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 술렁이고 있군요 ”

검은머리의 남자는 창 밖을 넘겨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고 중얼거렸다. 창 밖으로는 눈에 덮인 정원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길게 뻗어있는 높지 않은 성벽, 그리고 그 너머로 호수와 평원과 숲이 보일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남자가 말한 ‘술렁인다’ 고 하는 형용사에 어울릴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평범한 자연일 뿐이었다.  

“ 입맛이 동하는 모양이지, 그라비스. ”

그렇게 말하고 여인은 자신의 잔에 차를 따랐다. 꽃향기가 나는 붉은 물이 하얀 찻잔에 채워지고 여인은 거기에 술을 더했다.

“ 당신이야말로, 가엘리온, 오늘의 모임은 단순한 정기 회의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날, 그렇게 마셔도 괜찮겠습니까? ”
“ 누구처럼 데운 맥주 한 잔에 인사불성이 되는 주량이 아니니까 걱정 마. ”

태연하게 잔을 들어올리는 그녀를 보면서 남자-그라비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어깨를 한 번 으쓱 해 보이고는 다시 창턱에 손을 짚고 몸을 밖으로 뺐다.

“ 다들 늦네요- ”

가온은, 반쯤 마신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면서 웨이브 진 검붉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마치, 이런 자리는 귀찮아, 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라비스는, 태연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평소의 검은 갑옷 차림이었지만 가엘리온의 옷차림은 꼭 휴가를 즐기다가 끌려나온 것처럼 헐렁한 모직의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물론 그 바지 아래 신겨진 부츠는 언제나처럼 갑옷에 딸린 그 철갑의 부츠였지만.  바깥 날씨로 본다면 약간은 추워 보였지만, 실내는 따스했고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과 노랗게 칠해진 벽, 두툼한 카펫과 쿠션이 있는 소파가 앉아있기 꼭 좋은 장소에 놓여져 있어서 가엘리온의 그 차림은 꽤 어울렸다. 평범한 휴가를 지내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일에 끌려나온 것처럼 가엘리온의 볼은 살짝 부어 있었다.    

“ 아직도 화내고 있는 겁니까? ”
“ 평소라면 참가하지 않아도 별 무리 없잖아. 그리고- ”
“ ‘여럿이서 하나를 괴롭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 입니까 가엘리온? ”
“ 그라비스! ”
“ 그리고 그것이- 알카나가 아니기 때문에.. 화가 난 거군요 ”

쨍그랑.
그라비스가 지금껏 내다보고 있던 창틀에, 가엘리온이 내던진 찻잔이 날아왔다. 하얗게 채색된 창들에 붉은 액체의 자국을 남기면서 찻잔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튀었다. 그중 제법 큰 파편 하나가 그라비스의 뺨을 주욱 스치고 지나갔다. 실금처럼 그어진 붉은 선의 한 부분이 살짝 부풀더니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 더 이상 말하면 죽인다. ”

자신의 뺨에 그어진 붉은 선을 그라비스는 손가락으로 쓰윽 하고 훑었다. 선으로 있던 피는 색은 옅어졌지만 손가락에 눌려 조금 넓어 진 채로 그라비스의 뺨에 남았다. 묻어난 피를 바라보고, 여전히 미소지은 얼굴로 아직도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달려들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가엘리온을 돌아보았다.

“ 죽일 수 없다는 것, 잘 알지 않습니까? ”

쓰윽, 피 붙은 손가락을 핥으면서 그라비스는 차게 미소지었다.

“ 그리고 당신도, 죽을 수 없지요.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
“ 싫은 녀석- ”

가엘리온은 뱉듯이 말하고, 소파의 팔걸이에 기대었다. 저 남자와 말을 해서 자신의 감정이 편안했던 적은 없었다-가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게나 사람을 도발시킬 수 있다는 것도 재주는 재주지만, 자신이 유독 그와 껄끄럽다.. 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을 ‘그’는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에 반발한다’ 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같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라비스는 미소짓고, 가엘리온은 외면한 채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방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것은 두 사람, 길고 치렁한 로브를 입은 남자와 여자였다. 검고 긴 머리카락을 하얀 로브 위로 늘어뜨린 여자는 방안의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 또 싸웠어요? ”
“ 싸우긴 누가- ”

가엘리온은 반박하듯이 말끝을 올렸지만, 소녀는 이미 두 사람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그런 가엘리온을 향해서 옅게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마치 마법처럼, 그녀의 이마에 새겨진 금빛의 눈동자 문양이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단지 문장임을, 가엘리온은 잘 알고 있었다.

