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6.자각自覺



나는 완에게 전화를 하는 대신 원고를 꺼내들었다. 마감이 빠듯하지는 않다. 다만 잡고 있을 무언가가 필요할 뿐. 원고를 몇 번을 반복해서 읽으면, 지은이의 글투는 내 글투가 된다. 내 글은 사라지고 작가의 글만 남는 것이 이 일이니. 특별히 길거나 산만한 문체는 아니었지만, 이 작가의 글도 짧은 문장은 아니다. 청랑에서 내게 넘기는 글들은 대개 소설 중에서도 감정 묘사가 많은 글들이었다. 그들이 번역가를 어떤 식으로 선택하는지 나는 물어본 적이 없었고, 그들이 내 번역에 이견을 내는 적도 없었다.

문장은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시간강사였던 한 사람이었다. 교양강좌에 대한 지독한 권태에 사로잡혀 있던 그가 유일하게 눈을 빛내는 것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였다. 덕분에 그가 무슨 과목을 가르쳤었고, 무슨 내용을 배웠는지보다 그의 이런 독설들이 더 기억에 남게 되어버렸다. 일본의 책에 심취해 있으면 일본 글만 나온다. 그건 한글로 쓰여있어도 일본글이다. 영어로 쓰여져 있다고 다 같은 게 아니다. 사람들은 그럴 때면 언제나 뭔가 낙서를 하거나 해서 그의 말에서 도망쳤다. 부담스러운 말들.  번역자를 알 수 있는 글은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라고 한 것도 역시 그 강사였다.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글에 대해서 그렇게 핏대를 세웠었나. 그 사람 역시 번역가로 일을 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은 다음 해였다. 시간강사를 그만두고 그가 다시 번역가로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부정하려고 해도, 대학이라는 곳은 내게 수없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내가, 내 글을 쓸 수 있을까. 타인의 글을 써내는 일만 해온 내가.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번역은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번역을 하면 잡생각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머리를 비우려는 것은 포기해버리고 서너번을 그저 계속 읽었다. 문장이 대략적으로 마음에 잡혔다.

벨이 울렸다. 어머니셨다. 내가 집에 있다고 해도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분이.

"회사에 열쇠고리를 두고 왔지 뭐니. 정신이 이렇게 없다, 내가."

다섯시 반, 딸이 집에서 문을 열어주는 것에 미안해하며 어머니는 현관에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애호박 두 개가 검은 비닐 밖으로 빼꼼히 삐져 나왔다.

"저녁 약속 있니?"
"아니, 없어."
"잘됐구나. 호박이 참 좋아서, 전으로 부치려고."

애호박이 겨울에 나는가? 하긴, 사철에 안나는 게 없는 세상이다.

일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한다. 며칠동안 어머니는 계속해서 내게 조심스러워 하고 있었다. 굳이 그런 당신에게 다시 미안할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검은 비닐들을 부엌으로 옮기고 내용물들을 정리했다. 하겐다즈의 아이스크림통을 꺼내는 내게 어머니는 웃어보였다.

"남포동에 갔었어?"
"거래처 일로 나갔다가, 눈에 들어오길래. 바닐라랑 월넛인데, 괜찮니?"

시현은 월넛을 좋아한다. 하겐다즈가 아니라 써티원의 것이지만. 월넛을 좋아한다는 내게 시현은 나도 그런데, 하고 웃었었다. 써티원의 가벼운 월넛은 싫다. 그런 말을 시현에게 했었나. 아닐 것이다. 바닐라를 좋아한 것은 누구였나.

/ 밋밋하게, 그런 게 좋아요? /
/ 아이스크림은 바닐라가 제일 맛있는 거야. /
/ 피. /

지끈.

"나경아?"
"…응?"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나는 흠칫 물러앉았다.

"오늘 종일 앉아 있었더니 어지러워서 그래. 이거 냉동실에 바로 넣어?"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며 나는 냉큼 아이스크림을 냉장고 안으로 가두어버린다. 이럴 때는, 일부러 남포동을 나간 게 틀림없는 어머니에게 환하게 웃어도 좋지 않나. 먹고 싶었는데 좋다거나, 내가 월넛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라든가 그런 간단한 말로도 당신은 분명 기뻐할 텐데.

"나경아."
"…응."
"…아빠 일은- 네 탓이 아냐."

아빠 일?

"벌써 몇 년이니. 엄마는, 너무 힘들어. 나경이 네가- 그 때 이후로 계속 이렇게 넋놓고 있는 걸 보면."

무슨 소리야? 그 때 이후? 무슨 일?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아빠가 널 구해준 모양이라고 내가 얼마나 하늘에 감사했는지 모른다. 니가 계속 이렇게 있으면, 엄마는…."

어머니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보는 어머니. 당신이 그렇게 자신을 드러낸 것은 오랜만이다. 하지만 왜? 지끈거리던 머리는 점점 더 아파왔다. 눈을 뜨고 있는 게 힘들만큼.

"너 이렇지 않았어, 나경아. 너 이런 애 아니었어.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았어. 세상에 나한테는 너 뿐인데, 너 이러면 나는 어떻게 사니. 엄마가 나중에 아빠 얼굴을 또 어떻게 보니."

…아빠.

/ 자, 말해봐라. 사고 기억나냐? /
/ …사고? /
/ 아버지가 운전했잖아. 왜 갑자기 핸들을 꺾었는지 몰라? /
/ …몰라. /
/ 마주오던 까만 벤츠는? /

기름기가 많은 얼굴을 하고서 누군가가 내게 계속해서 물었다. 기억나지 않는 일들을, 내가 모르는 일들을.

/ 그만하시죠. 환자가 힘들어합니다, 형사님. /

하얀 까운을 입고 닥터가 말했다. 난 왜 병실에 있었지. 손목을 그었던 날 다음날 아침이었나.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 나는 왜 병실에 있었지? 왜 나는 내 힘으로 앉지 못했지?

/ 아버지가 가해자로 몰릴까봐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고? /
/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충격 때문에. 곧 돌아올겁니다. /

…내 옆에는, 아빠가 있었다. 차 안에서는 Rarebird의 Sympathy. 그룹 이름처럼 한곡만을 사람들 기억에 남기고 잊혀져버린 그들의 이야기를 아버지가 들려 주었다.

"아빠 서예가 맞아? 팝송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아빠가 좋아하던 곡이니까. 나경이 너도 국문과 지망한다면서 미국 작가들 이름이랑 작품이랑 줄줄 외잖아."
"헤…."
"아직은 너무 이른가? 대학 이야기는."
"많이 일러, 아빠."

이르지 않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대학 이야기를 할 수 없었으니까.

"나경아!"

등 뒤로 어머니의 외침이 들렸다. 끼이익- 차가 멈추는 소리. 시끄러운 경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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