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50년 전에, 과연 우리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제 와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한 세대나 지나가 버린 일을 마음에 담
게 되는 건 왜일까. 리는 새삼스럽게 드는  그 의문과, 꿈속의 잔상이
어른어른 비쳐 보이는 편두통에 이마를 살짝 찡그리고 안경을  벗어들
었다.
읽고 있던 책을 그대로 갈피를 끼워 덮어버리고는,  해가 진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뜬 달은,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보랏빛, 천공에
뜬, 달과 밤의 처녀신, 디안나의 성.
현현의 말대로 이제는 저 안에 그녀는 없는 것일까.

" 현현 "
" 예? "

리는 여전히 시선은 창 밖을 향한 채로, 현현을 불렀다. 리의  맞은편
에 앉아서 무언가를 책에 적어 넣고 있던 현현이 그 부름에 고개를 들
었다.

" 내가.. 엔드로 가자고 한다면... 따라와 줄 건가? "

잠시, 현현은 말이 없었다.  리의  시선은 여전히 달을  향해 있었고,  
그래서 지금 현현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잇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바스
락, 사각사각, 책장 넘어가는 소리에 이어 펜 끝이 종이를 긁고 지나가
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엔드에 가보고 싶은 건가요? "
" 뭐,  모험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하는 거잖아. "

바스락, 다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 요즘 리는 왜인지 계속 그 주제로 이야기하는군요. "
" 그건- "
" 5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엔드는 과연, 이  일의 근원인지...
알고 싶은 건가요? "

리는 한숨을 쉬고 시선을 현현 쪽으로 돌렸다.  올해로  80살이 약간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프엘프의 프리스트는 젊은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묘한  느낌을 주는
어른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현현이나 소오류는, 한번도 그때의 일을 말해주지 않았지. "
" 그다지,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

씁쓸한 미소, 그래 언제나 저 얼굴로 이야기의 주제를 돌리곤 했었다.

" 듣고 싶어, 부탁해도 될까? "
" ... 요즘 이상하군요 리, 당신답지 않아요. "
" 나도 알아. "

리는 다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달빛이 창턱에 부셔지고 있었다,
분명히, 요즈음의 나는 이상해.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녀
의 꿈 때문? 아니면 또 다른 무엇..

" 하지만 모르겠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지. "

현현이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펜을 내려놓았다.

" 한잔 마시겠어요? "
" .... 좋겠지. "

현현이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인가, 리는 속
으로 피식 웃었다, 첫 번째는,  가온을 막 동료로 맞이해서 그  아이가
'여자'라는 걸 알았을 때였다. 그때의 가온은, 작고  말라비틀어진 데다
가 성미마저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슬럼의 좀도둑 들  중 하나였다.
함께 다니게 후에도 그 바늘처럼 날카로운 경계 덕에 여자라는 걸  알
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현현은 가온에
게 왜 자기 몸을 보이지 않는지, 왜 자신을 남자라고 주장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고민하고 있는 리와 소오류에게 지금처럼 간단하게 술을
한잔하자고 했을 뿐이었다.
... 그것이, 현현이 가온을 받아들인 방식이었다. 아무 것도 캐묻지 않
고,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여관 지하의 펍에는 제법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현현과 리가 내려오
자 잠시 웅성거리던 소리가 멎고 시선이  둘에게 몰렸으나, 두 사람이
자리를 찾아서 앉자, 곧 시선은 줄어들었고 다시 이야기소리가 왁자지
껄 퍼지기 시작했다.
곧, 와인이 날라져 왔다. 모험자들에게 일반인들의 물가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싼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주인도 특별히 말이 없는 한 최
고급품을 가져다 놓는 것이 도시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첫 잔을 따
라 놓은 현현이 문득 시선을 펍의 입구로 돌렸다.

" 리, 바드군요. "
" 바드? "

현현의 말에, 리 역시 펍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거무스레한 갈색의 클
럭을 입고 그 클럭에 달린 후드를 이마까지 푹 눌러써서 코와 그 아래
의 입술밖에는 보이지 않는,  리와 비슷하게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진
남자였다. 어스름한 펍의 불빛 덕인지, 남자는 아른한 실루엣으로만 보
였고, 그나마도 제법 두툼해 보이는 클럭에 가려져, 보통사람이라면 그
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쳐 버릴듯했다.  그러나 남자는 분명히 뒤에
천으로 둘둘 말린, 검이라고 보기에는 짧고 뭉툭한, 그러나 다른  짐이
라고 보기에는 길고 부드러운 선을 가진 무언가를 메고 있었던 것이었
다.

