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Part 2. 라에느 제이린 (L'aene Jairin)



탁탁탁탁탁.

불이 모두 꺼진 빌딩사이의 좁은 골목을, 누군가 뛰어가고 있었다.
십여층을 가뿐히 넘어가는 듯한 그 오래된 빌딩들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
는 듯, 장식재가 무너져 내린 외벽과 기울어진 골조가 을씨년스러웠고, 골목
을 뛰는 발소리는 깨어진 창문으로  들어가 빈 공간에 공명되어 더욱  크고
음산하게 울려퍼졌다.
기이이잉-
어두운 골목의 상공으로 서치라이트의 하얀 백광을 흩뿌리며 비행선 한 대
가 천천히 지나갔다. 그 눈부신 백광에, 골목을 건너뛰던 그림자가 멈춰  섰
고 그 실루엣이 검게 뒤로 늘어졌다. 약간 늘어난, 변형된 실루엣으로도  그
존재가 여자란 것은 쉽게 알 수 있었고, 가느다란 몸을 한, 키가 큰  여인의
등에는, 색을 알 수 없는 긴  머리칼이 흘러내려 있었다. 잠시 발을  멈추고
비행선이 비추는 서치라이트의 눈부신 빛에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비행선을
올려다 본 그녀는, 비행선의 기구에  커다랗게 은빛으로 새겨진 <SOLLV>
다섯 문자를 보고 이맛살을 찡그렸다.

" ....God Damn... "

신음처럼 낮게 그 한마디를 흘린 그녀는 서치라이트를 피해 다시 빌딩사이
로 뛰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여성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민첩하고 훈련
받은 듯이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촤악.촤악.촤악.촤악. 탁탁탁.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물이 질펀이 고인, 오래된 아스팔트 도로위를 낮
은 굽의 앵클부츠가 밟고 지나갔고, 그 부츠가  내딛을 때마다 튀어오른 물
방울들이 수면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전에 한 보폭 앞에서 다시 물방울이 튀
어올랐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스피드로 물이 고인 도로를 통과한 뒤, 다시반쯤 허
물어진 빌딩들 사이로 아슴푸레 비치던 여인의  실루엣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참동안이나 그 어두운 골목 위를 맴돌며 서치라이트를  비추
던 하얀 비행선이 그 빛을  거두고 백광의 꼬리를 끌며  저 건너, 어둠속에
떠 있는 빛의 섬 쪽으로 이동을 시작하고 한참  뒤, 다시 어두워진 한 건물
의 옥상에, 그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으며 옥상의 난간에  한쪽 발을 얹고, 그 다리에  팔을
괴고는 백광으로 빛나는 비행선의 뒷모습과, 그 비행선이 향하고있는- 빛의
섬처럼 어둠에 떠오른 도시를 보고 낮게 혀를 찼다.

" 빌어먹을 서울. "
" 말이 심하지 않아 제이린 (Jairin) ? "

그녀의 뒤로, 또 다른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그녀보다 약간  작
은, 남성- 아니 아직 소년의 것으로 보이는 실루엣.

" 심하지 않아, 저 도시에게는, 그때부터 저주받았어 "
" 저주? "
" - 그래 빌어먹을 저주 "

새까만 밤하늘에는 별빛조차 없었다. 어두운 하늘에 비치는 것은, 비정상적
으로 번쩍이는 인공위성의 반사광. 그나마 저 도시의 상공에서는, 눈부신 빛
에 싸여 보이지도 않는다.
여인- 제이린은 난간에 얹은 다리를 내리고는 달리면서 헝크러진 긴 머리
카락을 손갈퀴로 빗질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아
직도 비행선이 사라진 빛의 섬-  범아연방의 중추인 서울을 바라보고 있었
다.

" 그만 돌아가자 제이린, 여기는 오래 잇을 곳이 아냐."

소년의 말에 제이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옥상에서  허공으
로 몸을 날렸다. 키가 크고 낭창낭창한 몸이  십여층의 빌딩을 따라 그대로
떨어져 내리다가, 2-3층 높이의 허공에서  가볍게 반회전하더니, 마치 담장
하나를 뛰어내린 것처럼 가뿐하게 지상에 착지했다.
그리고 또 한번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 동작은
마치, 습관인 듯이 몇십년이나 해온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그녀
가, 서울을 바라보며 신음같은 욕설을 흘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잠시 후, 계단으로 내려온 소년이 제이린을  올려다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어두운 골목을 따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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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빗- 삐빗- 삐빗-
테이블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옷가지와 손가락 두개를 붙인 크기의  나
이프가 두개 꽃힌 가죽벨트밑에서 무언가가 시끄러운 기계음으로  울어대었
다.

" 우웅 ..... 일어났어, 일어났다구.... "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그 기계음이  수분
간 계속 된 다음에야 겨우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벗은 등을 덮고 있던  긴
머리칼을 추스렸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손만을 뻗어  테이블의 옷가지들을
헤집어서 시끄러이 울고 있는 비퍼를 찾아들고는 알람의 스위치를 끄고, 액
정화면의 시간을 확인했다.

