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범아 연방의 중추 서울,  그리고 그 서울의 심장이라고  불리우는 명동은
마천루의 섬이다. 10-20층 이하의 건물 따위는 보이지도 않고, 하이비젼이
허공에서 상영되고, 유리와 철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굳건한 성채와도 같
은 곳, 그런 명동에는 마치 금역처럼, 마천루의 침범을 받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명동성당.
   1999년 그 사건 이후에 무너진 뒤  재건하여, 지금은 신 명동성당이라고
불리우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변을  두른 마천루들에 비하면 작고,  초라한
- 20세기 식의 빨간 벽돌건물인 명동성당은, 묘한 이공간을   형성하며 그
마천루의 중심가에 버티고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성당 앞마당에는, 20세기 때와 같이   까만 옷을 입은
수녀 몇 사람이 빌딩사이로 져 가는 새빨간 태양의 잔광을 보내고 있었고,
어두워진 성당 안 미사실에는 오래된 전통대로 전등대신 촛불이 켜지고 있
었다.
   20세기부터 이어져 온, 저녁미사의 준비. 언제 나처럼 변함없이  명동성
당에는 저녁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사방을 감싸고 둘러선 고층건물들의 창에서 전기불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고, 수많은 광고판들이 요란스런 화면을 빛내기 시작해도, 빛마저 함부
로 범접할 수 없는 성역처럼, 명동성당은  아슴푸레한 촛불 빛만으로 밝혀
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곳, 미사실 뒤쪽의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회랑에는  아직
스테인 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무지갯빛의 햇살이  가득히 차 있었다. 아니
그것은 햇살이 아닐지도 몰랐다. 마치 긴 회랑을 따라 늘어선 은빛의 촛대
에서 초 대신 빛나고 있는 알 수 없는 빛과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 백색광은 스테인 글라스가  그려내는 무지갯빛의 광선들과  부드럽게
섞이면서 회랑 맨 안쪽의 거대한 스테인 글라스 앞에 선 20대 중반의 여인
을 은은히 비추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보랏빛의 법의 위에는 마치 갈색의 유리섬유를 연상시
키는 빛깔의 머리카락이 단정히  땋아 드려져있었고, 무표정한  눈은 입고
잇는 법의와 똑같은 보랏빛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법의는 마당의 수녀들처
럼 20세기의 산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묵묵히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스테인 글라스를 올려다보고  있었
다. 성화로 장식한 스테인 글라스가 비추어 내는 그림은 예전에 이 성당이  
섬기던 바이블의 그것과는 약간 틀렸다. 아마도 개축한 이후 바뀌었을,  성
당이 새로이 섬기는 것의 상징.
  
   " 하이프리스티스. "
  
   회랑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천천
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보랏빛. 유리구슬같이 무표정한 보랏빛의  
눈동자. 마치 유리를 불어서 만든 섬세한 인형처럼 차갑고 단정한 인상.
  
   " 무슨 일이지? "
  
  유리로 만든 종을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입구에  선 소년에게 되묻자,
새하얀 견습사제의 옷을 입고 붉은빛의 타바드를 걸친 소년은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한 다음, 다시 용건을 말했다.
  
   " 찾으시던 인물의 소재를 발견했다는 연락입니다. "
   " .... 그런가. 알았다, 곧 나가도록 하지. "
  
   소년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 허리를 굽히고  회랑을 나갔고, 여인은 다시
스테인 글라스를 바라보았다. 유리에  그려진, 아기를 안은 여인을  감싸고  
날개를 편 열 명의 위대한 존재. 그리고 그 한가운데의, 아기를 안은  더욱
더  위대할지도 모르는... 존재. 그 여인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왜인
지 모르게 그 존재와 닮은 것 같았다.  아니, 닮았다라는 표현보다는, 보았
을 때의 인상이 비슷하다는 표현이 더 맞아  보였다. 무표정, 무감정, 그리
고 함부로 손 댈 수 없는 유리세공품같은 아름다움.
  
   " .... 세피라. 그대들은... 뭘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런 존재를 아직 지
상에 남겨두다니. "
  
   유리인형같던 여인의 표정이 약간 흔들렸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고, 그러
면서도 복잡한 감정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순간이었을  뿐,  
여인의 얼굴은 바로 예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스테인  글라스
에 등을 돌리고, 늘어선 촛대 사이를 지나,  회랑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빈 회랑에는 여전히, 무지갯빛의 빛이 창과 같은 문양을 그리며, 공간 가득
히 퍼져 있었다.
  
