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창 밖은 암흑이었다. '그곳'과는 달리, 이곳은 태양 이외의 조명수단이 없었으니까 저 암흑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이라면 중요한 장소나 빛이 꼭 필요한 장소에는 마법을 사용한 조명이 있었을 테지만, 마법사가 적어지고, 마나가 희박해진 지금에는 그것도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달은 이미 진 시간, 그리고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은 시간, 창백한 별빛만이 희미하게 하얀 창턱을 넘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창백한 빛에 아련하게 빛나고 잇는 것은 길게 흘러내린 은발과, 같은 색의 속눈썹에 쌓인 얼음처럼 차가운 코발트 그린의 눈동자. 창턱에 기댄 나인의 하얀 옆얼굴은, 별빛으로 마치 대리석과 같은 투명한 하얀 색으로 비쳐 보였다. 손을 대면 그대로 부서져 버릴 듯이 얇고 섬세한 조각상과 같은,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투명감이었다..

" 어울리지 않아요 그런 모습. "

어둠 속에 또 다른 어둠이 더해졌다. 소리도, 육중함도 느껴지지 않은, 그저 밤보다 더 깊은, 어둠을 응축시켜 만든 듯한 암흑색의 갑주, 그리고 그 안에서 미소를 띤 눈매를 하고 있는 한 남자. 그는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갑옷과 같은 색의 머리칼을, 그녀처럼 길게 내려뜨리고 있었다.

" ..그럼 나에게 어울린다- 라는 건 뭐지. "

의문형이 아닌 그녀의 물음에 남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웃는 것은 단지, 얼굴뿐이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묻어있지 않았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 당신은 좀더 강한 모습으로, 에- 그러니까 여왕님 같은 모습으로 서 잇는 것이 어울리죠. 조금은 도도하게 또 조금은 차갑게. "
" 그런 거, 허락 받지 못했어. 애초부터. "

낮은, 차분하고 낮은, 그리고 서늘한 느낌을 주는 카운터 테너에 가까운 알토의 음색, 그렇게 그녀는 별들이 만들어 낸 창백한 빛 속에, 그리고 그는 그 빛의  반대편의 어둠에 서 있었다. 빛과 어둠, 각자 그 안에서.
남자가 발소리도 내지 않고 한 발짝 빛으로 걸어나왔다. 음영이 선명해지면서 그의 모습이 좀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전사보다는 약간 작은 체형, 그러나 다부지게 갑옷을 걸친 그의 실루엣의 허리께에 길다란 장검의 그림자가 보였다. 온통 새까만 옷과 새까만 갑옷, 새까만 장검의 손잡이와 검집, 그리고 그 지독하게도 새까만 갑주의 가슴 판에 도드라지게 새겨진 새하얀 검 모양의 음각. 검은 머리카락이 감싸고 있는 평범한 얼굴은, 건강한 밀빛으로 그을려서 미소를 띄고 있었다.

" 그래도 역시 어울리지 않아요 듀크니스 나인, "
" 그렇게 해죽거리는 얼굴로 말해봐도 설득력 없어. "

남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에 난처함이 덧발라져 드러났다.

" 가엘리온양과 똑같은 소릴 하시는군요 "
" 널 보면 누구라도 그런 소릴 할거야. 무엇 때문에 왔어? "

스윽, 나인이 고개를 들자, 어깨 위에 늘어져 있던 은발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머리칼에 반사되던 별빛이 약간 다른 창백함으로 그녀의 얼굴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그 별빛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얼음처럼 차가운 색의 코발트 그린 아이. 그 눈이 똑바로 자신의 앞에 선 남자의 눈을 응시했다. 단지, 바라보고 있는 쪽은 방긋, 미소를 띄우고 있다는 것이, 조금 언밸런스하고 어색할 뿐이었다.

" 저는 단지 ... "

웃음, 소리내지 않는, 웃고 잇는 얼굴. 반쯤 어둠이 드리워진 그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순간적으로 오싹할 정도의 공포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공포는, 마치 순간적인 눈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나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다시 맥이 풀릴 정도의 긴장감 없는 미소를 띄운 평범한 한 남자일 뿐이었다.  

