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꿈? 아니면....
블라인드가 반쯤 걷힌 창으로는 저녁의 주황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자신의 뺨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음을 깨닳고 라에
느는 눈가를 비볐다.
비퍼는 몇 개의 메시지가 왔음을 파랗게 액정으로 띄우고 있었고,
방바닥은 어질러진 그대로였다, 어제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으
나, 실은 모든 것이 변해 있었고, 라에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음을, 예전처럼 그와 함께 할 수 없음
을,
" 라에느? 일어났니? "
언제나와 같은 다정한 연인의 목소리, 어느 때와 같은 방문, 그러나
이미 모든 상황은 어제와는 틀린, 아주 틀어져 버린 그대로.
라에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저 문 밖에,
그가 있다. 그녀의 연인이, 그러나, 그는 .....
찰칵,
" 어서 와 토파, 오늘은 늦었네. "
빙긋, 라에느는 미소를 지으면서 문을 열어 연인을 맞았다.
-------------------------------------------------------
-
진명은 설의 침실 밖에서 문에 기대어 가만히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
었다. 설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다섯 시간 전이었다. 무슨 중요한
일처럼 찬물에 목욕을 하고 하얀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침대에
단정하게 누워, 바로 꿈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미래를 움직이는 꿈? 현실
을 바로잡는 꿈?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을 이루는 중인 걸까.
저런 꿈을 꾸고 있을 때의 설은, 유난히 깨어질 듯 자그마하고, 연약
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강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워 보였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손을 대고 있는, 마치 세상의 운명을 움
직이는 신의 모습을 보는 것과도 같은 경외감.
문에 기대어 안에서 들러오는 가지런한 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진명은 갑작스럽게 그녀의 호흡이 가빠지자 급히 문을 열었다.
" 설!! "
죽은 듯이 잠자고 있던 설은, 어느 사이 상반신을 일으킨 채 쓰러질
듯 자신의 어깨를 싸안고 헐떡이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
굴은 표정이 굳어 있었고, 무엇엔 가에 놀란 듯, 동공이 크게 열려
있었다. 진명이 놀라서 그녀의 어깨를 짚자, 얇은 천 위로 그녀가 흘
린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그녀는 계속 무어라 말하려는 듯
숨을 들이쉬고 있었지만 그것은 거친 호흡이 되어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올 뿐, 의미를 가진 말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 설!! 무슨 일이야!! 깨어나!!! "
자그마한 어깨를 잡고 거세게 흔들었지만 그녀의 상태는 변함이 없
었고, 진명은 급한 나머지 그녀의 하얀 뺨을 후려쳤다. 철썩, 둔탁한
파열음이 나면서 하얀 뺨이 복숭아 색으로 물들었고, 그 복숭아 색이
천천히 진한 핑크로 물드는 것과 비슷하게, 크게 열렸던 동공이 서서
히 닫혀져갔다.
".... 진명? "
" ... 아아, 정신이 들었나, 다행이군.. "
진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물어지듯이 쓰려지는 그녀를 잡아 부
축했다. 설은 기운이 거진 다 빠진 손으로 진명의 팔을 붙들었다. 아직
도 그녀의 호흡은 고르지 못했고, 흠뻑 젖은 어깨가 들먹이고 있었다.
"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도 되나? "
" .... "
설은 한참동안 말없이 진명의 팔을 붙들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에게는, 말할 수 없는 미래의 일.
" 그렇군,, "
진명은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는
것을 깨닳고, 붉어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 내렸다. 설의 하얀
이마가 살풋 찌푸려졌다.
" 미안 급해서. 흉이 안 졌으면 좋겠는데,"
난처한 듯, 연해 자신의 뺨을 조심스레 쓸어 내리는 커다란 손을 바
라보고 있던 설은, 가만히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굵고 검못이 박힌
손가락에, 곳곳에 검상이 남은 손바닥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상처를 입은 그 손의 상처 하나하나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 ..서, 설 ;;; "
설의 그 조심스러우면서도 대담한 애정표현에, 진명은 오래간만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곧, 자신의 손에 와 닿는 것이 그녀
의 입술만이 아닌, 눈물도 함께 라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의 양 볼을
감쌌다. 검은 동공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은빛의 눈동자, 그 은빛 눈동
자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울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나의 이기다. 그녀는,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고통을 싸안고 가는 존재다, 내가 그녀의 눈물을 보
기 싫다 해서, 그녀에게 울음을 멈출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해.
