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바벨의 물고기-1

2005.10.26 23:3810.26

결국 올리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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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yohan
to my love


바벨의 물고기


"The whole world spoke the same language, using the same words"
[Genesis11:1]

"That is why it was called Babel, because there the LORD confused the speech of all the world. It was from that place that he scattered them all over the earth"
[Genesis11:9]


0.

너에게 보내는 편지.

너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는 사실이, 나에겐 죄악 같다.
나쁘고 좋고의 범위를 떠나 이질적이라는 부분에서. 나는 이 마지막 편지를 통해서, 나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감정마저도 지워버리려고 한다. 아마도 끈질기게 나를 붙들고 있는, '그것'이 사라지면 나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마저도 감정의 일부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너에 대한 죄책감이나 애정 등등의 감정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들을 떠올리기엔 난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눈꺼풀처럼 얇지만 질긴 세계의 장벽이 우리를 막고 있다. 그것은 명제 같아서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할 것이다. 이것 역시 감정의 동요는 들지는 않지만. 상황이 나를 미안하다고 말하게 한다. 너를 갑자기 떠나버리고, 다신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게 무슨 이유이건 간에 너에겐 배신감이 들게 했겠지. 하지만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하다. 내 상황은 도저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변명 같지만 세상 모두가 내가 갈 단 하나의 길로 몰아넣고 강요하는 것만 같다.- 아니 실로 그러했다- 마치 몰이사냥처럼.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이 상황에서 더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모든 것은 너의 덕분이다. 결코 너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실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너의 덕분이었다. 나를 깨우치고 글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가질 수 있게. 너는 열정적이었지. 하지만 너는 알았어야 했다. 극과 극은 어차피 닮은꼴이라는 것을. 강렬한 애정은 그 만큼의 증오와 같다. 나의 '글에 대한' 증오는 그것에 대한 끝없는 애정의 표현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너는 나에게 글에 대한 애정을 불어넣었다. 그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글 이외의 그 무엇도 생각 할 수 없게 되었다. 글자들은 내 눈 속에 새겨질 듯 빨려들었고, 내 모든 사고와 연상작용은 접속사와 단어들 사이의 연관과 유사해졌다. 인과 관계들은 무의미해졌다. 나에게 있어 작용하는 것은 어떤 소설처럼 복선과 필연성이었다. 그런 사고들이 또 다른 사고들을 불러왔고, 나는 어느새 나 자신의 의식자체가 변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새로운 의식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보게 되었다.

언뜻 단어들과 절묘한 연관성으로 연결된 조사와, 가슴을 짜르르 시리게 하는 구절 곳곳에 그것들이 있었다. 활자들의 섬세한 질감들은 그 세계로 향하는 길과 같았다. 그 세계는 너무 아름다워서 경이로울 정도였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세계에서만은 모든 것을 읽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과 함께 할 수 있었다. 당연하다시피 난 그 세계에 매료되고 말았다. 매료된 세계에 나를 투영하고 싶었다. 그 세계 사이를 물고기처럼 누비고 싶었다. 그런 욕구 사이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1.

"그를 찾아야 해."

지연이 말했다. 편지를 바들대며 움켜져보았지만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편지는 아무래도 일반적인 경로를 통한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경로를 통했다면 책 포장지에 쓰여 있을 리가 없으니까. 책 포장지로는 신문지를 쓰고있었는데, 편지는 바로 그 신문지에 쓰여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쇄되어 있었다. 한달 전쯤 되는 신문지에 예전부터 인쇄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기에, 하마터면 발견하지 못할 뻔했다. 편지를 다 읽은 지연은 편지의 끝이 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자신을 발견했다는 말. 아무리 해석해봐도 그것은 자신이 아닌, 또 다른 '나'를 발견했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해도 당장은 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뒷부분이 백지처럼 흰 것이 왠지 석연치가 않았다. 신문에서 그런  큰 공백이 날 리가 없다. 그저 보기에도 쓰여졌다, 지워진 것으로 보였다.

"그를 찾아야만 해"

다시금 말하면서도 왜 그런 생각이 드는 지 지연도 몰랐다. 하지만 처음의 배신감마저 흐릿해진 지금. 그의 편지가 도착한 지금. 그녀는 그가 절실히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편지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느꼈다. 그는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되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그의 도피-사라짐-이 자신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사실 역시 참기 힘들었다. 그의 말 모두를 믿을 수는 없지만, 그가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편지에서는 그것을 암시하는 몇 가지 구절이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을 떠나는 이유가 없다. 지연은 그것이 억지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에.

지연의 눈가에 눈물이 주룩 흘렀다. 그 흐른 눈물은 뚝하고 책에 떨어졌다. 지연은 책이 젖을까 황급히 손으로 훔쳐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소포에 적힌 주소는 그가 있는 곳을 아는 단서가 될 것이다. 그를 찾게 될 것이다.
다만 망설임이 들었다. 과연 그것을 '그'가 원할까. 편지를 보면 그가 그것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원하지 않는 글에 대한 애정을 강요했던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그에게 애정을 말하며 사랑을 느꼈다. 자신 속에 완전히 속하기를 바랬다. 글자 앞에서 무력해지는 그를 통해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다. 찾아야했다. 사랑하는 '그'를.

그러려면 이 주소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남아있는 것도 이것뿐이었다.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지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2.


"그래서 저를 찾아오셨다는 거군요."

사서는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말했다. 얘기를 듣는 중에도 계속 시선을 아래에 두고 있었기에, 지연은 약간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티내지 않기로 했다. 그럴 정신도 아니었다.

"네. 그 소포에 적힌 주소가 이 곳이었거든요."

"흠. 그 편지라는 것을 볼 수 있을까요?"

"여기 에요."

지연은 가방 속에서 그 신문지를 꺼내었다. 사서는 그 편지를 받아들고 내용을 한참동안 읽었다. 그리고는 이번엔 신문지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곧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이 날짜에 인쇄되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요. 신문지의 바랜 상태로 보나, 잉크 빛으로 보나. 혹시 이 날짜의 다른 신문은......"