  ----------------------------------------------------------
  
   " 라에느, 507호실에 커피세트 8인분 배달 부탁한다! "
   " 네에 마스터!! "
  
   라에느가 근무하는 카페는, 서울시 외각에 있는 그저 보통의, 흔한  건물
지하에 존재하는 가벼운 스낵과, 음료를 판매하는  테이블 여섯 개에 바가
있는, <첼로> 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카페였지만,  예전에, 이렇게 배달을  

하기 전에는, 저녁 8시가 넘어서 야근하는 사람들의 배가 출출해질 시간이
면,  테이블 수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곤 했었다.
   어쨌거나, 15층짜리의 그 건물에는 층수만큼의  소규모 회사들이 가득했
고, 사무실 수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밤을  새워가며 야근을 하곤 했으니
까, 같은 건물 내에는 배달을 결심한 주인의 심정도 이해는 갈만했다. 라에
느도, 그 결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몇 차례씩  엘레베이터를
타고 15층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수고가 있긴  했지만, 그 덕에 보수는
일반 카페의 웨이트레스보다는 두배 가까이나  많은 양이었고, 아르바이트
가 아닌 고정직인만큼, 나름대로 쉴 수 있는 시간도 넉넉한 편이었다. 무엇
보다....
  
   " 507호실이면.. 토파네 사무실이네. "
  
   웨곤에 첼로 브랜드의 아메리칸 커피와 샌드위치,  살구 잼을 바른 토스
트를 곁들인 커피세트 8인분을 싣고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길 기다리면서  

라에느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토파, 아직 화났을까. '
  
   낮에 자신을 깨우러 와서,  언제나의 문제로 그렇게 먼저  가 버린 뒤에
토퍼는 하루종일 첼로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증거
였다.
  
   " 커피세트입니다- "
  
   <507> 이라는 푯말을 단 철문을 가볍게 노크하면서 라에느는  언제나의
업무말투로 말했고, 곧 안쪽에서 크지 않은  환호성이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 어서와 라에느 -굶어죽는 줄 알았어^^: "
  
   웨곤에서 커피포트와 샌드위치 접시를 꺼내어 내리고, 빌에 적힌 금액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준 다음, 라에느는 반사적으로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
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커피포트를  받아든 직원 하나가  의외라는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 아아 토파즈는 퇴근했어. "
   " .. 퇴근..했어요? "
   " 응, 라에느에게 이야기 안했나보지? "
   " ... 네 "
  
   빌과 대금을 에이프런의 포켓에 넣고, 웨곤을  끌고 나온 라에느는 사무
실 문이 닫히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 ..정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걸;; "
  
   한 빌딩 안에서 근무하면서, 어지간해서는 혼자  움직이는 일이 없던 토
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주 감정이 상했거나, 아니면...
  
   " - 너무하잖아 토파즈 쥬얼(Topaz Jewel)! "
  
   라에느는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그 안에 웨곤을 팽개치듯 밀어  넣고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자신도  올라탔
다.
  어린애 같은 방법으로 화났음을 말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어  알고
있단 말야.
   툴툴거리던 라에느는 엘리베이터가 지하층에 다다라 첼로 앞에 문이  열
리자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화내는 건, 토파즈에게 만이야, 마스터나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어.
  
   " 다녀왔어요 마스터, 여기 대금. "
  
   라에느는 평소의 미소짓는 얼굴로 계산서와 돈을 내밀고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어느 새 시간은  한시를 약간 넘기고 있었고,  그것을 확인한 다음
그녀는 입고있던 에이프런을 벗어들었다. 퇴근시간인 것이다.
  