" 라인으로 보아서는 류트같은데요. "

펍의 마스터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
현이 말했다, 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정말 바드인지, 아니면 단순한 풍각쟁이인지는, 두고보면 알
겠지. "

잔에 남아있던 와인을 들이키며 리가 말하자.  현현은 고개를 끄덕이
며 빈 잔에 새로이 와인을 채워주었다.  
모험자가 줄어들면서, 함께 줄어든 것이 진정한  의미로 바드라고 할
수 있는 음유시인들이었다. 바드는 악기를 연주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 검도 어느 정도 쓸 줄 알았고, 눈썰미가 예리해 마법사들의 마법을
배워 사용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바드는 모험자보다 더 찾아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고, 연주와 노래를 동시에 하는 풍각쟁이마저 드
문 판이었다. 그나마도, 모두 50년  이후의 유행가들이 레퍼토리일 뿐,
옛날의 바드들처럼 전설을 읊는다든지, 자작곡을  부른다든지 하는 것
은 정말로 찾기 어려웠다. 마법사나  성직자들처럼 든든한 후원기관이
없었던 바드들은, 그렇게 한 사람씩 사라져 가버렸던 것이다.

" 우스운 일이에요, 예전에는- 바드들은 모두 아바타라고 불렸었는데.
"
" ..아바타? "
" 리, 신은 모두 열두 명이 계세요, 그러나 통합신전에서는 열  한 분
만을 모시고 있죠. 우리들이 섬기지 않는 단  하나의 신.. 그분이 모든
바드의 아버지, 올리에스랍니다. "
" 올리에스라 .. 반신(半神)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는 그 올리에스 말
인가. "
" 예, 완벽한 신이 아니고, 그분의 프리스트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
에 통합신전에서는 모셔지고 있지 않죠. 하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자
는 모두 그분의 프리스트고, 그분의 아바타가 진정한 의미의 바드라고
들 해요. "
" 그런가, 그럼 저 청년이 진정한 바드일 가능성은 적겠군. "

리는 새로 채워진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러나, 그것을 마시지는 못
했다. 현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펍 마스터와의 흥정을  끝냈는지,
청년은 구석에 마련된 무대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무대에 올라간 청년
은 천으로 둘둘 말았던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현현
과 리의 예상대로 류트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풍스런 느낌이 풍겼다.
첫 눈에도 보통이 싸구려 악기는 아니다  싶었다. 그러나 리가 와인을
마시지 못했던 것은, 그 류트의 고급스러움 때문이 아니었다.
휙 하고 넘겨버린 청년의 후드에서 금빛  머리카락이 스르륵, 갈색의
피부 위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같은 속눈썹 아래에서 빛나
고 있는 것은, 토파즈를 연상시키는 선명한 금빛의 눈동자. 첫  눈에도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잇는 이국의 용모.

" ...페린인이군요 "

현현이, 그답지 않게 감탄하고 있었다.
  후드를 벗어 던진 페린인 청년은, 능숙한 태도로 무대 가운데에 의자
를 끌어다 놓고 앉아서  류트의 현을 조율하더니, 티리링-  하고 현을
튕겼다, 순식간에 펍 안이 조용해지면서  모두의  시선이 청년에게 몰
렸다. 그렇게 몇 번 더 현을 튕기고 난  청년은  몇 번 헛기침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남자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투
명한 음색을 지닌  목소리였다.  
노래는,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유행가였다. 아까 리가  말했던
싸구려 풍각쟁이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그러나 그걸 노래하는 목소리
는 일반의 것과 틀렸다. 분명히, 리와 현현은 그 목소리에 실린 무거움
을 알 수 있었다, 저 바드는, 모험을 해본 자였다.  
그가 한 곡을 끝내자, 박수가 쏟아졌다. 아마도 이 펍 안의  사람들은
그가 어떤 무게를 지닌 목소리로 노래하는 지는 눈치채지 못한 채, 그
의 투명한 목소리와, 노련한 기교와, 능란한 연주솜씨에 박수를 보내고
있으리라,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은 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 감사합니다 "

바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펍 안의 사람들에게 꾸벅, 허리를 굽혀 보였
다. 다시 박수가 쏟아졌고, 사람들이 홀의 여기저기에서 신청곡들을 외
쳐 대었다, 바드는 옅은 미소를 띈 얼굴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주의를
집중시키듯이 티링, 하고 현을 튕겼다. 그 공명음이 퍼지면서 홀은  조
용해졌고, 다시 새 곡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리는, 뚫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그 바드의 홤금색 머리칼과 황금색 눈
동자와 갈색의 피부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리의 코발트 블루 눈동자와
토파즈빛 바드의 눈이  마주쳤다-라고 생각된 순간,  움찔하고 노래를
부르던 바드의 입가가 반응했다.

