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녀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몇 사람인가가 인사를 하려고 허리를 굽혔지만 차갑게 굳은, 냉기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아는 그녀는 평소에도 차가운 무표정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온 몸에서 등골을 시리게 만들 냉기를 뿜어내는 날은 드물었다. 그녀의 긴 은발 한올한올이 마치 얼음으로 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주는, 그런 서늘함이었다.
긴 복도를 걸어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탑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선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그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밝은 복도와는 틀린, 어두컴컴하고 좁은, 위로 향하는 나선계단이 나타났고, 군데군데 푸르스름한 마법의 빛이 떠서 그 좁은 나선계단을 비추고 있었다. 복도를 걸어온 것과 같은 당당한 기세로 그 계단을 올라간 그녀는 계단 끝에 달린 문을 보고는 잠시 멈추었다. 단지, 잠시. 한 호흡 정도만을 멈추었던 그녀는 다음순간, 그 문을 열고 있었다.

" 에테프! "

문 안쪽은 크지 않은 방이었다. 그 방안은 조용하고 밝았다. 유폐된 공주님이라도 있으면 어울릴 것 같이 단정하고 잘 정리된 방에는 옅게 향기까지 나는 듯했다. 단지 이곳이, 보통사람의 장소가 아니란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방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이 가득한 책꽂이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책꽂이 앞에는 하얀 로브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긴 생머리에, 까만 눈동자. 그리고 이마에 새겨진 황금빛을 한 눈동자 모양의 문장.

" 어서 오세요 듀크니스 나인 "

소녀는 방긋 웃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른 방문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 ..언제 돌아왔지. "

나인은, 자신이 열고 들어선 문을 듣고 거기에 기대서면서 소녀에게 물었다. 책꽂이를 정리하는 듯이 이리저리 책을 빼어 옮기던 소녀는 시선은 책꽂이에 집중한 채로 대답했다.

" 오늘 새벽에요. 그 동안 별일 없었죠? "
" 그라비스가 그쪽으로 갔어. "

나인의 말에 소녀의 손놀림이 잠시 멎었다. 그러나 소녀는 그것 외에는 흐트러짐을 보여주지 않았다, 여전히 살풋 미소를 띄운 표정으로 다시 책들을 정리해나갔다.

" 말해봐 에테프 프린테이트,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잇는 거지? 왜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거야? "
" ...들으셨군요. "

책을 꽂던 손을 완전히 멈추고, 잠시 그 책꽂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스윽 하고, 소녀는 앞으로 돌아섰다. 하얀 로브위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검고 차분한 눈동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이 양 눈 사이의 이마에 자리잡은 금빛의 문장. 조금전과는 틀려진, 조금은 차분하고 위엄 있어진 분위기. 그 모습에 나인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역시 알고 있었지, '포츈시커' "
" 예, 알고 있었어요. 그가, 그렇게 움직이리란 것을. "
"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
"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

약간은 차게, 그러나 감정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슬프게, 소녀- 에테프는 웃었다. 나인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저 낮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 그러나 자신이라면, 모든 것의 이 인자인 자신이라면, 그녀의 마음을 전혀 모른다고 무시해 버릴 수도 없는 것. 자신은, 두 번째의 예언자였으니까.
그녀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예정된 미래가. 그래서 그녀에게 붙여진 이름은 포츈시커. 미래를 보는 자, 단지, 말할 수 없이 보기만 하는 자.

" 또 많이 죽는 건가.... "
" 그렇겠지요, 그라비스가 갔으니까. "
" 하지만 어째서- 그녀를. "

에테프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나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사실은 둘 다 알고 있었다. 이대로 놔 둘 수만은 없다는 것을, 무언가 뒤집을 만한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는 그녀가 가장 제격이라는 것을.

