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Angel of the night <03>

2006.03.10 12:4203.10

2.

"어서 오세요, 맥도날드입니다."

저녁 열 시. 아직도 일이 끝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다는 생각에 여진은 한숨을 삼켰다. 온몸에서 산화된 기름 냄새가 풀풀 풍긴다. 전에는 일이 끝나고 햄버거가 남으면 가져가서 먹기도 했지만 이제는 꼴도 보기 싫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제대로 의사가 되어 돈을 벌면 햄버거 같은 건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다. 평생.

손님이 들어오는데도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전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손님이 뜸한 시간인 탓에 다들 구석에 모여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니저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나이 스물이 넘은 여진만 그들과 따로 앉아 문고본 로맨스 소설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아직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그녀를 달가이 맞아줄 리 없었다. 휴학했다고 해도 의대생이라는 신분이니 이런 곳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게 배부른 짓이라고들 생각할 테지. 그녀 역시 그런 오해를 풀어주고픈 생각은 없었다. 배부른 짓을 한다고 보이는 편이 가난해서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여겨지는 것보다 낫다.

"뭘로 주문하시겠어요?"

자동적으로 말을 하고서야 여진은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여자를 알아보았다. 가죽 재킷에 짧은 가죽 치마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은 여자는 며칠 전 경찰청에서 만난 그 여자였다. 오늘도 여전히 선글라스는 끼고 있다.

"이런 데서 아르바이트 해? 신기하네. 의대생이라더니."

여진은 인상을 찌푸리고 여자를 보았다. 이름을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기억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그 날의 피냄새 때문에 이틀이나 물 말고는 아무 것도 못 먹을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손님. 뭘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아, 응. 상하이 치킨버거 세 개랑 콜라 둘, 우유 하나, 프렌치 프라이 두 개, 애플파이 하나 포장해 줘."

만들어놓은 햄버거가 모자란 것을 보고 여진은 안쪽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향해 나직하게 주문을 되풀이했다. 아이들이 투덜거리며 일어나서는 주방으로 나온다. 카운터로 돌아온 다음 그녀는 가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10분 정도 걸리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해. 어차피 아가씨 얼굴도 보러 온 거니까."

반말에 아가씨라는 말까지. 이런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새파란 고교생 같은 여자아이한테 이런 소릴 듣고 있자니 기분이 영 아니었다. 여진은 고개만 끄덕이고서 돌아서서 프렌치 프라이 튀김기 앞으로 다가가 재빨리 길쭉한 감자조각들을 포장지에 담았다. 햄버거를 만드는 아이들 역시 성의 없이 재빨리 만들어서 보온기에 올려놓은 다음 안으로 사라진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자는 봉투를 받아들고서 가는 대신 카운터에 턱을 괴고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그냥. 샤크가 한 번 보고 오라고 해서."

샤크? 여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그저 생글생글 웃을 뿐이다. 고개를 흔들고서 그녀는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손님. 가게 정리할 시간이 다 되어 가서요."

"바깥에 보니까 11시까지라고 써 있던데. 그럼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잖아. 저기 있잖아, 나 좀 잠깐만 볼래?"

여진이 몸을 돌리자 여자는 어느 새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

"아무 얘기나 해 봐. 어서."

"네?"

여진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여자는 5초쯤 그녀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안 통하네."

"네?"

"진짜 안 통한다고. 내 매력이."

여진은 눈을 굴리고 싶은 것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어머, 농담이 아니야. 난 특수 4과 정소영이라고. 특수부 사람들은 전부 다 날 알아. 왜인지 알아?"

"글쎄요."

무례해서? 그렇게 덧붙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여진은 주위를 정돈했다. 소영은 여전히 턱을 괸 채 토라진 것처럼 입술을 비죽거리고 있었다.

"농담 아니야. 네가 이상한 거라고. 덱스가 아무 이야기도 안 했어?"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죄송한데요 손님, 제가 지금 할 일이 좀 있거든요."

"어머, 종업원은 손님한테 친절하게 대해야지. 막 쫓아보내려고 하네? 여기 매니저 없나?"

서서히 성질이 나는 것을 꾹 억누른 채 여진은 소영을 응시했다. 여진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보자 소영이 다시금 입술을 비죽거렸다.

"뭐 대단한 이야기 하려는 것도 아니잖아. 어쨌든 사무실에 한 번 놀러오래, 샤크가. 과장님 말이야."

