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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의 촛불이 흔들거렸다. 집필에 열중하느라 삐걱거리며 괴성을 지르는 낡은 창문이 열려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것도 몰랐다. 백색에 가까운 회색 로브를 걸친 은발의 엘프는 두 팔로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움직임이 힘겨워 보였다. 추운 듯 로브 앞자락을 꼭 여미며 걸어가서 창문을 닫았다. 때는 수확의 마지막 절기가 끝나가는 때라서 바람이 차가웠다. 문-포레스트Moon-Forest에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있었다.

  일어선 김에 책상 구석에 놓은 파이프를 집어 불을 댕기고 한 모금 빨면서 방안을 서성였다. 은발 엘프는 자신의 여행기를 모든 종족이 읽을 수 있도록 공용어로 쓰고 있다. 문엘프Moon Elf일족으로서 젊었을 적에는 영웅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기이한 말투 때문에 싫어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종족을 가리지 않고 친구들이 있을 정도로 주위에는 인망이 깊기도 했다. 실내가 쌀쌀해진 것 같아서 방 중앙에 놓인 화로에 불의 정령을 불러들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귀여운 정령들이 화로 위에서 춤을 추면서 방을 덥히기 시작했다.

  다시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여행담에서 매우 인상 깊었다 할 수 있는 추억거리로 희미하게 남아있는 부분을 쓰고 있다. 마법사 주제에 기억력이 좋지 못해서 오랜 시간 더듬어 올라가야한다. 기덴 캐니언Giden Canyon에서 놀 로드Gnoll Lord의 잔악한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망, 필사의 싸움, 불리한 상황에서 지혜로운 반격, 화끈했던 역전극 부분을 쓰고 있다. 읽는 사람이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착각을 느낄 정도로 신명나게 쓰고 싶었기에 다음에 이어질 적절한 문장을 한참동안 고민했다. 문 밖에서 나는 소리도 늦가을 바람이 불이나 쬐고 가고 싶다고 두드리는 소리로 착각했다.

  특별히 기억나는 동료들이 여섯 명 있는데, 바람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니 그들이 생각났다. 검을 잡은 황금팔의 가장 명예로운 기사 엘리자베스, 뛰어난 대장장이이자 난쟁이 전사 액슬란트, 어둠에 담긴 붉은 손의 충실한 성직자 볼벤스, 어비스에 녹아드는 그림자 닉, 황금숲Gold-Forest의 숙녀.금발 궁사 디아나, 어두운 고향을 등진 레인저 아키텍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옛날 기억을 떠올리다보니 젊은 시절을 함께한 그들이 그리워졌다.

  세월은 유수와도 같았고, 그들과도 작별한 순간이 찾아와서 지금은 오두막으로 찾아올 친구는 반으로 줄어서 셋 밖에 없다. 날이 추워질 때 모두가 따뜻한 화롯가에 앉아서 데운 치즈와 우유를 마시며 지난 일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때를 남겨두고 싶었다. 지금 기록하는 여행기도 세상 넓은 줄 모르고 날뛰었던 나이 든 엘프의 추억담이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한참 쓰다가보면 자세한 광경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럴 때는 아쉬운 대로 오우거의 뇌라도 빌리고 싶었다. 옛 친구의 방문은 이때 이루어졌다.

  엘프가 바람이 문 두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누군가가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손님의 표현이었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어둠 속에 작달막한 전사가 서 있었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칼과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작지만 강건한 육체를 가지고 갑옷을 걸쳤어야 할 몸에 로브가 걸쳐져 있는 것을 보니 서글퍼졌다. 그 뒤로 어둠이 움직였다. 놀라 올려다보니, 5피트가 넘고, 중장갑을 걸쳤고 거대한 핼버드를 짊어진 거인이 서있었다. 엘프는 찾아올 친구 세 명 중에서 두 명이 온 것을 보고 반갑게 맞이하며 그들을 끌어안았다.

  잠시 회포를 나누고 그들을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작달막한 전사는 드워프이고, 액슬란트라고 한다. 검은 갑옷을 걸친 거인은 캠비온이며, 이름을 볼벤스라고 한다. 폴테버크의 추종자이며, 성직자이다.
그들은 화로 가에 둘러앉았다. 집안에는 볼벤스에게 맞는 의자가 없어서 전용 그루터기를 가져와 앉았다. 그의 거대한 엉덩이와 육중한 몸집에 맞는 의자가 없어서 부러진 나무 밑동을 다듬은 것을 전용 의자로 삼고 있었다.

  웰레이즈는 친구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친구들도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본다. 늙고 있는 것은 자신만이 아님을 알았다. 이마와 뺨에 세월과 관록의 상징인 주름살이 새겨지고 흰 머리가 늘고 있었다. 볼벤스는 투구로 가려진 부분에 더 굴곡 심한 주름살이 생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 사람 모두 젊었을 적에는 역전의 모험가들로 위맹을 떨쳤었지만 나이만큼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 모양이었다.

  주인은 두 손님에게 파이프 담배를 권했다. 잠시 대화 할 것이 막막했던 그들은 기쁘게 받아들여서 불을 붙여서 깊이 빨아들였다. 어떻게 지냈냐는 웰레이즈의 물음에 액슬란트는 연기를 허공에 후 내뿜으면서 대답 했다. 그에게는 말썽꾸러기 외동아들이 있었다. 친구들도 익히 알고 있는 그가 최근에 약혼했다는 것이다.

  “물론 내 뒤를 이을 대장장이 기술도 잘 배우고 있네.”

  웰레이즈와 볼벤스는 좋은 일이라고 축하해 주었다.

  볼벤스는 싸움만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이다. 그는 아직도 전장을 찾아다니며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잔인한 성격 때문에 같은 캠비온이나 드로우조차도 기피하지만 웰레이즈와 액슬란트는 오랫동안 함께 한 여행으로 누구 엉덩이에 점이 몇 개 있는 것도 알고 있는 친우 사이였다.

  웰레이즈는 요즘에 무엇을 하느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쓰고 있는 여행담 원고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감상을 듣고 싶었다. 한동안 종이를 들여다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물었다.

  “도대체 뭐라고 쓴 것인가?”

  커다란 실수였다. 그들은 자기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일자무식인 것이었다.

  웰레이즈는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원고의 내용은 우리의 모험담을 적은 것이라고 설명한 다음 자신도 기억이 희미하니까, 뭔가 떠오르는 있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줄 것을 청했다. 그러다 액슬란트의 의견으로 아예 세 남자는 기억하는 일을 서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주인이 메모할 준비를 할 동안 손님들은 파이프 담배를 다 피웠다. 웰레이즈부터 시작한 이야기의 출발점은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길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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