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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루(淚) - 장미의 계승 (2)

2005.10.31 21:5910.31

루(淚)


02. 장미의 계승

2.
에스텔의 성좌, 그 순백의 영광. 그 화려하고도 순수한, 마치 순결한 처녀와도 같은 고성의 회의실에 어제의 영광을 누리던 이들이 힘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오만한 눈동자, 한 쌍의 보랏빛 눈동자가 마치 사냥감을 탐색하듯 짙은 붉음을 품는다.

‘그래서 그대들은 버러지다.’

현 상황을 납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다시 뒤집을 용기는 없다. 그러고도 그대들이 왕족이고 귀족이란 말인가. 이런 나약한 인간들이 정녕 고귀한 혈통이라 부르짖는 그 얼간이들이 맞는가!

“그렇게도 목숨이 아까운가.”

움찔-

그래, 두려움에 떨어라. 나약한 인종들아. 목숨을 구걸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 고귀한 무릎을 꿇어봐! 그리고 헐떡이며 구원을 애걸해 보란 말이다!

“그 한 몸 날려 날 베어볼 용기조차 없는가. 진정으로 이 이슈테르의 왕가를 걱정한다는 자들이?!”

인형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숨 쉬는 것 밖에 모르는 인형. 어떻게 수 십 명 중에 기백이 살아있는 이가 두 명 뿐이란 말인가!

“리타이너에게 검을 꽂을 기회를 선물할 용기조차 없단 말인가! 리타이너 파이데르트 공작!! 설마 자네도 날 벨 용기가 없는가?!”

리타이너 파이데르트. 수백의 기사들을 지휘하는 그의 시선이 대공에게 향한다. 이슈테르 왕국 총 기사대장의 시선은 진중하기 그지없다. 그 무게, 그 깊이! 리타이너 공작의 살의가 대공의 가슴을 가르고 그의 심장을 드러낸다. 포식을 앞둔 맹수의 그것처럼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주변의 공기를 구속한다!

“나에게는 검이 없다. 그리고 그대들은 무기를 뺏기지 않았군. 어떤가 공작, 저들을 방패막이로 나를 베어보는 건? 그대들에겐 기회일 텐데.”

드륵-

바로 그 순간 리타이너 공작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 검 끝이 대공을 향한다. 진심으로 베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경고인가.

“대공께서는 지금 기사도를 어기라 하십니까.”

허나 공작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냉랭하다 느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 수백의 기사들을 이끌던 그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래 기백이 살아있는 저 눈빛! 저 강렬한 눈빛이야 말로 진정으로 살아있는 인간이 가질 눈빛이 아닌가!

“나 역시 이미 기사도를 어긴 몸! 한 톨의 불만도 없다.”
“기사도에 약자를 베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대공께선 약자입니다.”

스르릉-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쇳소리와 함께 리타이너 공작의 검이 검집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모습을 감췄다. 허나 리타이너 공작의 강렬한 눈빛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눈빛만으로 대공을 죽일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리할 기세! 숨통을 죄여오는 날카로움이 폐부를 찌른다. 침묵과 함께 긴장된 기류가 공존하며 격하게 흔들린다! 기사도라는 굴레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대공을 베어버렸을 법한 날카로운 기백이 공작의 전신에서 파도가 치듯 흘러나오고 있다. 허나, 기사도를 모욕했다 하여 기사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도 없는 것!  

‘여전한 분이다, 대공은. 폐하와 함께 하던 그 시절과 변함이 없으시군.’

묘한 딜레마를 유도하는 대공의 화술에 리타이너 공작은 투기를 갈무리 하며 그저 고개를 저었다.

“나를 상대로도 기사도는 어기지 않겠다는 건가. 그게 자네의 긍지로군. 그래, 버러지를 상대로 버러지가 될 필요는 없지. 나도 흥분이 과했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끊은 대공이 좌중을 둘러보며 몸을 일으켰다. 당당한 몸놀림과 그 강렬한 눈빛은 이미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이들을 침묵시킨 지 오래다.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부탁하겠다, 나를 인정하라. 무엇보다 강한 이슈테르가 되겠다. 그대들이 원하는 부국강병, 내가 이루어주지. 형님의 뒤를 이을 자는 율리아나 엘 루아르가 아니라, 바로 나 프리스 데 루아르다!”

포효하듯 내뱉는 대공의 발언에 회의실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물론 모두들 대공이 어떤 요구를 할 것인지 예상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허나, 직접 듣는 것과 예상 해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법이다.

