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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Adelra-in - 요괴왕 ..... <1>

2006.07.11 19:3207.11

Adelra-in
요괴왕

12 번째 폴리스는 13 번째 폴리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아델라인과 소년은 꼬박 이틀을 걸어 12 번째 폴리스에 도착했다 마차 4대가 한 번에 지날 수 있는 넓은 도로를 가진 이 도시는 13 번째 폴리스에 비해 많이 발전한 도시였다. 12 번째 폴리스는 11번째 폴리스와 기차가 놓인 10번째 폴리스로 정기적으로 오가는 마차도 운행하고 있었다. 아델라인과 소년은 이 마차를 타고 곧장 10 번째 폴리스로가 기차를 타고 첫 번째 폴리스로 향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여권 수속을 마치면서 가호 받은 병사에게 들은 한 마디로 그 계획을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분간은 10 번째 폴리스로 향하는 마차들이 꼼짝도 못하게 됐지요.”
“아니 갑자기 왜 그렇게 된 겁니까?”
  
아델라인의 물음에 가호 받은 무구의 병사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커다란 싸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도로가 완전히 망가져서 마차가 도저히 오갈 수 없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첫 번째 아들의 추종자들과 성당 기사단들이 완전히 길을 봉쇄를 해버려서 원.”

병사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소년과 함께 도시 안으로 들어온 아델라인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구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은 소년을 데리고 곧장 근처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은 12 번째 폴리스 가장 높은 언덕에 있었다. 13 번째 폴리스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오갔으며 공부하는 수도사들과 나이 어린 수련자들도 볼 수 있었다. 아델라인은 곧장 신부를 만나려 했지만 신부가 무재중이라 성당의 계승자와 만날 수밖에 없었다. 짧게 머리를 깎은 계승자는 젊고 탄탄한 몸에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는 사내였다.

“신부님이 부재중이라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아델라인은 말없이 허리춤에서 브로치를 꺼내 계승자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엔 콘스탄티노플의 주인. 성황의 문장과 아델라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계승자는 “오 하늘 아버지시여.”를 중얼거리며 자신 앞에선 경이로운 존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델라인은 그런 그에게 더 이상 예의를 차리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얼떨떨해하는 그에게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이곳에는 보는 눈이 많으니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지.”
“그렇다면 사부님의 작업실로 가면 되겠군요. 그곳에는 평소에도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답니다. 하하.”

계승자는 아델라인과 소년을 신부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작업실은 그야말로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잉크 냄새가 물씬 풍기는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책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바닥에는 종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계승자가 아델라인과 소년에게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불편하시겠지만 이곳만큼 조용한 곳도 없지요.”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이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왔다.”
“무엇이든 말씀하시지요. 폐하.”
“신부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대의 힘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그래. 교회의 계승자들은 전보를 직접 보내고 해독하는 방법을 따로 배워뒀다는 걸로 알고 있다. 그 말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계승자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를 통해 황궁과 콘스탄티노플에 전보를 보냈으면 한다.”
“황궁과 콘스탄티노플이라 하셨습니까?”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승자는 의아해했다. 콘스탄티노플이라면 이해가가지만 황궁에도 보내는 내용이라면 성당이 아니라 시청에서도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전보를 보내면서 그 내용을 알게 된 계승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전보를 모두 보낸 뒤 계승자가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폐하…. 이것은?”
“교회의 계승자이며 하늘 아버지의 지팡이가 될 네 입이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본다.”

계승자는 고개를 조아렸다. 아델라인은 그런 계승자의 파리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델라인은 미소 지으며 커다란 돈을 헌금하고는 성당을 나왔다. 성당을 나서기 전 헌금으로 받은 보석을 받고 멍해 있는 계승자에게 아델라인이 한 가지 덧붙인 말은 자신이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이글거리는 노을 이 눈을 찌르자 아델라인과 소년은 인상을 찌푸렸다. 서서히 밤이 다가오면서 폴리스 곳곳이 환히 빛나기 시작했다. 아델라인이 소년을 보며 말했다.

“많이 피곤하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은 그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참아라.”

그렇게 말한 아델라인이 소년을 데리고 간 곳을 마시장이었다. 말똥냄새에 소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 한 마리 한 마리를 살피는 아델라인에게 피둥피둥 살이 찐 주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이구. 나리 어쩐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아! 마시장에 오셨으면 말을 사러 온 것이 당연한 것!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힘이 강한 놈? 아니면 바람같이 빠른 잘생긴 녀석?”
“일단 보여줘 보시오.”

뚱뚱한 주인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아델라인에게 여러 말을 보여줬지만 아델라인의 마음에 드는 말은 없었다. 소년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때 아델라인의 눈에 한 놈이 띄었다. 크고 검으며 자신감에 차있는 아주 사나워 보이는 녀석이었다.

“저 놈은 어떤 녀석이오?”

아델라인이 투레질 하는 녀석을 가리키자 주인이 깜짝 놀라 말했다.

“아하하. 저 녀석은 불가능 할 겁니다.”
“뭐, 문제 될 거라도 있는 거요?”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저 녀석을 어떻게 이곳에 끌고 왔는지도 모르겠군요. 원래 야생마의 우두머리였는데 운 좋게-녀석에겐 나쁜 거겠지만- 이곳에 들여온 놈입니다. 지금까지 사람을 태운 게 정말 손에 꼽을 정도지요. 그나마 태운 것도 녀석이 펄쩍펄쩍 날뛰어서 모두 호되게 떨어졌고요. 그런 놈이 머리는 얼마나 좋은지 틈만 나면 자물쇠를 열고 도망치기는 게 일상인지라 저렇게 자물쇠에 쇠사슬을 칭칭 감아놓은 겁니다. 뭐 하여간 놈에게 어설프게 다가가지 마세요! 그랬다가 뒷발에 채여서 몸이 부러진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요.”

“하! 그럼 저 녀석을 왜 여기에 계속 두고 있는 거요?”

아델라인이 묻자 주인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저래 뵈도 저 녀석이 이곳에 있는 말 중에서 힘이 가장 장사인데다 빠르기는 얼마나 빠른지 바람 같은 녀석이라 그렇습니다. 정말 나는 태어나서 저 놈 같이 빠른 말은 보지 못했습니다. 저 놈은 기사왕 아사무의 벤투스 보다도 빠를 겁니다.”

그 말에 아델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벤투스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주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2년 전 수도에서 열린 마상시합에서 기사왕과 벤투스를 보았지요! 벤투스는 그 이름 그대로 바람과 같은 녀석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빨리 달리는 말을 나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바로 그때 까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 놈이 그 벤투스보다 빠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아델라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뚱뚱한 주인은 표정을 굳히며 자신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아델라인이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하자 그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곳은 마시장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말을 많이 취급하며! 가장 많은 거래가 오가는 곳입니다! 나는 밑바닥에서부터 처절하게 기어 올라와 이 자리에 올라왔어요! 그 비결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신용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말을 볼 줄 아는 이 눈이었지요!”

