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일주일 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종종 예의 그 안티 사이트를 방문했다. 그 곳에서는 혜정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오고가곤 했다. 혜정이 작년 말부터 올 초에 캐나다 어학연수를 학교 지원으로 다녀올 정도로 재원이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 그러나 혜정이 그 사이트에 직접 글을 남기는 일은 없었다. 혜정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듯한 한 사람이 주로 혜정과 전화통화를 한 이야기를 올려놓고는 했다. 씁쓸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 목소리를 들으니 안쓰럽더라. 공식적으로 번역가한테 사과요청을 해야 한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들은 번역과 창작의 차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본다면 원작이 벌써 몇 년 전에 나왔다는 것, 그리고 별빛이야기가 불과 작년에 연재가 시작되었다는 것- 연재 시작지점을 생각해도 '시간을 거슬러 가다'가 훨씬 먼저 나왔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비난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우상을 잃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걱정하는 것은 혜정이 내게 연락을 해오는 것이었다. 그 애는 지난 번의 전화통화와 바다넷에서의 글이 내게 고별선언과 같은 것이었음을 알까. 그러나 마음으로 이미 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애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도 아무렇지도 않을지, 나는 장담할 수 없다.

매일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웠다. 몇 몇 사람들의 이메일은 욀 정도가 되었다. 나는 침묵하면서 그들의 분노에 찬 글들을 읽었다. 묘한 열정이랄까. 스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 실제를 눈앞에서 볼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그래-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그다지 없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들이 없던 것은 아니겠지만, 애당초 내겐 없는 감정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게 새로운 힘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냉정한 비웃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매일 매일 학교를 가고, 큰 대형 서점에서 영어로 된 소설 몇 권을 사고,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교수들이 수업에서 권하곤 하는 소설가들의 책을 도서관에 틀어박혀 탐독하노라면 나는 아주 예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를 잃고 현진이를 잃어도 세상은 돌아갔다. 나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책을 읽었다. 그 때처럼.

"언니- 학생회실에 언니 우편물 와 있던데요?"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에 마주친 동기가 반갑게 불렀다. 학생회실에 갈 일이 있나. 사물함도 복도에 있으니.

"고마워."

돌아서서 학생회실로 향하는데, 동기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통성명은 했던가. 내 이름을 모르는 동기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아, 그러잖아도 연락하려고 했는데요. 소포가 와 있어요."
"네, 고맙습니다."

커다란 우편물은 운동화 상자만큼은 되는 정도의 크기다. 적힌 이름이 낯설다. 소포는 반갑지 않다. 최근 2년간 소포와 함께 좋은 소식이 온 경우는 없다. 그러나 나는 조교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는다.

"음, 혹시 '시간을 거슬러 가다' 라는 책 봤어요?"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조교가 묻는다. 나는 예, 간단하게만 대답한다.

"그거 번역한 사람이 이름이, 이나경이더라구요."

나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가벼운 웃음이 나일리 없잖아요 정도로 비춰진 모양이다. 박사과정을 밟는다는 조교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 웃는다.

"그럼 가볼께요."
"아 예."

돌아서 나온다. 웃음은 편리하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상대방이 원하는 답으로 비춰지게 할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로도 가능하지. 건물 밖 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았다. 누런 소포 종이 위에 쓰여진 이름은 처음 보는 이름. 주소는 대전. 소인은 대전 중앙 우체국. 대전에 아는 사람이 있었나. 모르겠다. 포장을 뜯으니 생각대로 신발 상자였다. 두껑을 열었다.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간다. 바람이 불어 내가 잡지 않고 있던 상자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말라비틀어진 분홍 장미묶음이 바닥으로 흩어지고, 같이 들어있던 날선 면도날들도 헛되이 떨어진다. 종이 위에 피같이 붉은 물감으로 쓰여진 두 글자가 바닥을 떨며 뒹군다.

죽어.

"누나?"

들릴 리 없는 음성이 뒤쪽에서 들린다. 언제 이정도로 완에게 기대게 되었는가.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한 혐오감이다.

"누나?!"

조금 더 높이 들리는 음성. 나는 나도 모르게 뒤쪽을 돌아보고, 거기에 있을 리 없는 완을 보고 굳어버린다. 공대 건물과 인문관 건물은 20여분의 거리. 하지만 입구조차 정문과 후문을 구별해서 쓰는 두 개의 단과대학은 같은 학교 안에 있어도 별로 부딪힐 일이 없다. 그러니까 완을 학교 안에서 만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너 여기 어쩐 일이니?"
"교수님이 지나가다가 누나 봤다고 그러셔서. 누나 기말고사 기간이라서 얼굴 보기 힘드니까."

그래서였나. 요즘 전화를 걸거나 불쑥 찾아오거나 하는 일이 줄었다 했다. 정작 나는, 기말고사에 그닥 부담도 갖고 있지 않은데. 그보다 교수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내가 그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그럴 리가. 완이 어쩌면 내 사진을 교수에게 보여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찍는 것을 지독하게도 싫어하는 내가 '우리'끼리는 몇 번 사진을 찍은 적이 있으므로 완은 내 사진을 한 장 정도는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왜 이래?"

완이 바닥을 뒹구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 옆에 마침 포장지가 같이 뒹굴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내용물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완은 포장지의 주소를 확인하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자의 두껑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완은 바닥에 떨어진 또 한 장의 종이 - 붉은 글씨가 쓰여진 -를 발견하곤 완전히 표정이 굳어버렸다. 완이 거칠게 종이를 구겨서 상자 안에 던지듯이 넣고 두껑을 닫아서는 쓰레기통에 쑤셔넣었다.

