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아, 맞다- 너 혹시 그거 기억나? 내가 작별이라고 선물했었던 무한궤도- 대학가요제 앨범"

마음을 들킨 것마냥 놀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장도 못 뜯고 갖고 있었어. 아직도 있을 걸."
"…뭐? 맙소사. 그럼 너 못 봤겠구나."
"응?"
"그 안에 편지 썼었는데. 난 니가 답을 일부러 안한다고 생각했지 뭐야."

포장 안에 무언가 있었던가- 나는 그냥, 조그맣게 웃었다. 지난 일이지만, 처음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내가 누군가의 외침을, 누군가가 내게 하는 말을 놓쳐 버린 건. 바보같게도.

"뭐라고 썼었는데?"

"풋. 지금은 닭살 돋아서 그런 말 못할 거야. < 내가 너의 첫 번째 친구가 되어도 될까? 누가 물어도, 이나경의 제일가는 친구는 나라고 생각해도 돼? > 그 비슷한 말이었을걸. 닭살이지?"

그 나이의 여자아이들에겐 연애와 우정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보다 더 옆의 동성 친구를 미치도록 그리워했다. 평생 가장 절절한 편지를 쓰고, 모든 일에서 우선순위를 친구로 잡는다. 그 때의 나, 편지를 읽었다면 당연히 울면서 기뻐했을 것이다. 사랑해 현진아- 정말이야- 라고, 여신이가 내게 몇 번이나 그러했듯이, 현진에게 편지를 띄웠을 것이다.

"참 어렸구나, 우리."
"그래도 그리운걸."
"응."
"……편지도 참 많이 썼었어."

현진은 잠깐만, 하고는 장식장 아래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꽤 큼지막한 상자 안에서 검은 빛이 날 정도로 변색된 옛날 서류봉투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봉투 위에 쓰여진 <나경>이라는 글자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서 10통 가까운 편지봉투가 나왔다. 하나같이 보낸 사람의 주소가 없는, 발신인란에는 경. 이라는 외자 한자만이 적혀 있는 편지봉투의 일부는 우편번호의 칸이 5자리다. 거기에 한 칸을 더 만들어 억지로 여섯자리 우편번호를 써넣었다. 그 시절에- 아직 80년대와 90년대 사이의 변화를 느끼기에는 자신과 그 주변이 너무 소중했던 시대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책가방에 편지지며 봉투를 넣어 다녔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안에 품고 살았던 것일까. 모두가 작가가 될 것처럼 습작을 하고, 이야기를 끄적거리던 때에 나는 보낼 사람이 없으면서도 다른 아이들처럼 편지지를 사 모았었다. 그것들의 일부가 이리로 보내진 모양이다. 두려움으로 나는 차마 편지를 읽지 못한다.

이 편지들이 현진에게 도착하고 나서 우리의 학년이 바뀌어버린 어느날,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붉은 수취인불명 도장이 찍힌, 너무나 낯설었던 나 자신이 보낸 편지. 뭔가 잘못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며 새로 보낸 편지도 얼마 후 다시 되돌아왔다. 공중전화 앞에서 늘 걸었던 시외전화, 수화기 너머에서 기계적인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

"넌 긴머리가 잘 어울렸는데… 좀처럼 풀지는 않았지만."

혜진의 음성을 귓머리로 넘긴다.

"…편지가 되돌아오고, 전화가 결번이 되고…… 고의로 도망친 거라고 생각했어. 그 때 나는 분명히… 네가 부담스러울만큼 너한테 기댔으니까."

여신이 늘 내게 말했었다. 나경아, 내가 부담스럽니?

"미안……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이사를 가고 나서야 네 집 주소를 적은 수첩이 없어진 걸 알아서……,"

나는 담담히 그녀의 옛 말을 듣는다.

"얼마 후에 학교로 보내면 되겠다고 생각을 하긴 했는데, 학년이 바뀌었으니 반을 모르잖아."

그랬다면, 그저 학년과 이름만 썼어도 되었다. 학년에 이나경이 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중에 현진을, 서울에서 편지를 보낼 현진을 아는 것은 나 뿐이었을테니까.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고, 돌이킬 수 없다.

"……미안해, 정말."
"아냐,"

나는 심술궂게도, 바로 그 때문에 혜진이 나를 기억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긴 시절 이어졌다곤 하더라도 시간은 언제나 망각을 위한 유용한 약이다.

"매년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다 훑었어. 신인작가란 소개가 있는 책도 다 뒤졌고. 우습지? 내가 칠칠맞아서 너한테 연락을 못하게 된 건데."

"……고마워."

그녀가 번역자의 이름에 신경쓰지 않는 보통의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고, 어떤 면에서는 불행이다.

"요즘은 뭐하고 지내니?"
"대학 다니고, 프리랜서로 일 조금."
"어쩐 일이야- 니가 대학을 제 때 안갔을 건 생각도,"
"두 번째야."

자르듯이 나온 말에, 혜진은 아- 하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자유기고가?"
"번역쪽 일을 해. 처음은 영문과였거든."

긴 시간을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녀 앞에서는 오히려 말이 길어지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녀가 내게, 내 인생에서 제일의 우선순위에 있었기 때문이거나.

"미혼이니?"
"응."

그녀는 쓸쓸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현진은 학교에서 인기가 좋은 아이였다. 그 때- 교복을 입지 않았던 그 시절의 여중생들에게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는 운동부 아이들은 학교 안의 아이돌이었다. 현진은 그런 테니스부 안에서의 스타였고, 학교의 이름을 간간히 TV 스포츠 뉴스 시간에 찾을 수 있게 한 어린 영웅이었다. 그것이 나는 늘 궁금했었다. 어째서 현진이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인지.