그러면서 주인은 그 커다랗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워 소년은 아델라인 뒤로 숨어버렸다. 아델라인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확실히 아델라인이 보기에도 보통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좋소. 이놈으로 정했소.”

그러나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판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요. 아무리 많은 돈을 내 손에 쥐어줘도 그것은 바뀌지 않아요. 나는 놈을 완전히 길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팔 생각입니다. 아니 그냥 줄 수도 있어요!”

아델라인은 주인과 거칠게 투레질하며 자신과 주인을 노려보는 검은 놈을 바라보았다. 아델라인이 미소지었다.

“걱정할 필요 없소. 주인장. 내일 오겠으니 재갈이나 물려놓으시오.”

그렇게 말한 아델라인은 소년을 데리고 마시장을 나와 버렸다. 주인이 뭐라 하려 했지만 아델라인은 무시해버렸다. 소년은 많이 힘들어 보였다. 아델라인은 소년을 안아들었다. 소년이 괜찮다고 했지만 아델라인은 무시했다. 아델라인은 소년을 데리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묵기에 괜찮은 여관을 찾았다. 정기 마차가 묶여서 인지 12 번째 폴리스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어지러운 사람들을 헤치며 여러 여관에 들렀지만 주인들은 방은 모두 찼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아델라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노숙을 해야 할 듯싶구나.”

소년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을 내려달라고 했다.

“나 만큼 아버지도 힘드니까요.”

아델라인은  그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그때 한 간판이 아델라인의 눈에 띄었다. 《동해(東海)란 없다.》흥미롭기도 하거니와 근처에 남은 여관이라고는 그것 하나뿐이라 아델라인은 주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점을 겸하고 있는 듯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작은 무대도 마련되어 있었지만 비어 있다. 놀랍게도 카운터를 보고 있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녀는 카운터에 발을 올린 채 책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서 아델라인은 또 놀랐다. 그녀는 튜닉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잘못 봤나 해서 위에 입고 있는 셔츠를 보았다. 남성은 절대 낼 수 없는 부드러운 곡선이 보였다. 틀림없이 여자였다. 아델라인이 카운터로 다가갔다.

“…실례 하겠소. 하루 묵고 싶소만?”

아델라인이 말하자 책을 보던 여인이 힐끔 아델라인을 쳐다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다. 그녀가 책을 덮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키가 상당히 컸다. 아델라인은 결코 작은 키가 아니었으나 거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소년도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요. 지금 방이 하나 밖에 안 남았어요. 그리고 현재 대기 중인 사람이 세 명이구요. 대기 중인 사람들 손들어 봐요!”

그녀가 한 쪽 구석의 테이블에 물었다. 그러나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다. 그 중 여행자 차림의 한 사내가 손을 들고 말했다.

“한 명은 도중에 나갔어.”
“…해서 어쨌든 대기 중인 사람이 두 명 남았네요.”

아델라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이 하나 남아 있는데 대기자라니. 이해할 수 없군요.”
“아. 저기 있는 사람들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을 줘서 그래요. 자 다시 시작이군요. 하나 남은 방을 얻기 위해서는 저와 간단한 문답을 해야 해요. 정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저의 마음에 들어야하지요. 뭐 틀리더라도 상관없어요. 대기자가 있는 것은 나중에 제비뽑기를 하기 위해서니까 운이 좋으면 방을 차지할 수 있는 거죠. 자. 어쨌든 하시겠어요?” 
 
아델라인은 소년을 보았다. 때문에 카운터의 여인은 의아해하며 아래를 내려다 봤다. 카운터에 가려 소년이 보이지 않았던 데다, 일어선 뒤에도 눈높이가 높아 소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년을 발견한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예쁜 아이네요. 안녕?”

그 말에 소년은 아델라인의 뒤에 숨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여인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귀엽군요. 동생하고 여행이라도 하나 봐요? 정말 많이 닮았어요!”
“내 아들이오.”

아델라인이 그렇게 말했고 그녀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다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의외네요. 겉보기완 다른걸요? 뭐가 그리 급하셨던 걸까?”
“…그래서 그 문답이란 게 도대체 뭐요?”

아델라인이 말을 피하며 물었다. 그녀는 아델라인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부자지간이 맞는 것 같아요. 얼굴 빨개지는 게 똑같은 걸? 좋아요. 자 그럼 묻도록 하지요. 아,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정확한 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 자신의 생각을 편하게 말씀하시면 되는 거예요. 아시겠죠?”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델라인을 보며 그녀가 빙긋 미소 지으며 물었다.

“여관에 들어오면서 간판 보았지요?”
“그렇소. 확실히 《동해(東海)는 없다.》였었지?”

아델라인이 묻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은 그 간판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아델라인은 바로 말했다.

“당신의 세계의 크기가 궁금해졌소.”
“세계의 크기? 왜 그렇지요?”
“당신의 세계는 제국이요?”

그러자 여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그렇게 묻는 거죠?”
“동쪽에 바다는 존재하오.”
“동쪽에는 벽뿐이 없어요.”
“그 점이오. 당신의 세계는 제국이오.”

아델라인의 말에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고요?”
“제국의 동쪽에는 바다가 존재하지 않지만 어머니 대지에겐 아니오.”
“하! 그러니까 지금 당신 말은. 저 하늘 아버지 너머 아득히 솟아 있는, 유령과 요괴가 우글거리는 거대한 벽 너머에도 어머니 대지가 뻗어있다고 말하는 건가요?”
“물론이오.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것은 분명하오. 제국은 벽. 그러니까 이제는 저 경이로운 은룡의 산맥에 의해 모든 가능성을 잃었지만 어머니 대지는 그렇지 않소. 그 너머. 그녀의 동쪽에는 분명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을 거요.”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녀가 빈정거리는 투로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아델라인은 어깨를 으쓱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여인이 말했다.

“음유시인들도 벽 너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요. 그들은 노래로 유령과 요괴를 즐겁게 해줄 수 있지요. 그 대가로 그들이 벽 너머에 대해 물어본 일화는 아주 많잖아요? 하지만 유령과 요괴는 무슨 이유에선지 벽 너머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너머에 세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요.”
“수많은 마술사와 학자들이 그 너머에는 깊은 나락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고 했어요. 당신의 생각은 어렸을 적 할머니가 들려준 전설과 그리 다를 바가 없군요.”
“당신은 그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거요?”

소년은 아델라인과 여인은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인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아델라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델라인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여인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여인이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건 사실 아닌가요?”

아델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와 같소. 그들 역시 벽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했소.”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찬가지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그토록 확신하지요?”
“그것은 내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요.”
“아델라인에게 기사왕 아사무 하는 말 같군요.”