“ 오래간만입니다 포츈시커 에테프 프린테이트. ”
“ ... 그렇군요, 그라비스. ”

복잡한 시선이 에테프와 그라비스 사이에서 엉켰다. 언제였을까, 한때는 오빠처럼, 여동생처럼 함께 모험을 떠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에테프에게 눈동자의 문장이 없었고 포츈시커의 이름이 없었다. 전혀 변함없는 것은, 그때에도 지금에도 그라비스 그 뿐이었다.

“ 다들 늦는군요 오늘은, ”

에테프와 같이 들어온 남자는 깊숙이 눌러쓴 후드를 벗으면서 누구에게 라고 할 것 없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런 특징 없어 보이는 평범한 얼굴에서 유난히 빛나는 그의 시선은 무언가 그리운 것을 살피듯 벽을 바라보고, 난로를 바라보고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 방이. 그들의 모임장소가 되었는지는 아마 모두가 모인다고 해도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방에는-

“ 어차피 추억일 뿐이에요 아리아드 오빠. ”
“ 그렇군요. ”

슬픈 듯한 목소리, 씁쓰레한 미소, 그것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눈을 가리고 얼굴을 가리고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입까지 꾹 다물고서 그는 구석자리에 가 앉았다. 가엘리온과 에테프는 무언가 그에게 말하려다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에테프도 정해진 자신의 자리인 듯, 당연하게 난로 앞의 러그에 하얀 로브자락을 펴고 앉았다.

“ 오늘, 누가 오는 거지 에테프? ”

가엘리온은 여분의 잔에 새로 차를 따르면서 조용해진 방의 침묵을 깨고 싶은 듯, 그렇게 말했다. 에테프는 옅은 미소만을 지은 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 언제나 오던 녀석들이야.. 오늘도 올 테고- ”

가엘리온은 잠시 후드의 남자- 아리아드와, 창가의 그라비스를 바라보고 난로 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 ... 듀크니스는 늦는군 ”
“ 그분은 도망 나오셔야 되잖아요, 아리아드 오빠. ”
“ 너나, 나 역시.. 비슷한 처지 아닌가? ”
“ 우리는- 해리엇 같은 집사는 없으니까요 ”

에테프의 밝은 미소에, 아리아드도 듣고 잇던 가엘리온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 역시.. 해리엇은 좀 무섭지? ”
“ 저는 별로 무서워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

지금까지 들리지 않던, 새로운-그러나 잘 알고 있는-사람의 목소리에 방의 모두는 문 쪽을 돌아보았다. 소리도 없이 열린 문 앞에는 세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중 맨 앞에 서 있는 한 명은, 기다란 은발로 등을 덮고 간편한 여행복을 입은, 지금까지 세 사람이 이야기하던 그 집사 해리엇의 주인, 듀크니스 나인이었다.

“ 저에 대한 이야기는 상관없습니다만- 제 가신에 대한 이야기는 좀 그렇군요. ”
“ .. 죄송해요. ”  

가장 먼저 사과를 한 것도 에테프였다. 별로 밝지 못한 표정을 하고 있던 나인은, 쑥스러움이 담긴 에테프의 미소에 뭐라고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쿡 하고, 부드러운 웃음이 터져나온 것은 그 때였다.