" 하지만 왜 하필 그녀가 아니면 안돼는 걸까... "
" 그것이.. "

에테프는 잠시 말을 끊었다. 살짝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윤기가 도는 것 같았지만 곧 에테프는 몸을 돌려서 다시 책꽂이의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그것이 운명이니까요, 그녀의, 그리고 우리의. "
" 그런가 "

한숨처럼, 나인은 그렇게 읊조렸다. 그녀의 말대로, 그것은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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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어딘지 모르게 들뜬 날이었다. 거리도, 사람들도, 그리고 솔브 엔터테이먼트 본사 건물도. 솔브 엔터테이먼트 소속의 아머인 진욱은, 그것이 오늘 저녁부터 있을 대규모 콘서트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콘서트의 광고와, 오늘 처음으로 얼굴을 보이는, 그 콘서트 주인공의 노래로 가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콘서트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력과 자금이 투자되었던가, 거리가 술렁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오늘 진욱의 일은, 운전이었다. 솔브 엔터테이먼트 빌딩의 가장 지하인 B6의 주차장, 주변을 둘러보아도 전혀 지하라고 느껴지지 않는 깔끔한 주차장에는 몇 대의 호화스러운 승용차들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진욱이 기대 선 유리창까지 새까만 세단은 그 중에서도 최고급에 속하는 것이었다. 무뚝뚝한 시선으로 자신이 모는 차에 탈 사람이 나올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면서, 진욱은 손에 든 차 열쇠를 짤랑거렸다.
열쇠를 넘겨주던 치프 아머의 얼굴은, 굳어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거의 200여명에 가까운 솔브 엔터테이먼트 소속의 아머들 중, 어째서 자신이 선택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치프의 그 표정은, 이 일이 단순한 운전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찰랑... 조용한 주차장에 열쇠소리가 은은하게 번져갔다. 그 금속소리의 여운이 막 사라지려는 그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딩동-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고, 진욱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차를 보고 아머나 텔러를 잔뜩 거느린 중역이 우르르 나오리라고 생각했던 예상과는 틀리게, 내린 것은 단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자신도 몇 번 스쳐지나가듯이 본 적이 잇는 이곳의 중역중 한 사람인 이 해승 상무이사,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그의 어깨에 닿을 듯이 자그마한, 하얀 색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람이었다. 그 키와 긴 후드의 덧옷 너머로 보이는 가느다란 라인은, 그가 여성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욱은 얼른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해승 상무이사의 에스코트를 아주 능숙하게 받으면서 뒷좌석에 올라탔고, 그 다음 해승이 탔다. 차 문을 소리나지 않게 닫으면서 진욱은 해승에게 반쯤 가려진 그녀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얀 후드 아래로 몇 가닥 내려온 짙은 블루의 머리카락, 그리고 그것에 가려진 발그레한 뺨과 보기 좋게 오똑한 콧날의 부드러운 선.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것만 같은, 그런 아름다운 옆모습. 문득 시트러스향기가 난다고 진욱은 생각했다.    

" 출발하지. "
" 네. "