그녀가 햄버거가 든 봉투를 들고는 홱 돌아서서 8cm는 될 듯한 하이힐을 따각거리며 가게를 나갔다. 근처에 있던 아르바이트생 한 명이 그녀의 뒤쪽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짱이네. 꽤 노는 모양인데, 아는 사이에요?"

여진은 어깨만 으쓱였다. 아르바이트생은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안쪽으로 사라졌다. 여진은 구석에 앉아서 읽다 만 할리퀸을 들어올리다가 문득 주머니 속에서 명함을 꺼냈다.

'서울경찰청 특수범죄부 4과 박우현 경감'

그녀를 태워다 주고는 우현이 건넨 명함이었다. 험악한 생김새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는 상당히 친절하게 그런 정신병자는 다시 그 동네에 나타나지 않을 거고 금방 잡을 거라며 안심시켜 주었다. 솔직히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놀러오라니, 경찰청에? 웃기는 일이었다. 범죄 목격자 정도인데 뭐 그리 친하게 지낼 일이 있다고? 게다가 저 여자는 정말로 이상하다.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명함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서 여진은 책의 남은 다섯 페이지를 마저 읽었다. 집에 가다가 헌책방에 들러야 할 모양이었다. 오늘은 하려나? 부디 했으면 좋겠는데. 담배도 포기하고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취미가 바로 중고 서점에서 할리퀸 로맨스를 사 보는 것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책을 내려놓고 다시 일어섰다. 튀김기에서 기름 냄새가 매캐하게 풍긴다.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면서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맥도날드입니다."



여진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굳게 닫힌 헌책방의 셔터를 걷어찼다.

"빌어먹을 가게 같으니."

뭐라고 할 사람도 아무도 없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이 망할 책방은 제대로 문 여는 날이 한 달에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분명히 가게 간판에는 밤 9시부터 새벽 5시까지라고 써 있는데.

게다가 불친절하기는 또 얼마나 불친절한지! 무뚝뚝한 젊은 주인은 그녀가 수십 권의 할리퀸을 내밀어도 뚱하니 봉투에 넣고서 가격도 얼마인지 말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돈을 낼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 한동안은 벙어리인가 생각했으나 핸드폰을 받는 걸 본 이래로는 그저 성격이 나쁜 거라고 결론지었다.

"빌어먹을, 젠장, 젠장."

다시 한 번 셔터를 걷어찬 다음에야 여진은 발로 찬 부분이 조금 우그러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음을 억눌렀다. 설마 이런 낡아빠진 가게에 CCTV는 없겠지.

돌아서서 그녀는 차가운 바람을 뚫고 걷기 시작했다. 맥도날드와 이 책방, 그리고 그녀의 집은 완전히 반대방향이었다. 3월인 주제에 날씨는 뼈를 엘 듯 추웠다. 재킷 위로 팔을 문지르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 싫다, 정말. 저번에 정신병자를 만난 것도 이렇게 추운 날이었는데.
그래도 여기는 큰길이니까 설마 그런 걸 또 마주치지는 않겠지. 앞으론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절대 근처에 가지 않을 거야. 그냥 얼른 집에 가서 이불 속에 파묻혀서 책이나 봐야지. 코코아가 남아있다면 한 잔쯤 마시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바쁘게 걸어가고 있는 그녀의 귓가로 바람이 쌩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길거리에는 오늘도 역시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주정뱅이나 홈리스조차 하나 없다. 아무리 새벽 1시라지만 너무나도 적막한 길거리였다. 여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소한 큰길이라서 가로등은 밝다.

"돈이 있으면 택시를 탈 텐데."

도로를 쌩 지나가는 택시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장 픽 웃고 말았다. 돈이 있다면 애당초 이 시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지도 않았겠지.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그녀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빨리 걸을수록 더 빨리 집에 도착한다. 빨리 집에 도착할 수록 더 빨리 따뜻해질 거고.

나직하게 아바의 노래를 주문처럼 읊조리며 그녀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얼음장같은 바람에 뺨에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3월인데 아직도 이렇게 추우면 도대체 언제 따뜻해지는 거지? 물론 때가 되면 더워서 죽겠다고 말하겠지만.

"And finally it seems my lonely days go through, I've been waiting for you......(그리고 마침내 외로운 날이 끝난 것 같네요. 당신을 기다려왔어요)"

나른한 발라드 곡을 랩 수준으로 읊으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렸다니 참으로 기쁘군."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거친 손이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내리꽂히듯 바닥에 넘어진 여진은 재빨리 몸을 굴려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림자가 진 얼굴은......

