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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ay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TV에서는 연신 기나긴 장마와 홍수의 이야기로 진을 치고 있었다. 지겹고 외로운 시간들. 오랜 장마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슬프게 만들었다. 창을 열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받아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차디찬 물줄기들은 익숙하고도 낯선 이상한 감각이었다.
예전에는 비가 오는 날이면 그와 둘이서 나란히 부침개를 부쳐 먹곤 했다. 동동주에 사이다를 섞어서 달콤하게 들이키며 그와 건배를 했다. 새콤한 김치에서마저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세상은 초콜릿 발린 거대한 장난감 같았다. 손가락 사이 말랑거리는 그의 감촉이 가장 달콤했다.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끝없는 추억의 향연을 벌여 나갔다. 선연하고 투명한 기억들은 내게 알 수 없는 절망과 뜨거운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다. 무릎이 가려운 것도 같았다. 울고 싶었다. 가슴이 터져나갈것 같은 뜨거운 감정에 나는  집 밖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우산도 쓰지 않은채 그의 집을 향해 내달렸다. 쏟아지는 빗줄기에서 달콤한 향내가 났다. 풀려버린 다리가 나는듯이 붕붕거렸다. 멀리, 그의 아파트가 보였다.

-땡!

기막힌 신호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15층. 그와 그 여자의 보금자리. 흔들리는 손 끝이 의식을 벗어났다. 물기어린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익숙한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어오자 반가움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목이 메어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구세요?

이번에는 여자의 음성. 같은 단어의 나열임에도 흔들리던 감성이 말라붙었다. 조금, 차가워졌다. 가슴 한 켠에서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심결에 벽을 짚는다는 것이, 초인종을 눌러버렸다.

-누구?

다시 여자의 음성. 안에서 무어라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천천히 문이 열렸다. 까뭇한 눈초리. 불현듯 뜨거운 것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가느다란 여자의 목줄기를 손안에 쥔 채, 있는 힘껏 떠밀었다. 손가락 마디 사이로 출렁이는 맥박이 느껴졌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컥컥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자그마한 입술이 푸르게 변했다. 그의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더구나 여자의 뱃속에 잠긴 자그마한 생명의 벅찬 움직임이 나의 복부에도 전해왔다. 아이가 증오스러웠다. 움켜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여자의 벌어진 흰자위 위로 열꾳같은 실핏줄이 피어올랐다. 날카로운 손톱끝이 하얀 살갗을 파고들었다. 알 수 없는 희열이 전신을 싸고 돌았다.
악! 갑자기 몸이 허공에 들려졌다. 손끝에 쥐어진 그녀의 목줄기도 떨어져 나갔다. 머리가 핑, 도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목 뒤로 둔중한 타격감이 느껴졌다. 지독한 두통. 겨우 몸을 추스린 후 주위를 둘러보니 그와 낯선 남자 한 사람이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그 혼란의 와중에도 그의 곁에 서있는 낯선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궁금한 것들, 생각해야 할 것들. 그러나 정말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라고는 머리가 아프다, 라는 따위의 본능적인 감각.
여자는 아직도 자리에서 꿈틀거리는 채였다. 파르르 떨려오는 손끝을 보니 조금은 만족스러웠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곧장 아내에게로 달려갔다.

"여보, 괜찮아? 정신들어?"

흐릿한 시선 너머로 그의 나즈막한 어깨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울먹이는 음성 너머로 기분 나쁜 파장이 전해왔다. 싫어.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지마!
남은 힘을 모아 그에게 팔을 벌려도 내 손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오히려 닿은 것이라고는 낯선 남자의 거친 손길. 누군가, 이 남자. 내 손을 잡고, 나의 목을 휘감고, 나의 허리를 두르고 이 집 밖으로 나를 끌고 나왔다. 내가 있을 자리는 없는 이 따뜻한 공간에서 나는 끌려나왔다.
바깥의 공기는 아직도 추적한 비냄새가 묻어있었다. 던져지듯 차 안에 실린 나는 흔들리는 시동음을 온 몸으로 느끼며 망연한 기색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약간은 눈에 익은 듯, 어쩌면 전혀 모르겠는듯. 불현듯 그와 내 사이에 끼어들어 이 모든 상황에 관여하는 그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참을 머뭇거린 후에야 목소리, 그것이 흘러나왔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문득 돌아보는 시선이 모호했다. 날카로운 코 끝에 빗물이 맺혀있었다. 문득 어제 버스에서 본 끈적한 시선을 기억해냈다. 그와 닮아있는 모습. 묘한 분위기.

"누구신데 갑자기-"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누구신데 갑자기 남의 집 아내, 그것도 임산부한테 달려들어서 목을 조르고 난리를 치는건지."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말투가 문득 두렵게 내려앉았다. 남자의 정체. 다시 올려보자 길게 찢어진 눈초리가 유독 사납게 느껴졌다. 이 남자, 여자와 아는 사이인걸까. 어쩌면 그 여자와 가까운 피붙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리 어색하지 않은 상황일지도. 여자가 나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어서, 그래서 이 남자에게 부탁을 했다면?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이 상황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것일수도. 어제 마주친 그 눈동자가 그리 신기하지 않은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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