어딘지 모르게 두근거렸지만, 그 말에 진욱은 정신을 차렸다. 운전석을 열고 시동을 걸어 능숙한 솜씨로 주차장을 빠져 나올 때까지 진욱은 사실 그다지 일반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던 것이다.
아머로써, 그것도 수많은 연예인들을 실어 나르는 솔브 엔터테이먼트의 운전기사로써, 누군가에게 이런 두근거림을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철저하게 무감정으로 살아야 했고, 그것이 바람직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 달랐다. 분이 묻어 나올 것만 같은 핑크 색이 살짝 감도는 하얀 뺨과, 그 뒤로 보이는 콧날, 자연스레 드리워진 짙은 블루의 머리카락, 애태우듯이 가려진 하얀 후드 너머로 살짝 보인 그녀의 모습은, 단순히 자신이 흔들렸다- 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애써 진욱은 뒤에 신경을 돌리지 않으려고 앞을 바라보았다. 운전에 집중하고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떨쳐 내려는 듯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필사적으로 그녀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진욱은 운전석과 뒷좌석이 분리되어서 두터운 색유리로 가려져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까르르, 유리로 가로막힌 뒷좌석에서 아주 멀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보석으로 깎은 종들을 한꺼번에 자르르르 흔드는 것과 같은, 맑고 사랑스러운 웃음소리, 순간적으로 덜컹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돌아보고 싶었다, 잠깐 고개를 돌리어, 백 미러로 그 뒷좌석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미친 듯이 진욱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지금, 바로 지금 단 한번만 백 미러를 바라본다면, 저 목소리의 여인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을 다 얻은 것보다 더한 만족감을 얻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진욱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면 다시는 앞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근거 없이 느끼고 있는 이성 때문이었다. 단순히 그것이었다. 이대로 돌아본다면, 아마도 자신은 다시는 앞을 보고 운전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그 근거 없는 불안감. 이성이라고 말 할 수도 없는 그 느낌에, 진욱은 차마 돌아보지는 못했다. 다만 입술을 깨물고 숨을 몰아 삼키며, 억지로 눈앞에만 집중했다.
여의도를 벗어나서, 그대로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방향을 틀면, 동대문 운동장- 물론, 그 일 이후 새로 지어졌지만 여전히 동대문 운동장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 스타디움-까지 가는 데에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뭐라 해도 길은 한산했고 차라는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 기껏해야 40분이 조금 넘을까 말까한 그 시간동안 진욱은 몇 번이나 진땀을 흘려야 했다. 돌아보자-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그렇게 말했고, 그럴 때마다 진욱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돌아보면 안된다, 저 뒤는, 자신이 바라볼 수 없는 곳이다. 그렇게 몇 번이나 자기에게 최면을 걸면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었다. 까르르르, 그 맑은 웃음소리, 보고싶다, 보고싶다. 그러나 볼 수 없다.  
겨우겨우 주차장을 찾아 진입하면서 진욱이 안도의 한숨을 준비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웬 일인지 주차장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당연히 구름처럼 아머를 몰고 나와야 할 이 차의 탑승객이, 단 둘이었듯이, 주차장에 마중 나온 사람도 단 한 명이었다.

" 도착했습니다. "

파킹을 하고 핸드브레이크를 걸면서, 토해내듯이 그 말을 하고 나서야 겨우 진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난 것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마중을 나온 자기또래의 청년이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세큐리터다. 그의 손놀림에서 진욱은 그가 자신 같은 아머가 아닌, 세큐리터라는 것을 알아차릴수 있었다. 그들의 손놀림은 미묘하게 틀렸다. 특히 이번 같은 중요인물을 상대할 때는 그 미묘한 느낌이 확실한 차이로 보이곤 했다. 아머나 텔러는 배울 수 없는, 아니 배울 수 없었던 좀더 고차원적인 상대를 배려하는 움직임.
그들의 움직임에는 어느 한 점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기에 같은 동작을 행하면서도 다른 두 어시스턴스들과는 다르게 완성된 동작으로 보였고, 안정감이 있었다. 상대방을 완벽하게 배려하면서, 그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움직이는 것, 그것이 세큐리터였다.
뒷좌석의 두 사람이 내리는 동안에도 진욱은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차 문이 닫히고, 자신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무언가 이야기가 오고 가는 동안 진욱은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탈진해버린 듯이 운전대를 잡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뿐이었다.
-똑똑.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들자, 운전석 문 앞에 해승 상무이사가 서 있었다. 이미 하얀 후드를 입은 그녀와, 마중을 나왔던 세큐리터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진욱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해승의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무표정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언제나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무나도 동양적인 그의 얼굴은, 사실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의 묘한 느낌이 있었다. 단지 그가, 높은 위치에 있어서가 아닌.

