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꿈? 아니면....
   블라인드가 반쯤 걷힌 창으로는 저녁의 주황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자신의 뺨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음을 깨닳고 라에
느는 눈가를 비볐다.
   비퍼는 몇 개의 메시지가  왔음을 파랗게 액정으로  띄우고 있었고,
방바닥은 어질러진 그대로였다, 어제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으
나, 실은 모든 것이 변해 있었고, 라에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음을, 예전처럼 그와 함께 할 수  없음
을,
  
   " 라에느? 일어났니? "
  
  언제나와 같은 다정한 연인의 목소리,  어느 때와 같은 방문,  그러나
이미 모든 상황은  어제와는 틀린, 아주 틀어져 버린 그대로.
   라에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저 문  밖에,
그가 있다. 그녀의 연인이, 그러나, 그는 .....
  찰칵,
  
   " 어서 와 토파, 오늘은 늦었네. "
  
   빙긋, 라에느는 미소를 지으면서 문을 열어 연인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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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명은 설의 침실 밖에서 문에 기대어 가만히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
었다. 설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다섯 시간 전이었다. 무슨 중요한
일처럼 찬물에  목욕을 하고 하얀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침대에
단정하게 누워, 바로 꿈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미래를 움직이는 꿈? 현실
을 바로잡는 꿈?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을 이루는 중인 걸까.
  저런 꿈을 꾸고 있을 때의 설은, 유난히 깨어질  듯 자그마하고, 연약
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강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워 보였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손을 대고 있는,  마치 세상의 운명을 움
직이는 신의 모습을 보는 것과도 같은 경외감.
  문에 기대어 안에서 들러오는 가지런한 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진명은 갑작스럽게 그녀의 호흡이 가빠지자 급히 문을 열었다.
  
   " 설!! "
  
  죽은 듯이 잠자고 있던 설은, 어느 사이 상반신을 일으킨 채  쓰러질
듯 자신의 어깨를 싸안고 헐떡이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
굴은 표정이  굳어 있었고, 무엇엔 가에   놀란 듯, 동공이 크게 열려
있었다. 진명이 놀라서 그녀의 어깨를  짚자, 얇은 천 위로 그녀가 흘
린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그녀는  계속 무어라 말하려는 듯
숨을 들이쉬고 있었지만 그것은 거친  호흡이 되어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올 뿐, 의미를 가진 말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 설!! 무슨 일이야!! 깨어나!!! "
  
  자그마한 어깨를 잡고 거세게 흔들었지만 그녀의 상태는 변함이  없
었고, 진명은 급한 나머지  그녀의 하얀 뺨을  후려쳤다. 철썩, 둔탁한
파열음이 나면서 하얀 뺨이 복숭아 색으로  물들었고, 그 복숭아 색이
천천히 진한 핑크로 물드는 것과 비슷하게, 크게 열렸던 동공이  서서
히 닫혀져갔다.
  
   ".... 진명? "
   " ... 아아, 정신이 들었나, 다행이군.. "
  
  진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물어지듯이 쓰려지는 그녀를 잡아 부
축했다. 설은 기운이 거진 다 빠진 손으로 진명의 팔을 붙들었다. 아직
도 그녀의 호흡은 고르지 못했고, 흠뻑 젖은 어깨가 들먹이고 있었다.
  
   "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도 되나? "
   " .... "
  
  설은 한참동안 말없이 진명의 팔을 붙들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에게는, 말할 수 없는 미래의 일.
  
   " 그렇군,,  "
  
  진명은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는
것을 깨닳고, 붉어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 내렸다. 설의  하얀
이마가 살풋 찌푸려졌다.
  
   " 미안 급해서. 흉이 안 졌으면 좋겠는데,"
  
  난처한 듯, 연해 자신의 뺨을 조심스레 쓸어  내리는 커다란 손을 바
라보고 있던 설은, 가만히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굵고 검못이 박힌
손가락에, 곳곳에 검상이 남은  손바닥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상처를 입은 그 손의 상처 하나하나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 ..서, 설 ;;; "
  
  설의 그 조심스러우면서도  대담한 애정표현에, 진명은   오래간만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곧, 자신의 손에 와 닿는 것이 그녀
의 입술만이  아닌, 눈물도 함께 라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의 양 볼을
감쌌다. 검은 동공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은빛의 눈동자, 그 은빛  눈동
자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울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나의 이기다. 그녀는,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고통을 싸안고 가는 존재다, 내가 그녀의 눈물을 보
기 싫다 해서, 그녀에게 울음을 멈출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해.
  진명은 입술을 아프게 물으면서, 자신의 손으로 흘러내리는 설의  눈
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었다. 눈물의 이유를 물을 수도, 말릴 수도 없
다면, 자신이 할 일은 그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밖에 없었기에.
  
   " 팔라셰씨를.... "
   " 응? "
   " 라에느양의 스승님을.. 잠시 불러내었어요... "
  
  설은 진명의 가슴팍으로 안겨들면서 아주 작게,  그리고 천천히 이야
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도,  눈물로 인해서 젖어 있었고,
미세히 떨리고 있었다.
  
   " 그저... 난 그저 라에느양을 조금 위로해주고  싶었었는데... 그랬는
데. "
  
  반쯤은 울먹이는 듯한 말이었고 중간중간 흐느낌으로 끊어지긴  했지
만 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고해성사를 치르듯이, 진명의  가슴
에 안겨서 아직도 그의 손을 붙든 채로,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 알고 있었어요.... 라에느양.. 내가 거짓말한 것을... '보석의 아이'는
모두 루에의 아이들이고, 루에가 그를 내버려두더라도, 그의  형제들이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내가 한 거짓말
을... "
  
   진명은 자신도 모르게 품에 안긴 설의 자그마한 어깨를 끌어당겼다.
흐느낌으로 그녀는 작게 떨고 있었다. 그랬었나, 그대는 그렇게 웃으면
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그녀를 위로하려 한 건가, 거짓으로, 그녀를
조금이라도 위로하려 한 건가.
  