아델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타는 단검과 얼어붙은 단검을 단단히 쥔 채 으르렁거리는 아사무의 모습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런 아델라인을 흥미롭게 -또 매력적인- 눈빛으로 응시한 그녀가 빙긋 미소 지었다. 동시에 뒤편에 앉아 있는 대기자 두 명이 탄식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열쇠를 받아든 아델라인을 보며 여인이 말했다.

“침대는 하나 뿐이 없지만. 둘이 자기엔 충분할 거예요. 목욕탕은 지하에 있기는 한데 뜨거운 물을 기대하진 않겠지요? 여긴 그리 고급이 아니니까요.”

아델라인은 덤덤하게 물었다.

“선불이요?”
“60 페르크.”

아델라인이 표정을 굳혔다.

“너무 비싼 것 아니오?”
“저기 당신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리고 다른 곳에서 방 알아보려면 배는 고생해야 할 걸요.”

아델라인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폐를 내어줬다. 그것을 받아든 여인은 빙긋 웃으며 돈을 거슬러줬다.

“방은 복도 맨 끝 창가 쪽에 있어요. 그리고 계단 오를 때 여섯 번째던가? 아. 일곱 번째 단에 구멍 뚫려 있으니까 발 조심하구요.”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소년과 함께 계단에 올랐다. 소년은 계단을 오르기 직전 뒤돌아 카운터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여인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소년은 얼른 뒤돌아 아델라인을 뒤따라 올라갔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작은 등과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둘은 짐을 풀었다. 그 다음 아델라인은 바이올린을 꺼내들었다. 소년과 아델라인의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미소 지으며 류트를 꺼내들었다. 둘은 악기를 들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려왔다. 때문에 둘 다 일곱 번째 단에 다리를 빠트릴 뻔 했다. 요란하게 1층으로 내려온 아델라인과 소년을 본 카운터의 여인이나 술을 즐기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와우. 당신들! 음유시인이었어요?!”

여인이 말했고 동시에 여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환호를 터트린 것이다. 13 번째 폴리스 때와 비교하면 너무도 다른 반응이었다. 둘은 여관에 들어올 때부터 무대를 눈여겨 본 터였다. 아델라인과 소년은 얼른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쳤다. 그런 사람들에게 양팔을 들어 진정시킨 뒤 아델라인은 과장이 잔뜩 섞인, 그러나 굉장히 매력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반갑습니다! 뜬금없지만 갑자기 연주를 하고 싶다고 손가락이 하도 근질근질 거려 이곳에 올라왔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와 내 아들의 연주는 너무나도 훌륭해서 여러분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봐 걱정이 되는군요!”

사람들이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아델라인과 소년은 우아하게 인사한 뒤 악기를 들었다. 아델라인이 턱에 바이올린을 대고 활을 털었다. 소년의 작은 손가락이 현에 닿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 모이고 아델라인이 활을 바이올린 현에 대었다. 소년과 아델라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이 미소 지었다. 그 뒤 곧바로 아델라인이 활을 당겼다.

“첫 번째 폴리스의 위대한 오베루스의 노래다!”

곡을 단번에 알아들은 누군가 소리쳤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흑맥주의 거품이 날아들고 잔이 부딪쳤다. 경쾌한 반주가 이어지고 사람들이 리듬에 맞춰 박수를 쳤다. 그때 누군가가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쪽 바닷바람 부는 항구에!
  아름다운 금발벽안 꿈 많은 소년!
  아리따운 부인 얻기 위해
  여행의 돛을 펼쳤지!

  항구의 오지랖 넓은 늙은이! 조그만 돛단배 타고
  바다 멀리 떠나려는 무모한 소년에게 외쳤지!

  이름을 말해라! 미친놈아!
  네 부모에게 네 놈이 바다에 뼈를 묻었다고
  내 전해주마! 라고 하자!

  아름다운 소년 이렇게 외쳤지!

  아름다운 유령 달리아를 부인으로 얻기 위해
  저 멀리 미지의 대륙으로 떠나는 거라고!
  
  그러니 노망난 늙은이여
  내 이름을 기억하라!

  나로 말하자면 구릿빛의 매력적인 피부에!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을 가진!
  바닷바람의 자식!
  
  위대한 오베루스!”

한 사람이 부르기 시작하자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아델라인과 소년은 더욱 흥이 났다. 여관이 소란스러워 지자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호기심에 여관 문을 두드리고. 음유시인들의 연주를 보고는 놀라워하며 달려와 모두가 함께 노래했다. 순식간에 파티가 벌어졌다.

“이야히호!  
  무거운 폭풍과 바다악어 때를 넘어
  미지의 대륙에 도착한 오베루스
  아름다운 유령 달리아에게 청혼했지만!

  아니나? 아뿔싸!
  대답도 듣기 전에.
  못생긴 주먹코의 요괴왕!
  아름다운 달리아를 낚아채버렸네…!”

사람들이 와하하 웃으면서 맥주잔을 부딪쳤다. 노래는 그 뒤 계속 됐다. 유쾌한 리듬만큼이나 그 이야기도 유쾌한 위대한 오베루스의 노래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더욱 커졌고, 활을 당기는 아델라인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류트 위에서 춤추는 소년의 손가락이 더욱 현란해지고. 템포가 빨라지고. 빨라지고. 절정을 맞았다.

“위대한 오베루스…!”

노래가 끝났다.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소년과 아델라인은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관을 떠나지 않고 이 흥겨운 분위기를 계속 유지 했으면 바랐다. 사람들이 앵콜을 부르짖었고 아델라인과 소년은 서로 고개를 끄덕인 뒤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하며 잔을 높이 들었다. 흑맥주의 거품이 넘쳐흐르고ㅡ, 누군가 춤추고 누군가 노래했다. 모두가 즐겁게 웃었다.

이 즉석에서 이루어진 연주회는 사람들의 열렬한 요구로 몇 개의 곡을 더 연주하고 나서야 끝났다. 그 뒤 많은 사람들이 여관을 나갔지만 대부분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가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소년과 청년은 기진맥진 해져서는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둘다 배가 많이 고팠다. 짧은 연주회를 가지고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소년과 아델라인은 서로 그렇게 이야기하며 웃었다. 그때 그들의 테이블에 푸짐한 요리가 턱턱턱 올라왔다. 아델라인과 소년이 깜짝 놀라 올려보니 카운터의 미인이 빙긋 미소 지으며 서있다.

“정말이지! 음유시인이라면 진작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 걸 굳이 말해야겠소?! 그것보다 정말 고맙소. 마침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쾌활하게 말한 아델라인은 소년과 함께 고기를 뜯고 포도주의 코르크를 땄다. 그러다 잔이 하나 밖에 없음을 깨닫고는 소리쳤다.

