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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09 : 11 : 09 VIP  복도

세티는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 손에는 조그만 권총 하나가 쥐어져 있을 뿐, 아무런 무장 같은 것도 없었다. 그녀의 조금 뒤에서는 이드가 자신이 안전을 확보한 길을 걸어오고 있을 터였다. 몇 명 길을 가로막는 AD 청년들이 있었지만, 세티는 호흡 하나 흩트리지 않고 그들을 쓰러뜨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복도를 걸어갔다. 여전히 그녀는 깔끔한 그대로였고, 표정 역시 조각처럼 차가웠다.
긴 복도의 코너를 돌려는 순간, 세티는 그 너머에서 무언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끼고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겨누며 재빠른 동작으로 코너를 돌았다.

“ ?! ”

피에 젖은 옷을 입은 남자, 검은 머리칼, 짙고 푸른 깊은 눈동자. 그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져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익숙한 저 깊은 블루의 눈동자.
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히 그녀였다. 언제나 꿈에서 보던 파란 머리칼을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바다색의 초록 눈동자를 크게 뜬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의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고. 꿈에서 보았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 당신은... ”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다가 리는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나를 모를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단지 꿈에서였다. 그녀가 자신을 알고 있을까?

“ -물러서! ”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 아니, 약간은 떨리는 듯 한..

“ .......당신은 누구지? ”

여전히 자신을 향해 겨눈 총구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흔들리는 눈동자. 언제나 보아왔던, 낯익은 그녀의.. 두려움에 찬 표정. 그것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 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한 발짝 내딛었다.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

“ 다가오지 마!! ”

그러나 다가갈 수 없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를.. 두려워한다. 리는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오션 그린의 눈동자가 동요하고 있다. 꽉 다문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자신을 ... 두려워하고 있다.

“ 누구야.. 당신은.. 어째서.... ”

묻고 싶었다. 누구냐고. 어째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느냐고, 어째서... 그렇게 익숙하냐고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물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 어떠한 대답이 나올지, 그것이 두려웠다.
오지 마, 나에게 다가오지 마, 나를 흔들리게 하지 말아 줘.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겨누고 있는 손이 떨리는 것조차,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당신은 누구? 이렇게까지 나를 동요시키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
그 때였다. 세티의 어깨를 누군가 감싸안은 것은.
익숙한 손길이라는 것을 깨닳기도 전에 세티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먼저 느껴야 했다. 그리고, 곧 눈앞이 하얗게 흐려져 갔다. 툭..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세티의 권총이 카펫 위로 떨어졌다.

“ 의외로군. ”

그의 목소리는 이상스럽게 낯익고, 그러면서 낯설었다. 리는 쓰러지는 그녀를 안아 올리는 그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암흑처럼 새까만 눈동자. 어쩌면 자신과도 닮았음직한 새까만 긴 머리칼. 그녀의 꿈에서 보았던 그녀의 ‘마스터’였다.

“ 여기까지 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비웃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미소.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 발자국도 그에게 접근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강한 것이 자신과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잇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 그 스스로가 자신의 접근을 거부하며 밀어내는 듯한, 그런. 마치 명동성당에서 시스터 시스와 대화할 때와 비슷한 그런 이상한 이질감이었다.
축 늘어진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올린 채로, 그는 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 이 아이를 느끼고 온 거겠지? ”

안고 있는 그녀를 살짝 추스르면서 그는 그렇게 물어왔다.

“ 단지 ‘미러’를 위해서인가, 너는... ”
" ..미러? “

그는 웃었다. 차가운 미소라고 느껴졌다.

“ 대답해! ‘미러’란 뭐냐!! ”
“ 너는.... ”

그는 다시 한번 품에 안은 그녀를 추슬렀다. 짙은 녹색 벨벳에 감싸인 그녀의 가느다란 팔. 소매 아래로 늘어진 하얀 레이스, 그 아래로 살짝 보이는 하얀 손가락.