"아, 젠장. 왜 어디 가서 차에 치여 죽어버리지도 않았데?"

정신병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젊은 여자애가 필요해. 몇 살이지? 스물 둘이나 셋?"

"알아서 뭐 하려고, 이 정신병자야!"

들고 있던 가방을 남자의 얼굴을 향해 집어던진 다음 여진은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적당한 때 나타나 줄 경찰도 없을 것이다. 핸드폰은 가방 안에 들어있고, 젠장.

"난자가 필요해. 아이가 필요하거든."

아, 미쳐버리겠네. 여진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욕설을 삼켰다.

"난자 같은 건 산부인과에 가서 알아 봐, 이 자식아!"

갑자기 멈춰선 다음 바로 뒤에 달려오던 남자 쪽으로 몸을 홱 돌리며 팔꿈치로 그의 명치 부근을 가격하자 남자가 헐떡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장 그녀는 그의 정강이를 찬 다음 다시 팔꿈치로 쇄골 부근을 내리찍었다. 남자의 몸이 무너지는가 싶었으나 다시 그녀가 왼팔 팔꿈치를 날리려는 순간 남자는 마치 마법처럼 2미터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빌어먹을 계집애, 넌 뭔가 이상해."

명치 부근을 한 손으로 문지르며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여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이런 정신병자를 만나면 미친 듯이 도망가는 게 정상이지 이렇게 싸우는 건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튼튼한 편이었고, 체육 과목에서는 언제나 만점이었다. 젠장, 중고교 6년을 통틀어 그녀보다 체육을 잘 하는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저런 정신병자를 적당히 패고서 도망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아닌가?

눈 깜박할 사이에 남자는 그녀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양 팔목을 붙잡았고 다른 손은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부술 것처럼 조인다. 여진은 헐떡거리며 고개를 흔들려고 노력했지만 남자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로 그의 다리를 걷어차고 팔을 흔들어댔지만 역시나 남자는 꼼짝도 않는다. 이상할 정도로.

"날 똑바로 봐. 네가 필요해. 젊은 여자애의 몸이 필요하거든. 이번엔 다른 방법을 쓸 거야. 자, 어서 날 봐!"

남자의 붉은 눈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서서히 치미는 공포에 둘러싸인 채 여진은 눈을 깜박였다. 머리 속이 어쩐지 몽롱해지는 느낌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귀를 맴돈다.

"넌 이제부터 내 말만 듣고 내 명령만 따른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다른 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내 목소리만 들리고 나만 보인다. 내가 시키는 모든 걸 하게 될 거야. 지금 이 순간부터. 알겠느냐?"

여진은 다시 눈을 깜박였다. 붉은 눈동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찬바람. 휘파람 소리처럼 거리를 울리는 날카로운 바람.

공포를 짓누르고 치솟아 오르는 분노.

"이 미친 자식아, 그게 통할 것 같아?"

양팔을 힘껏 비틀자 남자의 손이 미끄러진다. 남자의 눈에 놀란 표정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주먹으로 그의 명치를 다시금 힘껏 쳤다. 남자가 그녀의 턱을 놓치고 두 걸음 비틀비틀 물러났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여자는 남자에 비해 절대적으로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칠 때 팔꿈치라든지 무릎 같은 단단한 부분으로 상대의 약한 부분을 쳐야 한다. 그게 그녀가 호신술 교양 강의를 들을 때 배운 것이었다. 물론 그 때의 그 강사는 수업이 진짜로 유용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리라. 여진은 왼쪽 다리를 축으로 해서 반 바퀴를 돌며 오른쪽 다리로 남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남자가 다시 두어 걸음 물러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길어지는 게 보인다.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진짜다. 송곳니가 길어졌다. 여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야, 도대체!"

남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여진은 재빨리 옆으로 피한 다음 보도 끝까지 달려갔다. 커다란 사거리에는 신호등이 전부 그냥 깜박거리고 있다. 도로에는 차 한 대 없다.

"뭐가 잘못된 거지? 넌 도대체 뭐야?"

내가 어떻게 알아? 여진은 필사적으로 도로를 달렸다. 남자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그녀의 바로 뒤까지 달려오더니 긴 머리를 확 붙잡았다. 머리가 한꺼번에 뽑히는 듯한 느낌에 비명을 지르며 그녀는 넘어졌다. 저번에도 이러더니! 이 망할 머리, 내일 당장 잘라버릴 거야.

지금 살아남는다면.