진명은 입술을 아프게 물으면서, 자신의 손으로 흘러내리는 설의 눈
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었다. 눈물의 이유를 물을 수도, 말릴 수도 없
다면, 자신이 할 일은 그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밖에 없었기에.
" 팔라셰씨를.... "
" 응? "
" 라에느양의 스승님을.. 잠시 불러내었어요... "
설은 진명의 가슴팍으로 안겨들면서 아주 작게, 그리고 천천히 이야
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도, 눈물로 인해서 젖어 있었고,
미세히 떨리고 있었다.
" 그저... 난 그저 라에느양을 조금 위로해주고 싶었었는데... 그랬는
데. "
반쯤은 울먹이는 듯한 말이었고 중간중간 흐느낌으로 끊어지긴 했지
만 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고해성사를 치르듯이, 진명의 가슴
에 안겨서 아직도 그의 손을 붙든 채로,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 알고 있었어요.... 라에느양.. 내가 거짓말한 것을... '보석의 아이'는
모두 루에의 아이들이고, 루에가 그를 내버려두더라도, 그의 형제들이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내가 한 거짓말
을... "
진명은 자신도 모르게 품에 안긴 설의 자그마한 어깨를 끌어당겼다.
흐느낌으로 그녀는 작게 떨고 있었다. 그랬었나, 그대는 그렇게 웃으면
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그녀를 위로하려 한 건가, 거짓으로, 그녀를
조금이라도 위로하려 한 건가.
" 난.. 난 라에느양을 기만한 거예요.... 그녀..그녀의 사랑이 이루어
질 수 없다... 는 걸 알고 있으면서.. 마치.. 보란 듯이.. 그녀를.... "
" 그만 설. "
꽈악, 진명의 거센 팔이 으스러질 듯이 설을 안았다. 위로할 수도, 그
녀를 나무랄 수도 없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녀를 안아주
는 것뿐. 품 엔이 들어온 설의 낮은 흐느낌이 몸을 타고 전해져 왔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당신처럼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혼자서 모든
걸 다 감당하려는 약한 사람이 '설정자'의 운명을 지게 된 거지. 진명
은 그녀의 울음을 몸으로 느끼면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나저나.... 라에느양도 걱정이 되는군, 괜찮을까. '
-------------------------------------------------------
----
어두컴컴한 벽돌건물의 복도, 보이는 빛이라고는 검은 커튼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마천루의 요란스런 백광의 일부들 뿐, 촛불이
나란히 켜진 복도에는 사람의 기척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조용히,
물 속처럼 깊은 침묵과 조심스러운 절제가 가득 차 있을 뿐.
루에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덮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처럼 유리인형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막내의 처벌은, 그 형제들에게 맡기었다. 차마 자신이 손을 대거나 할
수 없었기에,
" 고귀한 하이프리스티스의 손을 더럽힐 수는 없지요. "
" 누구냐?! "
조용히, 마치 허공이 말하는 것과 같은 단조롭고 무감정한 어조로 들
려온 말에, 루에는 그녀답지 않게 소리치며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대로, 당신은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하이프리스티스. "
" 당신은.... "
타이르는 듯, 조용히 말하고 잇는 것은 까만 수녀복을 단정하게 입은
젊은 수녀였다. 그녀는 입가에는 살풋 미소를 띄우고, 방 문 앞에 바른
자세로 서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루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를 본, 루에의 당혹스럽던 표정은, 천천히, 원래의 그녀다운 무표
정으로 돌아왔다.
"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루에 레오나인, 고귀한 하이프리스티스여,
그대는 세피라에게 이름을 받아, 월드의 명으로 유리에 굳힌 영혼을
가진 자. 세피라에 가장 근접한 여성, 자신의 위치를 잊지 마십시오. "
그녀의 어조는 마치 책을 읽어나가는 듯이 단조롭고,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리듬감이 있었다. 단어 하나 하나가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루에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루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 수녀는 여전히 옅고 부드러
운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로 가볍게 루에에게 허리를 굽히고 촛불 빛
너머, 어두운 복도로 사라졌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끼이이익. 텅-.
