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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yohan




로드 링커


길은 길을 연해,
항상 이어지기를 기대해
[길을 만들던 노동자의 노래中]


길은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과거 로마가 그랬듯이, 영국이 그랬듯이. 길은 항상 이어져있었다. 로마의 알렉산더 대왕은 길을 통해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기를 원했고, 그의 염원대로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진 단단한 그의 길은 그에게 정복왕의 이름을 선사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는 유럽의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정복왕의 칭호를 가졌던 몽골족의 칸인 징기스칸 역시 말을 타고 그의 길을 넓혔다. 그랬기에 몽골은 유럽을 정벌할 수 있었다. 그가 마지막 죽음을 가지기 전까지.

길은 항상 이어져 있었고, 지금도 끝없이 이어져 가고 있다. 그런 생각은 나에게 아찔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는 저 머나먼 하늘의 별까지 길은 이어져 갈 것이다. 그리고 그 길위를 아무런 감흥없이 가게 되겠지. 마치 지금 내가 로드 링커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는 것처럼. 아주 간단하게- 표를 끊고 버스에 타는- 가게 될 것이다. 왠지 씁쓸하고 아찔한 상상이다. 순식간에 놀라움에 적응해버리는 인간이여!

시베리아의 벌판은 시린 은빛이었다. 얼어붙은 툰드라의 벌판은 눈발위에 시리게 반짝인다. 멀리 툰드라 사슴-순록-의 질주는 로드 링커의 소리에 깜짝 놀란 탓일 테다. 눈틈에서 생의 비밀이라도 들어날듯한- 저 사이를 헤맨다면 생각에 사무쳐 사라지게 될듯하다- 나무에서 요정이라도 화악하고 솟아나도 이상할것 없는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버스안에서 적잖은 피곤함에 졸고 있었다. 며칠전까지 거듭된 회의로 너무 피로했던 탓이다. 항공연합은 왜 그다지도 신(新)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인지, 이유는 알지만 고려의 사신인 나로써는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생각들을 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반쯤 졸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 링커 안에서 특별할 것없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내 옆좌석에는 포니테일로 이쁘게 머리를 묶은 아이가 졸고 있었다. 쌔근대며 자는 모습을 보니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 아이가 백인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뒷자석에 앉은 이가 인도인의 특징이 드러나는 흑인이라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게 없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 사실을 무척 의식했을 텐데.....
나의 피가 반쯤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나는 내 피를 별로 탓하지 않아. 피같은 건 섞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렇게 바라보면 나에게서 일본인의 특징이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같은 동양인이었고,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데도, 고려인들은 일본을 증오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너무나도 해묵은- 편견이었다. 일본은 사람을 이용해먹고 버리는 나쁜 일족이다, 라는.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몰랐을 테잖아]

나 역시 내가 일본인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숨겨왔었고, 나도 그 편견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서류에는 항상 혼혈이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다. 고려인의 일족주의는 나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나는 멋지게 그 고통을 이용했다. 그게 지금 나의 직위였다.

나는 동아시아를 누비는 사절단.
고려의 사신이다.


1.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잠을 깰수 밖에 없었다.

버스 뒤편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흥분되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쩔수 없었단 말이야! 그 상황에선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꺼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뭘 그만 하라는 거야. 나도 답답하다고. 젠장.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니 됐다니까 그러네. 알았어. 그만해]

[그러면서 그 눈빛은 도대체 뭐야! 날 탓하는 거야? 그런거야? 흥! 그런거군. 네가 어떻게 해서 거기서 살 수 있었는지 기억해]

[아니 이 사람이. 그럼 그 상황에서 내가 죽을뻔이라도 했다는 거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사람들도 의식하지 않으려 하면서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심심했던 탓이다. 버스안은 항상 나른한 유령이 맴돌고 있으니. 잠이 깨어버리면 어찌 할 바 모르며 쓸데없는 잡지나 뒤적일 사람들에게 흥미거리가 생긴 것이다. 나 역시 흥미가 솟았다. 그 사람들의 말이 쓸모없는 말일지라도 왠지 궁금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대화중에 내가 아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누리살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수 없었어!]