“여기 내 아들이 보기엔 이렇게 작다고 얕보나본데! 이 녀석 포도주를 아주 잘 마시거든! 잔을 하나 더 가져다주게! 모두 아주 깜짝 놀라게 될 거야!”

오오, 사람들이 놀라며 소년에게 몰려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10살을 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소년이 그렇게 훌륭한 류트 솜씨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포도주까지 마실 줄 안다하니 신기한 것이었다. 잔이 나오고 아델라인이 소년의 잔에 포도주를 가득 채웠다. 모두의 시선이 소년에게 모이고, 소년이 씨익 웃더니 그것을 집어 한 번에 들이켰다. 사람들이 와! 하면서 웃음을 터트리고 박수를 쳤다. 그러자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 어린 아이에게 질 수 없다며 술을 달라 외쳤고 그를 본 모두가 깜짝 놀라 외쳤다.

“술 한 잔에 기절하는 알프레드가 열 받았어!”

알프레드의 얼굴이 시뻘개지고 모두가 와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소년도 웃었고 아델라인도 웃었다. 그때 누군가가 아델라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돌아보니 카운터의 미인이 곁에 앉아있다. 아델라인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요?”
“아니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당신 덕분에 가게 매상이 껑충 뛰어올랐군요. 정말이지! 아 사실은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우리 이름을 교환하는 게 어떨까요?”
“나는 떠돌이 음유시인일 뿐인데?”

그때 알프레드가 술잔을 받아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알프레드가 표정을 굳히더니 술잔을 쭈욱 들이켰다. 모두가 오오오! 하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년도 웃으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카운터의 여인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될까요?”
“뭐 문제 될 건 없지만….”

아델라인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아델라인을 보며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차림이나 행동 등 여러모로 여인 같지 않은 면이 많았다.

“내 이름은 아델리아. 아델라이데.”

순간 소년이 깜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아델라인은 별 표정 없이 아델리아를 보았다. 알프레드는 한 잔을 더 마실 수 있다며 호기롭게 외쳤고 발빠른 누군가가 맥주가 가득 든 잔을 얼른 갔다 줬다. 알프레드는 그것을 들고 한 바퀴 돌아 모두에게 보여주고는 벌컥 벌컥 들이켰다.

“우와아아아아아!”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고. 동시에 알프레드가 풀썩 쓰러졌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몇몇이 알프레드!를 외치며 그를 안고 그를 안고 여관을 빠져나갔다.  

“…발터요.”

아델라인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아델리아가 미소 지었다. 아델라인도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와 반대로 소년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델라인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델리아가 말했다.

“흐음. 내 이름 듣고 놀라지 않았어요? 유명한 이름이잖아요.”
“솔직히 놀랐소. 굳이 그런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뭐ㅡ. 그래도 나는 이 이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고 있어요. 아델라이데! 마녀라고는 하지만 아델라인의 유일한 공주이자, 제국의 축복 받은 저주를 내린 저주의 어머니. 아름다운 마술사왕 칼리오스테와 은룡의 사랑을 독차지한 유일무이한 여인. 매력적이죠?”

소년이 벌떡 일어섰다. 아델리아는 깜짝 놀라 소년을 보았다. 소년의 얼굴은 창백했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델라인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피곤하니?”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은 이만 올라가 쉬라고 했다. 소년은 아델리아에게 옅게 미소 지으며 인사 한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델라인은 말없이 잔에 술을 따라 들이켰다. 가슴이 부글거렸다. 아델리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픈 것 같았어요! 저대로 보내도 되는 거예요?”
“괜찮을 거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아델라인이 그렇게 말하자 아델리아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불편한 공기. 한 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귀를 스친다. 아델라인은 가라앉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옆 테이블에 있는 술을 가져와 잔에 가득 따르고는 한 번에 들이켰다. 모두가 오오오! 하면서 아델라인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가 마신 술은 굉장힌 독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음유시인 양반도 장난이 아닌데!”
“아버지 닮아 아들이 그렇게 술을 잘 마시는 거였구만!”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델라인도 웃었다. 그러나 공허한 웃음이었다. 한동안 아델라인은 사람과 웃고 떠들며 술잔을 부딪쳤다. 아델리아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아델라인에게 열쇠를 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그녀는 아델라인의 생각을 절대로 공감할 수 없다면서. 그녀는 술이 좀 들어간 상태였다. 그 상태로 한 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마침내 답을 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어렸을 적에는 벽 너머에 요정에 나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분명히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었어요. 흐음 아마 그것 때문일지도 몰라요. 이봐요.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머리로는 이해 못해도 가슴으로는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고요.”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그녀는 첫 번째 기사왕 아단과 아사무에 대해. 그리고 아델라인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진실과 상당 부분 달라진 이야기를 듣는 아델라인의 기분은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미소 지으며 그녀가 원하는 물음을 던져주곤 했다. 그렇게 한동안 사람들을 상대하던 아델라인은 조심히 몸을 일으켜 위층으로 올라왔다. 물론 아무도 눈치 못하도록 조심하면서 말이다.

계단 아래로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반대로 아델라인은 잔뜩 가라앉아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은 일부 번화가를 제외하고는 깊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소년은 자고 있지 않았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델라인이 말했다.

“쉬어야지. 피곤하잖아.”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끔찍한 목소리. 소년이 말했다.

“그녀는 마녀가 아니에요.”
“나도 알아.”

아델라인이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도 알고 있단다.”  

  

Adelra-in
요괴왕

잠에서 깬 아델라인은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새벽이었다. 도시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곧 해가 떠오르면 청동빛으로 물들겠지. 옆에서 소년의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이 걷어찬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준 아델라인은 기지개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띵하니 관자놀이가 아파왔다. 아델라인은 머리를 흔든 뒤 세면실로 갔다. 차가운 물을 연거푸 뒤집어쓰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아델라인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잠에서 깬 소년이 말했다.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얼른 씻고 오라고 했다. 소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건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창 밖 가호 받은 성벽 너머. 거대한 산맥 위로 옅은 빛이 떠올랐다. 벽의 그림자에 가려있던 폴리스가 밝아졌다. 녹슨 청동빛에서 천천히 원래의 색을 되찾으며. 소년이 말끔해진 모습으로 들어왔다. 아델라인은 말없이 곧장 짐을 챙겼다. 소년도 챙겼다. 둘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식당 칸은 아직 다 정리가 되지 않은 듯 보였고, 아델리아는 카운터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고 있었다.

“음. 음유시인 양반들. 부지런하네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파이프 연기를 후 내뿜었다. 아델라인이 카운터에 열쇠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신세 졌소.”
“돈 받았으니 상관없네요.”  

아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침은 안 먹을 건가요?”

아델라인은 잠시 고민하다 어제 저녁 소년이 제대로 식사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내 아들의 마음에 들게 해준다면.”

