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8.1999년 봄의 길목



겨울엔 아무 것도 맺어지지 않았다. 결론이 나는 것도, 마무리되는 것도 없다. 나는 뒤늦게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와의 타협점은 4년제 국문과였다. 당신은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사년제가 낫지 않겠니- 지나가는 말을 던졌을 뿐이다. 세계가 멸망한다는 1999년의 1월에 합격증과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들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스물 여덟의 늦깎이 새내기를 선배들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훑을 것이다.

2월 늦으막, 효정은 내게 책을 건네주었다. 작은 문고판 하드커버의 책은 제 주인의 이름을 잃고 그 주인이 무척이나 아꼈던 동생의 이름을 달고 나왔다.

"막 웃긴 거 있죠, 나는."

진지한 얼굴로 효정이 책을 쳐다보았다.

"주변에 소설가가 있게 되다니… 우리 언니요, 어렸을 때 그 흔한 글짓기대회 상이야 몇 번 받아왔지만."

"그것도 아무나 받지는 못해."

어머님이 갖다 놓으신 귤을 입에 물었다. 바지런도 하시다, 손에 귤물 든다고 껍질을 조금씩 까 두셨다.

"중학교때요, 언니가 백일장에 장원을 해서, 전교실에 방송이 된 적이 있었거든요. 언니가 그 글을 읽었는데- 세상에,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그런데 몇년을 집에 누우셨는데 자기가 병구완을 했다는 거에요."

효정은 소리를 죽여 웃었다, 집에 혜정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언니가 작가가 되다니. 이 책 광고 나온 거 보셨어요? 젊은 감수성과 노련한 화술이랬나? 4대 통신망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설… 아구 거창해."

"잘 읽을게."

혜정의 말을 자르며 책을 펼쳤다. PC통신에 연재된 소설들이 출판되는 건 드문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대학생이 책을 낸다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3대니 4대니 하는 통신망을 강타했다는 과장 섞인 광고들이 연일 신문 광고란에 보였다. 낯설은 붐. 낯설은 물결. 나는 첫장의 차례란을 보고, 맨 뒷장의 작가후기란으로 넘어갔다.

'나는 한번도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내게 소설가는 동경이고, 이상이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엄두도 나지 않았을 힘든 첫걸음입니다.

1998년은,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던 지주를 잃은 해입니다. 내게 그 사람은 용서와 믿음과 희생을 알려 주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나는, 나에게 글쓰기를 처음 보여준 그 지주를 잃고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 글쓰기인 듯 합니다.

……

미친 듯이 글을 써 온 몇 달이 지금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아득합니다. 글은 내가 쓴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넋이 나를 빌어 쓴 것만 같습니다…. '

차라리 말하지 않았다면 나았을 지도 모른다. 혜정이, 신이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혜정을 잊어버릴 수 있었을지도. 혜정과 시현 두 사람의 손가락에 똑같이 반짝이던 백금 반지를 그 후로 다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책을 백팩에 허둥지둥 담는다. 하얀 책표지가, 그 표지에 박혀있는 생경한 이름이 부담스럽다.

"혜정이는 잘 지내는 모양이네."

"아- 작년 말에 캐나다로- 그거 뭐죠? 아, 어학연수, 그거 갔어요. 2월 말에 온대요."

참 재미없는 사람이예요 언니는, 하고 효정은 픽 웃었다. 어학연수라는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효정도 어지간히 입시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아직도 그 애는 나를 증오하고 있을까. 속으로 묻고 나면 벌써 선뜩해진다. 차라리 캐나다에서 좀 오래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흠칫, 내가 먼저 놀랐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일어서는 창 밖으로 빨간 마티즈가 보였다. 그 안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안다.

"이제 가? 오늘은 좀 오래있었네? 효정이 너 나경 언니 괴롭힌 거 아니지?"

어머님이 웃으며 배웅을 한다. 큰딸이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작은딸이 붙임성 있게 구는 것이 더 먼저인 모양이다. 하긴, 수험생이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3월에도 계속 와줘야 해. 효정이가 이제 공부가 궤도에 올라섰다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예…, 안녕히 계십시오."

꾸벅 인사를 하고 어머님과 효정은 엘리베이터가 올라올 때까지 나와 있다가, 엘리베이터가 닫히자 작은 창으로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시야에서 그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이 한숨이 나올 만큼 반갑다. 닮은 얼굴이라서.

"조금 늦었네?"

완이 내리기 전에 앞좌석에 탄다. 백미러에는 여전히 회색 토토로 인형이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안전벨트를 매고 앞을 쳐다본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다. 봄은 아직 먼 계절이다, 자동차 안의 히터가 주는 온기가 적당히 반가운.

"어떻게 알았어?"
"전화했더니 안 받길래, 여기 왔구나 했어."

완이 내가 이 곳에서 과외를 하고 있는 걸 안건 얼마 전이다. 혜정의 집이라는 걸 알고 조금 표정이 굳어버린 완은 괜찮으냐고 되물었다. 뭐가? 하는 나에게 완은 아냐, 됐어. 했었다.

"아, 누나 호영이 알아?"
"…윤호영?"

완의 이야기에 가끔 등장했었던, 전문대학을 나와서 지금은 회사원이라는 어른스러운 친구.

"아, 말 했었구나. 그 녀석 얼마 전에 부산 와서 만났거든. 회사 차릴 거래."

"…회사?"

잠시 생각한다. 완의 이야기 속에 나왔던 그 '윤호영'이라는 사람. '회사를 차린다'는 것은 어느 먼 재벌의 아들 이야기같은 내 상식으로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지 않은가. 시끄럽게 내년의 대 예언을 이야기하는 TV가 아니더라도, 20세기는 끝나가고 있으며 어렸을 때부터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았던 21세기는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웹호스팅 할 거라나."

완은 뭔가 전문적인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는다. 컴퓨터를 고작 번역작업을 하는 데에만 쓰는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완의 상기된 얼굴을 자동차 옆거울로 들여다본다. 그래, 저 나이의 사내애들은 무언가를 만드는 꿈을 꾼다지. 친구의 소식을 듣고 완은 자신도 그러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꿈. …'그와 같은 방향을 보는 꿈을 꾼다.' 슥 가볍게 훑으면서 잊었던 다이어리의 내용들은 이렇게 기시감(deja-vu)처럼 불쑥 일어나, 그 출처를 알려온다. 어디서 보았는지 잊어선 안된다고 소리 높이듯이, 선뜻한 긴장감으로 등줄기를 훑어놓는다.

"누나?"
"아, 잠깐 딴생각……."

완은 머쓱하게 웃었다.

"에, 주변에서 사장이 된다니까 좀 기분이 묘해져서. 아. 누나 곧 입학이지?"
"내달 2일."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이런 숨죽인 안정이란. 문득 생각한다. 완은 신이가 대답을 해주길 기다렸다고 했다. 어째서 내게는 묻지 않을까. 나는 대답한 적이 없다. 아니, 완은 질문한 적이 없었다. 단지 일방적인 통보, 좋아한다고 한 것은 대답을 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엔 아무 것도 없다. 완도 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안정적인 일상이 이어졌을 뿐.

“나 좀 잘게."
"아. 그럼 집 도착하면 깨워줄게."
"응."

완은 차 오디오의 볼륨을 낮춘다. 음악이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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