“ 나인은 집안의 일에 민감하니까요 ”

그 목소리의 주인은 문 뒤- 아직 나인에 가려서 방안에는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던 두 사람 중 하나였다. 투명하고 생기 있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심장 한 구석이 저릿해지는 위엄을 담은 청아한 목소리. 방의 모두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창턱에 앉아있던 그라비스도, 소파에 앉아있던 가엘리온과 아리아드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퀸 헤리가셸- ”

탄성인지 한숨인지 모를듯하게 아리아드와 가엘리온이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약간은 난처한 표정으로 나인이 방으로 들어서고 그 뒤로 네 사람을 경직시킨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들어선 뒤였다.
나인의 은발이 얼음이나 금속과 같았다면, 그녀의 웨이브진 긴 은발은 마치 한 가닥 한 가닥이 빛줄기 같았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은빛으로 빛나며 붉은 자줏빛의 망토 위에서 일렁거렸고 같은 은빛의 속눈썹 아래에서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아름다운 빛의 붉은 눈동자가 방안의 네 사람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기품이 느껴지는 콧날, 위엄 있게 미소를 띈 붉은 입술, 황제의 것처럼 금실의 자수가 놓인 주색(朱色)의 로브는, 아리아드의 것과는 틀린, 마치 드레스와도 같이 허리를 조이고 어깨를 드러내고 깃에 장식을 한 예식용이었고, 깊게 파인 타이트한 스커트의 슬릿으로 눈처럼 흰 다리가 슬쩍 내비치고 있었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살짝 빗겨 맨 은색의 레이피어가 마치 장식인 양, 그녀의 다리 옆에서 흔들렸다.
잠시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네 사람 중, 가장 먼저 아리아드가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따라서 가엘리온이, 그리고 그라비스가. 마지막으로 에테프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를 띄우며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헤리가셸 다니에르 드 실버화이트, 우리의 여제(女帝)이시자 마법사들의 여왕이신 분. ”

에테프의 인사에,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고귀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그녀는 가볍게 손을 내저어 무릎을 꿇은 사람들을 일어서게 한 다음, 방안의 모두를 둘러보고 다시 한번 옅게 웃었다.

“ 불편한 존재가 나타나서 미안해요 ”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히, 그녀의 존재가 불편한 존재임은 맞았다. 모두가 평등한 그들 중에서도, 그녀의 위치는 남달랐다. 단순히 나인처럼 한 나라의 공작이라거나, 에테프처럼 혜안을 가진 예언자라거나, 혹은 가엘리온처럼 명성일 지닌 모험자이거나 한 이유로 그녀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 헤리가셸 다니에르 드 실버화이트는 모든 모험의 시작을 만들었고, 알카나가 될 이들을 이끌어 빼앗겼던 자신의 자리를 찾았고, 가장 큰 모험의 길을 떠나 그리하여 종국에는 또 다른 세상의 신이 된 존재였다.
새로운 땅에 숙명의 이름을 붙이고, 혼돈의 여왕의 자리에 올라, 부당한 정의에 상처 입은 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수호신이 되어준 그녀였다. 그 존재가 단순한 한 사람의 알카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 퀸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

언제나 웃는 얼굴이던 그라비스의 표정도 어딘가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사람의 등장 때문이었을까, 지금까지 창틀에 앉아있던 그라비스는 그녀에게 인사를 한 다음부터는 검에서 손을 뗀 자세로 벽에다 등을 기댈 뿐,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 아비게일은- 저에게도 특별한 아이니까요. ”

소파에 앉으면서 헤리가셸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앉자 나인과 아리아드도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고, 에테프도 난로 앞의 러그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 가능하면 그 아이가 행복하게 되기를 바랬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어 주질 않는군요. 그렇죠 가엘리온? ”

헤리가셸이 자신을 돌아보자 가엘리온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나 본심을 들킨 당황함은 그녀의 뺨에 옅은 홍조로 드러났다. 자신이 그 동안 내버려두었던 자신의 ‘미러’를 죽이러 갔던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저 사람이라면 전후 사정을 듣자마자 한눈에 알아차렸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도 퀸 헤리가셸 그녀는, 그녀의 수족과도 같은 라진을 통해서 그 전후 사정을 확실하게 듣고 있으므로, 자신이 의도하지 못했던 결과도, 그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 어, 어차피 나는 미뤄둔 일을 한 것 뿐이에요. 퀸도 자신의 ‘미러’를 없앴잖아요. ”
“ 그래요, 당신은 단지 자신의 ‘미러’를 없애러 간 거죠. ”