" 하아암- 벌써 일하러 갈 시간인가. "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시트 안에서 한껏 기지개를 키고는 침대에서 빠져나
왔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미계의 백인특유의 옅은 밀빛 몸 위로, 찰랑거
리는 길다란 허니블론드가 허리 아래까지 늘어졌다. 특이하게도 그 고운 빛
의 허니블론드는, 오리엔탈헤어처럼 묵직하게 찰랑거리는 직모였다.
기껏해야 3평이 간신히 될 것 같은 자그마한 방의 절반은 벗어서 바닥 아
무데에나 팽개친 옷가지와, 인스턴트식품의 포장지를 뭉쳐 구겨넣은 더스트
백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나머지의 공간에는 침대와  그 옆의 작은 테이블
이 들어서 있어 방은 더욱더 작아보였다.
똑똑.

" 라에느, 일어났어? 출근해야지 "
" -아아 기다려 토파. "

노크소리와 함께 문 밖에서 들려온 청년의 목소리에 여인은 서둘러 바닥에
서 여기저기 튿어 다리의 절반이 드러나는 청바지를  집어 다리에 꿰고, 테
이블에서 반쯤 흘러내린 셔츠를 집어 팔을 끼운  다음, 앞단추를 잠그는 대
신 그 앞자락을 잡아 가슴 바로 밑에다가 질끈 묶어 버렸다. 그녀가 그렇게
두 장의 옷을 입는데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30초 내외였다.

" 들어와 "

찰칵, 문을 열고 들어온 20대 중반의 청년은 까만 앵클부츠에 얇은 타이즈
를 신은 발을 집어넣으며 길게  흘러내린 허니블론드를 묶어올리는 여인과
그 주변의 엉망으로 흐트러진 방을 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길다란 생머리를 묶어 올리면서 청년을 향해 방
긋 웃어보였다.

" Good morning, Topa "
" ... Good afternoon L'aene. 결국 어제도 방을 안 치웠구나. "

청년은 맥풀린 표정으로 인사를 받으며 3평 남짓한  그 방을 다시 훑었다.
여인은 청년의 시선에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을 헤집어 벨트섹을  찾
아 들었다.

" 어제- 콜이 한잔하자고 해서- "

" 그래서 한잔이 두잔 되고 두잔이  석잔 되고, 그러다가 분명히 금지구역
까지 나가서 놀고 왔겠지? "

" ......^^: 들켰네 "

역시- 라는 표정으로 청년이 말하자 여인은 벨트섹을 허리에 두르면서 멋
적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청년이 낮게 한숨을  내쉬면서 약간은
화난 어조로 말했다.

" 몇 번 말해야 알겠어 라에느 제이린, 금지구역에는 가지  말라고 했잖아,
왜 금지구역이겠어? 가지 말아야 할 곳 이니까 정부가 금지구역으로 지정한
거야. "

그렇게 한 숨에 쏟아뱉은 다음, 화난 태도로 어지러진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청년은 아직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가죽벨트를 집어들었다.
두 개, 나란하게 꽃혀져 있는 자그마한 나이프의  길 잘든 손잡이가 조명등
빛에 차갑게 빛났다.

" .... 이런걸 차고 다니는것도 그만둬 이제. "
" 토파..... "
" 내 말 모르겠어 라에느?! 네가 금지구역에 다니는거나, 이런 나이프를 가
지고 다니는거나, 그리고-.... "

청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  어느새 그의 어조는 약간화난
정도가 아닌, 격양된 어조로 바뀌어 있었고, 그도 그 사실을 깨닳고 있었다.
어느사이엔지,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경직되어서 다문  입술이 약하게 떨려
오고 있었다. 여인을 바라보고,  자신의 손에 들린  나이프벨트를 바라보고,
어지러진 방을 다시한번 둘러보고, 그리고 다시, 여인의 청자색 눈동자를 바
라보고, 그런 행동으로 흥분된 감정을 진정시키고, 그리고 청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언제나 여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눌러참을때 그랬듯이.

" ..... 관두자, 어서 준비해. "
" ... 응.. 미안 "
" 됐어. "

청년은 벨트를 테이블에 내던지듯 내려놓고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그가 화났을때, 언제나처럼 남겨진 여인은 쓴 미소를 지으며 벨트를
집어들어 나이프가 안쪽으로 들어가게 허리에 둘렀다.
밤샘과 위험한 놀이에 그가 화내는건,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도 슬슬 그 '놀이'의 본질을 알아챈거 같았다.  말을 삼키는건, 아마도 그
다음 말이 가져다 줄 현실을 스스로 견디기 힘들어서겠지.
청년이 나가며 닫은 문을 잠시 바라보고, 여인은 비퍼를 벨트섹에  넣었다.
청년- 토파에게 숨길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 ... 콜, 서둘러야겠어 "

신음처럼, 라에느는 낮게 내뱉았다.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목소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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