" 잠시 보지. "

해승이 가볍게 손짓을 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진욱은 그의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에 약간 의문이 들었지만 당연히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무언가 따로 시킬 일이 있는 걸까, 하는 것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고, 그 다음에 든 생각이 혹시 운전에 미숙한 데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녀를 돌아보고 싶은 그 감정을 억누르느라고 평소보다는 약간 운전이 서툴렀을지도 모른다. 그것 때문일까.
약간 후미진 주차장의 구석까지 가자, 해승은 더 가는 것을 멈추고 뒤로 돌아 진욱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등뒤로 붉어진 저녁 하늘과, 그것을 거의 다 가리고 있는 스타디움의 벽이 보였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사람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을 채우는 것은 간간히 지나가는 차의 소리, 그리고 불빛. 벌써 그 뒤로 보이는 도시에는 전기불빛이 들어오는 듯이 부분부분 희고 붉은 빛이 보였다. 왜일까. 진욱의 시선은  바로 앞에 선 해승이 아닌, 그 뒤에 펼쳐진 서울에 향해 있었다. 빛으로 가득한 도시, 자신이 태어났지만 자라나지는 않은 도시. 하얀 불빛, 어두운 하늘, 그리고 진욱의 머릿속에 그 눈부셨던 남양의 하늘이 떠올랐다. 눈부시도록 새파랬던 그 하늘.

" 미안하군 "
" 예? "

반문을 하면서 해승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검은 색의 포멀 슈트 안주머니에서 꺼내 든 것은 검푸른 건 블루의 냉기를 내쏘고 잇는 COLT M1911권총. 단정하고 조금의 넘침이나 부족함이 없는 동작으로 그것을 꺼내어 든 해승은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총구를 진욱에게 향한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자신의 이마로 날아드는 탄환을 본 것도 같았다. 그러나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해승이 세큐리터의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어째서일까 의문을 가졌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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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않으실 겁니까? ”
“ 아아, 그래. 아섹 부사장에게 가 보라고 해 뒀어. 그는 가보고 싶어했었으니까. ”

에이단은 피곤한 표정으로 지금까지 그의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원래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였기에 회사의 대외적인 일이 아니고서는 정장을 입지 않았다. 오늘 아침까지 그는 몇 번이나 회의를 거듭하고 전화통을 붙들고 콘서트장과 그 주변을 정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기억하기에도 어젯밤, 그녀와 시간을 보내주느라고 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었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 직접.. 보고 싶어하실줄 알았는데요. ”
“ .. 그랬나? ”

에이단은 쓰게 웃었다. 평소에 그가 얼마나 그녀를 애지중지했는지를 아는 케이로서는 이런 중요한 날에 직접 가 보지 않는 에이단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에이단의 입장은 또 틀렸다.
아마도, 해승 이외로는 가장 오래 함께 지냈고 그녀가 신뢰하는 인물이 되어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사람 앞에 내어놓는 일을 내켜한 것은 아니었다.
보고싶지 않다.
그녀가 사람 앞에 서는 것을,
그녀가 타인 앞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그녀가 부서질지도 모르는 그 상황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봐야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 눈 좀 붙일 테니, 공연 끝날 시간에 깨워 줘 케이. ”
“ .... 알겟습니다 마스터. ”