“나 프리스 데 루아르가 왕의 혈통을 이어가는 것을 인정해주길 바란다.”
“대공께선 이슈테르를 온전히 흡수하실 생각이신가 보군요.”

이번에도 역시나 리타이너 공작이 나섰다. 왕족이라는 이유로 떠받들어지던 이들은 정작 나서지도 못하고 있는 이 상황이 얼마나 조소적인가.

“물론이다. 그대들만 인정한다면 이슈테르는 온전히 국력을 보전할 수 있다. 형님이 직접 이루신 것들을 내 손으로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지 않겠나. 게다가 후계가 없는 나인만큼 율리아나 공주의 왕위 계승은 훗날로 미루면 될 일이다.”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은 대공의 제안에 솔깃함을 느껴야 했다. 프리스 대공의 문무와 인덕이 출중함은 이미 깊이 믿고 따르던 바 있다. 또한, 그는 이슈테르 왕국의, 아니 정확히는 카류리안 엘 루아르 전 국왕의 개인적인 무력으로서 그 의무를 부족함 없이 이행해 왔다. 대공이 흑심이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이슈테르는 그의 손에 넘어갔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강력한 영력 제어력을 지닌 에프리안의 기사단, 아니힐은 충분히 그것을 가능케 할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일례로 군사대국으로서 명성이 자자한 아르콘도르의 대군을 너무나도 손쉽게 격파한 전례까지 있지 않은가! 그 누가 있어 이 이슈테르의 미래를 이어갈 자로 그보다 신뢰받을 수 있겠는가.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 형님께서 중용한 바 있는 그대들이라면 온당한 판단을 해주리라 믿는다.”
“그럼 여쭙겠습니다.”

다시금 대공의 시선이 리타이너에게 향했다. 회의장은 이미 그 둘의 독주! 타인의 참견을 허용치 않는 듯한 전개다.

“대공께서는 분명, 에프리안 공국에서 시행해오시고 있는 정책들을 본 이슈테르에도 시행하여 좀 더 광범위한 영토를 정책권에 포함하실 것이라 사료되고 이는 정확할 것입니다.”
“정확하다.”
“그렇다면 귀족들과 왕족들의 반발, 그리고 그에 따른 혼란은 어찌하시려 하십니까.”

귀족들과 왕족들의 반발. 리타이너는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대공의 평등한 인재등용 정책에 제동을 걸려는 것이다.

“그대들을 믿는 것으로 부족한가? 에프리안의 변혁이 형님의 지원과 나 자신의 성심으로 이뤄졌다면, 이슈테르는 왕가의 지원과 나와 그대들의 노력으로 변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만한 자신감쯤은 충분히 지닐 그대들이 아닌가 싶군.”

긴 설명을 배제한,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를 주고받을 수 있는 대답으로 대공은 리타이너에게 다시 한번 감명을 주었다. 신뢰와 높은 이상으로 이루어진 관계.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포기하지 않는 그 용기와 노력! 대공이 원하는 바는 이미 모두 공개되었다.

“본인은 대공을 따르겠습니다. 여전히 변함없는 당당하신 모습에 따르지 않을 수 없군요. 이 자리에 모인 다른 귀족들께서도 마찬가지리라 봅니다. 공작가의 가주로서 그저 이 자리를 물려받았을 뿐인 저와는 달리 노력만으로 지금 이 자리를 쟁취하신 분들이니 만큼 대공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 없겠지요.”
“이건 말도 아니되오!”

그리고 바로 그때, 순수한 혈통이 아님을 자랑하듯 갈색 머리칼 사이로 새치가 드러난 왕가의 노익장 하나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대공과 리타이너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어찌 루아르의 왕계가 엘의 호칭도 지니지 못한 부당한 자에게 계승될 수 있단 말이오! 리타이너 파이데르트 공작, 그대는 이것이 반역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요?! 대공의 박력에 그만 눌려버린게냔 말이오!”
“바셀 공이야 말로 말씀을 삼가주시기 바라오. 그도 아니면, 본인의 명예를 직접적으로 훼손키라도 하시겠다는 건 아니시겠지요.”

다시금 피어오르는 리타이너의 박력이 그가 속물은 아님을 증명한다! 노약한 심장에, 긍지없는 정신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바셀 루아르의 이름을 지닌 왕족은 그저 힘없이 고개를 숙인다. 허나, 아직은 물러설 때가 아니다. 정당히 왕위를 계승하고자 한다면 왕족들의 인정이 뒤따라야 하는 법! 분명 다른 왕족들도 힘을 실어주리라.