아델리아는 테이블 하나를 요령 있게 치우고는 잠시 앉아 있으라고 했다. 아델리아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관 안에는 아델라인과 소년 둘 뿐이었다. 어제 그렇게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지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의자가 좀 높아 아델라인이 소년을 들어 의자에 앉혀주었다. 그녀는 곧 요리를 내왔다. 신선한 채소와 닭 가슴살을 이용한 샐러드 몇 종류. 빵과 스튜였다. 소년이나 아델라인이나 순식간에 아침을 비웠다. 아델리아는 웃으면서 그 모습을 보았다. 식사를 마친 뒤 둘은 몸을 일으켰다.

“식사는 어땠나요?”
“훌륭했소.”
“다행이네요. 바로 폴리스를 떠날 건가요?”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리아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잠시만 기다리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 나온 그녀는 도시락을 두 개씩 아델라인과 소년에게 얹어주었다. 당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아델리아가 말했다.

“상태를 보니 제대로 된 식사를 폴리스에서 밖에 못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준비해봤어요. 무료니까 그런 부담스런 표정 짓지 말고! 알겠어요?”

둘은 아델리아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아델라이이데는 와하하 웃으면서 둘을 여관 밖으로 떠밀어버렸다. 여러모로 시원시원한 성격의 여자였다. 여관을 나온 뒤 소년은 멍하니 동해는 없다를 바라보았다. 오늘 식당은 쉽니다라는 팻말이 조용히 흔들거린다. 아델라인은 그냥 걸었다. 아델라인이 멀어지자 소년은 얼른 따라붙었다. 둘이 곧장 향한 곳은 마시장이었다. 주인이 아델라인을 맞았다.

“오셨습니까?”
“그래. 놈을 보고 싶소.”
“글쎄요. 일단 안장 채우는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설사 채운다고 하더라도 나리께서 놈을 길들일지는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델라인이 따라 보니 검고 커다란 놈이 투레질을 하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녀석의 은색 갈기가 어지럽게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델라인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조련사 몇몇은 포기하며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아델라인이 앞으로 나서며 호기롭게 말했다.

“내가 하겠소.”

사람들이 말렸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막무가내였고 나중에는 주인도 그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했다. 소년은 걱정스런 얼굴로 아델라인을 보았다. 놈은 콧김을 내뿜으며 아델라인을 노려보았다. 녀석은 동그랗고 깊은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썹과 매끈하게 빠진 머리 때문에 순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델라인이 놈을 노려보았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변화가 왔다. 그 뒤 조련사들과 주인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말은 꼼짝도 않고 서 있었고 아델라인은 그런 놈에게 자연스럽게 재갈을 물리고 안장을 얹은 것이다. 사람들이 놀라워 아무 말도 못했다. 주인장이 허겁지겁 달려와 말했다.

“도, 도대체 어떻게?”

아델라인은 말없이 말에 짐을 얹었다. 짐을 얹는 동안에도 놈은 온순하게 있었고 아델라인은 웃으면서 갈기를 쓸어줬다. 푸르르. 놈이 투레질하며 콧김을 내뿜었다. 아델라인이 소년을 번쩍 들어 앉혀준 다음 자신도 훌쩍 올라탔다. 그 뒤 천천히 몰아 주인의 주위를 돌며 말했다.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하! 하하하!”

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매우 감탄한 얼굴로 말과 아델라인을 보았다.

“당신이 어떤 마술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살아생전 놈이 이렇게 얌전하게 구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녀석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 것 같군요!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 녀석의 진정한 주인이 나타나면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그냥 넘겨줄 생각이었어요.”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주인에게 물었다.

“놈에게 이름이 있소?”
“지금까지는 미친놈이라고만 부르고 있었지요.”

아델라인이 웃으며 말의 배를 찼다. 동시에 놈이 길게 울더니 바람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놈이 달리기 직전 아델라인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그것은 정확하게 주인의 앞에 떨어졌고 주인이 깜짝 놀라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커다란 보석이었다.

아델라인은 감탄했다. 처음 보는 순간 굉장한 놈일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는걸! 사람들이 깜짝 놀라 좌우로 갈라졌다. 커다란 도로를 바람처럼 달리는 은색 갈기의 말을 본 사람들 모두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말은 순식간에 12 번째 폴리스의 가호 받은 성벽을 지나쳤다. 넓게 펼쳐진 들판! 놈이 크게 울부짖더니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아델라인이 환호했다. 소년도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델라인이 소리쳤다.

“놈의 이름을 정했어! 나타리르크Natalrrk! 빛을 쫓는 바람이다!”

나타리르크는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길게 울어재끼더니 녀석은 더욱 속도를 높여 앞으로 쏘아나갔다. 나타리르크는 아주 대단했다. 바람같이 빠를 뿐만 아니라 체력은 어찌나 대단한지 하루 종일 달려도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지친 쪽은 아델라인과 소년이었다. 한참을 달려 갈대밭에 도착한 그들은 말에서 내려 도시락을 깠다. 도시락을 먹으며 쉴 때까지만 해도 둘은 견딜만했으나 그 다음 말을 타는 것이 고역이었다. 결국 둘은 기진맥진해져서 나타리르크를 천천히 몰았다.

“아버지. 그런데 왜 이렇게 돌아서 가는 거요? 첫 번째 아들의 추종자와 성당 기사단들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라면 그 길을 지나서 갈 수 있을 것 아니에요?”

소년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라면 그렇게 갔지만 네가 있지 않느냐. 그들이 너를 보면 분명 가만 두려하지 않을 거야.”

아델라인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델라인은 그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다각거리는 나타리르크의 발굽소리가 경쾌하다. 소년과 아델라인은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여행을 지났다. 분명 돌아서 가는 길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나타리르크의 발이 워낙 빨라 이런 여유를 부려도 상관없었다. 왼편에는 경이로운 모습의 거대한 벽이 구름너머 아득히 까지 뻗어있었다. 이곳에서 벽은 불과 10키로도 떨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길 양옆으로는 갈대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바람에 물결치는 갈대밭은 노을에 물들어 있었고,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갈대밭 너머 커다란 언덕이 보였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곳의 꼭대기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아델라인은 의아하게 여기며 말을 그곳으로 몰았다. 이곳은 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사람이 살기엔 위험할 텐데? 언덕을 오르며 아델라인은 진한 풀내맷와 눈을 찌르는 노을빛 때문에 어지럼증을 느꼈다,

플라타너스 나무는 굉장히 크고 두꺼웠다. 말을 타고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델라인은 말에서 내렸다. 오두막에 다가가 문을 두드려 보았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아델라인은 문을 살짝 열며 말했다.

“아무도 안계십니까?”

솨아아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오두막 안을 뒤덮고 있던 것들이 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몰려 사라졌다.  창으로는 빛이 들어 오두막 안은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 아델라인은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델라인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13 번째 폴리스의 하수도에서 보았던 흑마술사의 그림자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어쨌든 오두막은 꽤 튼튼해 보였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보였지만 벽난로도 있었고 옆에는 장작도 쌓여 있었다. 몇몇 가구들은 다 천으로 덮어둔 상태였다. 그 위엔 먼지가 뽀얗게 내려있다.