" 단지 바쁜 일이 시작되기 전에 여행이나 다니고 있는 거죠, 오랫동안 못 뵈었던 분들도 만날 겸.. "
" 또 누군가 죽는다는 이야기군 "
" 아핫,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씀하시면 부끄럽지 않습니까. "

나인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고 긴 머리를, 검은 색 일색인 갑옷과 검을, 하얗게 음각된 검 모양의 문장을, 미소를 띄운 얼굴을, 그리고... 어둠에 의해 검은빛으로 보이는, 흑적색의 눈동자를 잘라 버리기라도 할 듯한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고 나서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돌아가, 여기는 함부로 외부인이 들어올 만한 곳은 아니니까. "
" 왕성 안이라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언제 그런 것 가리는 걸 보셨습니까? "

빙긋, 어떻게 보면 참으로 바보스럽고 친근하게 보일 듯한 그의 웃음은, 그 뒷면에 등골이 써늘해질 듯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어지간해서는 그의 미소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 표면을 장식한 웃음만이 그의 얼굴을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풋...  나인의 입가에 옅게 비웃는 듯한 묘한 미소가 맺혔다.

" 그래.. 그런 걸 가릴 정도로 안면이 물렁한 놈은 아니었지 분명히.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이야... "
" 역시 그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시면 부끄럽지 않습니까, 일 이년 본 사이도 아닌데 "
" 그런 정도로 부끄러워 할 녀석이 아닌 건 잘 알아. "

차갑게 쏘아붙인 나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 떠 있는 수많은 별들, 그리고 그 별들 사이를 채운 짙은 암흑. 이것이, 이렇게나 마음 아프게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 좋은 별빛이에요. 그쪽에서는 볼 수가 없죠. "

어느 사이엔가 남자는 발소리도 없이 나인의 옆에 와 있었다. 창턱에 한 손을 짚고 밖으로 몸을 빼어서, 나인과 같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장막처럼 드리운 그의 검은 머리칼, 검은 갑주. 흘끔, 그를 돌아본 나인은 마치 몰래 훔쳐보다가 들키기라도 한 듯이 급히 시선을 허공으로 되돌렸다

" ... 언제 돌아가지? "
" 해가 뜨면 갑니다. 일이 급하니까요. "
" 그렇군.... "

해가 뜰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암흑은 더욱더 짙어졌고, 별빛은 그에 대항이라도 하듯 창백한 푸른빛을 내 비추었다. 그리고 그 창백한 빛은, 나인의 옆얼굴을 타고 흐르듯이 그녀에게 내리쬐었다. 창백한 별빛이 타고 흐르는 반듯한 이마, 그 아래로 흐른 코의 쭉 뻗은 라인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진홍의 입술이 꼭 닫힌 채 코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라인을 그린 턱과 목.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줄기의 폭포수처럼, 별빛의 안에서, 너무나도 아름답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 듀크니스 나인, "
" 응? "
" 당신은... 운명을 원망하십니까? "

남자의 질문에, 나인은 약간은 슬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움직였다. 묵직하게, 은빛의 머리칼이 일렁거려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고 말해주었다. 남자는 여전히 웃음 띈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 동편이 밝아지는군요. "
" 아, "
" 가겠습니다, 또 한가해지면 찾아 뵙지요. "

암흑을 무너뜨리면서 동쪽 하늘이 밝아져왔다. 별빛이 점차 옅어지면서, 새까맣던 하늘이 보랏빛으로 천천히 바뀌어갔다. 그리고, 하늘이 밝아지듯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암흑이 아침빛에 물러나듯이 그렇게. 별빛이, 태양빛에 사라지듯이 그렇게. 처음에 아무 소리도 없이 나타났던 것처럼, 침묵과 함께 사라졌다.

" 운명을 원망하지는 않아...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바꾸어 놓았으니까.. "

그가 사라졌던 그림자와 점차 검은빛에서 붉은빛으로 그리고 다시 푸른빛으로 바뀌어 가는 동쪽하늘을 바라보면서 나인은 낮게 중얼거렸다.

" 제 2인자로의 운명을.. 받아들여서 나는 모든 것의 2인자가 되었으니까.. 원망 같은 건 하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그라비스, 숙명은 어떻게 하면 좋은 거지? "

여전히 빛으로 둘러싸인 채, 나인은 허탈한 눈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목소리에는 그녀가 20대 초반의 외모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짙은 회한이 배어 있었다.

" .. 우연히도,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 숙명을 ... 우리들은 원망해야 하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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