“리타이너 공께는 사죄하오. 허나, 이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임은 자명한 사실! 루아르의 이름을 계승한 이들을 대표하여 발언컨데, 대공의 왕위 계승은 정당히 인정될 수 없소!”
“아니, 인정될 수 있습니다.”

고아한 목소리. 그 이전에는 존재치 않았다는 듯한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한 청년이 회의석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빛나는 금발에 은빛의 화려한 눈동자를 지닌 청년의 시선이 바셀을 향한다.

“바셀 공께서는 ‘장미의 계승’을 아십니까.”

장미는 왕족을 뜻한다 한다. 그 고아함과 고귀함이 바로 왕의 혈통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허나, 이 장미가 계승을 의미하게 될 때. 그 의미는 그저 존귀하지 많은 못하다. 그 붉음은 왕의 피가 되고, 그 꽃송이는 왕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그 가시는 피로 물든 왕의 상징을 쓸 왕족의 검이 되는 것이다.

“장미의 계승······?”
“그렇습니다. 장미의 계승, 예로부터 정당한 계승자가 아닌 왕족의 구성원이 정당한 계승권을 요구하여 왕위를 계승 받을 때. 왕가는 이를 장미의 계승이라 하여 인정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오래된 사실이라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그 깊이있는 학식으로도 미처 떠올리지 못한 듯 하십니다.”

청년의 부드러운 달변에 내포된 조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왕족들은 그저 갑작스레 등장한 이 신비스러운 왕족의 모습을 담는다.

“계승을 원하는 자는 그 자신의 능력으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왕으로서의 자질이 있음을 밝히고 이를 인정받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경우, 이미 고위 귀족들께서 대공의 손을 들어드린 이상 소수에 불과한 저희들은 승인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는 듯 사료되는군요.”
“나는 그러한 제도가 있음을 들어본 바 없네!”

매끄럽게 회의실을 주도하는 청년의 앞으로 바셀 공의 항변이 날아들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지식한 루아르의 왕족인 바셀로서는 지금의 이 상황이 도저히 납득될 수 없었다. 무지함을 드러내면 어떠한가! 그래 저 말이 사실이라 해도 절대로 인정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는 법이 아닌가. 허나 청년의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은빛의 눈동자는 묘하게도 거역을 허락지 않는다. 아무런 강제성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셀은 자신의 의사가 내면으로 깊이 하락해 흩어져 내림을 느껴야 했다.

“정녕 들어본 바가 없으십니까? 왕실의 법도를 익히신 지가 오래되시어 기억이 아니 나시는 건 아니신지요. 다른 분들은 어떠십니까. 장미의 계승을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아무도 없으신 겁니까?”

대공은 물론이고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는 회의실에 오랜만에 고요함이 찾았다. 박력과 살기를 주고받던 이 회의실을 이토록 고요하게 만들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대공은 장미의 계승이라는 생소하면서도 왠지 익숙한 것처럼 느껴지는 단어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에게 순수히 감탄했다.

“글쎄, 들어본 것도 같구먼······.”

한 두 명의 왕족들이 조심스럽게 동조하는 가운데, 동조의 분위기는 회의실 전체에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청년의 등장으로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 버린 것을 느끼며 바셀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오. 확실하지도 않은 사안으로 말미암아 이런 중대한 사안을 결정한단 말이오? 그러고도 그대들이 왕족이고, 귀족들이오!”
“바셀 경, 장미의 계승은 최종적으로 루의 승인이 이루어져야만 완벽해집니다. 대륙의 중재자인 루께서 인정하신다면, 바셀 경도 장미의 계승을 인정하시겠습니까?”

루. 그 끝이 어디인지 누구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하는 신비한 땅. 대륙의 서부를 지배하는 대제국의 임금을 거론한 것이다.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아왔는지 알 수 없는 기린의 왕은, 또한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라고도 알려져 있었다.

“진정으로 그러하다면······, 나도 따르겠소. 젊은 루아르여.”

  바셀의 힘없는 대답과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금발의 청년은 우아한 자태로 대공에게 예를 취한 뒤 작게 속삭이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폐하에게 영광을.”

그리고 그 속삭임은 곧 열렬한 환호가 되었다.

- 폐하에게 영광을! 이슈테르에 기적을!

1725년 9월 16일, 장미의 계승이 최초로 승인되어 프리스 데 루아르가 이슈테르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위왕의 영광은 하루 만에 저물고,
찬란한 광휘가 되어 떠오른 것이다.



* 베스트셀러를 꿈꾸다 ( http://cafe.daum.net/Besel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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