헤리가셸의 미소에, 가엘리온은 더 이상 반론을 펴지 않고 입술을 비쭉 내민 채, 그대로 침묵했다. 말을 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 그녀는- ”

헤리가셸은 말을 멈추고 습관처럼 흘러내린 은빛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로브와 같은 색의 장갑을 낀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귀에 달린 수정 귀걸이를 건드리자 찰랑- 하고 조용한 방안에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서서히 잦아들면서 공기의 울림 속으로 타닥타닥하고 장작 타는 소리가 가라앉았다.

“ ...아비게일은 차라리, 알카나 같은 건 안 되는 게 나았을 텐데. ”  

여전히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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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다란 장작이 몇 번이나 난로에 던져 넣어지고, 보이지 않는 하인의 손길이 몇 번이나 새로 차를 우렸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점점 어두워지고 마침내 깊은 물과 같은 새파란 밤이 하얀 눈 벌판위로 펼쳐졌을 때, 방안의 사람은  열 두명으로 늘어 있었다. 좁지 않은 방의 안락의자와, 난로 앞의 러그, 창 옆과 안락의자 옆의 의자에 모두 각자 자리를 잡고 사소한 일상에 관한 잡담을 나누거나, 준비된 다과를 즐기거나, 안부를 나누고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리아드가 신호처럼 창틀을 한번 두드리고, 창문을 닫았다.  

“ 별이 남쪽 탑을 지났습니다. ”
“ 시간이 다 되었군요 ”

그리고 모두가, 하고 있던 일을 멈추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몸을 바로잡았다. 잔잔한 속닥거림 들이 멈추고, 방안은 조용해졌다. 방안의 사람들을 돌아보고, 양해를 구하듯 방 한 구석에 앉은 헤리가셸에게 한번 눈길을 주고 그녀의 시선을 확인 한 다음, 아리아드는 가볍게 고가를 끄덕이고, 다시 시선을 방 가운데로 옮겼다.

“ 그럼 언제나처럼 진행은 제가 맡겠습니다. ”

그리고, 아리아드는 벗었던 후드를 다시 깊숙이 눌러 써서 얼굴을 가렸다. 에테프와 이야기를 나눌 때와는 또 다른, 로브에 가려진 단조롭고 활기차지 않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 로브를 뒤집어써서 표정이 보이지 않을 때의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 50번째의 신년회의고, 사실 평소에는 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만, 오늘은 중요한 일이 생겨서...  ”  

말끝을 흐리면서 아리아드는 가볍게 혀를 찼다.

“ 어쨌든 안건은 아비게일, 더 러버의 문제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거나 일에 관련되신 분들도 잇겠고 무슨 결론을 내자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은 개요만 설명하죠. ”

방안의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시선을 주고받았다. 전해들은 사람, 직접 본 사람,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사람, 간접적인 연관을 가진 사람,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못한 사람이 모두 이 방 안에 있었다.

“ 발단은, 그녀가 콘서트를 하겠다- 고 말한 것에서부터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녀는 사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 공포감을 보이지 않는 세큐리터를 붙여서 ‘서울’에서 지내도록 조치했었지만, 그 계기가 무엇이든 간에, 스스로 사람 앞에 서겠다고 해서, 시작된 것인데- ”

말을 멈추고, 아리아드는 방안을 한번 더 둘러보았다. 시선을 피하고 있는 가엘리온과 사실을 알지 못했던 이들의 놀란 표정. 자그마한 속닥거림이 퍼지다가 아리아드의 시선이 멈추자 다시 조용해졌다.

