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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완이 몇번이나 헛기침을 하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완의 말이 현실성있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시현이 아니라, 완이? 그 말을 되뇌는 순간에 머리에 떠오른 건 여신의 얼굴이었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나를 향해 수줍게 웃고 있는 신이의 얼굴.

"그럼… 신이는?"

그 때도 이렇게 말했었다. 시현에게도. 여신이가 그렇게 사랑했던 시현, 그 역시 여신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는 걸 견딜 수 없었던, 여신이의 시현에게도.

"…신이를 사랑했던 건, 거짓이었니?"

당황한 얼굴로 시현은 내게 말했었다. 자신과 여신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나밖에 없다고. 그건 자신이 나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여신이 죽었다고 해도, 자신은 상관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말할래, 너는?

"아니."

단호하게, 완이 말했다.

"신이를 좋아했어. 진심으로. 지금 나경 누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완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면, 여신을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면 나는 완에게 시현에게처럼 그렇게 쏘아줄 작정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너 역시 여신을 죽인 공범이라고 말은 하지 않겠지만 그 이상으로 완을 몰아쳐 줄 작정이었다.

"알아. 가벼워 보이겠지. 신이가 그렇게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금 새로 누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냐 생각될거야. 그래서 망설였어, 많이. 내가 태어나서 지금처럼 뭔가 망설인 적이 없어."

완의 말에는 헛기침도 섞이지 않았다. 어렵게 꺼내는 말이라면 당연히 그랬을텐데도.

"그러니까 나한테는 숨기지 말아줘. 누나 혼자 끙끙거리지도 말고, 그렇게 내던지지도 말고."

아주 오래전부터, 혹시나- 하고 생각했었는지 모른다. 완이 부산의 대학을 갔을 때에도, 완이 대학 진학 후에도 계속 내게 연락을 해 왔을 때에도, 어느새인가 말을 놓아버렸을 때에도- 나는, 아주 조금이라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완이 나를 좋아한다는 꿈을.

"…신이는, 나 때문에 죽었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완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냐. 그 애는, 시현씨와 내가 사귄다고 생각해서 그런거야. 실제론 그게 아니었지만, 그 애는 나한테 물어보지 못했어. 너도 잘 알잖아. 신이 성격."

완은 조용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길지 않은 말을 하는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내 방에 언제나 들리는 작은 소음들도 갑작스럽게 멎어버린 것 같다.

"나도 얼마 전에 겨우 알았지만, 몰랐다고 변명이 되는 건 아니…"
"신이 누나, 시현형과 사귀고 있었던 거야?"

완이 물었다. 조금은, 멍한 얼굴로.

"…응."
"그랬구나. 시현형이."

혼잣말처럼 완은 중얼거렸다. 나는 물을 수 없었다. 신이가 사랑했던 사람이 시현이라는 이야기인지, 신이의 아이 아빠가 시현이라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신이를 그렇게 몰아간 것이 시현이라는 이야기인지.

"…괜찮니?"

내 말에, 완은 나를 쳐다보았다. 넋이 나간 것 같은 눈동자가 힘겹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욱하는 성질이 있기는 해도, 스스로를 놓아 버리는 일은 없을 녀석이다. 완은 그랬다. 그래서 완의 어머님은, 어쩌면 불안스러울 수도 있을만큼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하던 아들을 믿고 계셨던 걸 거다. 그래서 고등학교 몇 년 동안 특별히 성적을 올려 주는 것 같지도 않은 과외선생을 아들이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던 걸 거다. 당신들의 그런 태평함은 이제 완에게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내리물림했을 것이다.

"…누난, 모르고 있었지. 신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
"응."

신이가 시현과 사귀었다는 것도 몰랐고, 시현과 내가 그런 사이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던 걸까. 신이는.

"시현형이 고백한 것, 신이가 알았어?"

아아, 그래… 그랬다.