   " 난.. 난 라에느양을  기만한 거예요.... 그녀..그녀의 사랑이  이루어
질 수 없다... 는 걸 알고 있으면서.. 마치.. 보란 듯이.. 그녀를.... "
   " 그만 설. "
  
  꽈악, 진명의 거센 팔이 으스러질 듯이 설을 안았다. 위로할 수도, 그
녀를 나무랄 수도 없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녀를  안아주
는 것뿐. 품 엔이 들어온 설의 낮은 흐느낌이 몸을 타고 전해져  왔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당신처럼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혼자서  모든
걸 다 감당하려는 약한 사람이 '설정자'의 운명을  지게 된 거지. 진명
은 그녀의 울음을 몸으로 느끼면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나저나.... 라에느양도 걱정이 되는군, 괜찮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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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컴컴한 벽돌건물의 복도,  보이는 빛이라고는 검은  커튼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마천루의  요란스런 백광의 일부들 뿐,  촛불이
나란히 켜진 복도에는 사람의 기척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조용히,
물 속처럼 깊은 침묵과 조심스러운 절제가 가득 차 있을 뿐.
  루에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덮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처럼 유리인형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막내의 처벌은, 그 형제들에게 맡기었다. 차마 자신이 손을 대거나 할
수 없었기에,
  
   " 고귀한 하이프리스티스의 손을 더럽힐 수는 없지요. "
   " 누구냐?! "
  
  조용히, 마치 허공이 말하는 것과 같은 단조롭고 무감정한 어조로 들
려온 말에, 루에는 그녀답지 않게 소리치며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대로, 당신은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하이프리스티스. "
   " 당신은.... "
  
  타이르는 듯, 조용히 말하고 잇는 것은 까만 수녀복을 단정하게 입은
젊은 수녀였다. 그녀는 입가에는 살풋 미소를 띄우고, 방 문 앞에 바른
자세로 서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루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를 본, 루에의 당혹스럽던 표정은,  천천히, 원래의 그녀다운 무표
정으로 돌아왔다.
  
   "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루에  레오나인, 고귀한 하이프리스티스여,
그대는 세피라에게 이름을 받아,  월드의 명으로 유리에  굳힌 영혼을
가진 자. 세피라에 가장 근접한 여성, 자신의 위치를 잊지 마십시오. "
  
  그녀의 어조는 마치 책을 읽어나가는 듯이  단조롭고,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리듬감이 있었다. 단어  하나 하나가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루에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루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 수녀는 여전히 옅고  부드러
운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로 가볍게 루에에게 허리를 굽히고 촛불  빛
너머, 어두운 복도로 사라졌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끼이이익. 텅-.
  나지막한 발소리에 이어  들려온 육중한 문소리가  신호라도 되듯이,
조용하던 공간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공간을 진동시키고, 물 속 같았던 성당 안을 파문처럼 가득  채우면서,
파이프오르간이라고 짐작되는 악기소리를 업고, 성가대의 합창이 울렸
다.  
  
   잔인하고 공허한 운명-
   잔인하고 공허한 운명-
   움직여라 생명을 받드는 자들이여-
   움직여라 나무를 받드는 자들이여-
  
  높고, 새된 하이소프라노의 독창.
  
   별의 운명 하늘의 운명
   과거의 회상 육체의 가호
   희망의 이름으로-
   별의 운명 하늘의 운명
  
  그리고 이어지는 웅장한 모두의 합창.
  
   세피라-
   세피라-
   명예롭고 고귀한 이름이여-
  
  다음으로 이어지는 독창은 조금 전, 루에에게  건네어졌던 그 단조로
운 메조 소프라노의 목소리.
  
  
   달의 운명 하늘의 운명
   현재의 자각 이성의 복귀
   불안의 이름으로-
   달의 운명 하늘의 운명
  
  다시 합창.
  
   세피라-
   세피라-
   고결하고 아름다운 이름이여-
  
  그리고 독창, 지금까지의 두 사람과는 약간은 틀린, 무겁고 육중한 울
림을 가지고 있는 알토의 음색.
  
   태양의 운명 하늘의 운명
   미래의 예지 영혼의 회귀
   생명의 이름으로-
   태양의 운명 하늘의 운명
  
  또다시 합창과 울리는 코러스.
  
   세피라-
   세피라-
   절대적이고 위엄 있는 이름이여-
   그대의 뜻을 받드노라-
   나무의 뜻을 받드노라-
   열 개 이름의 의지를 받드노라-
   잔인하고 냉혹한 운명-
   잔인하고 냉혹한 운명-
   세피라-
   세피라-
  
  그 웅장한 코러스는 어두운 복도를 울리며 마치 인형처럼 앉아  있는
루에에게 까지 들려왔다. 그녀는 유리인형같이 무표정한 눈을, 잠시 읽
고 있던 책에서 떼고, 뒤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스테인 글라스에  그
려진, 아기를 안은 여인을 감싸고 날개를 편 10 명의 위대한 이름,  세
피라.
  
   " ..잔인하고 ... 냉혹한.. 공허한... 운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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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다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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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중편 도플갱어 [중] lucika 2005.09.1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