"넌 도대체 뭐지?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미치광이, 정신병자, 왕자병! 속으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여진은 머리를 흔들었다. 주머니에 가위나 칼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남자가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고서 홱 잡아당긴다. 고개가 뒤로 꺾이자 그녀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려요!"

"난자가 필요해. 신선한 게 필요하다고. 네 몸이 필요해."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쫙 끼친다. 여진이 고개를 흔들며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꺼져, 꺼져!"

손톱을 세우고 얼굴을 할퀴어 보았으나 남자가 우악스럽게 주먹으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후려치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난소만 빼 갈까, 아니면 통째로 들고 갈까? 아니면 피는 빨아먹고 내장만 꺼내서......"

눈을 뜨자 남자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몸 아래로 딱딱한 아스팔트가 느껴진다. 눈앞은 여전히 반쯤 부옇다. 여진은 눈을 깜박였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재킷을 벌리고 옷을 찢었다. 천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서 남자를 밀어내려 했다.

"가만히 있어!"

남자가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눌렀다. 숨이 막히는 것보다도 목이 마치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녀가 발버둥을 쳤다.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건데.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이냐고!

"알포 주제에 발버둥을 쳐봐야 소용없어."

남자의 손이 드러난 배를 어루만지다가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손만이 그녀의 머리 속을 채웠다. 목이 아파, 숨이 막혀, 차가워, 추워.

죽고 싶지 않아.

"여기인가."

팬티선 부근을 손으로 어루만지던 남자가 힘을 주었다. 목과 함께 아랫배가 찌를 듯 아프자 그녀가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숨조차 쉴 수 없는 상황에서 목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눈앞이 하얗다가 까매진다. 아픔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너는 멍청이야.'

누군가의 목소리. 낮고 거칠고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

'이런 것 하나도 죽이지 못하다니.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하는 거야, 바로 이렇게!'

'알포 주제에 싸우려고 하네. 어머, 웃겨.'

여자의 목소리. 웃음소리. 분노 가득한 거친 음성. 그리고 비명. 피.

아파, 아파, 아파. 날 두고 가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더 잘 할게요. 잘 할 수 있어요!

'넌 하나 쓸모가 없어.'

피투성이가 된 지저분한 남자가 그녀를 노려본다.

'왜 너 같은 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끔찍한 실수였어. 네가 죽었어야 했는데.'

네가 죽었어야 했는데.

아파.

죽고 싶지 않아.

"너......"

갑자기 그녀를 누르고 있던 무게가 사라졌다. 목을 조이던 손도, 아랫배를 누르던 날카로운 것도. 컥컥거리며 그녀는 몸을 옆으로 굴리고서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타는 듯 아픈 폐로 공기가 들어간다.

"이 자식!"

정신병자가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는 것이 들렸지만 아직 그쪽을 볼 정신은 없었다. 여진은 몸을 구부린 채 한참이나 헉헉대며 몸을 떨고 있었다.

아픈 것은 둘째치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게 그녀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분노에 찬 남자의 목소리, 죽어버리라는 저주 같은 외침. 공포, 도망쳐야 한다는 다급함. 도대체 언제 어디서 그런 걸 느낀 걸까?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때 본 영화 장면이었나? 수십 명이 그녀를 둘러싸고 비웃고 놀려대는 듯한 그런 장면.

아냐,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었어.

"전하의 남창 주제에!"

"시끄러워, 개새끼야. 너처럼 취미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진 않아."

말의 내용과는 달리 너무나도 감미로운 목소리에 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목과 머리가 전부 다 아프고 아랫배 역시 욱신거렸으나 아까 전보다는 좀 나았다. 찢어진 옷을 추스르며 그녀는 정신병자 쪽을 보았다.

정신병자는 웬 검은 옷의 남자와 싸우고 있었다. 싸움은 대단히 일방적이었다. 검은 옷의 남자가 정신병자를 정말로 '개 패듯' 패고 있었다. 정신병자 역시 맞받아 치려고 하고 있었지만 검은 옷의 남자가 20cm는 큰 데다가 한 대 칠 때마다 마치 영화 특수 촬영을 보는 것처럼 몇 미터씩 몸이 날아갔다.

여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서 두 사람을 보았다. 마침내 검은 옷의 남자가 바닥에 걸레뭉치처럼 늘어져 있는 정신병자를 들어올렸다.

"저 여자를 갖고서 무슨 짓을 하려던 거지?"

허공에 두 발이 들린 채 정신병자는 멱살을 쥔 남자의 손을 내리치며 몸을 뒤틀고 소리를 질렀다.