-----------------------------------------

콘서트가 시작하는 시간은 8시였지만, 6시 30분부터 사람들은 동대문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은이 운전하는 봉고차의 뒷좌석에 앉아서, 세 사람은 각자 안 포켓에 무전기를 달고 무선 이어폰과 마이크를 귀와 칼라에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달았다. 머리가 긴 라에느나 세영의 경우에는 그런 것을 달았는지 할 정도로 머리카락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고, 리의 경우에도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내려 귀를 살짝 덮는 것만으로도 그 조그만 이어폰은 완벽하게 가려졌다.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별히 이제 와서 의견을 나눌 필요는 없었으니까. 모든 준비는, 완벽했고, 그 완벽을 위해서 그들은 그 동안 수없이 플랜을 점검했다. 시뮬레이션에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3일이 걸렸다, 그리고 그 플랜대로 교육을 끝내고, 단지 남은 것은 실행뿐이었다.
동대문 운동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세 사람을 내려주고, 은은 그저 살짝 웃고 손을 흔들어 준 다음 밤에 보자- 라는 인사만을 남기고 그대로 다시 신촌으로 돌아갔다. 세 사람은 그런 봉고차를 잠시 바라보다가 각자 헤어져서 콘서트장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었다.
리는 자신의 주변을 채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노을 빛이 검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본 뒤, 자신의 눈앞에 거대하게 서 있는 스타디움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가슴이 뛰었다. 주변의 몇 사람인가가 리의 얼굴을 돌아보고 낮은 탄성을 흘렸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빛은, 자신의 주변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그녀의 멜로디, 그것만을 쫓아 홀린 것처럼 스타디움 안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소란도, 난동도 없이 매혹된 것처럼 그렇게. 리 역시 코트자락으로 자연스럽게 세이버를 가리고 그들 사이에 섞이어 그 안으로 들어섰다.
한쪽 귀에는 무전기의 이어폰을, 그리고 다른 한쪽 귀에는 mp3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꽃은 세영은 볼륨을 약간 높이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향했다. 자신에게는 마인드 배리어도, 마법에 견디는 힘도 없었지만, 자신의 손에는 스승님이 물려준 소중한 스나이퍼 라이플이 들어 있었다. 모델은 조금 오래된 헤클러&코흐(Heckler&Koch)사에서 나온 반자동 저격 소총 PSG1. 개발된 시기가 80년대 초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라이플의 나이는 거의 70살에 가까웠다. 그런 것을 아직까지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만큼 좋은 녀석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최고급의 볼트 액션식 스나이퍼 라이플에 비하면 성능이 약간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세영의 스승은 어렵사리 구한 이 라이플에 그것을 보안하기 위해 엄청난 짓을 했다. 마법을 걸어버린 것이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15년에 가깝고, 자신에게는 이 라이플에 대해 그다지 자세한 자랑은 하지 않으셨기에 세영은 정확하게 이 라이플에 어떤 마법이 걸려있는지는 몰랐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금속 탐지기에는 걸리지 않고, 가벼웠으며,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았다. 조각조각 분해해서 건 케리어가 아닌 보통의 스포츠 백에 집어넣고 닫아두면, 아무도 그것을 스나이퍼 라이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도, 세영은 간단하게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 설 수 있었다.
라에느의 경우에는 더욱더 간단했다. 그녀는 칼도 총도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고, 그대로 입장객에 섞이어서 콜이 지정해 준 자리로 갔다.
세 사람의 대기장소는 모두 콜이 지정해 준 것이었다. 몇 번이다 스타디움의 평면도를 살펴보고 점검하고 난 콜은 세 자리를 뽑아주었다. 라에느와 리에게는 무대의 양 사이드 쪽의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은 관객석을, 그리고 세영에게는 무대 정면의 가장 꼭대기 좌석을. 단, 세영의 경우에는 거기로 입장을 해서 다른 사람 눈에 뜨이지 않게 조명 옆으로 올라가라는 말까지 해 주었다.
세영은 콜의 말대로 입장이 진행되는 어수선한 틈을 타서 그대로 조명이 있는 기계실로 올라갔다. 잠긴 문 앞에 다다르자 이어폰으로 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려요 세영씨?
" 잘 들린다 콜. "
- 락 넘버는 223913입니다, 입력하고 7번과 8번 조명 사이로 가세요,
" 오케이. "

세영은 콜이 일러주는 대로 기계실의 락을 풀고 무대 정면을 비추고 있는 조명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유난히 어두움에 싸여서 그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무대가, 마치 어둠의 구처럼 눈앞에 확연하게 보였다. 스포츠백의 지퍼를 열고 분해된 라이플을 꺼내어 하나 하나 섬세한 손놀림으로 조립한 다음, 세영은 다시 칼라에 달린 마이크를 잡아당겼다.