"확인해봤어요."

지연은 사서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아. 그럼 역시 다른 내용이 있었나요?"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서는 한참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의 길이만큼 지연은 초조해졌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황당하다며 자신을 무시하지는 않을까? 불안감이 들었지만 지연은 사서의 말을 기다렸다. 어떤 단서가 있기를 바라면서. 사서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나보고 이 편지 내용을 믿으라는 건가요?"


"믿고 말고 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단지......알고 싶어요. 그가 어디에 있는지. 그를 찾아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그래서......"

지연의 말이 잦아들었다. 사실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만나야 하는지를. 사서는 그런 지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 절실함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도와드리도록 하죠. 이 도서관의 주소가 적혀있다면, 저와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 테니까 말이죠. 그 소포를, 왔다는 그 소포를 보여줄 수 있나요?"

"네."

지연은 책을 꺼내 사서에게 건넸다. 사서는 그 책표지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약간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곧 사서는 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책. 음. 제가 보냈어요."

"네? 정말이요? 무슨 이유에서요?"

의외의 대답이었기에, 지연은 좀 당황했었다. 설마 사서가 보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사서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사서의 표정은 망설임으로 가득 차있었다. 어색하기까지 해서 무슨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에.....그게. 말씀드리기 묘하네요. 이건 참. 뭐랄까. 좀 긴 이야기가 될 듯 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어떤 이야기든 들을게요."

"그래요. 좋아요. 먼저 이 도서관을 보세요."

지연은 도서관을 훑어보았다. 사서의 자리는 구석진 곳에 있었기에, 대화를 나누어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들린다고 해도 별로 신경쓸것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으니까. 평범한 도서관의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지요?"

"그러네요."

"하지만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랍니다. 대부분 그저 공부를 하고 있을 뿐이에요. 책을 읽는 것은 글자들 사이에서의 의미를 파악하고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동요. 절묘한 구절과 진실이 밝혀지는 그 순간. 그런 것이 진짜 책을 읽는 거예요. 어떤 책이든 마찬가지지요. 저자의 생각에 수긍하고, 또는 반대하고 하면서 서로 상호작용 하는 것.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단지 받아들이고 있지요. 그나마도 항상 보는 책들만 훑어보고 있어요. 결국 소모전 같은 것이죠."

지연은 사서가 내뱉은 말의 홍수에 잠시 머뭇대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답답해지더군요. 도서관에는 책이 참 많지만, 읽히는 책보다 읽히지 않는 책들이 더 많아요. 그 읽히지 않는 책들에게서 저는 어떤 호소를 들었어요. 저의 느낌이겠지만, 저는 그 호소를 모른 척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저는 도서관에 있는 책 리스트에서 작게 본 순서대로 괜찮은 책들을 선택해서 임의로 사람들에게 보냈지요. 따로 사느라 돈이 들긴 했지만, 어느 정도 보람도 있었고요."

"그렇다면......"

"네. 당신의 주소도 도서관의 주소리스트에 있었고, 저는 책을 선택해서 당신에게 보내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순전히 우연으로 저에게 보내게 되었다는 거네요. 그런데 저는 이곳에 처음 온 것인데요? 어떻게 제 주소 리스트가 여기에 있는 거지요?"

"글쎄요. 그게 저도 궁금하네요. 일단 찾아보죠."

사서는 지연의 이름을 컴퓨터에 쳐서 넣었다. 그러자 곧 주르륵 하면서 책의 목록들이 떠올랐다. 수십 권의 책이었다. 게다가 모두 지연의 이름으로 빌린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연에게는 그것들을 빌린 기억이 없었다.

"꽤 많은 책을 빌렸는데요. 이 이름으로."

"음. 저는 기억이 없는걸요. 여기는 분명 처음 온 것이니까요. 혹시 다른 사람이 제 이름으로 빌릴 수 도 있는 건가요?"

"원칙상으론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일이긴 하죠. 아. 설마 그 남자 분이 빌렸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마 제가 아니면, 그가 빌린 것이겠지요. 빌린 날짜도 확인할 수 있나요?"

"네. 잠시만요."

사서는 책의 목록들을 시간순서로 배열했다. 그러자 날짜들이 떴다. 지연은 그 날짜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일부의 책들이 그가 사라진 이후에 대여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는 사라진 이후에 이 도서관에 들렸다는 것이다. 혹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찾아올 것을 대비해서 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들을 볼 수 있을까요?"


3.


[미국의 송어낚시]
[자유의 감옥]
[거울나라의 앨리스]
[어린 왕자]
.
.
.
.

꽤 많은 책들이었다. 그러나 지연은 끈질기게 한권 한권 책을 찾아 한곳에 모아두었다. 다 모으자 대략 스무권 남짓 되었다. 처음에는 그 책들을 모두 읽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 권을 넘어서자, 지연의 마음에 허탈감이 들었다. 그 책들을 다 읽는다고 해서 그에 대해서 알 수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턱하니 그에 대한 단서가 그녀에게 발견되라고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그가 읽은 책이라고 해도 단지 읽은 책들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사서도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그녀를 도와주었으나, 그도 뜸해졌다. 지연은 완전히 무력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는 아이 같았다. 길을 잃어버렸다.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의 말대로 막막한 장벽이 들어찬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책을 휘리릭 넘길 때였다. 책의 마지막에 꽂혀있는 도서대여카드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몇 년 전부터 도서관은 도서대여카드를 쓰지 않고, 컴퓨터 바코드로 바뀌었다. 아마도 도서대여카드는 예전에 쓰던 것을 떼지 않고 그냥 둔 모양이었다. 지연은 무심코 그 카드를 뽑아보았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이름이 있었다.

또박또박 서툰 글씨로 쓴 그의 이름이었다. 날짜를 본 그녀는 그것이 그가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적 읽었던 책인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는 그의 다른 책들도 뒤져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여카드에는 그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어렸을 때 읽은 책을 그는 다시 읽은 것이다.