창 밖엔 서서히 밤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아델라인은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면 될 터였다. 벽으로부터 가깝기는 했지만 자신들에게는 노래가 있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아델라인이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이슬을 피하고 가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은 소년을 나타리르크에서 내려주었다. 소년은 짐을 챙기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델라인은 나타리르크를 플라타너스 나무에 묶었다. 그때 벽으로부터 유령이 서글프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갈대밭에 몸을 숨기고 있던 새들이 무리지어 날아올랐다. 거대한 봉우리를 스치는 구름들의 모습이 느긋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라인은 나타리르크를 끌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벽으로부터 유령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델라인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벽난로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던 소년은 아델라인이 나타리르크를 끌고 오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소년을 보며 아델라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같이 잘 거야.”

나타리르크가 킁. 하고 콧바람을 불었다. 소년은 기뻐했다. 처음에는 나타리르크를 무서워했지만 하루 종일 나타리르크와 함께 하면서 많이 친해진 뒤였다. 아델라인은 벽난로 안을 살펴보았다.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아델라인은 먼지를 뒤집어쓴 장작을 난로 안에 던져놓고 불을 붙였다. 소년이 벽난로 곁에 앉아 멍하니 불을 보았다. 작은 불씨는 천천히 커져 나무를 잘도 태우기 시작한다. 아델라인은 수납장 안에서 램프를 찾아냈다. 기름은 별로 없었지만 밤을 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램프에 불을 붙인 뒤 아델라인은 도시락을 꺼내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뒤 소년은 꾸벅꾸벅 졸았다. 아델라인은 침대를 덮은 천을 걷어내고 소년을 눕혔다.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소년은 곧 잠들었다. 아델라인은 망토를 벗어 소년을 덮어주었다. 창밖은 짙은 그림자에 가려있었다. 벽난로의 장작이 바스러지며 불꽃이 치솟았다. 나타리르크가 푸르릉하며 콧바람을 뿜었다.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아델라인은 괜찮겠지 하며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를 재워 막을 불을 붙이려 할 때였다.

“음…?”

불을 붙이지 않았는데 입에서 김이 나온다. 자고 있는 소년의 고르게 숨을 뱉을 때 마다 흰 김이 피어오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년은 추운 지 아델라인의 망토를 끌어안았다. 나타리르크도 갑작스런 주위의 변화를 감지한 듯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아델라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어느새 파충류의 그것과 같이 홍채 길게 찢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타리르크가 부르르 떨었다. 그때 창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불쑥 스치고 지나갔다.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칼을 뽑은 아델라인은 으르렁 거렸다.

창밖은 짙은 어둠. 달빛이 들지 않는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름에 가린 걸까. 구름이 걷히며 창밖이 조금 보였다. 옅은 달빛과 별빛에 그림자 지는 플라타너스 나무. 그리고 밤의 장막에 드리워진 벽이 보인다. 아델라인은 그곳에서 유령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의 칼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벽난로의 불이, 램프의 불빛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똑똑똑.

누군가 오두막 문을 두들겼다. 하아아아. 아델라인은 조용히 숨을 뱉었다. 흰 김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벽으로부터 유령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이 소리는 보통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그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소년이 벌벌 떨며 몸을 웅크렸다. 아델라인은 으르렁거리며 문을 노려보았다.

“누구냐.”

대답이 없다. 아델라인은 칼을 겨눴다. 검은 아지랑이가 날카로운 송곳과 같이 모여 들더니 길게 늘어졌다. 그것은 문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아델라인이 다시 물었다.

“누구냐.”

나타리르크가 불안한 눈으로 아델라인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중년의 사내의 목소리였다.

“지나가던 여행자입니다. 밖이 너무도 추워서 말이지요. 실례가 아니라면 오두막에서 따뜻한 온기를 빌리고 싶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델라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문 밖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허함만이 깊은 서글픔만이 감돌고 있었다. 아니 멀지 않은 곳에서 산 자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지만ㅡ. 아델라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상관없지만 이곳은 산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소.”  

그때 무언가가 창가를 슥. 하고 스쳐지나가는 것을 아델라인은 발견했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소년의 곁으로 붙었다. 소년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아델라인은 이를 악물고는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오두막 안이 검은 아지랑이에 모두 뒤덮였다. 나타리르크가 깜짝 놀라 앞발을 들었지만 그것이 아무런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금방 진정했다. 오히려 오두막 안의 공기는 한결 편해졌다. 아델라인은 어지러운 듯 관자놀이를 거칠게 문지르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어쨌든 덕분에 창밖의 존재는 안을 살펴 볼 수도 오두막 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너무나도 슬프고 가슴이 아픈 소리였다. 나타리르크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동물은 민감하다. 사람보다 훨씬. 오두막 밖의 누군가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난 지금 너무 추워 꼼짝도 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당신의 입에서는 김이 나오지 않나요? 나는 숨을 한번 들이킬 때 마다 내 몸 속의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것 같단 말이에요. 부탁입니다. 제발 문을 열어 내가 들어가게 해주세요,”
“왜 굳이 이곳에 들어오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 나는 악기가 있소.”

아델라인이 그렇게 말하자 창 밖의 흐느낌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듣지 못할 소리겠지만 아델라인에겐 똑똑히 들려왔다. 속삭이는 소리였다. 우리를 알고 있어. 그리고 그는 자신을 음유시인이라고 밝혔지. 그렇다면 우리의 친구로군. 그런데 저 창을 가리고 있는 그림자는 뭐지? 끔찍한 그림자야. 다가가면 얼어붙을 것만 같아!

그들의 속삭임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델라인은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냈다. 아델라인이 말했다.

“망자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안으로 들어오려는지 알 수 없군. 노래를 원하는 것이라면 내 기꺼이 그대들에게 노래를 선물하겠소. 어떻소. 나의 노래를 듣겠소?”

창밖의 존재는 조용했다. 아델라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오두막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델라인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허공을 옅게 스치는. 달빛에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무리가. 아델라인은 자신의 음유시인의 표식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대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두막 안으로는 들일 수 없소. 내 아들은 굉장히 민감해서 당신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금방 깨어날거요. 지금도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소.”
“밤과 눈 마주친 아이인가? 우리를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분명 아델라인이 자신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할 터였다. 몸을 투명하게 하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옅은 그림자. 공기의 일렁거림. 그들은 아델라인의 주위를 맴돌며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아델라인이 고개를 들었다. 한 유령과 눈이 마주쳤다. 파충류의 그것과 같이 날카로운 홍채가 번들거린다.

