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익숙한 천장과 벽, 그리고 3년간 살아온 자신의 방.. 이어야 했다. 세영은 아직 흐릿한 눈을 비비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어젯밤, 늦게까지 웹서핑을 하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옷을 벗지도 않고, 구두까지 신은 채로 침대에 쓰러졌던 기억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영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젯밤의 그 방이 아닌, 파란 하늘과, 그것을 차양처럼 가리고 있는 녹색의 나뭇잎이었다. 이슬에 축축이 젖은, 자신이 드러누운 풀밭에서는 짙은 풀 냄새가 풍겼다.
부시시 일어나 앉은 다음, 잠시 세영은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녹색의 나뭇잎을 올려다보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자신의 옷을 적시는 풀잎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꿈치고는 너무 심각하게 리얼하잖아. "

손에는 눌려서 으깨진 풀잎이, 이슬에 젖어 달라붙어 있었다. 꿈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또렷한, 그 축축함과 풋내. 뚫어지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세영은 미간을 찡그렸다.

" 이런, 꿈은 아닌 것 같군. "

풀물 든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면서 세영이 일어나자 습기에 축축해진 긴 머리가 뒷목에 달라붙었다. 헐렁하게 걸친 남방과 청바지도, 마찬가지로 이슬에 흠뻑 젖어 축축해져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옷자락을 떼어내면서 세영은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무언가 보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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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 가게는 오늘 임시휴업 간판을 내걸었다. 손님들이 있을 지하의 가게에는, 은과, 리와, 알프렛만이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처럼 은은 바 안에서, 알프렛과 리는 바 너머의 은의 맞은 편에 앉아서.

" 늦네. "

알프렛은 두 잔 째의 커피에 각설탕을 넣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게 안에는 크지 않은-그러나 결코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을 정도로 큰소리로 은은한 노래가 흐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듣고 있지는 않았다. 알프렛은 커피 잔을 티스푼으로 젓고 있었고, 은은 유리잔을 닦고 있었고, 리는,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츠르르르르릉-
문에 매어 달린 방울이 고운 소리를 내자, 알프렛의 시선이 확 문 쪽으로 돌아갔다. 리도 천천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실은 지금까지 누가 자신과 함께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 약간은 궁금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 늦었어요- "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커다란 후드 티 위에 패딩조끼를 걸치고 힙합바지를 입은 십 이삼세 가량의 소년이었다. 커다란 티와 커다란 바지, 머리에 눌러쓴 커다란  니트모자에서 약간 긴 듯한 갈색 생머리가 모양 좋게 흘러나와 있었다. 눈썹 바로 위까지 눌러쓴 니트 모자 아래로 새파란 눈동자가 얼핏 보였다. 입가에 걸린 장난스런 미소가 입고 잇는 옷과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 소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선 것은, 상당히 훤칠하고 낭창낭창한 몸을 가진 아가씨였다. 포니테일로 묶어 올린 직모의 허니블론드가 허리까지 흘러내려 있었고, 소년과는 대조적으로 딱 붙는 칠부소매의 배꼽티와 군데군데 찢어진 타이트한 블랙진 차림이었다. 겨울로 슬슬 접어드는 날씨를 생각한다면 상당히 계절에 맞지 않는 듯한 옷차림이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상당히 잘 어울렸다.

" 제이린이 늦잠 잤대요~ "

먼저 들어온 소년이 통통 튀는 듯한 걸음걸이로 바 앞의 의자에 와 앉으면서 고자질하듯이 말하자, 뒤이어 들어온 아가씨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눈 옆을 긁적이며 말했다.

" 그러니까.. 비퍼의 건전지가 다 된걸 몰랐다니까. "
" 다 큰 아가씨가 그렇게 털털하게 살면 어떻게 해. "

알프렛의 충고인지 나무람인지 모를 말을 들으면서 그녀도 바 앞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움직임을 보면서 리는 첫눈에도 그녀의 몸이 보기보다 탄탄하게 짜인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당히 경쾌하게 움직일 것 같은 팔과 다리, 부드러운 여성적 곡선의 피부 아래 감춰진 균형 잡힌 근육, 그리고 굳은살이 박힌 손. 저런 체형을 가진 사람을, 라에에서 본 적이 있었다.

" 리와 라에느는 처음이죠? "

알프렛의 말에 그녀의 청자색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했다. 또렷한, 흔들림 없는 눈동자. 마음 한 구석 흐트러짐 없는 단정함이 그녀의 시선에서 느껴졌다.

" 라에느, 이쪽은 리할트씨. 플레인스 트레블러고, 이번 일에 도움을 주시기로 하셨어. 그리고 리, 이쪽은 라에느, "

라에느, 그녀의 이름은, 리의 조국과 같았다. 어째서 전혀 플레인스 트레블러 같지 않은 아가씨가 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걸까.

" 반가워요 리할트씨. "
" .. 리라고 불러도 됩니다. "

그녀가 먼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고, 리는 그 손을 잡았다. 하얗고 조그만 여자의 손이었지만, 그것은 보통 여자들과는 다르게 단단했다.

