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형광등을 담은 네모난 반투명의 유리케이스가 붙어있는 연한 베이지 색의 천장. 그 천장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익숙하게 바라보았던 '미풍'의 회반죽 바른 다갈색 나무 천장과는 틀린, 그리고 이곳에 익숙해지는 동안 내리 보았던, 너무나 새하얘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워 보였던 명동성당 구석의 그 천장과도 틀린 느낌으로 리에게 다가왔다.  
이곳이 '집'인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으로 머물고 있는 '숙소'인 것이다. 여기나, 명동성당이나, '미풍'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에게 '집'이란 건, 이미 그 날 이후부터 없었으니까..
미풍의 아침에는 동료들이 있었다. 막 구워낸 빵의 냄새나, 시끄러운 도시의 아침 소리가 두껍지 않은 창문을 넘어 들어오곤 했다. 자신을 깨우는 소오류의 목소리, 그녀만의 독특한 노크 소리 현현의 옅은 웃음소리, 그가 기도를 올리는 나즈막한 웅얼거림, 그런 사소한 다정함들을 깡그리 잊게 해 준 것이 명동성당 구석의 작은 방에서 맞이하던 아침이었다. 잠들기 힘든 밤을 새우다시피 지내고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천장과 같은, 손대기 힘든 순백의 벽, 차갑게 자신을 둘러싸고 잇는 '이세계'의 물건들, 주야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 대낮과 같은 밤의 조명들과, 한없는 침묵.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과 같은 철제의 가구들 틈에서 두 달을 보내면서 마주친 얼굴이라고는 까망과 하양으로 이루어진 옷을 입은 단 한 사람의 여인, 시스터 시스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곳-. 신촌 뒷골목에 자리한 지하를 포함한 5층 건물의 3층. 동편으로 창이 난, 지금까지의 두 곳과 넓이는 별반 다를 것 없는 이 방. 내려진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는 있지만, 마치 새벽처럼 조용한, 퍼진 햇살이 뿌려진 온통 베이지색인 방. 이곳이 지금 리의 숙소였다. 미풍처럼 동료들이 잇는 건 아니었다. 빵 냄새나 깨우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명동성당처럼 차가운 것은 아니었다. 비록, 어릴 때에 보던, 장식이 된 대리석의 천장과 고풍스런 가구가 가득한, 그 방의 편안함에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오래간만에 가지는 편안한 자리였다.
이 방에서 맞은 아침은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첫날은, 알프렛과 함께, 그리고 두 번째 날은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해가 채 떠오르기도 전부터 눈이 뜨여졌고, 세 번째 날인 지금, 리는 눈을 뜨기는 했으나 침대 밖으로는 나오지 않고, 상반신만을 일으킨 채 긴 호흡을 내쉬며 닫힌 문과 리놀륨이 깔린 바닥과 천장을 차례대로 바라본 다음, 침대의 머리받이에 등을 기대고 다시 블라인드 사이로 실금처럼 들어오는 주황빛 햇살로 시선을 돌렸다.  
옆방에 잇는 것은 알프렛, 위층에는 가게주인이자, 건물주인 은, 이층에는 주방일을 봐주고 있다는 30대 후반의 남자. 이 건물에는 그렇게 해서 모두 4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고 이 시간에 깨어서 무언가를 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지금은, 단지 리 혼자만이 깨어 잇는 시간이었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은 온갖 종류의 차(茶)의 향기, 자신이 아는, 혹은 자신이 모르는 미묘한 향기, 그리고 그것보다는 조금 짙은 농도로 퍼진 알코올의 내음, 담배의 매캐함이 약간. 유리창을 넘어오는 햇살은 약간은 탁한 주황색으로 블라인드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황색이 곧 건물의 그늘에 가려져 절반으로 줄어들고, 다시 어두워지는 것을, 리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골목과 골목을 타고 골목길 밖의 대로의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침묵뿐인 오전의 조용한 시간. 만일, 위층의 누군가가 깨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가 이 방까지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어제의 경험으로 리는 잘 알고 있었다. 조용하고 네모진 방에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묘하게도 리에게 안정감으로 다가왔다.
익숙해지고 잇는 것이다, 이 자리에.
분명히 자신이 존재해서는 안 될, 그런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단 사흘만에, 여기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가로 걸어가, 그 얇은 플라스틱을 들추고 유리 너머로 펼쳐진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소리는 유리에 걸러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슬슬 중천으로 떠오르는 햇살에 거리의 모습은 건물과 건물의 틈 사이로 선명하게 들어왔다. 지나다니는 자동차와, 사람들, 혼잡스럽고 활기에 가득한 아침의 거리. 간간이 장식처럼 선 가로수의 이파리가 가을비를 맞고 군데군데 바랜 듯한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것은, 회색에 가까운 하늘. 빛 바랜 가로수 외에는 자연 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온통 돌과 유리와 철로 지어진 성들이 늘어선, 회색빛 하늘과 흐린 별과 탁한 대기로 감싸인 이 곳에서 안정감을 느낀다고? 리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이것은 내가 떠나온 것들에 대한 배신이다. 그 푸른 하늘에 대한 배신, 그 수많은 별들에 대한 배신, 그 무성한 숲과 던젼과 암흑의 밤에 대한 배신. 아직도 가온이 흘리던 그 피의 색이 눈앞에 선명한데, 소오류의 가슴에 박힌 숏소드가 손에 잡힐 듯한데, 그리고, 지금이라도 눈을 감았다 뜨면,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긴, 현현의 그 녹색 눈동자가 보일듯한데. 그렇게 슬프게 울던,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흐느끼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 당장이라도 꿈에 나타날 것 같은데, 나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
창턱에 기대어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유리를 통해 보이는 거리와 베이지 색의 방을 천천히, 그리고 무표정한 눈으로 리는 바라보았다.
꿈을 꾸지 않으려 했다. 꿈에는 언제나 잊고 싶은 것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꿈에서나마 그 얼굴들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창 밖의 광경을 보면서 리가 느끼는 것은, 자신이 그 동안, 왜 이곳에 왔는지를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자책감이었다.
애초에 모든 현실을 포기하고 '꿈'으로 온 것은, 가온을 죽인- 가엘리온 엘르, 가온과 같은 이름을 가진, 가온과 닮은- 그녀가, 자신을 죽이고 싶으면 '꿈'으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심을 도와 준 것은, 오션 그린의 눈동자였다....
찾아야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두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리가 살아서 이곳에 잇는 유일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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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
" 예, 찾을 수 있을까요? "
" 글쎄요... "