"나한테 손을 대면 전하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거야!"

"아, 전하라? 그거 참 대단한 협박이군. 그래서 내가 무서워 할 거라고 생각해?"

"전하께선 더 이상 너 같은 남창 자식을 아끼지 않으시지. 감히 나한테 손 댈 수 없을걸? 전하께서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셔도 넌......"

아무렇지 않게 검은 옷의 남자는 한 손으로 정신병자의 몸을 그대로 들어올린 채 남자의 입에 주먹을 그대로 꽂아 넣었다. 이가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고 피가 흘러내린다. 보통의 피보다 훨씬 비릿한 냄새가 세찬 바람을 타고 그녀에게까지 와 닿았다.

오감이 남보다 예민하다는 것은 이럴 때는 조금도 좋은 일이 아니다. 만약 학교에서 실습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먹은 것을 다 토했으리라. 여진은 멍하니 옷자락만 붙잡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난 하고 싶은 건 해. 하고 싶지 않은 건 안 하고. 네 놈을 여기서 죽이는 것도 마음만 내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검은 옷의 남자와 여진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한참 멀지만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여자의 목소리에 여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쪽이야. 아이 참, 가까이 좀 있으라고 했잖아. 늦었으면 다 네 탓이야, 덱스!"

그 고교생 같은 경찰청 여자의 목소리다. 여진은 조금 더 몸을 일으키다가 아랫배가 뜨끔거리는 느낌에 몸을 내려다보았다. 가로로 길게 찢어진 것처럼 핏자국이 있다.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만지자 피가 손가락에 묻었다. 하지만 상처는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두 남자 쪽을 보았다. 검은 옷의 남자는 발소리가 들리는 쪽을 잠시 보고 있다가 손에서 힘을 뺐다. 정신병자가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남자가 웃었다.

"조금 더 살 수 있을 모양이군."

"더러운 오카마 자식."

여진은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욕인 모양이다. 하지만 검은 옷의 남자는 낮게 웃을 뿐이었다.

"그건 오히려 전하 쪽이지. 그 분께 그렇게 말해 봐, 기뻐할 테니까. 가장 좋아하는 자세거든."

"감히 전하께!"

정신병자가 고함을 지르는 순간 발소리가 더더욱 가까워진다. 꽤 빨랐다. 보통 사람치고는 상당히 빠르다. 여진은 검은 옷을 보았다. 검은 옷의 남자가 다시금 발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본 다음 고개를 흔들었다.

"다음에 만나면 죽인다."

남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남자의 모습은 없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남자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정신병자가 신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그가 지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남자가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더러운 오카마 놈, 감히 제깟 게......"

그가 갑자기 여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움찔 뒤로 물러났다.

"넌 도대체......"

발소리가 더 가까워지자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물러나 사라졌다. 여진은 눈을 깜박였다. 최소한 이 남자는 멀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아까 그 남자처럼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맙소사. 그녀는 멍하니 앉아서 숨만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다. 정신병자, 또 다른 남자, 그리고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

"재주도 좋으시네요. 타이밍에 딱 맞게 나타나시고."

여진은 헐떡거리며 옆으로 다가온 우현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우현이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리며 재킷을 벗어서 내밀었다. 여진은 재킷을 받아 팔을 끼우고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섰다.

"다친 데는?"

"어, 괜찮은 것 같아요. 몇 대 맞긴 했지만."

그녀는 손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문질러 보았다. 다행히 더 이상 욱신거리지 않는다. 목은 아직 아팠지만 숨도 못 쉴 정도는 아니었다. 최소한 목소리도 멀쩡하게 나오니까.

"아, 정말. 너무 빠르잖아! 나만 두고 가면 어떡해?"

저쪽에서 아까 저녁에 햄버거를 사갔던 여자, 소영이 헐떡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뛴다기보다는 거의 걸어온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았다. 우현은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쪽으로 갔죠?"

"정신병자요? 저쪽이요. 그런데 너무 빨리 가서 아마 지금 가도 잡지는 못할 걸요."

여진은 정신병자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우현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비틀거리는 그녀에게 한 팔을 내밀었다.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했죠?"

"글쎄요. 난자가 필요하다던데요."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몸이 연신 떨리는 걸 깨닫고 여진은 자신이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능한 한 빨리 화장실에도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쩍 마른 몸과는 달리 돌처럼 단단한 우현의 팔을 잡고서 그녀는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잠깐 그녀가 걷는 걸 본 다음 우현이 팔을 빼고서 등을 돌렸다.