/ …오늘따라 기침이 더 심해, 나경아. /
/ 어제 꽃세례를 받아 버려서. /
/ 꽃세례? /
/ 누가 눈치없이 백합을 한상자 보냈어. 아직 꽃가루가 남은 것 같아. /

당연히 누구냐고 물었어야 할 여신은, 아무 말도 없었다. 여신은 한상자의 백합이라는 말에서 곧바로 시현을 떠올린 것이다. 시현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까. 그저 속만 앓고 있었을까. 그러다가 그게 나라는 것을 알고, 신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았구나."
"…그랬을 거야."

완은 조금 한숨을 내쉬고, 내 팔을 힐긋 쳐다보았다. 때를 맞춘 듯이 완의 전화가 울렸다. 완은 전화기를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웬일이야. 그래. 아는 사람 집이야. 그래. 전화 끊자. 됐다. 그만 좀 하자니까. 끊는다. 뒤로 갈수록 음성에 짜증이 섞여들었다.

"바쁜 일 있으면 가."
"아냐 됐어. …너보고 한 말 아냐. 끊는다."

뚝, 전화를 덮고 완은 전화의 밧데리를 빼내 버렸다.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니."
"……."
"…혜정이야?"

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완은, 글동의 부시삽이었다. 혜정이는 대표시삽이었고. 동호회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간단한 안부인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완은 전화 내용에 대해서도, 정말 상대방이 혜정이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완은 그런 사람이었다. 거짓을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침묵해버리는.

"…예전에 누나가 그랬지. 혜정이 글, 신이 누나 거라고."
"첫 구절만. 다른 건 몰라."

완은 늘 들고 다니는 맨스백에서 디스켓 하나를 꺼냈다. H.J with Goddess. 레이블에 써놓은 글만으로도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완은 계속 생각해 왔나보다. 혜정이가 계속 글을 쓰는 동안, 그 글이 정말 여신이의 것인지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글을 계속 지켜보았나 보다.

"읽어봐 줘. 게시판 글 갈무리한거야. 첫 구절 말고 다른 구절도."
"…그래."

완은 몇 번 헛기침을 하고는 내 팔을 다시 쳐다보았다. 나는 입으로만 괜찮아. 했다.

"누나가 처음 혜정이를 소개했을 때 말이야."
"응."
"좋은 애야. 라고 그랬던 것, 기억나?"

아.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혜정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예전에 가르치던 남학생이야. 지금은 대학생이지. 좋은 녀석이야, 라고. 여신이와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도. 여신이는 금새 그들과 어울렸다. 나중에 여신이가 말했다. 나경이가 그랬잖아, 좋은 사람들이라고. …글을 쓰겠다고 했던 사람이, 그렇게 쓸 수 있는 말이 없었구나.

"난 지금도 그렇게 믿어."
"나도."

좋은 애다. 그만큼 여신이를, 나를, 가깝게 생각했던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이 글에서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은, 왜 혜정이가 이 여신이의 글을 쓰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여신이가 아니라 혜정이를 찾아야 했다. 나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고 나를 쳐다보던 그 혜정이를. 그리고, 혜정이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

"가야겠다. 이거 주러 온 길인데…, 내일이라도 아파지면 파스 꼭 붙여. 알았지?"

응, 하고 나는 완을 보냈다. 잠시 후에 문득 베란다로 내다보니 완이 힘없는 걸음으로 돌아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묘한 우연이다. 완과는 늘 이렇게 우연처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완이 아는 상황에서 혹은 모르는 상황에서. 가로등 불빛에 비친 어깨가 너무 힘이 없어 보여 나는 시계를 본다. 아직 동지가 한참이라 밝은 때는 점점 줄어들 것이지만 이미 일곱시의 바깥은 깜깜하다. 차는 어쩌고 왔을까. 어떻게 그 대로에서 나를 보고, 그 찰나의 순간에 나를 붙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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