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20.짧은 행복



단행본 한 권 분량의 번역 원고를 출판사에 발송한 것은 그리고 나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나는 그동안 애써 여신의 모든 것에서부터 멀어지려 했다. 책장 한칸을 채우고 있는 신이의 책을 피해 거실에서 작업을 했다. 선물 받은 새하얀 책은 아예 펼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번역한 글에서 조금이라도 신이가 느껴질 땐 몇 번이고 새로 문장을 만들었다. 여태까지 한 번역 중에 가장 힘드는 작업이었다. 수정을 원하는 전화를 기다리는데 이진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배 말대로 적임자였다고 높은 음성으로 말하는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알지 못하나보다. 그녀가 보내준 초벌번역은 아예 다운만 받은 채 열어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아, 그리고 역자 약력이 필요한데요. 어떻게 할까요?"

"제가 작성해서 드려야 되나요?"

"그냥 출신학교만 일러주시면 번역한 글 목록은 청랑에서 갖고 있으니까 저희쪽에서 만들 수 있겠네요."

역자약력이라. 책의 맨 뒤쪽에 조그맣게 적히곤 하는 그것을 주의깊게 살펴볼만한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별 생각 없이 나는 중학교때부터의 학교를 불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제사에 참석하러 가고, 나는 마감을 핑계로 남았다. 조금만 일찍 끝냈다면 어머니와 함께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역시도 그것을 원했다. 다만 나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만의 혼자일까. 휴일의 TV에선 얼마 전부터 과장된 대사들이 자막처리까지 되어서 클로즈업되는 것이 유행이었다. 과장된 억양과 음성에 과장된 감정들로 도배된 TV프로그램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무감정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음성 사서함에 들어있는 완의 목소리를 세 번째로 다시 들었다. 지금 아무 긴장 없이 들을 수 있는 타인의 목소리는 거의 없고, 어머니 역시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 마감 끝나면 전화해줘. 맛있는 거 먹고 좀 쉬어야지? 꼭 전화해 누나. ]

다시듣기.

[ 나야, 이제 다 끝나가지? 너무 서두르지 말고- 마감 끝나면 전화해줘. 맛있는 거 먹고 좀 쉬어야지? ]

뚝. 전화를 끊고 2번을 길게 누른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완이 네, 이완입니다, 조금은 어른의 목소리로 말한다.

"나야."
"아, 누나!"

전화기 너머에서 섞이는 잡음으로 임마, 연구실에서 연애하지 말랬지- 젊은 교수의 장난기어린 음성이 들렸다.

"언제 마치니?"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어."

예의 그 교수가 어어 이완, 너 많이 컸다. 한다. 웃음이 나오는데 언뜻 혜정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선생님은 완 오빠 이야기할 때만 웃어요. 나는 웃음을 참으려다가 관둔다. …상관없잖아. 웃는 이유가 누구이건간에. 지금 나는 어쩌면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에 하나였을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의식한다는 것인가. 그것도 내가 벼랑 끝으로 밀어낼 사람을.

"별로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옆에 계신 거 교수님이지?"
"어, 들려?"

교수님, 들린대요! 완이 소리를 죽여 말하는 소리와, 헉- 야 이거 나 미움받겠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적어도 완의 일상은 힘들지 않은 것 같으니까. 그러니 내가 조금 기대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놓쳐 버린 현진을 몇 년 후에 다시 만나 서로의 조심스러움에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지금을 후회할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오늘은 내가 이사람 불러낸 거니까, 보내줄테니까 안심하세요.“

교수가 조금 톤을 높여서 말했다. 30대 중반이라는 교수와는 금새 친해졌다고 자랑하던 완의 말이 허풍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친절한 건 여자한테만이야- 라고 덧붙인 완의 말은 농담이었겠지만.

"나 아직 밥 한 끼도 안 먹었다?"
"우앗, 굶으면 안된다니까!"

완이 당황한 음성을 듣는 것이 즐겁다. 아니, 행복하다.

"에잇, 당장 나갈게. 집 앞에서 전화할테니까 기다려!"
"응."

전화를 끊고 소파에 기대어 멍하니 앞을 본다. 미안해, 신아. 나 이렇게 됐어. 편해지고 싶어. 사랑받고 싶어.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이런 날.