'왜.'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그녀는 소포로 온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보았다. 당연히 같은 책이 꽂혀있었다. 그녀는 그 책의 제일 마지막을 펼쳤다. 그러자 도서카드에 역시 그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었다.

작은 쪽지였다.

'더는 읽을 책이 없다. 세상에 많은 글자들을 더 읽고 싶다. 바벨로......'

좌절이 느껴지는 글귀였지만, 그녀는 그것이 '그'가 어렸을 때 쓴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글씨체가 어렸다. 그러나 의아함이 들었다. 그는 글자를 증오하지 않았던가. 활자공포증이라고 할 만큼 그는 글자를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어렸을 적에 이토록 많은 글자들을 읽었던 것일까. 정말 그의 말처럼 애정이 증오가 되고, 다시 그 증오가 자신 때문에 애정으로 바뀐 것일까. 그런데......

"이 바벨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벨이라고 하면, 성서에 나오는 말이 흩어진 곳 아닙니까. 아마도 그곳을 지칭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왜 갑자기 바벨일까요."

사서는 물끄러미 고민했다. 그러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서관......"

"예?"

"아닙니다. 그는 책을 더 읽고 싶어하니까. 그가 찾고 싶어하는 게 도서관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바벨......도서관......."

사서는 안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하긴 바벨이 도서관이었다는 이론도 있지요. 그렇게 높은 건물에다가 신에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의 지식들을 모아놓았다면, 아마도 도서관이었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혹 그도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지요."

"그렇다면, 그는 바벨을 찾기 위해 떠난 것일까요?"

"그거야 모르지요."

그때 사서를 찾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래서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지연은 혼자서 쪽지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더는 어디로 갔을지 그녀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새로운 세계로 가버렸다면, 그녀는 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왜 그는 자신에게 그런 편지를 남긴 것일까. 그리고 우연이라고 하지만, 소포와 같은 책에 있던 쪽지.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억측일까? 그녀는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억세고 질긴 벽이 그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좌절. 그는 어떻게 좌절에서 탈출한 것일까. 그녀는 지금의 좌절에서 탈출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쪽지의 글귀 뒤편에 하나하나 쓰여지는 것처럼 글자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작됐어. '나'는 아무래도 글자들을 사랑할 수 없나봐......."

천천히 글자는 보여지고 있었다. 아니 쓰여지고 있었다.

'.....노력해 보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증오하기 위해......'

지연은 가슴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태어난 것 같아......'

그때 사서와 학생과의 실랑이가 귀에 들어왔다. 지연은 강철의 심장을 가진 것처럼, 답답해졌다. 눈물이 고일 만큼 어지럽고, 머리가 깨져버릴 만큼 아팠다. 그러나 사서의 말은 너무나 잘 귀에 박혔다. 하나 하나 새겨지는 것 같았다.

"책이 비어있다고요?!"

'......시작해 버렸어. 미안해.'

"아냐. 나 때문이야."

"그럴리가요. 계속 읽던 책인데, 책이 갑자기 백지가 될 리가 없잖아요. 설마요. 뭔가 착오가 있겠지요."

"모두 나 때문이야. 내가 그에게 글을 읽으라고 강요하지만 않았어도.......내가, 내가 글에 대한 애정을 강요하지만 않았어도......내가!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다른 책들도 그렇다고요? 예?"

"나 때문이야."

"책에서 글자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요?!"

지연은 소스라치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고 말았다.


4.

지연은 자리에 앉자마자 벽에 걸린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당연하다시피 거기에는 아무런 글자도 없었다. 지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오늘 하루종일 글자라는 것을 못 본 것 같군요. 뉴스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완전히 다 사라진 건 아닐 테고 아마......"

"아마?"

"지연씨가 구심점인 듯 합니다."

지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그럴 꺼라 생각했었기에, 특별한 놀라움 같은 것은 없었다. 지연은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왠지 '그'가 더 글을 보여줄 것만 같았기에, 계속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더는 읽을 책이 없다. 세상에 많은 글자들을 더 읽고 싶다. 바벨로......시작됐어. '나'는 아무래도 글자들을 사랑할 수 없나봐. 노력해 보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증오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 시작해 버렸어. 미안해.'

그러나 글을 더 쓰여지지 않았다. 글이 사라진 뒤로는 완전히 침묵이었다. 하지만 지연의 시야에 이제 보이는 글자라고는 손에 든 쪽지 밖에 없었다.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글자가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뭔가 특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뉴스에 나오지 않는 것은 신기한 일이군요."

"뭐. 글자들이 사라 졌다곤 해도, 그렇게 먼 범위까지 닿지는 않은 건가보죠. 게다가 글자들이 좀 사라졌다고 해서 사람들이 별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순간 지연은 말을 삼켰다. 도서관 안의 모든 책에 글자들이 사라졌다. 사서는 도서관의 책을 지킨다. 그러나 도서관에는 더는 책이 없어졌다. 이런 논리에서 지연은 사서가 어떤 기분을 느낄지 예상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직장을 잃어버린 걸로는 표현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서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있던 사서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너무 낙관적으로만 생각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듭니다. 단지 지연씨를 구심점으로 글자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에 지연씨가 구심점이라면 지연씨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만약 그가 온 세상의 모든 글자에 대해 증오를 가지고 있다면, 또 그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 범위를 알아 봐야겠습니다. 만약 그저 구심점이라면, 지연씨는 더는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행동은 저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사서의 담담한 말에 지연은 불안감을 느꼈다. 사서의 표정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담겨있는 듯했다. 불안감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달랐다. 그렇기에 지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그렇게 적극적인 거죠?"

사서가 지연을 바라보았다. 지연은 사서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왜 그렇게 적극적이신 거죠? 사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아니잖아요. 아니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도와주진 않을 거에요. 왜 그런 거죠?"

사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지연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사서는 억지로 말을 퍼 올려야 했다.

"보통사람이라도 이렇게 했을 겁니다. 사태의 이유를 알았으니, 누구라도 해결을 해야 할 것입니다. 때마침 제가 그것을 알았으니 제가 해야지요......."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그 동작이 이어지기라도 한 듯이 사서는 고개를 돌렸다. 지나가는 듯한 말이 들렸다.