' ...웃었어? '

리는 흠칫하고 손에 쥐어져 있던 잔을 꽉  집었다. 끼익 하고 청동제
와인 잔이 낮게 비명을 질렀다.  바드는 여전히 태연하게 사랑의 노래
를 달콤하게 읊조리고 있었다, 아까 와는 달리, 녹아버릴 듯이  달콤한
목소리였다. 꺼림칙한 마음에 시선을  돌려 홀 안을 바라보다,  모두가
몽롱한 표정을 하고 바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빙을 보던 아가씨들은
물론, 그 잘 생긴 바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난 다음에도 류트의 반주는  끊어질 듯이 여리게 계속되었
다, 단조롭고 소박한,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로맨틱한 리듬,
티리리리링..... 류트의 현이 울다가 멎었다. 그러나 아직 실내는 그 여
운으로 조용하기만 했다.

" 오늘은 아주 멋진 밤입니다. "

바드는 류트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류트
현의 여운처럼 천천히 홀 안에 퍼져나갔다.

" 이제부터 여러분께 조금 특별한,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노래를 들
려드리겠습니다, 조금은 오래된... 노래입니다. "

조금은 느리다 싶은 느낌으로 전주가 홀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
보이지 않는 '소리' 가 온 홀 안을 다  채웠다 싶자, 바드는 천천히 노
래를 시작했다, 그것은 달콤한 사랑노래도, 흔히 듣던 유행가도 아니었
다.

" - 첫 번째, 마법사에게 주어진 이름은 시련, 그것을 모두  견뎌내었
을 때 비로소 새로운 자신에의 길이 열리리,
두 번째, 전사에게 주어진 이름은 성장, 모두의 동생에서 모두의 보호
자가 되리,  
세 번째, 성직자에게 주어진 이름은 원죄, 그것을 갚기 위해 그는  선
택해야 하리,
네 번째, 도적에게 주어진 이름은 계승,  모든 것을 이어받아, 미래에
의 길을 열리,
그리고 다섯 번째, 또 다른 마법사에게 주어진 이름은 운명, 보되  말
하지 못하고, 듣되 표현하지 못하리, 그것은 혜안의 운명.
다섯의 이름은 은빛을 따라 걸으리, 피의 눈동자를 따라 가리,
그리하여 세상의 끝을 만나 선택하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은빛의 땅에 얼음의 성을 세우고, 크고 위대한 자들의 방문을 받으리,
고결한 피여, 운명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

노래에 빠져있던 리는 문득,  앞자리의 현현을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잔을 꼭  쥔 현현의 손에는 눈에  보일 정도로 식은땀이
배어 나와 있었고 언제나 냉정한  그답지 않게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 분명히.. 분명히 그 사람...... "
" .. 아는 사람인가 현현? "
" .. 아뇨,  분명히 내가 어릴  때... 그러니까  살아있을 리가.. 없는...
데.. "

현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먼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듯이,  낮게
떨리고 있었다.

" ... 죽었어야.. 할.. "

떨리는 현현의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조로운 류트의  반주와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다.

" 무엇을 보는가 그대 주시자여,
   무엇을 말하는가 그대 설정자여.
   세계는 누구에 의해 열리고 움직이고 멸망하는가....
   그것은 .... "

뚝, 목소리와 류트소리가 동시에 멎었다. 심각하게 그 내용과  노랫가
락에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바드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 죄송합니다 다음 가사를 까먹었어요 "

으하하- 하고 엄청난 폭소가 터져나왔다. 약간은 무거웠던  홀 안 분
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그 바드가, 그렇게 좌중의 분
위기마저 움직이고 있다고 눈치챈 사람은 단 둘, 현현과 리  뿐이었다.
현현은 여전히 무언가 중얼거리면서 손을 꼬옥 쥐고 바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하늘빛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을 본 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를 타닥하
고 두들기자, 펍 마스터가 리를 돌아보았다.