은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턱을 긁었다. 셀 수도 없이 플레인스 트러블러들이 드나들고, 아무도 모르게 사람이 사라지는 이 도시에서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이, 의외로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대 놓고 힘들다고 말하기에, 리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 급합니까? "
" 꼭 그렇진 않습니다만... 찾기는 해야 합니다. "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꼭- 뒷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의미는 전달된 것 같았다. 다시 한번 턱을 긁적인 은은, 프라이팬에서 타닥거리고 있는 베이컨을 뒤집은 다음, 옆으로 밀어놓고 계란을 집어들었다. 가볍게 프라이팬 손잡이에 두드려 깬 다음 프라이팬에 얹자 치익 하고 기름 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은은 능숙한 태도로 반숙된 계란 위에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잠시 기다려 접시에 옮겨 담았다.

" 그 사람 때문에 넘어올 결심을 한 모양이군요. -아 거기 냉장고에서 우유 좀 꺼내 주시겠습니까? "
" 사람들입니다. "
" .. 몇 명이죠? "
" 둘입니다. "

리는 은이 내미는 베이컨 에그 접시를 받아들면서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은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약간 굵어졌다. 그 어색한 잠깐의 침묵을 깨듯이 토스터가 탁, 하고 여우색으로 구워진 식빵을 퉁겨 올렸다.

" 알프렛은요? "
" 깨면 알아서 먹을 겁니다. 먼저 들죠. 둘이면 남자와 여자? "
" 아뇨, 둘 다 여자입니다. "

그리고 또 한번의 대화의 단절, 대화는 끊어졌지만 은이나 리의 손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토스터에 새 빵을 집어넣었고 은은 선반에서 마멀레이드 병을 내렸다. 두 사람이 그렇게 아침 식탁을 차리는 동안, 커피메이커에서는 뽀얀 김과 함께 커피 향이 풍겨왔다. 마멀레이드 병을 식탁에 내려놓은 은은, 커피메이커에서 포트를 뽑아와 자기 잔에 따르고 리를 돌아보았다.

" 커피? "
" 주십시오. "

탁, 한번 더 토스터가 빵을 퉁겨 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았다. 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리에게 물었다.

" 여자 둘이라, 어떤 관계인 겁니까? 설마 둘 다 애인은 아닐 테고- "
" ... 한 사람은 죽여야 할 사람, 한 사람은 구해야 할 사람입니다. "
" 시적이군요 "

희미하게 은이 웃었다. 그것은 어쩌면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씁쓸한, 지금 은이 마시고 잇는 커피를 닮은 웃음이었다. 은은,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깊은 색의 블루 아이즈, 그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나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이 서울로, 시간과 장소를 건너뛰어 온 남자를.  

" 해 보지요, 어차피 리할트 씨도 우리 일을 도와주는 거고, "
" 감사합니다 Mr. 서, "
" 뭘요, "

베이컨과 반숙의 계란프라이, 여우색으로 잘 구워진 토스트와 손으로 만든 마멀레이드, 그리고 커피 한 잔이 잇는, 오전 열 한시의 늦은 아침식사.
늘어진 하품소리와 함께,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 남자들끼리 맛있게 해 놓고 먹네요. "
" 일어났어 알피? "
" 네, 나도 커피 줘요 은 아저씨. 우유 넣어서. "

분명히. 세 사람이 자는 곳은 각자 다른 곳이었는데 왜 약속이나 한 듯이 이 식당으로 모이는 걸까, 당연한 듯이 우유를 꺼내놓고, 당연한 듯이 커피를 넉넉하게 내리는 행위, 너무나도 익숙한, 친구들의 것들.
풋, 리는 가볍게 웃었다. 부디 내가 목적을 이룰 수 있기를. 그래서 이 모든 행동이, 느끼는 감정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안정감이, 두고 온 나의 친구들에게 배반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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