"저는 사서입니다."

사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 지연은 멍하니 사서가 나간 자리만 바라보았다.


5.

지연과 떨어진 사서는 무작정 길을 걸었다. 무의식적으로 지연과 멀어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걸음에 주저함은 없었다. 거리를 걸어가면서 사서는 주변이 너무나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조용하다기 보다는 허전한 느낌이었다. 뭔가가 텅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실제로도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평소엔 의식하지 않지만 글자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큰 일인 것 같았다. 너무 컸다. 그래서 막상 와 닿지 않았다. 너무 큰 충격은 오히려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점점 길을 걸어갈수록 그 기분은 더했다. 무언가 빼먹은 느낌이었다. 그런 걸음을 한 1km쯤 걸었을 때였다.

세상은 온통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쥐떼들이 모조리 달려들어 파먹은 느낌이었다. 글자들이. 수십 가지의 글자들이 군데군데의 모든 부분에다가 새겨지고 쓰여졌다. 그리고 그 글자위로 덧씌워지는 글자들로 인해 더는 의미를 파악해 낼 수 없었다.

"왁자지껄 억울한 삶의 사탕을 던지는......"

읽어보려 시선을 집중하던 사서는 어지러움증 마저 느꼈다. 아무런 생각도, 사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글자들의 홍수였다. 답답한 마음만이 드는 글자들의 발악 같았다.

'사라지는 범위 바깥에서는 그 범위만큼 글자들이 우겨지는 것일까? 종이조각처럼 말이지.'

고개를 들어 높은 건물부터 낮은 건물까지 주르륵 훑어본 사서는 그게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딱히 설명하지 못할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온통 소란스럽게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의아해하다가 나중에는 두렵게 느꼈다. 글자들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수십 마디의 글자들이 새겨졌다.

"가물대는 물고기 꼬랑지 바싹 깎은 코끼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다. 두어 번 더 시도를 해본 사서는 아예 포기해 버렸다. 덕지덕지 발라진 글자들에게서 의미를 이해해보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할 테니까. 사람들의 비명만큼이나.
사람들은 비명소리를 지르며 그 글자들을 피해보려는 듯 여기저기로 달아났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글자들이 피해를 끼치는 것은 없었기에, 무익한 짓이었다. 신경에 팔린 차들이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바닥에 덧붙여지는 글자들을 잡으려한 아이를 어미가 말렸다. 고개를 숙인 비둘기들이 글자들을 쪼았다. 한 건물들에서 벗어난 글자들은 옆 건물까지 문장을 이어놓았다. 세상이라는 커다란 종이에 글자들을 빽빽하게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현상들이 한순간 멈췄다. 그러더니 사서가 왔던 방향에서부터 경계선하나가 움직였다. 그 경계선 너머에는 아무런 글자들도 없었다. 우겨지던 글자들이 야금야금 사라져갔다. 화들짝 놀란 사서는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움직였어요?"

"아뇨. 그 자리에 있는 걸요."

"정말이죠?“

“정말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맙소사."

사서는 전화기를 든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외침들이 침묵처럼 잠겨 들어갔다. 사람들도 멍하니 그 장면들을 보고 있었다.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낮의 해가 어둠으로 묻어 가는 모습에 비교할까. 물고기가 야금야금 파먹어 가는 것처럼 글자들이 사라져갔다. 세상을 둘로 나누는 경계선을 그으면서.

"확장되고 있어."

"예?"

지연의 먼 목소리가 들렸다. 사서는 바들바들 떨면서 지연에게 말했다.

"확장되고 있어요. 글자들이 점점 더 멀리까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건물 옥상의 큰 tv스크린에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앵커는 그제야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때마침 근처에 방송차라도 있었나보다.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한 채 그 tv를 바라보았고, 묘하게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사위가 조용한 탓이리라. 사람들의 경악과 공포 속에 사서는 한가지 결심을 했다.

"지연씨."

"예."

"한가지 고백할게 있습니다. 지금 말해야겠어요."

"무슨 일인데요?"

사서는 크게 숨을 쉬었다. 단호한 결심을 내려야 했다.

"사실은 저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를 만났었습니다."

지연마저 침묵했다.

6.

지연과 만난 사서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결정은 했지만, 말하기 쉽지 않은 탓이다. 지연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재촉보다는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시간이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사서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그'는.....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지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진실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의 그의 표정을 기억합니다. 때때로 울고 웃고, 또 고개를 끄덕이곤 하는 그를 보면서 저는 그가 정말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책 취향은 뭐랄까......저와 비슷한 편이었습니다.
그런 동질감이 있었기에, 저는 그와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그와 이야기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저는 그와 대화하면서 내가 기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마음이었습니다. 들뜨고 두근거리고, 저는 그의 사상을 이해했고, 동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보통 사람의 말이라면 저는 그것을 무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는 특별했습니다."

사서는 자신이 연설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잠시 말을 멈췄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말을 정리하기 위해서인 듯 했다. 지연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불안감을 느꼈다. 사서는 그런 지연을 바라보고는 동조의 눈빛을 보냈다.

"혹 이런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서로에게 완전한 이해. 전달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도 그 내용의 일부분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수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또 부단한 시간이 필요하고 지식을 쌓아가야 하지요. 하지만 그가 말하는 세계에서는 그것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바벨에서는!"

"글로 이루어진 세계. 새로운 바벨. 사람의 지성이 올바르게 후대에 전달되고 이해되면서. 결국은 완전한 세계로......"

지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사서는 지연에게서 시선을 멀리 뒀다. 지연을 보고 있었지만, 그가 보는 것은 과거였다.

"놀라웠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더는 의사소통의 고민 따위는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책을 읽음으로서, 아니 그 사람자체를 읽음으로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글자는 본래의 올바른 역할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인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서는 조용히 자신 속에 잠겨들었다. 하지만 지연은 그런 사서에게 추궁하듯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그는......"

사서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지연을 보다, 갑자기 말했다.