"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
" 저 바드를 방으로 불러줄 수 있겠나? "

그렇게 말하면서 리는 주머니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어 마스터  앞에
놓았다, 일반 가정의 두 달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마스터는
반색을 하면서 얼른 그 금화를 받아 챙기고는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지
었다.

" 그럼 부탁하네. "
" 물론입니다! "  

----------------------------------------
  
술자리는 펍에서 방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현현은 술을 마신다기보
다는 무언가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잔을 꼭 움켜쥔 채,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잔 안에 담긴 수면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길드에서 돌아와서 두
사람의 분위기에 눌려 쭈뼛거리고 있던 소오류가 슬쩍 리를  잡아당기
고는 얼른 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오빠 왜 저러고 있어? "

리는 소오류의 걱정스런 얼굴을 보면서 무어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자신도, 어째서 현현이 저러고 있는지 알고있지 못했기
때문에-단지,  짚이는 점이라면, 그 바드가 원인이라는 것.  그가 불렀
던,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그 노래가, 현현을 동요하게 만들었다는 것
정도, 리는 습관적으로 안경을 끌어내려 손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소
오류는  그런 리를 보고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침대로 가서 털썩 주
저앉았다. 이 방의 무거운 분위기도 그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지
만, 리가 저런 제스추어를 취할  때는, 그 자신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 가온은- "
  
똑똑.
방안의 침묵을 이기지 못한 소오류가 다시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문
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와 현현이 눈을 들어서 문 쪽을 바라보
았을 때는, 이미 소오류가 침대에서 팔짝 뛰어 내려  문 앞에 서 있었
다.

" 누구세요? "
" 부르신 사람입니다. "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히  남자답지 않은, 맑은 그  목소리,
리는 돌아보는 소오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오류가 문을 열자, 류트
를 옆에 낀 그 페린인  청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서서
꾸벅하고 허리를 굽혔다.
약간 의문을 띈 소오류의 시선과.  복잡한 감정을 담은 현현의  시선,
그리고- 무표정한 리의 시선이, 한꺼번에 서로를 바라보고 다시 그 바
드에게로 옮겨갔다.

" 이쪽으로 앉으시죠. "

잠시간 침묵이 지나간 뒤, 현현이  바드에게 의자를 권했고, 그는  긴
옷자락을 추슬러 거기에 앉더니,  자연스럽게 류트를 무릎  위로 올려
연주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티리링... 하고 현을 튕겨내려갔다. 그리고
는, 옅게 미소지은 얼굴로 세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 자, 무슨 노래가 듣고 싶으신가요? "

잠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앉아있던 소오류가 조심
스럽게 물었다.

" 저 혹시, 아바타의 노래, 알고 있어요? "

움찔, 현현의 손이 살짝 떨렸다, 아바타의  노래라, 리 자신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 물론입니다 귀여운 아가씨. "

싱긋, 소오류를 향해 웃어 보인 바드는 부드럽게 연주를 시작했다. 그
의 손가락이 능숙하게 현 위를 건너뛰었다.

" 그들은 신의 뜻을 받드는 그들의 분신
   신의 힘을 가진 그들의 대리인,
   파랄의 아바타는 빛의 검을 든 파라다인,
   영생을 받은 그의 인간의 아들,
   글로브의 아바타는 흙의 지팡이를 든 프리스티스,
   만물의 어머니의 맏딸,
   소슈트라의 아바타는 천공에 사는 무녀,
   번개와 바람을 부리는 검은 피부의 여인,
   듀난의 아바타는 검과 천칭을 든 레이디 파라다인
   절대적인 평형을 지키는 인간의 여성,
   디안나의 아바타는 순결한 여승려,
   유니콘을 부리는 달밤의 주인,
   칸의 아바타는 커다란 도끼를 든 파멸의 시작,
   전쟁이 일어나는 대륙에 나타나는 드워프의 전사.
   그리니시의 아바타는 태고의 숲에 사는 숲의 주인
   생명이 없는 것은 손대지 않는 엘프 드루이드,
   피라스의 아바타는 방패를 든 나이트,
   윗사람에게 충성하고 아랫사람을 돌보는 인간의 기사,
   훼이의 아바타는 황금빛 로브를 입은 위대한 마법사
   장소가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탑의 주인,
   가이샤의 아바타는 도구의 마술사,
   손끝에서 작은 세계를 만드는 드워프의 발명가,
   고르다의 아바타는 알려지지 않은 대상.
   재력과 행운을 겸비한 노련한 장사꾼.... "