“ 그래서 유리테스의 관리로 일을 추진했습니다. 그녀가 대중 앞에 나선 것은 그녀의 판단이니 접어두더라도, 이 콘서트 장에 ADRTF가 난입, 아비게일이 ‘그’와 대면했습니다. ”
“ 뭐? 설마 리를 만난 거야? ”    

놀란 소년의 목소리가 아리아드의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검을 머리칼에 초록 눈을 가진 놀랍도록 아름다운 소년은, 자신이 큰 소리를 냈다는 것에 지레 놀라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놀란 것은 소년만이 아니어서 방에는 조금 전보다 더 큰 속삭임이 번져갔다. 소년의 행동을 책하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소년의 말에 대한 아리아드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방안의 시선은 속삭임이 잦아드는 것과 함께 아리아드에게 쏠렸다.

“ 맞습니다, 하렐, 리와 아비게일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비게일의 미러 역시, 리와 만났습니다. ”
“ 그런- ”

웅성거림은 커졌지만 아리아드의 말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리아드는 말을 잇지 않고 하렐과, 헤리가셸과 가엘리온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다만, 깊숙이 눌러 쓴 아리아드의 후드가 그 움직임을 가리고 있어서, 그가 누굴 바라보고 있는지,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방안의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후드 아래 드리워진 어둠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잇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 그의 파티가 해산되고 그가 엔드로 간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 마주치게 된 겁니까? ”
“ 나로는, 그녀가 왜 사람 앞에 나서고자 했는지, 또 어째서 리할트가 엔드로 갔는지, 무슨 경위로 두 사람이 만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알카나인 아비게일과 유리테스는 불참이므로, 상황을 들을 그녀의 세큐리터를 여기 불렀습니다. ”

아리아드의 말에 가엘리온이 움찔 하고 어깨를 경직시켰다.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나타내고 있었고, 방 안의 다른 몇몇 사람들도 그렇게 좋은 표정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 어째서 일반인을 이 회의에? ”

차가운 목소리로 물어 온 것은 아리아드와 마찬가지로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후드를 쓰지 않은 얼굴과 로브 자락 밖으로 나온 손과 목은 눈에 뜨일 정도로 말라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성적이었고 긴 머리카락에서는 아름다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말랐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하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는 앉은 자세로 몸을 바로 세우고 흔들림 없는 태도로 아리아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리아드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그다지 편안한 표정이 아님을 짐작하기는 쉬웠다. 그가 진행을 맡아 온 50번의 신년회의동안, 이번처럼 까다롭고 진행하기 어려운 안건이 올라온 적은 없었다.  단지 가장 앞에 있는 알카나- no.1의 매지션이기 때문에 이 일을 맡게 된 그로는 그닥 달갑잖은 일임에는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피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 그 외에 일의 전말을 들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아스타? ”
“ 알겠습니다. ”
“ 잠깐만 아리아드. ”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는, 가엘리온의 것이었다. 평소의 그녀는 상당히 이성적인 편이었지만 그라비스와 언쟁을 벌이고 있을 때에는 누구보다 감정적이었고, 알카나 이외의 자가 관련된 사건에는 냉정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감정적이라는 것을, 50년간 보아온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 나는- 인정할 수 없어. 여기에 ‘인간’이 들어온다는 것을. ”
“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
“ 어쩔 수 없다고 해도! ”

팡. 가엘리온의 손바닥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티 세트들이 짤랑거리고 방안의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 ‘데스’ 가 있는 자리에 일반인을 부른 다는 건, 죽일 생각이란 것 아닌가? ”

가엘리온의 말에, 그라비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입가에 웃음을 띄고 아리아드를 한번 본 다음, 그녀를 바라보았다.

“ 단단히 밉보였군요, 저는. ”
“ 당연하잖아. ”
“ 하지만 저도 이번에는- ”

그라비스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이미 가엘리온이 아니라,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헤리가셸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방안의 상황에 반응하지도, 그렇다고 무신경하지도 않는 태도로 가볍게 다리를 꼬고 그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살짝 내려감은 은빛 속눈썹이 부드럽게 열리더니 붉은 눈동자가 그라비스를 바라보았다.