"그 책!"

지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사서는 지연의 가방을 뺏듯이 가져가서 그 안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소포로 보내었던 책이었다.

"제가 이 책을 권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세계를 믿고 있었기에, 그에게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해주었습니다. 그는 이 책을 알고 있었지요. 읽으면서 그는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이 책에서 자신이 찾던 것을 찾았다고 저에게 말했었지요. 그런데......."

"그런데 뭐죠?"

사서는 성격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그의 안경 속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마도 그때의 기분을 상상하는 것이리라.

"그가......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라졌다니요?"

"마치 유령처럼. 아니. 아무런 의미 없는 연기처럼. 무형물처럼.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제 머리 속에서만 존재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리에는 이 책만이 있었습니다."

사서는 자신의 손에 든 책을 격정적으로 흔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사라지다니요."

"말 그대롭니다. 그의 편지에 나와있는 대로, 아니 저도 모르겠군요. 아니 모르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는! 그는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 버린 겁니다."

사서는 침을 삼켰다. 지연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서는 위로를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말을 이해 못하는 지연에게 화를 내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럼 저에게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인가요?"

사서는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

"아뇨.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 한 말 때문에, 지연씨에게 그 책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지연은 사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었나요!"

사서는 기억을 되살렸다. 기억 속의 '그'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녀가 날 태어나게 했으니,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가야할 곳도 찾았으니 그곳으로 가야합니다. 하지만 만약 돌아갈 곳이 있다면, 그녀뿐이겠지요. 그녀가 보고 싶군요. 그녀라면......"

그 뒷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지연의 손을 살며시 내리며 사서는 그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나 지연은 그의 말을 불신했다.

"어떻게 그 말을 믿으라는 거지요? 어떻게요?"

사서의 눈에 슬픈 빛이 떠올랐다.

"저는 사서입니다. 책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지연은 사서의 말이 슬프다는 것을 알았다. 지연이 바라는 것도 이런 것은 아니었다. 지연은 한번쯤 다시 믿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사서가 아니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누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겠는가. 아니 믿는다고 해도 구심점인 그녀이다. 그녀가 무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는 건가요?"

지연의 말은 좀 누그러져 있었다.

"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런 것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시선 어딘가에는 반드시 글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을 보세요. 아무 글자들도 없습니다. 사람은......사람은! 글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그리고 이건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그가 원하던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바벨처럼 하나의 언어로 통합된 이해의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완전한 이해의 세계 말입니다."

"단지 이것이 선행과정이면요? 이해의 세계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라면......"

"그렇다고 해도,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지연은 너무나 큰 아픔을 느꼈다. 자신이 그에게 한 일이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을 지금 '그'는 겪어가고 있다. 글자를 증오하던 '그'가 변화해서 글자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를 일깨운 자신의 탓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지연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글자를 증오하던 그'. 세상의 모든 글자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던 ‘그’.

"아!"

지연의 비명 같은 소리에 사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연의 눈에는 놀라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있었다.

"왜 그러죠?"

"하나가 아니에요."

"뭐가요?"

"그는 하나가 아니에요. 둘로 나뉘어져 있어요. 글자를 증오하던 그와 사랑하는 그. 그래서.....사라지고 있는 거에요. 그가 말했던 '나'는 바로 증오하는 그 일 거에요. 맙소사. 그러면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어떤 '그' 말이죠?"

"사랑하는 그 말이에요. 글자를 사랑해서, 완전한 세계로 만들려고 했던 '그'말이에요."

사서는 뭔가 아귀가 맞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글자를 없애려는 그는 예전에 사서가 봤던 그와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지연의 말이 맞다고 한다면, '그'는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둘로 나뉘어진 게 된다. 사서는 우겨지던 글자들을 생각했다. 너무나 사랑해서 글자들을 새겨 넣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던 것처럼 보였다. 구심점은 역시 지연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사서는 지연의 손 근처에 있는 쪽지를 집어들었다. 쪽지에는 새로운 글씨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지연씨와 같이 있습니다. 둘 모두 지연씨의 곁에 있는 겁니다."

지연은 다급하게 그 쪽지를 바라보았다. 그 쪽지에 나타난 것은 하나의 '주소'였다.


7.


"아마 대화하기가 좀 힘들 거에요."

간호원은 예의 미소를 띄며 말했다. 지연은 눈으로 물었다. 간호원은 약간 씁쓸한 표정-그러나 틀에 박힌-을 지었다.

"알츠하이머지요. 기억하고 계시는 건 얼마 되지 않을 거에요."

지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힘겹게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아무런 대화도 하기 힘들다면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것이다. 하다 못 해, 어머니에게서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도 들을 수가 있다면......
간호원은 사서와 지연은 병원 밖으로 안내했다. 병원 밖은 잔디가 깔려있었고, 바닷바람이 잔잔히 불어오는 해변이었다. 간호원은 그런 공원 같은 경치의 너머에 있는 작은 건물로 인도했다. 그 건물의 외벽에는 이끼인지, 잎인지 모를 것들이 잔뜩 엮여있어 동화 속 건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어쩐 이유인지 지연은 바로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당연하다시피 '책'을 읽고 있었다.
간호원은 몇 가지 주의사항을 주고 떠났고, 지연과 사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책을 보다가 둘을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웬일들이니?"

사서는 좀 당황했지만, 지연은 같은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이야기 좀 하려고요."

"그러니? 이리들 앉으렴."

사서와 지연은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는 지연에게 말했다.

"넌 참 예쁘구나."

"감사해요. 그런데 무슨 책을 보고 계신 거에요?"

"아. 이 책은 잠시만 기다려보거라.......아. 그래. '신데렐라'란다. 아주 슬픈 책이야. 신데렐라는 슬픈 아이야. 그렇지?"

"예. 그런데, 혹시 이 책 아세요?"

지연은 가방에서 그의 책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처음에는 무슨 책이냐는 듯이 그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사서는 뭔가 걸렸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지연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그녀'는 그 책을 한장 한장 펼치며 읽기 시작했다. 한참을 지났을 때, '그녀'는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내 잘못이었던 게야."