   " 그럼 내일 뵈요 마스터, "
   " 아, 조심해서 가. "
  
   첼로를 빠져나온 라에느는 인파로  붐비는 밤거리 속으로  들어섰다. 그
거리 가득한 사람들, 그다지 중심가가 아닌데다가  벌써 한시 반을 가리키
는 전광판 시계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온통 그 사람들과 색색의  네
온과 눈부신 백광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라에느는 그 빛과 사람들의  강
을 물결을 따라 내려가듯이 자연스럽게 지나서 그대로 발걸음을 시 외각으
로 돌렸다.
  자신의 집과는 반대의 방향이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비율로, 라에느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서, 드디어 주변의 조명과 인파가 거의 완전히 사라졌을 때쯤에는,인
간의 속도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듯이 달리고 있었다.
   라에느가 멈췄을 때, 그  주변을 비추고 있는 것은  20세기 때의 흐릿한
가로등들뿐이었다. 이미, '서울' 의  관리를 벗어난 곳이라는  걸 경고라도
해 주듯이 거리는 어두웠다. 뒤를 돌아보면, 마천루가 백광에 빛나고  있고
- 그리고 앞을 바라보면, 별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어둠아래에 원래는 붉은빛이었음 직한 빛 바랜 벽돌로 지어진 집  한
채가 있었다. 집의 벽면엔 말라죽은 담쟁이덩굴의 잔해가 앙상하게 남아있
었고, 사람 손이 전혀 타지 않은 듯이 보이는 넓지 않은 정원은 온통 잡풀
투성이었다. 깨어진 기왓장, 부셔져나간 유리창들,  그리고 사람이 살지 않
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한 무거운 적막감, 그 모든 것이 반쯤 허물어진
집 담장 너머에 선 어슴푸레한 보안등 빛으로 비춰지고 있는 중이었다.
  
   " 늦었어 제이린. "
  
   소년의 목소리, 라에느는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담장 안, 반
쯤 죽어버린 은행나무 아래, 그곳에는 한 열 다섯에서 여섯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누런빛으로 바래버린 은행나무 이파리를 밟고 그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 ..미안 콜, "
  
   라에느의 대답을 듣자 소년은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기대고 있던  등을  
탁탁 턴 다음, 무성하게 자라난 잡풀을 헤치며 집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
기 시작했다. 그런 소년의 뒤를  따라가던 라에느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 저.저기 콜. "
   " 응? "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잡풀을 헤치는 데에만 집중하며  응
수했다.
  
   " ... 토파가... 눈치를 챈 것 같아. "
  
   잠시간의 침묵, 바람 한 줄기가 와스락  하며 말라버린 낙엽들을 뒤엎고
지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앞을 본 채로- 소년이 입을 열었다.
  
   " ... 그래, 그렇구나, 그렇다면 "
  
   소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가볍고,  밝은, 천진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약간의 웃음기를 띄우고 라에느에게 대답했다.
  
   " 그럼, 언제 나처럼 처리해야겠네. 안 그래? "
   " 콜-!! "
  
   라에느의 비명 같은 부름에 소년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희게 질린
라에느의 얼굴과 소년의 무서우리만큼 평온한  얼굴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새파란 소년의 눈은, 옅은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그
리고 그 눈을 마주 본 라에느는 더이상 아무런 반문도, 항의도 할 수 없었
다.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천진스러운 소년의 미소.
  
   " 들어가자 '공주님' 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
  
   소년은 다시 풀을 헤치기 시작했고 라에느는 묵묵히 그 뒤를 따라서  집
안으로 가는 조그만 길을 걷기 시작했다. 더이상은,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
다는 것을 느끼면서.
   정원을 다 건너온 소년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신 뒤뜰에 마련된  조
그마한 온실로 향했다, 비닐이 다 찢어져 이미  외부와의 온도차이가 없게
되어버린 자그마한 온실까지 걸어온 소년은, 뒤따라온 라에느에게 손을 내
밀었다. 라에느는 그 손을  잡으며 아까의 기분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이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 ... 대문에서부터 이걸로 이동했어도 되잖아, "
   " 그건 피곤해, 아래 위 위치만 맞추어도 덜 피곤하다구. "
  
   소년은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의 모습은 온실 옆
에서 사라졌다.
  
  -----------------------------------------------------------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31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0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9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8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7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하나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6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여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5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다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4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3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1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0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9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8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7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6 장편 인사드립니다. 김현정 2004.10.30 0
115 장편 [환국기] 1. 동량(棟梁) (2) 강태공 2005.09.28 0
114 장편 [환국기] 1. 동량(棟梁) (1) 강태공 2005.09.28 0
113 중편 도플갱어 [하] lucika 2005.09.12 0
112 중편 도플갱어 [중] lucika 2005.09.1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