“ 이번에는 제 일을 하기가 곤란하답니다. ”
“ ..하아? ”
“ 저도 때와 장소는.. 가리는 녀석이거든요. ”

그라비스는 검 손잡이를 가볍게 오른손 검지로 튕기면서 왼손으로는 눈썹을 긁적거렸다. 그의 시선이 헤리가셸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가엘리온은 깨달았고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리고 맥이 풀려버린 듯, 낮게 투덜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 그럼 이제 불러도 되겠습니까? ”

이번에는 아무도 반론을 내지 않았다. 옅게 한숨을 내쉬고, 아리아드는 로브 속에 감추어졌던 손을 들어 허공에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렸다. 단순히 마법사의 소매틱이나 룬(Rune)만은 아닌 복잡한 도형이 완성되자, 그것은 빛의 포말이 되어 천천히 공간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곧. 포말은 하나의 확실한 모양을 띄고 천천히 실체가 되어갔다. 포말에서 나타난 것은,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정색의 수트를 입은 동양색이 짙은 얼굴을 한 남자였다. 팔을 부상당한 듯이 한 팔을 가슴 앞에 올려 붕대로 가볍게 고정한 모습이었지만 환자로는 보이지 않는 단정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미 남자의 얼굴을 알고 있던 몇 사람은 살짝 눈가를 움직여 그를 맞았고, 안면이 없었던 몇 사람은 새로운 것을 보듯이 눈을 빛냈다. 남자의 외모는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드문 것이어서 ‘서울’과의 교류가 없던 이들에게는 나름대로 새로운 볼거리인 셈이었다.

“ 세큐리터 해승,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
“ 익숙지 않은 곳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군. ”
“ 아뇨, 저는 세큐리터, 알카나의 명령을 따르는 자입니다. 이런 것은 당연하지요. ”

익숙하고 단정한 태도로, 해승은 아리아드에게 허리를 굽히고, 자신에게 시선을 모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여전히 해승의 표정은 읽기 어려운 것이어서 그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복잡한 시선이 오갔다. 그리고, 문답이 시작되었다.
  
“ 아비게일의 상태는? ”
“ 좋지 않습니다. 수면도 식사도 거부하신 채, 만 하루째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다. ”
“ 자네는 그 남자와 마주쳤나? ”
“ 그렇습니다. 콘서트장에 난입한 ADRTF의 별동대 중, 그가 끼어 있었습니다. ”
“ ADRTF의 난입은 사전에 통보된 것이었나? ”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질문에 대답하던 해승은, 마지막 질문에서 대답을 망설였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한, 흑청색 플레이트메일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굳건한 전사의 얼굴을 한 남자는, 방안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리에 앉지 않고 모두가 들어온 문에 등을 기대고 가볍게 팔짱을 끼고선 해승의 대답을 보채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 통보된 것이었습니다. 블루 님. ”
“ 누구에게까지 통보되었나? ”

또 한번, 남자가 물었다.

“ 미스터 유리테스에게 통보되었고, 저에게 통보되었습니다. 마이너 알카나께는 가지 않았습니다. ”
“ 통보한 자는 누구인가. ”
“ 레즈너. 전설을 부르는 자.  ”
“ 또 그인가. ”

해승과 블루의 문답을 가르고, 새로운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탄식과 언짢음을 동시에 담고 있는 그 목소리의 주인은, 지금까지 방안의 소란스러움에 전혀 흔들림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년의 남자였다. 약간은 길어진 머리, 그을린 피부, 깊고 부드러운 남자의 갈색 눈동자는 목소리에 담긴 것과 같은 감정으로 찌푸려져 있었다.
자신의 말에, 두 사람의 문답이 중지된 것을 깨달은 그는, 낮게 헛기침을 하고 블루에게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 그렇다면 레즈너에게 통보 받은 후, 관객을 교체한 것은 누구의 판단인가? ”
“ 미스터 유리테스의 판단이었습니다. ”
“ 그러면 관객이 교체된 것에 대해서는 마이너 알카나는 모르는 일이란 말인가. ”
“ 그렇습니다. ”

블루는 해승의 답을 듣고 가만히 턱을 긁었다.