나지막한 발소리에 이어 들려온 육중한 문소리가 신호라도 되듯이,
조용하던 공간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공간을 진동시키고, 물 속 같았던 성당 안을 파문처럼 가득 채우면서,
파이프오르간이라고 짐작되는 악기소리를 업고, 성가대의 합창이 울렸
다.
잔인하고 공허한 운명-
잔인하고 공허한 운명-
움직여라 생명을 받드는 자들이여-
움직여라 나무를 받드는 자들이여-
높고, 새된 하이소프라노의 독창.
별의 운명 하늘의 운명
과거의 회상 육체의 가호
희망의 이름으로-
별의 운명 하늘의 운명
그리고 이어지는 웅장한 모두의 합창.
세피라-
세피라-
명예롭고 고귀한 이름이여-
다음으로 이어지는 독창은 조금 전, 루에에게 건네어졌던 그 단조로
운 메조 소프라노의 목소리.
달의 운명 하늘의 운명
현재의 자각 이성의 복귀
불안의 이름으로-
달의 운명 하늘의 운명
다시 합창.
세피라-
세피라-
고결하고 아름다운 이름이여-
그리고 독창, 지금까지의 두 사람과는 약간은 틀린, 무겁고 육중한 울
림을 가지고 있는 알토의 음색.
태양의 운명 하늘의 운명
미래의 예지 영혼의 회귀
생명의 이름으로-
태양의 운명 하늘의 운명
또다시 합창과 울리는 코러스.
세피라-
세피라-
절대적이고 위엄 있는 이름이여-
그대의 뜻을 받드노라-
나무의 뜻을 받드노라-
열 개 이름의 의지를 받드노라-
잔인하고 냉혹한 운명-
잔인하고 냉혹한 운명-
세피라-
세피라-
그 웅장한 코러스는 어두운 복도를 울리며 마치 인형처럼 앉아 있는
루에에게 까지 들려왔다. 그녀는 유리인형같이 무표정한 눈을, 잠시 읽
고 있던 책에서 떼고, 뒤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스테인 글라스에 그
려진, 아기를 안은 여인을 감싸고 날개를 편 10 명의 위대한 이름, 세
피라.
" ..잔인하고 ... 냉혹한.. 공허한... 운명... "
꿈? 아니면....
블라인드가 반쯤 걷힌 창으로는 저녁의 주황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자신의 뺨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음을 깨닳고 라에
느는 눈가를 비볐다.
비퍼는 몇 개의 메시지가 왔음을 파랗게 액정으로 띄우고 있었고,
방바닥은 어질러진 그대로였다, 어제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으
나, 실은 모든 것이 변해 있었고, 라에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음을, 예전처럼 그와 함께 할 수 없음
을,
" 라에느? 일어났니? "
언제나와 같은 다정한 연인의 목소리, 어느 때와 같은 방문, 그러나
이미 모든 상황은 어제와는 틀린, 아주 틀어져 버린 그대로.
라에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저 문 밖에,
그가 있다. 그녀의 연인이, 그러나, 그는 .....
찰칵,
" 어서 와 토파, 오늘은 늦었네. "
빙긋, 라에느는 미소를 지으면서 문을 열어 연인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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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은 설의 침실 밖에서 문에 기대어 가만히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
었다. 설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다섯 시간 전이었다. 무슨 중요한
일처럼 찬물에 목욕을 하고 하얀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침대에
단정하게 누워, 바로 꿈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미래를 움직이는 꿈? 현실
을 바로잡는 꿈?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을 이루는 중인 걸까.
저런 꿈을 꾸고 있을 때의 설은, 유난히 깨어질 듯 자그마하고, 연약
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강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워 보였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손을 대고 있는, 마치 세상의 운명을 움
직이는 신의 모습을 보는 것과도 같은 경외감.
문에 기대어 안에서 들러오는 가지런한 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진명은 갑작스럽게 그녀의 호흡이 가빠지자 급히 문을 열었다.