" 그리고 여기 꼬마는 콜. "
" 안녕하세요. "

알프렛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소년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꼬박 숙였다. 천진하고 밝은 미소였지만, 리에게는 너무나도 새파란 소년의 눈이 약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지금의 리에게는 소년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잇는 것은, 조국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아가씨였다.  
달깍, 은이 라에느의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하얀 잔 안에 찰랑거리며 담겨 잇는 주황색의 차에서는 벨가못의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 애프터눈 얼 그레이였지 라에느는? "
" 아, 네. 고마워요 은 아저씨. "

그녀는 방긋 웃으며 잔을 들었다. 은은 곧이어 소년 앞에도 커다란 잔을 내밀었다. 얼음이 보얗게 앉은 보냉용 머그 잔에는 검은 색 탄산음료가 가득 차 있었다.

" 꼬마는 콜라. "
" 넵. "

크르르륵, 스트로로 타고 올라가는 탄산거품소리를 들으면서 리는 잠시, 라에느를 주시했다. 그녀의 몸 움직임, 손의 놀림이 눈에 익었다.

" 혹시 아가씨. "
" 네? "
" 파이팅 피스트(fighting fist) 인가. "

그녀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이유는, 리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나라에서 쓰이는 언어. 이곳에서는 그네들을 '무도가' 라고 말했었다. 아마도 그녀가 놀란 것은, 단번에 자신의 직업을 알아맞히었다는 것 때문일 것이라고, 리는 생각했다. 약간의 놀라움이 스쳐지나간 다음,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바로 세운 다음 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
" 이름은 스승님이 지어주신 거겠군요. "

다시 한번,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하게 놀라움의 빛을 띄고.

" 어떻게 아셨어요? "
" 아아. "

당신의 이름이 내 나라와 같은 이름이니까- 라고 말하려다가 리는 문득, 그녀의 이름을 지어준 스승, 그러니까 자신과 같은 곳에서 왔을 존재가 궁금해졌다. 무엇 때문에 그는 이곳으로 왔을까. 아직 자신 외에는 그렇게 많다는 플레인스 트레블러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제자의 이름에 조국을 붙일만한 사람이라면....

" 그나저나 세영씨, 너무 늦네. "
" 전화라도 해 볼까? "

은과 알프렛의 대화는 리의 생각이 더 진행되는 것을 멈추어주었다. 잠시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들을 머릿속으로 뒤지던 리는 풋 하고 혼자 웃음을 웃으면서 은이 바 안쪽에서 수화기를 집어들고는 번호를 누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무슨 상관인가 그녀의 스승이 누구이든, 이제 그쪽 세상과는 인연을 끊은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랴. 잠시 수화기를 대고 있던 은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 안 받는걸. "
" 가게에는요? "
" 기다려봐... "

은은 다시 한번 다이얼을 눌렀다. 이번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고 잇던 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확 펴졌다.

" 아 세이티양? 나 은입니다. 세영군 아직 가게에 있습니까? "

수화기 너머로 맑은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언가, 그녀가 대답을 하는 듯 하더니 은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바 바깥의 사람들이 그 통화에 귀를 기울이며 숨을 죽였고, 주변은 조용해졌다.

" 그래요? 알겠습니다, 이쪽에서도 좀 찾아보도록 하지요. "

찰칵, 은은 굳어진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은의 표정 때문인지, 알프렛도 라에느도, 그리고 콜도 말이 없었다. 리 역시 가만히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 소식이 그다지 좋지 못한 것이라는 것은, 그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 세영군이 집에도, 가게에도 없다는군. "

은이 난처한 표정으로 시작한 첫 말은 그거였다.

" 세이티 양이 확인한 걸로는, 어젯밤에 집에 들어갔고, 새벽까지 네트에 접속해있었다는데.. 집에도, 없고, 아직 가게에도 나오지 않았다는 걸. "
" 세영씨가 어디 다른 데에 갈 사람도 아닌데. "

라에느의 목소리에도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의 둘째 마디를 입에 가져다 대고 습관처럼 살짝 물었다. 그 동작에는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 신중한 사람이니 솔브의 비밀경찰에게 꼬리를 잡혔을 리는 없고, 조금 찾아보는 게 좋겠네요. "
" 그게 좋겠군. "

알프렛의 말에, 은이 앞치마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바 밖으로 나왔다.

" 미안하게 됐군요 리할트씨. 소개해줄 사람이 이렇게 되다니."
"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뭔가 할 일은? "
" 그럼, 시스터 시스에게 이 일을 좀 말해주십시오. "
" 알겠습니다. "

은이 코트를 걸치자 콜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는 설이한테 가볼 테니까 알프렛과 라에느는 집 근처를 찾아 줘, 콜은 네트에서 어제 세영씨랑 얘기한 사람을 좀 찾아보렴.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은 내 핸드폰으로. 그럼, "

은의 말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고, 훈련이 잘 된 군인들처럼 알프렛은 겉옷을 집어들었고, 콜은 마시던 콜라를 들고 가게 구석의 컴퓨터로 걸어갔다. 라에느는 잠시, 리를 보며 머뭇거렸지만, 곧 가게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저 아이, 당신에게 듣고 싶은 게 있었나봐. "

어느새 겉옷을 걸치고 내려온 알프렛의 말에, 리는 그저 입가를 살짝 올려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듣고 싶은지, 조금은 짐작이 되었기 때문에.

" 일이 복잡하게 되겠는걸, 다녀와서 봐. "

알프렛은 손을 흔들고는 가게문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 문에 달린 방울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리는 그 문을 열고 나왔다. 불길하다거나,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지만.
천천히 인파에 섞여 들어간 리는 그대로 명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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