"…누구야 이 사람?"
"모르는 사람이야."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완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 완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지, 다음에 완이 무슨 말을 할지. 날 보고 반갑게 웃던 완의 얼굴이 성난 얼굴로 바뀌는 순간의 장면을 비디오의 리와인드 버튼을 눌린 것처럼 기억속에서 반복적으로 보고, 나는 그냥 그 자리에 계속 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왜 이런 걸 보내, 누나한테?"
"…글쎄, '별빛 이야기'의 팬이라거나."

완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누나 학교를 알아?"

그도 그랬다. '시간을 거슬러 가다.' 의 표지에는 작가의 사진과 작가의 프로필이 실려 있고, 뒷페이지에는 내 약력이 씌어 있다. 그러나 그 책의 독자들이 내 주소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들이 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어느 책을 번역했었다는 정도. 그리고 나의 이메일 주소. 그 세 가지를 통해서 내가 지금 새로 다니고 있는 이 대학과, 학과와, 학년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나? 그럴 리가. 전 대학의 동창회 명부에는 내가 여기 새로 입학한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지방 명문이라는 전 대학에서 자신들의 동기가 다른 대학에 새로 입학했다는 것을 달가워 할 리도 없을뿐더러, 그런 사실을 굳이 알릴 나도 아닌 것이다.

"죽어버리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일은 그 일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아니면 죽은 여신이가 보낸 건가?"

실언이다,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완은 눈에 띄게 얼굴을 굳혔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

완은 휙 돌아섰다. 완이 유난히 커 보인다. 나는 앉아 있고 완은 서 있기 때문이라고는 해도. 사람의 뒷모습은 참 많은 표정을 담고 있다. 지금 완의 얼굴 표정을 볼 수 없는데도 나는 완이 지금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미안해."
"…혜정이인가."

내 말과 완의 말이 거의 동시에 나왔다. …알고 있어. 지금 이 대학을 새로 다니고 있는 이나경과 '시간을 거슬러 가다'의 이나경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그 중에 내게 악의를 품고 있을 사람… 그 안에 있는 것은 두 사람 밖에 없다는 것.

"누나."
"…응."

완은 돌아서지 않는다.

"그 책 번역 맡은 것, 혜정이한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거야?"

완이 선 쪽으로 햇빛이 있다. 눈이 부셔서, 그 등을 보고 있기가 어렵다. 그래서다. 눈물이 핑글 맺혀 버리는 건 저녁으로 접어드는 오후 끝나절의 햇살이 눈이 부셔서다.

"아니지? 누난, 내가 혜정이 야단칠 때도 누나는 나 진정시켜줬잖아."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쉰다. 어지럽다. 완의 어깨 너머로 부시는 햇살이, 꽤 쌀쌀해진 바람이, 시험을 마친 듯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부담스럽다.

"…나는…."
"등 돌리고 말하지 마."

완의 말을 자르는데 왈칵, 목에서 뭔가가 걸렸다.

"네 등 보고 말하기 싫어. 그러니까 그렇게 돌아서서 말하지 마."

눈이, 볼이 뜨겁다. 흠칫해서 돌아서는 완이 흐리게 보인다. 완이 놀라고, 당황하고, 내게 다가선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는다. 눈이 부셔서, 뜨거워서. 완의 떨리는 손이 내 어깨를 붙잡는다.

"…너한테까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말 끝이 완의 가슴으로 묻혔다. 완의 캐시미어 점퍼가 포근하다.

"미안해…."

완의 목소리가, 벽 너머처럼 멀다.

"…다신 돌아보고 이야기하지 않을게. 누나한테 등 보이고 이야기하지 않을게."

완이 당황해서 두서없이 하는 말들이 멎을 때쯤 내 시선 앞에서 완의 가슴이 멀어졌다. 우편물을 받은 나보다 어쩌면 완이 더 놀랐을지도 모르는데. 순간 내 눈에서 흐른 눈물이 껄끄러웠다.

"나, 지금도, 좋아하니?"

완이 나를 보았다. 끔찍한 표정. 완의 표정은 그랬다. 참담하고, 비장한. 나를 알기 전의 너는 저런 표정은 짓지 않았다.

"누나… 나 때문에 힘들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을 때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은 완의 답을 들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 완을 쳐다보았다. 일어서더라도 나보다 한참 높은 완의 얼굴선이, 눈매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들은 변한다. 함께였던 사람들이 더 이상 함께가 아니고 서로에게 매서운 말들을 쏟아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소년은 자라서 청년이 된다.

"너는 나 때문에 힘들잖아."

나는 너와 있어서 웃을 수 있었다. 네가 운전하는 차안이라서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너는 그래도 괜찮을까. 나는 계속해서 너한테 이렇게 이기적으로 굴어도 되는 것일까.

"서로 아무렇지도 않으면, 그건 그냥 남이지."

완은 얼굴을 굳힌 채로 말하다가,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무렇지 않다고는 말 안해. 그게 누나가 듣고 싶어하는 답이라고 해도. 힘들어. 누나가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 안타깝고, 아까처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머리를 긁적이던 완은 고개를 돌리려다가, 아까의 내 말 때문인지 억지로 고개를 다시 돌렸다. 바람이 차가운걸까.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렇지만… 힘든 쪽이 더 나으니까."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곧 크게 내쉬었다. 사람은 변한다. 멈춘 채로 몇 년을 살아온 나도, 이제는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변해왔다. 울 줄 알고, 소리칠 줄 알고, 화낼 줄 안다. 아직 서투르지만.

"나, 커피 사러 가야 되는데. 같이 가자."

밖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다른 말. 그 말을 완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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