[닥쳐! 누가 알아들으면 어쩌려고]

[걱정마. 알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

갑자기 아찔해졌다. 나는 알아들어버렸다. 두 사람의 말에 담긴 무시무시한 속뜻을, 그리고 누리살에 담겨있는 그 잔혹한 참변도. 나는 되도록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아무 쓸모없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bio텍의 옷을 입고있는 두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저 두사람인 것이다. 누리살에서 죽어버린 수천명의 사람들이 저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니 더 고위에서 내려진 명령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나의 머리속에선 다른 생각이 솟아올랐다.

이 정보를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

나는 고려의 사신이었고, 누리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사회에선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지만, 사신인 나 였기에 1급 비밀을 다루는 나였기에, 누리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달먹이병에 걸려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는 더욱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진정했는지 대화가 잦아들었다.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어중간한 정보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빌어먹을. 나의 궁금증조차 해결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둘씩 흥미를 잃고 잠의 유령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로드링커는 시베리아의 협곡 어딘가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의 궁금증은 머리속에서 더욱 퍼져가고 있었다.

수천명을 죽여버린 두사람과 그 두사람이 같은 버스안에 타고 있다는 사실은 역겨움보다는 의혹감으로 작용했다. 저 두명이 몇되지 않는 생존자중 하나일까?

나는 누리살에 대한 나의 정보를 점검해보기 시작했다.
그것에 대해 처음 알게 된것은 10여년 전, 북해도 근방의 작은 빙성에서 열린 모임에서였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연설자의 첫 마디는 약간 진부했다. 늘상의 연설에서 가끔 사용하곤 하던 졸어였다. 하지만 그의 뒷마디는 조금 특별했다.

[우리는 '우리'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그 연설의 핵심이 되었다.

인류는 개인으로 시작해, 공동체가 되어 공동체에서 다시 개인이 되어간다. 그것은 또 다른 공동체다. 라는 의미의 긴 연설이었다. 하나 하나의 의지가 모여 공동체가 되는 것처럼, 인류는 점점 자신들을 모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반발감이 일었다.

그렇다면 인간본연의 소외와 점점 개인화 되는 이 사회는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가. 라는.

그러나 그 연설자는 나의 마음속 질문을 듣기라도 한듯이 말했다.

[소외는 공동으로의 회합의지입니다. 인간이 소외된다는 것은 합해지고 싶다는 반향이지요. 한마디로 우리 모두는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는, 그래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하고, 상처받지 않는 그런 사회. 하나가 되는 공동의 사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설자는 작은 버튼을 눌러 자료화면을 열었다.

누리살. 누리살이라 불리는 작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하나로 회귀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머리속에 심겨진 일종의 안테나와 모두의 마음을 열어버리는 특별한 약. 등등에 대해서.

나는 그것을 작은 일탈로 치부했었다. 실패하기 위해 만든 약간의 희극 정도로.

그리고 10년이 지난, 몇달 전. 나는 하나의 기밀을 접하게 된다.

누리살의 전멸. 수천명으로 이루어진 사회공동체의 완전한 소멸.
그것은 나에게 당연한듯이 받아져왔다. 사람이 버텨낼리가 없다. 완전한 공동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버스안에서 누리살에서 살아남은 두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저 두사람이 뭔가 이유가 되었다. 그 하나의 추론은 이미 완성한 상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추론은 저 사람들이 입고 있는 bio텍의 옷은 일본기업이 그 실험에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 역시 그 실험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업연방인 나라에서 그것은 당연한 사실일지도. 그러나 거기까지다.

점점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더이상은 아무런 추론도 되지 않았다. 답답했고, 나는 여행을 즐기기로 마음먹은 상태였기에, 포기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약간의 귀찮음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나는 졸고 있었다.
이 사실이 나에게 큰 사건으로 다가올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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