" 설!! "
죽은 듯이 잠자고 있던 설은, 어느 사이 상반신을 일으킨 채 쓰러질
듯 자신의 어깨를 싸안고 헐떡이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
굴은 표정이 굳어 있었고, 무엇엔 가에 놀란 듯, 동공이 크게 열려
있었다. 진명이 놀라서 그녀의 어깨를 짚자, 얇은 천 위로 그녀가 흘
린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그녀는 계속 무어라 말하려는 듯
숨을 들이쉬고 있었지만 그것은 거친 호흡이 되어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올 뿐, 의미를 가진 말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 설!! 무슨 일이야!! 깨어나!!! "
자그마한 어깨를 잡고 거세게 흔들었지만 그녀의 상태는 변함이 없
었고, 진명은 급한 나머지 그녀의 하얀 뺨을 후려쳤다. 철썩, 둔탁한
파열음이 나면서 하얀 뺨이 복숭아 색으로 물들었고, 그 복숭아 색이
천천히 진한 핑크로 물드는 것과 비슷하게, 크게 열렸던 동공이 서서
히 닫혀져갔다.
".... 진명? "
" ... 아아, 정신이 들었나, 다행이군.. "
진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물어지듯이 쓰려지는 그녀를 잡아 부
축했다. 설은 기운이 거진 다 빠진 손으로 진명의 팔을 붙들었다. 아직
도 그녀의 호흡은 고르지 못했고, 흠뻑 젖은 어깨가 들먹이고 있었다.
"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도 되나? "
" .... "
설은 한참동안 말없이 진명의 팔을 붙들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에게는, 말할 수 없는 미래의 일.
" 그렇군,, "
진명은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는
것을 깨닳고, 붉어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 내렸다. 설의 하얀
이마가 살풋 찌푸려졌다.
" 미안 급해서. 흉이 안 졌으면 좋겠는데,"
난처한 듯, 연해 자신의 뺨을 조심스레 쓸어 내리는 커다란 손을 바
라보고 있던 설은, 가만히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굵고 검못이 박힌
손가락에, 곳곳에 검상이 남은 손바닥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상처를 입은 그 손의 상처 하나하나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 ..서, 설 ;;; "
설의 그 조심스러우면서도 대담한 애정표현에, 진명은 오래간만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곧, 자신의 손에 와 닿는 것이 그녀
의 입술만이 아닌, 눈물도 함께 라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의 양 볼을
감쌌다. 검은 동공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은빛의 눈동자, 그 은빛 눈동
자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울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나의 이기다. 그녀는,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고통을 싸안고 가는 존재다, 내가 그녀의 눈물을 보
기 싫다 해서, 그녀에게 울음을 멈출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해.
진명은 입술을 아프게 물으면서, 자신의 손으로 흘러내리는 설의 눈
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었다. 눈물의 이유를 물을 수도, 말릴 수도 없
다면, 자신이 할 일은 그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밖에 없었기에.
" 팔라셰씨를.... "
" 응? "
" 라에느양의 스승님을.. 잠시 불러내었어요... "
설은 진명의 가슴팍으로 안겨들면서 아주 작게, 그리고 천천히 이야
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도, 눈물로 인해서 젖어 있었고,
미세히 떨리고 있었다.
" 그저... 난 그저 라에느양을 조금 위로해주고 싶었었는데... 그랬는
데. "
반쯤은 울먹이는 듯한 말이었고 중간중간 흐느낌으로 끊어지긴 했지
만 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고해성사를 치르듯이, 진명의 가슴
에 안겨서 아직도 그의 손을 붙든 채로,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 알고 있었어요.... 라에느양.. 내가 거짓말한 것을... '보석의 아이'는
모두 루에의 아이들이고, 루에가 그를 내버려두더라도, 그의 형제들이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내가 한 거짓말
을... "
진명은 자신도 모르게 품에 안긴 설의 자그마한 어깨를 끌어당겼다.
흐느낌으로 그녀는 작게 떨고 있었다. 그랬었나, 그대는 그렇게 웃으면
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그녀를 위로하려 한 건가, 거짓으로, 그녀를
조금이라도 위로하려 한 건가.