“ 무대의 그녀에게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나? ”
- 너도 꿈을 꾸나?

순간, 무언가 심장에 와 꽂힌 듯한 기분이 되었다.

“ ... 무얼 말하고 싶은 거냐. ”
“ 별로. ”

차가운, 인간 같지 않은 미소. 그 주변만 시간이 멈춘 듯한 기묘한 적막함. 리는 세이버를 들어 그를 겨누었다. 날 끝이 자신을 겨누고 있음에도, 그는 미소를 흩트리지 않았다.

“ 그녀를 어쩔 셈이냐. ”
“ 데려간다. ”
“..데려가? ”
“ 그래, 나와 그녀의 공간으로, 막을 텐가? ”

그의 미소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건드릴 수 없이 균형 잡힌 무언가와도 같은 안정감과- 그에 따른 자신감이었다. 희미하게 자신의 검 끝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리는 느낄 수 있었다.

“ 자신이 생기거든, 찾으러 와라. ”

그리고 그는, 리의 옆을 지나쳐서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가 바로 옆을 지나감에도 리는, 무엇하나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느낄 수 없던 위압감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꿈에서부터 온 너이니, 별로 어렵진 않겠지? ”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리는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긴 복도,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긴 복도.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 긴 복도. 리는 천천히 몸을 돌려 카펫 위에 떨어진 그녀의 권총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리의 손에는 모자랄 정도로 작았고, 그녀의 체온 때문이었는지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 콘서트는... 끝인가. ”

사건 종료, pm 09 : 15 :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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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구경은 끝나셨습니까? ”
“ 아아, 즐거웠지. ”
“ 그녀는....? ”
“ 조금 지친 모양이야. ”
“ 그래도 마스터의 품에 안겨 오다니 세큐리터로써 제정신인지 궁금하군요, ”
“ 뭐 괜찮아. 가끔은 이런 것도. ”
“ .... 계속 안고 계실 겁니까? ”
“ 좋지 않은가? ”
“ ... 좋군요. ”
“ 그럼, 돌아갈까 에오더드? ”
“ 예, 마스터. ”

삐리리리리리-
“ 네, 전화 받았습니다. 네, 해승입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대단치 않은 상처입니다.
예, 계속 같은 상태입니다. 여전히 ‘유리의 방’에 틀어박히신 채, 노래만 부르고 계십니다. ‘그 남자’였다고만 되풀이하실 뿐, 별다른 말은 하고 계시질 않습니다. 아직은 괜찮은 듯 하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아뇨, 아닙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그럼 이만. “  

“ 웃기게 되어버렸네. ”
“ 예상했던 것 아니었어? ”
“ 으음... 그래도 그녀가 그렇게 빨리 눈치 챌 거라곤 생각 못했는걸, 게다가 원래 예정대로라면 그녀는 안 올 거였단 말야. ”
“ 핑계대지 마. ”
“ 쳇. ”
“ 덕분에 앞으로 일이 커질 것 같은데.. 뭐, 일을 네가 벌려 놓았으니 뒤처리도 알아서 하라구. ”
“ 에에? 너무하잖아~ ”
“ 안 너무해. ”

“ ? 거기서 무얼 하고 있니? ”
“ .... 보고 있었어요 ”
“ 뭘 말이야? 나에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저 밤하늘일 뿐이잖아? 별이 조금 보이고.. 은(銀)의 달은 이제 막 뜨고 있네, 오늘은 금(金)의 달은 뜨지 않는 날이구나. ”
“ 미리에겐 보이지 않을 거예요. ”
“ ...클로소? ”
“ 저에겐 보여요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어둠 속에서 그저 다른 이들이 만들어놓은 대로만 흘러가던 것이 이젠 스스로 제 힘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어요.
그것은 끝없는 어둠, 끝없는 빛,  
빛에서 어둠으로 변화하는 황혼,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하는 여명. “
“ 저어기.. 클로소? ”
“ 운명이 ... 움직이고 있어요. ”



part 6.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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