"업혀요."

"네?"

"업히라고. 어차피 경찰청에 가야 되고, 차는 한참 걸어가야 있으니까."

여진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남자에게 업히는 건 평생 처음이었지만 이대로 걸어가는 것보다는 업혀 가는 편이 차라리 덜 흉할 것 같았다. 찢어진 옷도 가려질 거고.

우현은 176cm나 되는 여자를 업었다기보다는 그저 등에 매미가 한 마리 달라붙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다. 티셔츠 한 장 사이로 느껴지는 그의 등 역시 울퉁불퉁하고 단단하다. 보기보다 대단한 근육질이라고 생각하며 여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경찰이라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뭐야, 벌써 도망갔어? 못 잡았어? 다쳤어, 얘는?"

소영이 간신히 옆으로 비틀거리며 오더니 숨을 할딱거리며 물었다. 우현은 대답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비칠거리며 따라오는 소영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업혀야 되는 건 여진 자신이 아니라 소영인 것처럼 느껴졌으나, 자리를 양보할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는 않았다. 어쨌든 피해자는 그녀니까.

"그런데 그 자식 왜 도망간 거야? 솔직히 오빠를 보고 도망갔을 리는 없잖아. 어떻게 된 거야? 이 여자애 왜 또 살았지? 이번엔 정말로 죽을 줄 알았다구."

소영이 뒤에서 따라오며 조잘거린다. 우현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고 입술을 비죽거렸다.

"사실이잖아. 언제 그 자식이 우릴 무서워했나? 샤크 정도면 모를까. 그런데 이 여자애는 그 자식을 두 번이나 만나고도 살아남았다고. 임산부가 아니라서 그런가? 그렇다면 왜 쫓아왔지?"

"나중에 알아 봐."

"나중에 알아보려고 해도 얘한테는 내 힘이 먹히질 않는단 말이야. 이상해. 이해할 수가 없어. 샤크는 놔두라고만 그러고. 그러면서 감시는 왜 시킨대?"

"이런 일이 일어날 게 분명했으니까. 입 다물고 좀 조용히 따라 와."

뒤에서 소영이 코웃음을 친다. 여진은 흔들거리는 우현의 등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걸을 때마다 몸이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넓은 등은 따스한 체온을 뿜어낸다. 하나, 둘, 하나, 둘. 흔들흔들흔들.

아주 오래 전에.

똑같은 느낌.

'네가 죽었어야 했는데.'

목을 조르던 손. 업어주던 등.

어둠.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94 장편 Adelra-in - 13 번째 폴리스 ...... <2> 어처구니 2006.07.11 0
193 장편 Adelra-in - 13 번째 폴리스 ...... <1> 어처구니 2006.07.11 0
192 중편 당신이 사는 섬 3부 김영욱 2006.04.21 0
191 장편 Angel of the night <6>2 김지원 2006.03.24 0
190 장편 Angel of the night <5> 김지원 2006.03.24 0
189 장편 Angel of the night <4> 김지원 2006.03.24 0
장편 Angel of the night <03> 김지원 2006.03.10 0
187 장편 문 나이트 스토리 - 200년 전, 문-포레스트 근처의 록울 마을(1) - 나길글길 2006.03.08 0
186 장편 문 나이트 스토리 - 은둔한 영웅들의 영웅담 - 나길글길 2006.03.08 0
185 장편 Angel of the night <02> 김지원 2006.03.04 0
184 장편 Angel of the night <01>2 김지원 2006.03.04 0
183 중편 당신이 사는 섬-2부 김영욱 2006.02.16 0
182 중편 Hidden verses; 공유하지 못하는 음악 (상) mori 2006.02.11 0
181 중편 별을 담은 상자-- 제2부 긴 침묵(2) 달의묵념 2006.01.20 0
180 중편 별을 담은 상자 -제1부 긴 침묵 달의묵념 2006.01.20 0
179 중편 생애 첫 NO판타지! 별을 담은 상자 - 프롤로그- 달의묵념 2006.01.20 0
178 중편 당신이 사는 섬-1부 김영욱 2006.01.20 0
177 장편 달 그림자 12 향단이 2006.01.13 0
176 장편 카이진 블레이드 - 프롤로그 2. 괴력의 미소녀 카디앙 2005.12.27 0
175 장편 카이진 블레이드 - 프롤로그 1. 마법사 그리고 상인 카디앙 2005.12.2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