“ 투입대 중, 그 남자가 끼어 있다는 것은 통보된 것인가. ”
“ 아니오, 적어도 저에게는 통보되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일련의 무리들이 콘서트장을 점거할 것이라는 것 외에는 통보 받지 못했습니다. 무대로 뛰어들 것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

아직까지, 해승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블루의 첫 질문에 대답을 망설였지만, 그 이후에는 전혀 막힘 없이 무표정하게 블루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해승의 대답에 몇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고 몇 사람이 탄식을 흘리고 시선을 주고받았다.
다만 그들이 문답에 끼어들지 않고 잇는 것은, 이 중에서 상대방의 대답에 대한 진의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블루였고, 그가 치안을 담당하는 알카나, 더 져스티스The Justice기 때문이었다. 그의 판단이 처벌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판단이었고, 그의 결정이 일의 타당성을 판가름해 주는 것이어서 모두가 블루의 반응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렇다면 이제는 세큐리터의 보고가 아닌 너의 의견을 묻겠다. ”
“ 네? ”

의외의 말에, 해승의 흔들림 없던 표정이 조금 동요했다.

“ 그는 아비게일을 보고 동요했나. ”
“ 그건.... ”

지금까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던 해승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똑바로 바라보던 블루의 시선을 피하고, 똑바로 내려뜨린 손이 긴장되어갔다. 물론 그것이, 확연하게 보일 만큼의 변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타인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희미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 지금의 블루라면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상대의 어떠한 동요나 망설임이라도 놓침 없이 잡아낼 터였고, 해승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제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
“ 아비게일은, 자각했나 ”

이번에는 정말로, 해승은 눈에 뜨일 만큼 확실하게 당황함을 보였다. 어느새 꽉 쥔 그의 다치지 않은 손에서는 물기가 배어 나오고 긴장한 근육이 옷 아래에서 굳어 있다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 저는...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
“ 그런가. ”

쥐어 짜내듯, 간신히 꺼낸 대답에 블루는 오히려 가볍게 수긍을 했다. 당사자도, 보고 있던 주변사람들도 좀 더 강한 채근을 예상했던 것인지 의외라는 표정으로 블루를 돌아보았으나, 오히려 블루는 꽤나 깊게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 당신의 질문이 끝났으면, 우리들도 물어도 되나? ”

블루가 생각에 잠긴지 몇 분이 지났을 무렵에, 방안의 침묵을 참지 못했는지 아니면 계속 질문거리를 참고 있었는지 조금 전, 둘의 대화에 끼었던 중년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상관없습니다 길버트, 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으니까요. ”  

한 손으로 가볍게 턱을 괸 자세로 여전히 문에 기대어 서 있던 블루는 남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는지, 살짝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질문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 신호를 확인하고 나서, 길버트라고 불린 중년의 남자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서 있는 해승에게 눈을 돌렸다. 해승의 표정만은 평상시로 돌아왔지만 하얗게 질린 안색과 꽉 쥐어졌던 손의 물기만은 그대로였다.

“ 대단한 건 아니지만- ”
“ 질문하십시오 길버트님. ”
“ 레즈너를 직접 보았나? ”
“ 아뇨, 저는 언제나처럼 전화로 전달받았을 뿐입니다. ”
“ 그렇다면 이드는? ”
“ .. 저는 미스터 유리테스가 레즈너와 어떻게 만나시는지는 모릅니다. ”
“ 그렇군. ”

길버트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표정에 의문의 빛을 띄웠다. 힐난하는 것도, 추궁하는 것도 아닌 목소리였지만 대답을 거부할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블루처럼, 그도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인지 가볍게 머리를 긁적였고 그의 옷 밑에서 체인 메일이 미세한 철렁거림을 내었다. 그 작은 소리가 들릴 만큼, 방안은 조용했다. 모든 시선과 관심이 해승과, 그에게 질문을 하는 이에게 쏠려 있어서인지, 아무도 찻잔에 손을 대거나 벽난로에 추가의 장작을 던져 넣거나 하지 않았다.
불편하고 무거운 침묵이 방을 가득 채우고 일반인의 신경이라면 호흡하기 힘들 정도로 더한 중압감이 침묵과 함께 블루와, 길버트와 그리고 해승에게 모였다. 이미 타인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자신들만의 생각정리로 들어간 길버트나 블루와는 대조적으로 해승의 안색은 이미 핏기하나 없이 창백했다.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이마에 새로운 땀 한 줄기가 주르륵 하고 흘렀다.

