투고, 헤어지고, 늙고, 병들어, 죽었다.




*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몇가지 문제들이 계속 반복된다.
누군가 그랬던가, 남자에게 모든 여자는 결국 같은 얼굴을 가진 여자라고.

집어치우자. 결국,

"그래, 알잖아, 형. 상대에게 원하는게 뭐겠어"

"그야,."

피.

"그래, 그리고 상대도 그걸 알고, 이것저것, 따져보는거지.
우리가 줄 수 있는 영생, 혹은 그 뒤의 삶에 대해서.
결국 거래야"

그냥, 페어플레이라고. 요구하고 그에 응하거나 응하지 않거나.

문제는 거래가 이루어진 뒤의 일이라고.




*

나는 언제부턴가 방랑을 멈췄다. 몇 백년을 같은 곳에서 살아가면, 이상한
소문이 나던 시절은 지났다. 결국 그네들의 삶이 끝나면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다. 이어져 내려가는 이야기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도 그렇다. 예를들어 지금 도서관의 사서가 학생일 때도
나는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도서관에서 그녀를 만났었다. 나는 항상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도, 그녀는 나를 항상 다르게 봤다. 그녀가
알던 사람으로, 알았던 사람으로, 알았던 사람과 비슷한 사람으로..



*

채 메우지 못하고 남아있을 내 이야기들의 구멍에 대해서.
상담자는 나와 함께, 그 구멍들을 메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유가 사라져버린 감정들을 다루기 위해 애를 쓴다.
몇가지 문제만이 아스라이 살아남는다. 하지만 과연 그것 뿐일까.




*

그녀와 나의 얘기들을 복원해보고자 하지만,
글쎄, 그 구멍 사이에, 자기인정이란 부분을 넣어본다.
물론 대충 설명이 된다. 그네들이 나를 받아들여서,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가 나를 거절했기 때문에
달려들었다. 성적인 흥분이 아니라, 통제감을 획득하고
싶어서 요구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내가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내가 들었던 이유는 말이 안되는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그렇게 나에게 메달려야 했던
감정도 충분히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줬다.





*

"그러니까..전 남을 제 필요에 의해서만 만나는게 아닐까 두려워요"

"어떤 의미에서죠?"

"소외감, 자기인정, 두려움..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것들로 타인을 원하죠"

"근데, 문제는..글쎄요..이런 표현이 좀 과격하긴 하지만,
제가 필요로 하기 전에는, 전 상대가 있는지도 몰라요.
문득 나타나는 거죠"





*

그녀는 나를 거절했다. 나는 화가 났다. 그녀를 비난하고 싶었다.
왜, 그러면 먼저 유혹한거지. 나는 그녀가 먼저 시작했다고,
먼저 웃고, 틈을 보이고, 말을 걸었다고 믿었다. 다시 한번
나를 의심하는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말했다
영원히. 너를.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

"그래서..저는 인간관계란 진심보단, 기교의 문제가 아닐까..생각해요"

상담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굉장히..당신이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

이해받을 수 있을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개별성에 서투르다. 나의 자의식은 너무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다. 한번에 한번의 부정을
더하는 것. 타인을 이해하려면 같은 조건에 처해보거나
그의 개인적 역사를 더듬어가야 하는데. 역사란 정말, 정말,
모호한 것이다. 불멸의 존재란 것은, 일종의 벽이 되기도 한다.
무엇을 배웠는가. 그 기나긴 날들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희생자들의 공포로 얼룩진 표정 이외에. 무엇을 기대했는가.
영생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다음에 오고 가게될 진부한
삶에 대해. 충만한 기대와 그 만큼의 실망에 대해.
나는 여전히 서투르다.

상담자와 시간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잠이 없는 편이라고 해도, 오후는 꽤나 이른
시간이었고, 그녀에게도 저녁은 늦은 시간에 속했다.
늘 피곤한 컨디션으로, 날이 선 감정으로 그녀와
말을 나누었고, 그녀는 적절히 받아주는 편이었지만,
보람된 상담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렴, 20년전이나,
지금이나 난 그녀에게 피로를 의미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도 이제 이 무용한 '이해'의 제스쳐는 마지막.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상담시간은 끝났다. 구멍은 항상 채워지지 못한다.
역시나 그녀도 나를 기억하지 못한 것 같았다.

꽤나 나이가 들어버린 그녀를 보며, 그 옛날의 얼굴의 흔적을
살펴보며,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그녀가 내 회한과 사과의 말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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