리는 노래를 들으면서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저런 것이었나 아바
타의 노래란 것은, 언젠가 열두 신의 노래라는 것을  들어 본 적은 있
었지만, 지금은 통합신전으로 변한  덕에 잘 모셔지지도  않는 신들의
아바타까지 바드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동료가 성직자인 덕에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신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일반인들에게는 잊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파랄과 글로브의 네  아
이들-  피라스, 훼이, 고르다, 가이샤-에  대해서도, 그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해도 겨우 이십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저 사람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잊혀진 신들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 당신, 설마-! "

우당탕, 요란스런 소리가 나면서 노랫소리가 뚝 끊겼다. 바닥에는  현
현이 일어나면서 나동그라진 의자가 데구루루 낮은 소리를 내면서  방
구석으로 굴러가고 있었고, 소오류는 토끼모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
현과 바드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려서 놀라움을 가득 담고 있는 현현의 표정과는 대조적으
로 바드의 갈색 얼굴에는 여전히, 옅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라진, 라진 알 딘 리이훈, 바람부족의 후계자.... "
" 옛날 일입니다. 현현 에스타릇테. "
" .... 역시 기억하고 있었군요, "
" 물론입니다, 현현, 그리고 소오류 "

바드의 미소 띈 얼굴이 자신을 향하자 소오류는 어깨를 으쓱했다.    

" 역시 생각한 대로였잖아. "
" 뭐, 눈치채고 있었습니까?  아바타의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 약간
걸리긴 했었습니다만.. "
" 하지만 정말- "

소오류는 흥미 있다는 얼굴로 그 바드- 라진를 바라보았다. 그 태연한
태도에 질려버린 듯이, 멍하니 누이를 바라보고 있던 현현은 구석에서
뒹구는 의자를 집어다 놓고,  다시 단정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라진을
바라보며 반쯤은 포기한 듯이 맥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 용하게도 살아있군요  아직까지. 분명히 내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도 그 나이였던 것 같은데, "
" 실은, 아루우에게 트라이를 소개받을 때도 이 나이였지요 "

라진이라는 이름의 바드는, 연신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말하고 있었
지만, 그 내용이 무척이나 놀라운 것이라는  것을 리는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트라이 에스타릇테, 말로만 들어왔지만 그 사람은 저 두  사람
의 아버지였고....

" 이야기하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노래를 마저 듣고싶은걸, "

마치, 자신만이 저들의 시간대에 끼이지 못한 소외감, 분명 자신은 50
년 전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싶어 했었지만, 무얼까 지금 그 시간대
를 살아온 이들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무지해 보이는 느낌을, 리는 지
울 수가 없었다. 나이의 어림? 경험의 부족? 아니 그런 것만은 아니었
다. 단지, 확실히 무어라고 찝어낼 수 없을 뿐.

" 그러고 보니 리는 듣지 못했었겠구나. "

소오류는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짓고 양 무릎을 가슴 쪽으로 당겨 끌어
안은 채 약간 침대 뒤로 물러났다.

" 그렇군요, 노래는 끝내야겠죠. "

디리링, 다시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상한, 아주 이상한 기분.

" 라라.... 그리고 '주시자'의 아바타는 세상의 모든 바드,
  노래하고 기록하는 이 페이트의 모든 바드,
  그들이 바로 주시자 올리에스의 아바타.
  루루루... 열둘의 신 열 하나의 아바타,
  하나의 주시자 무한의 아바타,
  그들은 신의 힘을 받은 자, 신의 대리인
  신의 뜻을 행하고 있는 그들이 이 페이트의 수호자라네, "

반복적이고 단순한 후렴구, 리는 안경을 내려  손수건으로 슥슥 문지
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 결국, 당신은 그 수많았던, 올리에스의 아바타 중  한사람이란 말이
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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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1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0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8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7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하나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6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여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5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다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4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3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2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1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0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9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8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7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6 장편 인사드립니다. 김현정 2004.10.30 0
115 장편 [환국기] 1. 동량(棟梁) (2) 강태공 2005.09.2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