“ 환자를 언제까지 세워 놓을 생각입니까 길버트, 블루, ”

그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마른 몸에 로브를 걸친, 아름다운 남자였다. 솔직히 말하면 해승보다는 그가 더 병색이 완연해 보였지만, 그는 처음에 일반인에 대한 질문을 아리아드에게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앉아서 흔들림 없이 이 질의응답과 방안의 침묵을 살피고 있었던 듯했다.  

“ 조금은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도 좋을텐데요. ”
“ 아스타의 말이 맞습니다. 두 분, 질문은 끝나셨습니까? ”

아리아드의 질문에 두 사람은 난처한 듯 미안함을 각자 나름대로의 표정으로 얼굴에 띄웠다. 그리고 블루는 가볍게 손을 내저어서, 길버트는 어깨를 으쓱함으로서 자신들의 질문이 끝났음을 신호했다.

“ 그럼 세큐리터를 돌려보내도 되겠습니까? 질문이 있는 분은 질문해 주십시오. ”

아리아드는 잠시간 모두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새로운 질문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은 두 사람이 질문을 한다고 나선 것도, 아리아드의 예상과는 틀린 것이었다. 이들은, 궁금한 것이 있어도 세큐리터의 입으로 듣기보다는 분명히 자기들의 정보망으로 이번 일에 대해서 알아내던지, 아니면 무시하던지, 혹은 은폐하려 할 텐데. 부상중인 해승을 굳이 아비게일의 곁에서 떼어 여기에 오게 한 것도 뒷말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의외의 결과를 낳은 셈이었다.

“ 질문이 없으면 돌려보내겠습니다. ”

창백한 해승의 얼굴을 보면서 아리아드는 소매틱을 위해 살짝 소매를 걷었다. 문득, 해승과 눈이 마주쳤지만 해승의 눈빛은 평소의 그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탈진해 있었다. 육체의 피로인지 혹은 정신의 피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는 입장에서 별로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올 때와 똑같이 빛의 포말이 해승을 감싸고 천천히 허공으로 포말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해승도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누군가의 입에선가 들릴 듯 말 듯,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불편한 자리 같은 건 얼른 끝났으면 좋겠는데.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얼굴에는 그런 표정이 역력했다. 표정에 변화가 없는 것은 깊이 생각에 잠긴 블루와 길버트, 시종일관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포츈시커 에테프. 그리고 이 모임의 분위기를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면서도 한 발자국 물러서서 관망하고 있는 퀸 헤리가셸, 넷뿐이었다.
아리아드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불편한 자리를 끝내기 위해 모두의 얼굴을 한번씩 바라보고 마지막으로 퀸 헤리가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모임의 종료를 선언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마주친 적색의 눈동자는 살짝 시선을 내리고 가볍게 다시 한번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 자신의 의사를 아리아드에게 전달했다. 회의를 접으라고. 그리고 아리아드 역시 되돌아온 그녀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결론은 나지 않는다.
도울 사람은 가서 도울 것이고, 은폐하고픈 자는 은폐할 것이다.
어차피 알카나라는 존재가 모두 하나의 뜻으로 움직이는, 모두 한편인 것만도 아니었다.  이 사건에 가장 깊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 짐작되는 이드는 모습조차 비치지 않았다. 이것은 언제나 모이는 사람만이 모이는 단순한 얼굴보기 행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슨 결론을 내어도 결과는 결론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러면 차라리 결론을 내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얼굴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50년 동안의 암묵적 규칙이었다.

“ 끝내겠습니다. 내년, 운명의 벌이 남쪽 탑을 지날 때에 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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