" 난.. 난 라에느양을 기만한 거예요.... 그녀..그녀의 사랑이 이루어
질 수 없다... 는 걸 알고 있으면서.. 마치.. 보란 듯이.. 그녀를.... "
" 그만 설. "
꽈악, 진명의 거센 팔이 으스러질 듯이 설을 안았다. 위로할 수도, 그
녀를 나무랄 수도 없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녀를 안아주
는 것뿐. 품 엔이 들어온 설의 낮은 흐느낌이 몸을 타고 전해져 왔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당신처럼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혼자서 모든
걸 다 감당하려는 약한 사람이 '설정자'의 운명을 지게 된 거지. 진명
은 그녀의 울음을 몸으로 느끼면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나저나.... 라에느양도 걱정이 되는군, 괜찮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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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벽돌건물의 복도, 보이는 빛이라고는 검은 커튼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마천루의 요란스런 백광의 일부들 뿐, 촛불이
나란히 켜진 복도에는 사람의 기척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조용히,
물 속처럼 깊은 침묵과 조심스러운 절제가 가득 차 있을 뿐.
루에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덮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처럼 유리인형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막내의 처벌은, 그 형제들에게 맡기었다. 차마 자신이 손을 대거나 할
수 없었기에,
" 고귀한 하이프리스티스의 손을 더럽힐 수는 없지요. "
" 누구냐?! "
조용히, 마치 허공이 말하는 것과 같은 단조롭고 무감정한 어조로 들
려온 말에, 루에는 그녀답지 않게 소리치며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대로, 당신은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하이프리스티스. "
" 당신은.... "
타이르는 듯, 조용히 말하고 잇는 것은 까만 수녀복을 단정하게 입은
젊은 수녀였다. 그녀는 입가에는 살풋 미소를 띄우고, 방 문 앞에 바른
자세로 서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루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를 본, 루에의 당혹스럽던 표정은, 천천히, 원래의 그녀다운 무표
정으로 돌아왔다.
"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루에 레오나인, 고귀한 하이프리스티스여,
그대는 세피라에게 이름을 받아, 월드의 명으로 유리에 굳힌 영혼을
가진 자. 세피라에 가장 근접한 여성, 자신의 위치를 잊지 마십시오. "
그녀의 어조는 마치 책을 읽어나가는 듯이 단조롭고,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리듬감이 있었다. 단어 하나 하나가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루에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루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 수녀는 여전히 옅고 부드러
운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로 가볍게 루에에게 허리를 굽히고 촛불 빛
너머, 어두운 복도로 사라졌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끼이이익. 텅-.
나지막한 발소리에 이어 들려온 육중한 문소리가 신호라도 되듯이,
조용하던 공간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공간을 진동시키고, 물 속 같았던 성당 안을 파문처럼 가득 채우면서,
파이프오르간이라고 짐작되는 악기소리를 업고, 성가대의 합창이 울렸
다.
잔인하고 공허한 운명-
잔인하고 공허한 운명-
움직여라 생명을 받드는 자들이여-
움직여라 나무를 받드는 자들이여-
높고, 새된 하이소프라노의 독창.
별의 운명 하늘의 운명
과거의 회상 육체의 가호
희망의 이름으로-
별의 운명 하늘의 운명
그리고 이어지는 웅장한 모두의 합창.
세피라-
세피라-
명예롭고 고귀한 이름이여-
다음으로 이어지는 독창은 조금 전, 루에에게 건네어졌던 그 단조로
운 메조 소프라노의 목소리.
달의 운명 하늘의 운명
현재의 자각 이성의 복귀
불안의 이름으로-
달의 운명 하늘의 운명
다시 합창.
세피라-
세피라-
고결하고 아름다운 이름이여-
그리고 독창, 지금까지의 두 사람과는 약간은 틀린, 무겁고 육중한 울
림을 가지고 있는 알토의 음색.
태양의 운명 하늘의 운명
미래의 예지 영혼의 회귀
생명의 이름으로-
태양의 운명 하늘의 운명
또다시 합창과 울리는 코러스.
세피라-
세피라-
절대적이고 위엄 있는 이름이여-
그대의 뜻을 받드노라-
나무의 뜻을 받드노라-
열 개 이름의 의지를 받드노라-
잔인하고 냉혹한 운명-
잔인하고 냉혹한 운명-
세피라-
세피라-
그 웅장한 코러스는 어두운 복도를 울리며 마치 인형처럼 앉아 있는
루에에게 까지 들려왔다. 그녀는 유리인형같이 무표정한 눈을, 잠시 읽
고 있던 책에서 떼고, 뒤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스테인 글라스에 그
려진, 아기를 안은 여인을 감싸고 날개를 편 10 명의 위대한 이름, 세
피라.
" ..잔인하고 ... 냉혹한.. 공허한... 운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