마지막 마무리에 몰두한 며칠동안 신경을 쓰지 않은 방은 엉망이다. 빨래통에 쌓인 빨래를 돌리고, 거실이며 안방, 내 방을 청소기로 밀고 걸레질하고, 사전을 제자리에 꽂고 책상의 노트북을 꺼서 제 위치로 넣고, 구석구석을 원래대로 돌려 놓는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렸는데, 막 문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누나? 있어?”

인터폰으로 보이는 완의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무슨 일이지?

“왜 올라왔니? 아래에서 전화하지.”

문을 열어주며 중얼거리는데, 완이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당황한 나는 그를 확 밀어낸다.

“뭐, 뭐하는 거니!”

완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허하게 웃었다.

“전화를, 안 받아서. 아래에서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저렇게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누나 밥도 안 먹었다고 그랬고, 갑자기 너무 걱정이 돼서.”

“청소하고 있었어. 청소기 소리에 못들었나봐. 핸드폰으로 전화했지?”
“응.”

나는 완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바보, 집 전화로 걸어볼 생각도 못했니 그래?”
“…그렇구나. 맞아.”

완은 머쓱하게 웃는다. …겁내고 있구나, 완아. 너도 나랑 같아. 너도 아직 신이한테서 자유롭지 못한 거야. 그래서 여전히 무서운 거야. 신이처럼- 나도 갑자기 널 떠나버릴까봐.

“교수님한테 야단 안 맞았어?”
“아니- 오히려 누나한테 맛있는 거 사 주라고 명령을 받았지.”

애써 표정을 돌리며 완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것도 기다리지 못했나보다.

“교수님이 파스타 잘 하는 곳 알려줬는데, 파스타 괜찮아?”
“응.”




완의 차를 타고 길거리로 나오니 바깥의 풍경이 며칠 새 달라져 보였다. 가을이 벌써 깊었다. 노란 은행잎이 깔려 있는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은 어쩐지 모두들 스산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까르보나라 레귤러 사이즈를 주문한 내게 완은 라지 사이즈의 봉고레를 잔뜩 덜어 건넸다. 마감 후엔 속이 좋지 않아서 육류는 꺼리는 것을 알고 좋아하는 치킨 파스타 대신에 봉고레를 주문한 걸 거다. 배가 고프긴 고팠던 건지, 맛나게 먹는 완의 얼굴에 식욕이 더해진 것인지, 잔뜩 배부르게 먹고 한쪽 벽에 기댔다. 나른한 식곤증이 편안하게 밀려온다.

“언제 나와, 이번 책은?”

“글쎄. 출판사가 얼마나 속도를 내 주느냐겠지. 삽화를 넣지는 않는 것 같지만 표지 디자인도 끝냈는지 모르겠고. 편집도 해야 하고. 나 출판사 자세한 일은 잘 몰라.”

“같이 대학원 다니다가 그만두고 영문과로 옮긴 여자선배가 있는데, 누나가 번역일 한다니까 굉장히 궁금해 하더라.”

“뭐, 나야 줄을 잘 선 셈인걸.”

나른함.

“나보다 더 열을 내서,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구 막 흥분하더라구. 나까지 으쓱해지던걸. 그 선배가 그렇게 열내는 거 처음 봤어.”

그 호칭이 낯설었다. 여자선배. 선배. 그리고 깨달았다. 완이 누나라는 호칭을 다른 누구에게도 쓰지 않는단 걸. 아- 그랬구나.

“응, 왜 웃어?”
“배불러서 행복하거든.”

완은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주 웃었다. 나는 백팩에서 디스켓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첫 독자가 되어주세요, 이 완씨.”
“앗, 영광!”

완이 헤벌쭉 웃는 것에 가슴 한구석이 아프다. 난 잔인한 사람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아마도 완은 굉장히 힘들어할텐데, 아직까지 신이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내가 똑같은 너에게 이런 일을 하다니. 이것은 완을 공범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라, 부디 이 글이 ‘별빛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다고 느껴지기를 바라는 욕심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많이 졸리면 차에 갈래?”

소중하게 디스켓을 맨스백에 넣으며 완이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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