“밤과 눈 마주친 이는 아니요. 어쨌든 나는 그대들을 오두막으로 들일 수 없다고 말했소. 그러니까 나와 유령제의 약속에 따라라 망자들이여.”

아델라인과 눈이 마주친 유령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유령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두려운 눈으로 아델라인을 보았다. 아델라인은 코웃음치며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칼을 들어 유령들에게 겨누었다.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칼을 보며 유령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림자의 정체는 저 칼이었어! 무시무시한 칼이야!”
“저 사람의 눈은 어떻고! 끔찍해! 우리를 알아봤어. 저건 사람이 아니야!”
“음유시인이 아니야! 첫 번째 아들의 추종자인가?! 네 정체는 뭐지?”

아델라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음유시인의 표식을 보여줬다. 달빛에 옅게 빛을 발하는 문장. 그것은 아델라인의 오른쪽 눈 아래 볼에 그려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령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째서 이 음유시인의 표식을 눈여겨 보이지 않았을까! 저것은 아델라인의 문장이 분명했다. 세 유령이 놀라 하늘로 솟구치며 노래 불렀다.

“오오. 위대한 이. 이곳에 납셨네. 먼 옛날 우리의 지배자를
  아름다운 멜로디로 굴복시킨 위대한 음유시인 왕 이곳에 납시었네!”

그러더니 유령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며 아델라인 앞에 섰다. 모두 세 명이었다. 중년인. 여인. 그리고 소년으로, 그들은 아델라인은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델라인이 물었다.

“나의 노래를 듣는 것으로 끝내겠는가?”

그들은 가만히 아델라인을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델라인이 활을 들었다. 바이올린을 턱에 대고 가만히 눈 감은 그는 활을 몇 번 털은 뒤 조심히 현에 활을 대었다. 깊은 숨을 내쉰 그는 조용히 활을 당겼다. 현이 떨리며 바이올린의 떨림이 공기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늘함이 가시기 시작했다. 유령들의 공허한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리라. 초조해하던 나타리르크는 조용해졌고 소년은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언덕 아래 갈대밭이 물결친다. 스치는 구름에 모습을 가렸던 휘황한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짙은 그림자에 가렸던 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유령들이 흐느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델라인이 연주하는 곡은 진혼곡이었다. 저 멀리 있던 구름이 다가와 달을 가려 세상이 캄캄한 그림자에 덮였을 때 아델라인이 활을 내려놓았다. 풀벌레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아델라인이 말했다.

“만족 했는가? 망자들이여.”
“그렇습니다. 음유시인의 왕이여.”

아델라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곳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인가?”

세 유령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여자의 모습을 한 유령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리의 물건을 훔쳐간 인간 계집을 쫓고 있습니다.”

그 말에 아델라인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령들의 물건을 훔쳐간 인간이라고? 그렇다는 말은 사람이 은룡의 산맥에 올랐다는 말인가?”

아델라인의 말에 유령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은 너무나도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 유령들이 한 말이 더 놀라웠다.

“그녀는 제국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계집은 동쪽에서 왔지.”
“아주 특이한 마술을 부려서 우리와 요괴들을 감쪽같이 속이서 말이야!”

만약 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벽 너머에서 온 사람을 찢어발기려 할 것이다. 그때 중년인의 모습을 한 유령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음유시인이의 왕이여ㅡ. 부탁이 있습니다.”
“말하라.”
“그 계집은 은룡의 산맥. 그러니까 벽에서 중요한 물건을 훔쳐 이곳으로 도망쳤습니다.”

아델라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중요한 물건이라니? 설마?”
“그렇습니다. 그것은 겨울입니다!”
“하얀 돌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눈물입니다!”  

세 유령이 한꺼번에 말했고 아델라인이 눈을 크게 떴다.

“흰바우를 도둑맞았다?!”

아델라인의 말에 유령들이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주위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아델라인은 너무나도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벽 너머에서 이곳을 넘어왔다는 여자는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기에 유령과 요괴를 홀리고 거기에다 그들의 보물을 훔칠 수 있는가! 그것이 과연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일까? 아델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대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음유시인의 왕이여.”

흐음, 아델라인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이 가엾은 망자들을 바라보았다.

“많이 고통스러워 보이는군.”
“…벽으로부터 가까운 곳입니다.”
“솔직히 말해 놀라워. 은룡의 봉인을, 그것도 만월의 밤이 아닌 때 뚫고 나올 수 있는 유령이라니. 요괴왕이나 유령제 외엔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대들은 신화시대의 유령들인가?”

유령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혼 장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 아직 있었군?”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쪽이었습니다.”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이 나오자 아델라인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래. 그래서 그 부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인간 계집을 잡아주십시오.”
“팬드래건의 힘이라면 그깟 계집을 찾는 것은 시간 문제일터!”
“그 뒤 하늘 아버지의 눈물과 함께 우리에게 넘겨주십시오!”

그들은 그렇게 말한 뒤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델라인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대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하지만.”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유령들을 찬찬히 돌아봤다.

“나는 그대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눈물만을 줄 것이다.”

그러자 유령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아델라인을 베어낼 듯 무시무시한 손톱을 내보이며 소리쳤다.

“그년은 우리의 보물을 가져갔다!” “사람이 아닌 우리 망자의 유일한 보물을 훔쳐간 자!”:
“하물며 사람이 사람의 물건을 훔치더라도 커다란 벌이 내려지는데 어째서 음유시인의 왕은 그런 말을 하는가!”

세 요괴의 말에 아델라인이 웃으며 말했다.

“벽 너머로부터 온 사람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중년인의 모습을 한 유령이 소리쳤다. 잠자코 있던 아델라인이 으르렁거리며 칼을 휘둘렀다. 검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수십 가닥으로 나뉜 그것은 날카롭게 벼려져 유령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령들이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아델라인이 사납게 말했다.

“이 칼에 죽고 싶은가!”
“우리는 사라질 각오를 하고 은룡의 봉인을 뚫고 이곳에 왔다는 것을 음유시인의 왕은 잘 알고 있을 터!”

아델라인이 코웃음 쳤다.

“하! 망자여. 그대들의 고통이 대단하다는 것은 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대들은 하늘 아버지의 눈물을 되찾으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대들을 위해 연주했고 또 그대들의 보물도 찾아주겠다고 했다. 내가 건 조건은 벽 너머의 사람을 내가 보호하겠다는 것! 그거 하나뿐인데 어찌 그리 욕심을 부리는가!”

아델라인의 말에 유령들이 낮게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곧 손톱을 숨겼다. 그리고는 할 수 없다는 듯 아델라인을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음유시인의 왕!”
“좋아. 약속은 약속. 내 지금 당장 그대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눈물을 주겠다.”  

그 말에 유령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저 안에 있는 것은 동쪽에서 온 계집이구나!”

아델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잘못 짚었다. 나의 것을 주는 것뿐이야!”