그리고 좀 있다가 다시 말했다.

"내 잘못이었던 게야......."

"뭐가요?"

결국 참지 못하고 사서가 불쑥 끼여들었다. 그러나 지연이나 '그녀' 둘 모두 그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말을 머뭇거리다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책을 참 좋아했었는데......"

책이라는 말에 사서와 지연은 숨을 삼켰다.

"내가 그 치료만......에구. 내가 바보였지. 너무 무서웠거든. 잘못되면 어쩌나. 큰일나면 어쩌나. 하지만 그게 아니었지. 그냥 놔두었어야 했어."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뒤 지연은 그녀가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나 하는 기분에 그녀의 몸을 살짝 건드려본 지연은 그녀가 그새 완전히 잠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책은 신데렐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수첩 같은 것이었다. 사서는 그 수첩을 슬그머니 빼서 펼쳐보았다. 후드득 넘어가던 수첩 중간에 글씨가 빼곡한 쪽이 있었다. 그리고 귀퉁이가 뜯겨져 나가 있었다. 지연은 쪽지를 꺼내었다.
쪽지는 그 귀퉁이에 딱 맞았다.

'바벨로......'

뒤쪽에 더 이어진 글씨가 있었다.

'더는 읽을 책이 없다. 세상에 많은 글자들을 더 읽고 싶다. 바벨로....가고싶다. 하지만 바벨로 가는 길은 책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한 책이었다.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책장과 같았다.'

"이게 무슨?"

콰드드드득.

갑자기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거센 톱니바퀴가 아귀가 안 맞게 돌아가는 듯한 소리였다. 마치 거대한 괴수가 이를 아득거리는 소리 같은....... 그리고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지연이 앉아있던 뒤편의 건물이 수없이 많은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변해 있었다. 처음에는 부분 부분이 점점 옅어지다가 그 부분이 글자의 형태로 변해갔다. 수없이 많은 글자들이 모여서 건물을 이루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그 글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건물들은 그 무게를 못 견디고 앓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비어진 틈 사이로 자재들이 쏟아져 내렸고, 결국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져갔다.

"저게 무슨!"

"맙소사. 책이에요. 저 건물!"

"예?"

"글로 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 건물이!"

콰드득 먼지가 휘날리며 무너져 내리던 건물이 마침내 쓰러졌다. 지진처럼 땅이 울렸다. 거대한 울음 같았다. 거대한 울음 뒤에는 먼지와 자재들의 시체들만 남아있었다. 사서는 콜록대면서도 연신 외쳤다.

"책이에요. 그에겐 세상 자체가 책이라고요."

"그래서 설마......"

"예. 이번에는 세상마저 사라지게 할 셈인가봐요."

"왜요! 왜 사라지는 거죠?"

"그는 글자를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니까요."

사서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전율을 느꼈다. 사실 그대로였지만, 너무나 무서웠다. 그의 목적지는 예상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벨을 찾기 전까지는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미 세상은 멸망해가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바벨을 찾아야해요. 그에게 그것을 선물해야 해요."

"그런 뒤에는 요?"

사서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옅었다. 저곳에도 글자가 있을까. 사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를 죽여야지요."


8


주변에 늘어선 가로수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까 까지만 해도 차가 많았었는데, 이미 시골길로 들어선 뒤로 그나마도 보이지 않았다. 지연은 몇 번이나 어디로 가야 되는 지 물었지만, 사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정신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차가 시골길로 들어서자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지연이 말했다.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역시 사서는 아무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연은 답답한 마음에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노부인은 여전히 수첩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첩에 빼곡이 적힌 글씨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내용일까 라는 궁금증은 들지 않았다. 대신 답답함이 들었다.

사서는 건물이 무너지자마자 노부인과 지연을 데리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건물이 무너지는 혼란스러움은 그런 일을 행하기에 충분했다. 무슨 설명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무작정 차에 올라탄 둘에게 사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요."

지연은 재차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냥 죽어요? 절망해요? 어떤걸 해야한다는 거죠?"

사서는 지연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차로 달려가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서는 차로 달려감에 따라, 멀리서부터 그림자 같은 것이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빼곡이 적혀진 글자들일 것이다. 사서는 아찔함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피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죠? 지금 글자도 사람도 드문 시골로 도망가는 게 아닌가요?"

"맞아요. 하지만 피하는 게 아니에요."

지연은 무슨 말인가 하려했다. 하지만 그때 노부인의 상태가 이상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연은 그 말에 집중했다.

".......잊어버림.......글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은.......어지러운 마음에서 벗어난.......아아."

꺄아아

노부인의 말을 듣던 지연은 갑자기 난 비명에 귀를 틀어막았다. 노부인은 거센 비명을 울고 있었다. 사서도 그 소리에 깜짝 놀라 핸들을 꺾었다. 다행히도 차는 구석 편으로 미끄러지듯 세워졌다. 한숨을 내쉰 사서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지연은 노부인을 감싸안고 있었다. 그러나 노부인은 기절했는지, 잠이 들었는지 의식을 잃고 있었다. 지연은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고 여겼다. 수첩을 보고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노부인의 그 모습은 집착에 가까웠다.

"기절한 것 같아요."

"휴우, 깜짝 놀랐군요. 바람 좀 쐬고 가야겠습니다."

사서는 차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마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문손잡이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서는 자신의 손에 걸러진 글자들을 볼 수 있었다. 문손잡이는 글자들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염병처럼 차 전체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연의 주변에서부터 점점 사라져갔다. 사서는 다급하게 외쳤다.

"빨리 차 밖으로 내려요!"

이미 지연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노부인을 끌고 내리고 있었기에, 지체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지연 주변의 글자들이 사라지고 있었기에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힘겹게 몸을 빼낸 사서가 그녀를 도왔다. 그때 사서는 볼 수 있었다.

보닛 안쪽의 엔진이 연신 움직이고 있었다. 그 엔진의 위쪽에는 점화 코크가 연신 빛을 발했다.