" 이쪽은 준비 끝, 콘서트가 시작하면 무선을 끊겠다. "

콜과 라에느와 리에게 세영의 말이 전달되었고,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은 간단하게 OK사인을 보냈다. 석양은 점점 검게 가라앉고 있었고, 콘서트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

세 사람을 태운 봉고차가 스타디움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내려놓고 있을 때. 주차장에는 새까만 세단 한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능숙한 솜씨로 귀빈용 후문 앞에 차가 서자, 대여섯 명의 아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차문을 열었고 그 안에서는 한 청년과, 파트너로 보이는 아가씨가 내렸다. 세련된 슈트에 긴 코트를 입은 청년은 에스코트하듯이 짙은 녹색의 원피스에 하얀 모피코트를 입은 아가씨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하프코트 자락 아래로 살짝 빠져나온 초록색의 플레어가 하얀 다리 위에서 살랑거렸다.
아머들의 가드를 받으면서 막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한 남자가 주차장 안쪽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청년은 그 남자 쪽을 돌아보면서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 이건, 해승군이 아닌가. "

남자는 청년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는 듯 했으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웃고 있는 듯하면서도 무표정한 전형적인 몽골로이드의 얼굴,

" 도착하셨군요 미스터 유리테스. "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는 그를 보면서, 세티는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그대로 입술을 물고 말을 삼켰다. 자신이 상관할 일이 아닌 것에는 상관하지 않는다. 함께 복도를 걸어 들어가면서 두 사람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 자네의 레이디를 두고 혼자 다니다니, 자네답지 않군, 레이디는 안에 계신가? "
" 네, 무척이나 기대하고 계십니다. "
" 좋은 일이군. "
" 그럼 저는 준비가 바빠서. "
" 시작하면 보도록 하지. "

해승은 한번 더 정중하게 예의를 표시하고는 갈림길에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놓여 잇는 복도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세티와 이드가 가야 할 VIP석은 다른 쪽의 갈림길 끝에 있었다.

' ....? '

옅게, 피와 화약의 냄새가 났던 것도 같은데. 세티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한번 복도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셔 보았지만, 착각이었던 듯, 그런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드의 팔이 세티의 어깨를 감싸안았고, 세티는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기었다.
운전을 하던 에오더드의 눈은 차가웠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금빛의 눈, 그것이 백미러를 통해서 자신을 보고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일반적인 세큐리터들의 무감정적인 그것과는 틀렸다. 차가운 것은 무감정이 아니다. 뚫어버릴 것만 같은 냉기와 적대감, 그 눈길이 자신을 향한다는 걸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그가 두려웠다.

" 왜 그러지? "

떨리는 세티의 어깨를 느끼기라도 한 듯이, 이드는 감싸안은 팔에 부드럽게 힘을 주었다.  그 이상스러운 포근함과 안도감에, 세티는 흠칫 놀라면서도 그 팔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의 깊은 흑발, 따듯하게 뺨에 와 닿는 모직 코트의 촉감,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깊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깊은 어둠과 같이 검은 눈동자. 그때와 같은.
가슴이 뛰었다. 불안함이 아닌 이상한 기대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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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51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여덟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50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일곱 이야기. 김현정 2005.07.24 0
149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여섯 이야기. 김현정 2005.03.15 0
148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5.03.10 0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넷 이야기. 김현정 2005.03.07 0
146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셋 이야기. 김현정 2005.01.12 0
145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2.11 0
144 장편 SOLLV 에피소드 여섯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30 0
143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일곱 이야기 김현정 2004.11.30 0
142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여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19 0
141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10 0
140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8 0
139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8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7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6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다섯 이야기1 김현정 2004.11.02 0
135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4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3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2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