그렇게 말한 아델라인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뒤져 조막만한 하얀 돌을 꺼낸 그는 밖으로 나와 말했다.

“그대들이 가지고 있던 흰바우의 크기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보단 크지 않았겠지! 자 받아라!”

아델라인이 돌을 던졌다. 마침 하늘의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들었고 그 달빛을 머금은 돌이 허공에서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오!”
“오오!”
“오오!”

유령들이 놀라 외쳤다. 소년의 모습을 한 유령이 얼른 나아가 돌을 받아들었다. 어린아이 주먹 만한 크기에 표면이 매끄러운 돌이었다. 달빛을 흡수하며 은은히 빛나는 그것을 본 유령들이 기뻐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음유시인이의 왕ㅡ! 우리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푸는 구나!
  진혼곡으로 우리의 깊은 슬픔. 따뜻하게 채워주더니!

  아름다운 마음씨로다!
  생면부지의 벽 너머의 이방인 위해!

  아름다운 마음씨로다!
  이방인에 고통 받는 우리 유령 위해!

  음유시인의 왕께서
  우리에게 흰바우를 베풀어주었다!”

  유령들은 아델라인에게 예를 차린 뒤 언덕을 떠났다. 그들이 사라지기 직전 아델라인은 설사 벽 너머의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유령들은 아델라인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노라고 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아델라인은 허리춤에 칼을 꼽고는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바이올린을 집어 들면서 몸을 일으킨 아델라인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플라타너스 나무를 조용히 응시했다. 오두막 안에서 본 은빛 여운. 모든 것이 숨을 죽인 듯 조용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델라인이 시선을 거뒀다. 찌르르르. 하는 풀벌레 소리가 그의 귀를 스쳤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타너스 나무 뒤편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Adelra-in
요괴왕

오두막 안은 따뜻했다. 아니 약간 덥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타리르크가 푸르릉거리며 아델라인을 반겼다. 나타리르크의 은색 갈기를 몇 번 쓸어준 아델라인은 소년의 곁에 앉았다. 소년은 곤히 자고 있었다. 오두막 안의 그림자를 모두 걷어낸 그는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벽난로에 두 개의 장작을 더 던지고, 불쏘시개로 헤집고, 램프의 기름을 확인했다. 잠이 왔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보고 있으려니까 창 밖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자 은빛 여운이 남는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델라인은 몸을 일으켰다. 허리춤의 칼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아델라인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휘황한 달에 언덕 아래 물결치는 갈대밭이 훤히 보였다. 달빛에 길게 늘어진 플라타너스 나무 그림자에 여린 실루엣이 보였다. 아델라인이 말했다.

“그대가 벽 너머로부터 온 사람인가?”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령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그 나무 뒤에서 모두 지켜봐서 알겠지만 당신을 대신해 내가 그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눈물을 줬으니 말이요.”

그래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델라인은 난감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플라타너스 나무 그림자에 숨어있던 실루엣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델라인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막 불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아델라인은 하마터면 물고 있던 파이프를 떨어뜨릴 뻔했다.

눈 같이 하얀 소녀였다. 그러나 알비노는 아니었다. 벽안의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아델라인에게 진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소녀가 말했다.

순간 아델라인은 소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언어였다. 지금의 사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아니 전설을 사실로 기억하는 저주받은 자들이라면 분명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고대의 말이었다.
아주 오래전 제국이 없던 시대에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였다. 지금의 말은 그때와 달리 다듬어지고 바뀌고 바뀌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신화시대의 언어로 소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음성이다. 아델라인이 대답했다.

“나는, 아니.” 《나는 음유시인입니다.》
《그것은 알고 있어요. 당신의 진혼곡은 너무도 아름다웠죠. 그런데 이곳의 음유시인들은 모두가 그런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다니나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인의 허리춤에 걸린 검은 날의 칼을 가리켰다. 아델라인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대부분의 음유시인들은 날붙이 하나 다룰 줄 모르지요.》
《은룡의 산맥 너머, 내가 원래 있었던 곳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랍니다. 당신은 참 신비롭군요.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아요. 유령의 경배를 받는 자라니, 게다가 당신은 하얀 돌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에게 줘버리는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슴 사이에서 작은 돌을 꺼냈다.

《이 하얀 돌이 무엇인지 당신은 알고 있나요?》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령들의 안식처지요.》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하늘 아버지의 눈물이 결정화 된 것으로 대부분 알고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아주 머나먼 신화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니까요. 그것보다 나는 당신의 존재가 더 궁금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벽을 넘을 수 있었습니까?》
《벽이라? 그것은 은룡의 산맥을 말하는 것입니까?》

소녀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곳 서쪽은 은룡의 산맥을 벽이라 부릅니다. 세상의 끝이라 여기고 있지요. 저 강대한 산맥은 인간의 발길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요괴와 유령이 우글거리기 때문에….》
《어째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룡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전설이 되었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은룡제(銀龍祭)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선 안돼요. 어째서 그의 크나큰 은혜를 잊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곳의 사람들은?》

소녀가 처음으로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아델라인은 말없이 그런 소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소녀의 파란 눈동자와 아델라인의 호박색 눈동자가 조용히 어우러졌다. 아델라인이 말했다.

《이곳 서쪽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4000년의 시간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게 하기에 충분했지요. 그리고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얀 돌을 대가로 그들과 약속을 했는데, 그들은 더 이상 당신을 쫓지 않을 것입니다.》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찌르르르. 하는 풀벌레 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소녀도 아델라인에게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후우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당신에겐 감사하고 있어요.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유령들에게 찢겨졌겠지요.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최후에요. 나는 죽을  힘을 다해 겨우 저곳을 넘어왔는데, 나는…. 나는….》

말이 쉽게 이어지지 않는 듯 그녀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어깨가 들썩였다. 그런 그녀의 행색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바지는 여기저기 찢겨져 속이 훤히 보였고, 가슴도 찢어진 옷으로 동여매 가린 것이었다. 삐쩍 마른 손발은 여기 저기 찢긴 상처로 가득했다. 아델라인은 가슴이 아파지는 걸 느꼈다. 아델라인은 다가갔다. 소녀는 아델라인에게 와락 안겨들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델라인은 그런 소녀를 안아주고는 가만히 토닥여줬다. 그러면서 괜찮다고 속삭여줬다. 동시에 아델라인의 눈에 아주 먼 과거의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소녀였다.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아름다운 은발을 가진 소녀였다. 소녀는 아델라인과 칼리오스테가 선물한 공과 인형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울고 있었다.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작고 여린 소녀. 아델라인은 아아. 하면서 달려가 꼭 안아줬다. 그리고 속삭였다. 사무치는 그리움아. 나의 딸아. 걱정하지 말아라.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나 눈앞의 드레스의 소녀는 곧 사라졌다. 그의 품안에는 흐느끼는 동쪽의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어처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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