'맙소사'

엔진에는 기름이 있다.

"엎드려!"

엔진에 있던 점화 코크가 번쩍였다. 그 순간 엔진에 가득 차 있던 기름에 불이 붙었다. 그 불꽃은 아무런 저항 없이 기름을 따라 흘렀다. 원래라면 엔진을 막고 있어야 할 것들이 모조리 사라진 뒤였다. 불꽃은 그대로 기름탱크까지 이어졌다.

콰가광.

점화에 의해 촉발된 폭발은 글자로 이루어진 차를 날려 버렸다. 수없는 글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 글자들 틈틈으로 여전히 번식은 계속 되고 있었고, 그 폭발의 불꽃마저 글자들로 변했다. 불꽃은 글자로 잠식되었고, 그 글자들은 지연의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미처 닿지 못하는 끔찍한 손길 같았다. 사서는 그 장면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연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글자가!"

지연의 말에 사서 역시 정신을 차렸다. 불꽃의 자리 주변으로 '공기'라고 쓰여진 글자들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치 폭풍처럼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글자들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스팔트위로 수없는 기억의 '글자'들이 흩날렸다. 나무위로 잠식해간 글자들은 나무의 모든 형체를 글자로 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지연의 주변에서는 글자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몸이 쑤욱 내려가는 기분에 지연은 소름이 돋았다.

"그녀를 깨워요!"

사서가 외쳤다.

"예?"

"그녀를 깨워요. 그녀가 변하게 하고 있어요!"

지연은 사서의 말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노부인을 다급히 깨웠다. 한참이나 몸을 흔들어서야 그녀가 깨어났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글자로 변하던 것들이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모든 것이 되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글자로 변했을 때 삭제되었던 부분들은 그대로였다. 그 부분은 무언가 천해의 괴수가 파먹은 것처럼 사라져있었다. 가운데가 파 먹힌 가로수 하나가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꺾여 쓰러졌다. 사서는 그것이 미래의 전망일거라는 끔찍한 생각을 떠올렸다.

사서는 노부인을 붙들고 외쳤다.

"어떻게 한 거에요! 도대체 이건!"

노부인의 표정이 굳었다. 사서는 답답함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요!"

"그만하세요. 알아듣지도 못하잖아요."

지연은 노부인을 끌어안았다. 노부인은 굳은 표정 그대로 사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서는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이를 악물어 참았다. 하지만 답답함과 억울함은 참을 수가 없었다. 지연과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원인이 되는 둘이었다. 지연과 노부인. 그녀들이 없었다면 이 현상이 더는 일어나지 않을까? 자신이 저 둘을 죽여버린다면. 사서는 그 생각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꾸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들이 없어진다고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진짜 원인은 '그'였다.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혹시나 했던 게 맞았습니다. 아마 노부인이 사물이 글자로 변하는, 그러니까 글자화의 원인이었습니다. 노부인이 기절하거나, 잠이 들면 글자화가 진행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무슨 소설가 같군요. 글자로 만들다니. 어쨌든 저 사람이 의식이 없을 때 세상은 글자가 됩니다. 아마 이것도 그의 영향이겠죠. 어쨌든 그를 낳은 것은 저 여자니까요. 그리고 지연씨는 글자가 사라지는 현상의 구심점입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차가 폭발하고 건물이 무너진 겁니다. 두 명만 있다면 세상이 멸망하겠군요."

사서는 자신의 말에 섬뜩함을 느꼈다. 세상의 멸망. 그러나 차근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이 있으면 안됩니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겠지요."

"그래서 어쩌자는 거죠?"

지연은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사서는 그런 불안감을 확인시켜주듯 말했다.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그녀를 만난 이상 혼자 내버려두면 안되겠지요. 그러니까 지연씨. 따로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지연은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사서가 있었기에 이때까지 버텨 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없다면? 지연은 마음속은 벌써부터 부담감과 두려움으로 가득해지고 말았다. 사서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지연씨 혼자 내버려두는 것 역시 내키진 않지만......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도록 하지요. 지연씨는 되도록 사람이 드문 곳에 숨어 있는 편이 낫겠어요."

"어디로 가실 건가요?"

사서는 망설였다. 사실 특별한 방향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다면 지연이 더 불안해 할 것이다. 사서는 되도록 자신의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리기를 기도하며 말했다.

"그가 바라던 바벨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의 어머니인, 이 여자의 과거도 조사해봐야겠어요. 치료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게 '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군요."

"저는 뭘 해야 하죠?"

"쪽지에 혹시 글씨가 나타나면 좀 알려주세요. 그리고......"

사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겠지만, 힘내요."

"힘들지 않아요."

지연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서는 그 미소에 미소로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사서는 지연에게 악수를 청했다.

"세상을 구해야죠."


9.

모텔은 시골 중에서도 구석진 곳에 있었다. 이런 곳에서 장사가 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이런 모텔이 있다는 사실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연은 돈을 지불했다. 모텔 주인은 여자 혼자라는 것이 의아했는지 한참이나 지연을 바라보았다. 지연은 그런 주인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주고는 방에 들어왔다. 한숨이 나왔다.

며칠동안 제대로 쉬어보지를 못했기에 피곤함이 들었다. 무작정 쉴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할 일도 없었기에 지연은 애써 편안함을 가져보려 애썼다. 한숨을 다섯 번 정도 내쉬며 침대에 누워보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갖가지 상념들이 지연을 괴롭혔다.

'그'에 대한 기억과 사서. 그리고 글자들. 예전에는 참 많이 읽던 글자들이었지만, 이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예전의 '그'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도대체 그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정말 그는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나.

결국 지연은 쉬지도 못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tv를 켰다. tv에서 뉴스가 나온 뒤에야 지연은 그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급하게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졌기에,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과연 세상에서는 무슨 말들이 오갈까.