"어머니랑 진학 문제로 많이 싸웠었어. 어차피 체육으로 진학할 거니까, 특기생이 되려면 환경 좋은 서울로 진학을 하라고 하셨거든. 근데도 이상하게, 난 널 내버려 둘 수가 없더라. 입술을 앙다물고 주변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네가… 어째선지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니가 나랑 같은 학교에 왔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지, 나도."

서울로의 전학은 학교에서 더욱 권했다는 것을, 뒤에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학교에선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다른 운동부를 키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했다. 그런 학교에서 현진같은, 전국대회급의 아이가 있다는 건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보낼 수 있었다. 많은 것을 잊었어도, 아버지의 가치관은 몸에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할지 생각해야해. 가사분담은 확실히 하던 아버지가 절대 요리만큼은 어머니에게 맡겼었던 것처럼.
어느 날이었던가, 어머니가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가셨던, 내가 10살 전후였을 때다. 아버지는 내가 보는 앞에선 처음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끼니마다 찌개가 다르게 올라왔고, 졸임에 무침을 무척이나 정성스럽게 만드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오시기 전날에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식은 밥에 볶아서 드셨다.

/ 어머니한테 아빠가 음식 했단 말 하면 안된다. /
/ 응? /
/ 우리가 먹은 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알았지? /
/ 응. /

아빠와 둘만의 비밀을 갖는다는 것이 마냥 기뻐서, 나는 그 속내를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너무 어렸을 것이다. 당신이 없으니까 사다먹는 음식에 질렸어. 당신 찌개가 너무 그리웠어. 아버지의 투정 아닌 투정에 돌아온 어머니는 웃으며 앞치마를 둘렀다.

"하지만 넌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니까, 서울로 가서 잘 됐잖아. 고등학교에서도 몇 번 널 뉴스에서 봤는걸."

"그래도 대학에 오니까 벽이 너무 높더라. 중학교땐 전국 레벨이라고들 그랬지만 대학생이 되면 이젠 쟁쟁한 선배들과 맞부딪히는 거잖아. 지금은 그 때 꼭 그랬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해. 물론 지금 하는 일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잘 한 거였다. 그 날- 어렵사리 내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던 현진에게 울음을 끝내 보이지 않은 것. 내 쪽에서 현진의 학교로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 것. 결국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서로의 감정이 어느 정도 무뎌진 다음에 널 만나게 되었으니까.

"참 세월 빠르다."
"응."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 초까지의 3년. 그 기간이 내겐 어떤 기간이었던가. 그 시절은 다시 가질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라고,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망설인다. 현진이 전학을 가지 않았다면, 여신이 복학한 반은 다른 반이었을 것이다. 내 짝이 되지 않았을 여신과 이야기를 나눌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도 우연처럼 필연으로 만남으로 이어진다.




"꼭 연락해야 돼."
"그래."

지하철 역까지 배웅을 나오면서 현진은 몇 번이고 내 손을 잡았다. 현진에게 나는 어떤 기억일까. 내가 그녀를 억지로 망각 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처럼 그녀도 나를 잊어버리려 했었다면, 매년 신춘문예 당선자의 이름과 사진을 확인하며 몇 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머리에서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몸이 먼저 기억해내는 현진의 느낌은, 그녀가 나를 잊지 못했던 것과 아주 상관없는 일은 아니었다. 내 고장이 아닌 서울에서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지하철 안, 나는 핸드폰을 수 차례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지금 그는 서울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어 이제 시간이 났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반색하며 날 만나러 나올 것이다. 현진의 이야기를 하면 그는 자기 일처럼 싱글거리며 행복해 할 것이다. 30여분을 망설이다가 나는 교보로 나왔다. 아찔하게 거울이 빼곡이 매달려 있는 교보 천장을 되도록 올려보지 않도록 노력한다. 1999년, 여름도 방학도 지나고 가을이 접어드는 이즈음에 만나는 혜정의 책은 낯설었다. 하얀 책의 표지에는 오렌지색 덧표지가 절반 정도 씌워져 있었다. 나란히 놓여 있는 책은 시현의 것이다. 시현의 책이 혜정과 비슷한 두께라는 것에 씁쓸하게 웃으면서 나는 책의 뒷표지에 쓰여진 글귀를 발견했다.

[ 판타지 소설의 붐 속에서 정말로 가치있는 글을 발견하기는 더 어려워져 버렸습니다. 귀한 판타지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 '별빛 이야기'의 작가 김혜정 ]

새하얀 그 책보다도 이 글귀에 더 심장이 쿵쾅거렸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는 친구의 모습을 우연히 숨어서 보게 된 기분이 이럴까. 아니, 그것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왜 혜정이 시현의 책에 대한 단평을 한 것인가. 왜 혜정이 '작가'라는 말 뒤에 있는가. 왜 혜정이, 이 글의 작가로 불리는가. 별빛 이야기- 아니 '바람이 있는 풍경'의. 비스듬히 매고 있던 쌕을 당겨서 끌어안는다. 쌕 안에는 이진희가 내게 준 문고판의 원서가 들어있다. 혼란스럽다. 여신은, 그렇게도 글을 쓰고 싶어했던 여신의 마지막 글은 어째서 이런 방향으로 가 버린 것인가. 내가 기억하는- 대학노트에 쓰여졌던 '바람이 있던 풍경'은 너무나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따뜻했다. 스스로의 글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글을 가져왔다- 그건 아니다. 그건 내가 기억하는 신이가 아니다. 도대체 너는 무엇을 원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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