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Angel of the night <4>

2006.03.24 01:0003.24

"검은 옷의 남자?"

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배트맨이 돌아다니는 거야? 난 배트맨 싫던데. 기왕이면 섀도우 쪽이 좋아."

"섀도우는 배드 가이 타입이잖아. 남자 취향이 안 좋은데."

"흥, 원래 남자란 거친 이면에 보이는 부드러움이 멋진 거라구요."

팔짱을 낀 채 소영과 현호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고 있던 것 같던 우현이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래서 그 검은 옷의 남자는 어디로 갔죠?"

"모르겠어요. 정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으니까. 정말로 그 정신병자 살인마를 죽일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협박만 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니, 말을 하면서도 여진은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 남자는 아마도 여유가 있었으면 분명 그 살인마를 죽였을 것이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죽인다는 말에는 어떠한 과장도 없었다. 순수하게 사실을 말하는 그런 어조였다.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 좀 해 줄 수 있나요? 지난번에 경중필의 생김새는 세세하게 잘 기억하던데."

현호가 빙긋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여진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우현의 재킷이 살짝 앞으로 흘러내린다.

"죄송해요. 기억이 잘 안 나요. 어두컴컴한 데다가 저도 여러 대 맞고서 반쯤 기절해 있던 상태라서요."

"맞은 것치고는 멀쩡한데, 뭘. 피도 하나 안 나고. 그 미친놈이 그렇게 살살 때렸을 리가 없는데. 전에 다른 여자들은 안 맞았다면 모를까 맞았으면 전부 다 얼굴이 반쯤 박살이......"

"프리티."

우현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하자 소영이 움찔하고는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알았어, 알았어."

여진은 우현과 소영을 잠시 번갈아 보다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 프리티라는 거 별명이에요?"

"어, 내 별명이야. 난 예쁘니까."

여진은 5초 정도 멍하니 소영을 응시했다. 소영은 그저 뻔뻔하게 웃을 뿐이었다. 갈색 선글라스 아래로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짱만 끼고 서 있고, 현호 역시 빙그레 웃고 있었다.

"자, 그런 세세한 건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어쨌든 검은 옷의 남자가 나타나서 구해줬다 이거지. 정체는 모르고. 거기다가 우리의 사이코 닥터 경은 난자가 필요하다고 했다라. 직접 애를 만들 셈인가."

"뱀파이어의 죽은 정자로? 말도 안 됩니다."

우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 끽끽거리는 소리가 확연해졌다. 여진은 흠칫하며 한 손으로 귀를 문질렀다. 현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네 목소리가 불편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야. 조금 조심해야겠어."

"죄송합니다."

우현은 곧장 평소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거렸다. 여진은 귀를 문지르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현호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빙긋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경계심이 들어서 여진은 움찔 재킷을 움켜쥐었다.

"조여진 씨, 지금 휴학생이라고 했죠?"

"네."

"나이는 몇 살이지?"

"스물 넷인데요."

"음, 스물 넷, 좋은 나이지."

CF에서 들어본 듯한 대사에 여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현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는 일이 달리 없다면 말이지, 우리 과에서 일을 하면 어떻겠어요? 어차피 우리의 살인마 닥터 경은 여진 씨를 찍고서 쫓아다니는 것 같은데, 여기 있으면 우리도 보호하기가 좋고. 이 두 사람을 여진 씨 경호에만 붙여놓으면 일손이 모자라거든. 우리 과는 이렇게 세 명이 전부라서."

"닥터 민도 있잖아요."

소영이 툭 끼어 들자 현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닥터는 정확하게는 우리 과 소속이 아니잖아. 수사를 내보낼 수도 없고."

그가 다시 여진을 쳐다보았다. 여진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더러 여기 취직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이해가 빠르네, 여진 씨. 어쨌든 우린 공무원이고 월급도 괜찮게 나오거든. 어때요? 돈 벌기도 쉽고, 적당히 돈 번 다음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도 돼요. 괜찮지 않아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여진은 눈을 깜박거리며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얼굴이다.

"하지만 저기, 여기 경찰청이잖아요. 경찰은 시험 같은 거 보고 들어오는 거 아니던가요? 게다가 공무원은 당연히 시험을 봐야 되잖아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게다가 공식적으로 전 학생인데......"

"어머, 어머, 그렇게 말 더듬고 그럴 거 없어. 우린 그런 거 신경 안 쓰거든. 여긴 특수범죄부라고. 경찰청에서도 특별한 곳이지."

소영이 방긋 웃으며 팔꿈치로 그녀를 쿡쿡 찔렀다. 여진은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정말이라니까. 우린 일반적인 경찰 부서랑은 다르게 돌아가. 걱정할 거 없어. 게다가 전부 다 특채거든."

그녀가 깔깔거렸다. 여진은 눈을 굴리고 일어났다. 몸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린다.

"저기 사정 청취 끝난 거면 저 가도 되죠?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

"아, 물론. 그런데 취직 제의는 진심이니까 생각해 보고 괜찮을 것 같으면 언제든 와요."

현호는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우현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우현이 앞장서서 사무실을 나간다. 여진은 따라 나가다가 문득 현호를 돌아보았다.

"혹시 샤크라는 게 과장님 별명인가요?"

"별로 근사하진 않죠?"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여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죠스보다는 낫네요."



3.

'자, 어서 죽여.'

칼을 건네던 남자. 덥수룩한 수염에 길고 헝클어진 머리, 지저분하고 구겨진 면 재킷.

'어서 죽이라고!'

못 해요, 못 해요, 못 해요. 난 그런 거 못 해요!

'이런 쓸모 없는 년 같으니. 저 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 봐!'

그런 거 난 몰라요, 모른단 말이에요.

남자가 고개를 젓는다.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번쩍이는 눈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쓰레기 같은 년. 너 같은 건 살아있을 필요도 없어. 네가 죽었어야 했는데.'

강철로 만든 것처럼 번쩍거리는 긴 손톱으로 남자가 여자를 찢어 죽인다. 갈가리 찢긴 살점, 비린내를 풍기는 피. 여자, 남자, 아이, 노인, 전부 다 찢어 죽인다. 바닥에서는 살점이 꿈틀거리고 피는 개울처럼 아스팔트 굴곡을 따라 흐르다가 굳어버린다.

온통 피를 뒤집어 쓴 남자가 돌아본다. 머리에도 얼굴에도 옷에도 온통 핏자국뿐이다. 구역질이 날 정도의 피냄새가 사방을 뒤덮고 있다. 남자가 손을 불쑥 내민다. 손도, 팔도 피투성이다. 냄새. 지독한 냄새.

'봐라. 이걸 봐! 어떻게 이걸 잊을 수가 있지? 어떻게 이 원한을 잊을 수 있냐고!'

귀가 찢어질 정도로 격렬한 고함소리, 분노, 증오. 마치 등뒤에서 타오르는 것 같은 시커먼 원한의 구름. 피눈물.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은 바싹 마른 해파리처럼 투명하고 조그만......
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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