"이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글자들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리포터가 연신 주변을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글자들이 사라져있었기에 황량하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리포터의 표정은 놀라움이 담겨있었지만, 세계의 멸망 같은 것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면은 녹화된 듯한 장면으로 바뀌었다. 캠코더 같은 것으로 촬영한 것인지 화면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화면에서는 글자들이 빼곡이 들어찬 주변건물들이 보였다. 게다가 그 글자들은 계속 덧입혀 지고 있어서, 검은 새들이 화드득 날아가는 것 같았다.

"사서가 말하던 게 저거였나......."

화면은 계속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연이 느끼는 것만큼의 위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황하고 어이없어 하기는 했지만, 리포터의 말처럼 두려움은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일면 일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신기한 현상의 일부로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어서 사회학자나 초현상학자 등등이 나와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왔다. 지연은 더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tv를 꺼버렸다. 그리고 가방 속에서 쪽지를 꺼냈다. 쪽지의 글씨는 그대로였다.

멍하니 쪽지를 바라보던 지연은 가방 속에서 편지와 책도 꺼내었다.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세계와 발견한 '나''

새로운 세계의 부분이 새롭게 읽혔다. 그가 본 세계는 어떤 세계였을까. 그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글로 이루어진 완벽한 세계일까. 절대 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면 지연 자신도 끌릴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해서 상처 입히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한다면?

'완전한 세상.'

'바벨'

지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책에 시선을 돌렸다.

[끝없는 이야기]

미하엘 엔데의 소설이었다. 지연은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묘한 끌림이 있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막연함이 좋았다. 그가 마지막에 읽었던 책이었다. 사실은 그게 가장 큰 끌림이라는 것을 지연 역시 깨달았다.
한동안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연이 할 일 역시 없을 것이다. 지연은 책장을 펼쳤다. 책은 재미있었고, 금새 책 내용에 빠져들었다.

지연은 그렇게 한동안 책을 읽었다.



지연과 헤어진 사서는 노부인과 함께 도서관을 찾아갔다. 사서가 원래 일하던 도서관은 책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뒤였기에, 다른 도서관을 찾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 곳의 책은 멀쩡했다. 아직은 확장된 영역이 여기까진 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서는 바벨에 대해 나와있는 책들을 모았다.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에-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적당한 내용들로만 골라내었다.

'바벨: 신이 언어를 흩은 곳. 인간의 오만이 쌓인 탑.'

처음의 대략적인 내용은 사서가 알던 사실 그대로였다. 몇 가지 책을 뒤적거리던 사서는 예전에 본적이 있는 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책은 바벨이 도서관이 아니었나에 대한 논의를 쓴 글이었다. 소설 비슷한 형식으로 쓰여져 있었기에, 무리 없이 책이 읽혔다.

책에는 바벨이 도서관이라는 것을 두루뭉실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것은 없었고, 비약한 논리와 추론으로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서는 그 결론 근처에 쓰여진 작은 논조가 마음에 들었다.

"세상은 어쩌면 새로운 바벨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벨을 쌓아서 신에게 다가가려고 하고 있다. 인간의 지식이 쌓인 곳 그곳이 바벨이 아니던가."

'바벨'

사서는 그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결국 신은 노여워하고 만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하나로 되어있기에, 신에게 도전하려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언어가 인간의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한 듯 하다. 실제로 바벨에서 언어가 흩어지자 인간은 힘을 잃었다."

'인간의 힘'

"신에게 다가가려고 지식을 쌓던 인간은 곧 흩어졌다. 그러나 만약 다시금 하나의 언어가 된다면? 모두가 서로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신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신에게 도전장을 내밀어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완전한 세계'

사서는 그 책의 내용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평소 그의 관심사에 가깝기도 했지만, 이런 비약적인 글은 던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약이 지금의 현실에 가장 가까웠다. 지금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상은 완전한 세계로 가기 위해 꿈틀대고 있었다. 사서는 완전히 몰입한 채 책을 읽어나갔다. 적어도 노부인이 잠이 들기 전까지는.

처음에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계속 글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글자들이 덧씌워진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사서의 책 위로 새로운 내용의 글자들이 덧입혀졌을 때, 사서는 그것이 어떤 말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알같은 글씨로 책 위로 새로운 내용이 쓰여졌다.

'알알이 박힌 증오는 글자들을 흩뿌려 인간의 힘을 잃게 하고 그 사라짐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사랑의 마음으로 그것을 끌어안을 때 글자들의 전투는 영원히 계속될 어지러운 신에 대한 미련을......'

그리고 책이 옅어졌다. 그리고 책상도, 책꽂이도 의자도 모조리 글자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사서는 화들짝 놀라며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노부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당황한 사서는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책장이 옅어지고 있었기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뒤편까지 보였다. 도서관 안에서 산발적인 비명소리가 들려다. 사람들도 그제야 사물이 변해 가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사서는 끔찍한 기분을 느끼고 노부인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열심히 뛴 덕분일까? 사서는 복도의 창가에서 몸을 창밖에 낸 노부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창틀에 걸친 채로 기절한 것인지 노부인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자세로만 보면 자살하려던 모습 그 자체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서는 노부인을 깨웠다.

처음에는 멍한 표정으로 깨어나던 노부인은 사서를 바라보곤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내가 죽이지 않았어! 내 탓이 아냐! 내 탓이 아니라고!"

"진정하세요. 진정해요."

"내가 한 게 아냐. 제발 날 놔줘! 내가 한 게 아니야."

사서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힘겹게 노부인을 진정시켰다. 노부인은 수첩을 던지고 사서를 마구 때리면서 반항했지만 곧 진정할 수 있었다. 노부인이 진정하고 창틀에서 내려와서야 사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피로함이 들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일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일이 커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다.

사서는 떨어진 수첩을 주었다. 무심코 수첩을 건네려던 사서는 수첩에서 뭔가를 본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서는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았다.

사서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분명한 사실이었다. 봐서는 안될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서는 가슴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잘못 된 거야. 무언가.......이럴 리가......."

사서는 노부인에게 신경 쓰지 않고 그 수첩에 집중했다. 덕분에 노부인이 지쳐서 다시 잠이 든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노부인의 주변에서 시작된 반응은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폭발 같은 속도로 사물들이 글자들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계속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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