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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에 완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1720을 약속 장소로 잡은 이유를 완은 모를 것이다. 다시는 그, 조그만 등이 밝혀진 구석자리에 앉은 완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그 앞에서 완을 보고 있었을 신이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완은 커피를 조금 입에 물었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동요하고 있구나, 늘 넣는 설탕의 양까지 맞추지 못할 만큼. 완은 반 스푼의 설탕을 더하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거기서는, 이 글 어떻게 이야기하니."
"그녀석 글 답지 않다고."

그렇겠지. 그 글은 너의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평가는 좋은 편이야. 통신 사람들 즉시적인 면이 있어서, 소설 연재가 기간이 길어지는 것 좋아하지 않거든. 하루에 두 편씩 올라오는 것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점수를 먹고 들어간다고 봐야 하지."

당신들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당신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 이 글은 언제 쓴 글이야? /

중 3 담임선생님은 학교 문집에 실린 내 글을 보고 물었다. 미친 듯이 써 내려갔던 원고지 50장 분량의 꽁트. 드물게 중3이 낸 글이라서 손도 거의 대지 않고 실렸다. 담임은 체육과였다. 체육과답게도 아이들의 성적은 매만 들면 올릴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만은 손을 대지 않았다. 아마도 2학년 담임이 이야길 했을 것이다. 내 체질에 대해서.

/ 올 겨울방학때에 썼습니다. /
/ 그래- 입시준비하느라 바쁠텐데 언제 이런 글을 썼나 했다. /

그건 거짓말. 단지 문집을 낸다는 말을 듣고 일주일을 미친듯이 써내려 간 것이니까.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사실상 나는 당신이 원하는 고입 선발고사 수석 자리에는 관심도 없었다는 것도.

/ 이녀석 글 재주는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읽는 사람을 고려해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

지나가던 국어 선생님의 말을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은 선언처럼 내 마음에 박혔다. 너는 글을 쓰는 사람이야. 하지만 읽는 사람은 고려해주지 않아. 고쳐야 한다는 생각 대신에 그것은 내 글의 특징처럼 낙인찍혔다. 글을 쓰지 않게 될 때까지.

"신경숙 글체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어. 섬세하다고."

완의 말에 조금 웃는다. 그건 내 말이었다. 하지만 신이에겐 해 준 적이 없었던. 숨이 막힐 것 같은 감정이 그 안에 있었다는 말도 사람들은 혜정에게 했을까.

"어쩔 거니?"

완은 나를 쳐다보았다. 애써 보통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그 눈 안에는 불안한 흔들림이 있다. 격류처럼 흐르는 감정이 있다.

"사실은 이 글이 강여신의 글입니다라고 그렇게 말할 생각이야?"
"……."
"그러지 마."
"…왜?"

이번엔 내가 한숨을 쉴 차례다.

"그럼, 글동에서 신이 일 알게 될 거야. 그러고 싶어?"
"……."
"그 곳 사람들 모르고 있는 거 아니니…? 그렇게 보였는데."
"…맞아."

그리고 말할 수 없었을 거다. 세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입에 올리게 되어서 사람들이 신이의 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부풀려지기 쉬운 이야기인가.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진 20대의 작가 지망생 이야기란.

"그럼 이대로 두라고? 혜정이가 신이 글을 제 것처럼 올리는데?"
"……."

완은 조금 식은 커피를 후룩, 한입에 마셨다.

"누나도 알잖아! 신이가 어떻게 글을 썼는데- 우리한테는 보여주지도 못할 만큼 그렇게 힘들여서 쓴 글이잖아!"

…완이, 언제부터 신이를 '신이'라고 불렀는지 나는 잠시 생각한다. 순간적으로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을만큼의 시간이 지났구나.

"차라리 이야길 해. 그 글 신이 글 아니냐고. 왜 그러냐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네 말이면 듣겠지."

"그 녀석, 내 말 안 들어."

완의 음성은 조금 풀이 죽어 있었다. 아니, 풀이 죽었다는 것보다는 조금 허탈하게 들린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럴 리가. 신이와 시현, 혜정과 완, 너무나 자연스럽게 편하게 어울렸던 네 명인데. 보고 있는 내가 묘한 기분이 되어 버릴만큼.

문이 열리며 새로 손님이 들어왔다. 레몬빛의 우산이 젖어 있다. 비가 오는가. 12월이다. 동지는 아직 오지 않은 12월 초순, 겨울비로 젖어있는 남의 어깨가 유난히 시려 보이는 계절.

"비가 오나보네요."

주인이 싱긋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단골인 모양이다.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밝던 날이 갑자기 컴컴하니 비가 오네. 겨울비라니, 궁상맞게. "

"뭐 따뜻한 걸로 드릴까요?"

"음- 그럼 로즈마리로 부탁해요."

1720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밖에 없다. 주인과 손님은 조금 친숙한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를 의식했는지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는 주인을 불러, 포트에 물을 한 번 더 부었다. 라벤더향이 화악 퍼진다. 차의 매력이란 이런 것이다. 은은하게 투명한 포트로 색이 번져나는 것은 녹차나 홍차만의 기쁨이지만, 온통 주변을 제 향으로 물들이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신이도 그랬다. 그저 한 쪽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제 향으로 주변을 물들이던 아이. 이미 이 곳에 없어도 아이의 향은 그대로 있다. …아이는 꼭 라벤더 같았다. 그다지 강하지 않은 듯 해도 어느새 옷 깊이 향이 배어버리는.

"소란스러워요? 이야기가 끊어졌네요."

주인이 머쓱하니 웃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마리아 칼라스는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음- 하긴 너무 가라앉는군요. 비도 오는데. 어떤 걸로 바꿀까요?"
"…마술피리가 있을까요?"
"그럼요."

붙임성 있는 주인은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이내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가 끊어지고 가벼운 마술피리가 시작되었다. 모차르트, 그 지독했던 천재의 음악은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네."
"꽤 됐는데, 몰랐어요?"

섬뜩한 무언가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문을 보지 않는다. 내 표정에 놀란, 아니 그 음성들을 분명히 알아들었을 완이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오는 겨울이다. 젖은 타인의 어깨가 안쓰러워 보이는 겨울. 영화에는 종종,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스쳐 지나간다. 올해의 최고 인기작 제목이 '접속'이었던가.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연인이 길거리에서, 계단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 나라 사람 특유의 무표정한 - 얼굴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영화에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볼 수 있을 테니까.

"…오랜만이네."

시현이다.

"그렇네요."

완, 시현에게는 존댓말을 쓰지 않았던, 정말로 친형제같이 굴었던 완의 존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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