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5.적의敵意



하루를 쉬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효정의 이른 크리스마스 카드가 우편함에 들어 있었다. 며칠만에 켠 핸드폰의 메세지도 몇 개가 쌓여 있었다. 그 짧은 며칠의 단절 동안에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이 이렇게 있다니. 인간관계라는 것은 참 묘한 것이다. 본의건 아니건 잠시 단절이 있으면 평소보다도 더 나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

[ 내가 첫 카드죠? 언니, 좋은 성탄 되시고요, 올 겨울에도 잘 부탁드려요. ]

효정의 카드 끝에 익살스런 캐리커쳐가 덧붙여져 있었다. 숱이 없는 머리에 작은 눈. 캐리커쳐에 그려진 웃음이 남의 것인양 낯설었다. 효정의 앞에서 내가 웃었던 적이 있었는지. 그런데도 효정은 나를 웃는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그림은 그 사람의 의식을 반영한다고 한다. 효정은 내게서 웃음을 이미지로 잡아낸 것일까. 아니면, 웃고 있는 나를 바라는 것일까.

생각에 잠기다 핸드폰의 봉투들을 확인했다. 인사치레의 몇몇 말들. 출판사에서의 연락. 그리고 마지막 음성은 오늘 것이다.

"통화가 안 되네요. 집전화도 안 받고. 우리 집 온다면서요? 효정이가 이야기 많이 하던데. 여전하네요-. 쿡쿡. 별로 연락하고 싶지는 않은데, 편지는 돌려받아야 되니까. 잃어버렸다는 말 해도 안 믿으니까 다음에 우리 집 오면 효정이 편에 돌려주세요. 피차 얼굴 보기 싫잖아요? 끊을께요."

직접 내가 이 전화를 받았다 해도, 혜정의 말이 순화되었을리는 없다. 혜정에게 적대의 대상은 이미 나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바다넷'에 가입한 이후로, 어쩌면 그 전에 혜정의 마음은 정하여 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라고 묶여 있었던 다섯은 이미 '우리'가 아니다. '우리'를 묶어주었던 끈이 끊어진 순간에. 처음부터 불완전했던 것이다. 서로 타인인 다섯이 모여 있었을 뿐이니, 언제 무너졌을 지 모르는 일이고- 그 결과가 우연히 지금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갈색 백팩 앞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돌려주는 것을 잊은 것은 확실히 내 잘못이다. 그렇다고 혜정이 내게 저런 말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의 인연이 좋은 인연과 악연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면, 혜정에게 나는 악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에게 혜정은? 혜정은 나 때문에 여신을 잃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신이, 나 때문에 june을 잃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 지금껏 내가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나경이 때문… 그 사람 때문. 나에게 글쓰기를 알려준 것이 나경이였고, 나에게 너를 알려준 것이 나경이. 나에게 완을 알려준 것은 그 사람. 내가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 사람.

나는 껍질 뿐이야. 모든 것은 함께 있는 사람들 덕분이었고,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고마웠어.
모두에게 그렇게 전해줘. …정말로 고.마.웠.다.고. ]

여신의 편지를 조금은 담담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만큼 내가 그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시간이라는 것이 모든 일의 치료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감정을 둔화시키는 데에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마치, 마약처럼. 나는 신이의 편지를 다시 집어넣었다. 혜정에게 보내진 편지였으므로, 나는 읽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커다란 박스 밑바닥에 다이어리를 낱장으로 붙여서 보낼 정도의,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지도 모르게 그렇게 나에게 비밀의 메시지를 남긴 여신이다. 혜정에게 내 이름이 적힌 편지를 보낼 땐, 혜정의 성격으로 보아서 내게 이 편지가 전해질 것이라는 추측은 하고 남았을 것이다. 그 애는 그렇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인연은.

몇년간의 따돌림에는 친구가 있었다. 운동을 잘하고, 결국은 테니스를 하기 위해 전학을 갔던 친구의 이름은 이미 잊었다. 그 친구에게 나는 절실하지 않았다. 1년인가 편지를 주고받다가 소식은 끊어져 버렸다. 대신 그 때 내 곁에는 여신이가 있었다.

"…완아."

부질없이 중얼거리며 나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목소리가 듣고싶다.




갑자기 겨울비가 내렸다. 눈이 드문 도시에서 겨울비는 드물지 않지만, 잦은 비는 언제나 불쾌감과 더불어 찾아왔다. 비가 내리면 햇빛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체내의 어떤 호르몬이 부족해져서 우울함이 유발된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설명이겠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사람의 감정이 기후에 따라 변하는 것은 사실이다.

"비 많이 오지? 고생하셨네"

효정의 어머님은 따뜻한 모과차 한 잔을 준비해 내놓으셨다. 수능이 끝나 효정은 조금 더 신경이 곤두서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눈밑이 거므스르하게 피곤에 찌들려 있었다.

"이거, 혜정이에게 좀 전해줄래."
"뭔데요?"

편지봉투를 돌려보고 효정은 나를 쳐다보았다.

"이걸 왜 선생님이 갖고 계세요?"

그 얼굴을 보니 알겠다. 효정이도 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걸.

"보여 달라고 부탁했었어."
"…예."

효정은 편지봉투를 한켠으로 밀쳐 놓았다. 이런 상태에서 수업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니?"
"……."
"…내가 어렵니? 아니잖아."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언니한테 듣기론."
"…그래…."
"선생님 때문에, 사람 하나가 죽었다고…."
"여신이 말이구나."
"사실이에요?"

효정은 말을 해놓고 놀랐는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사실이겠지.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거짓일 테고."
"……."
"…나도 그 애를 그렇게 몰아간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으니까, 혜정이도 마찬가지겠지."

혜정이와 효정이는 형제다. 몇 번 보지 못한 나와, 친형제 사이에 누가 더 믿을 수 있을지 그 당연한 결론 앞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의 이야기가 고작이다.

"나는 …미안하지만, 그 사람 싫었어요."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구나. 그 앤 내 친구야."

효정은 피, 하고 웃는다.

"믿지는 않았어요. 혜정언니는 어젯밤 내내 울며 불며 소리 질렀지만. 선생님 못 오게 하라고요."
“그래….”
“그런데 왜 죽은 건데요 그 사람은?”
“…아무도 모르지, 신이가 왜 자살했는지는.”

자살이라고 입에서 나오는 순간 철렁하고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왜 그런 감정적인 편지밖에 남겨놓지 않았을까. 신이는 정말로 자살한 걸까. 누군가가 그 애를 밀어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니다. 내게 보낸 우편물이나 혜정에게 보낸 편지…, 그 모든 것으로 말하고 있다. 오랫동안 준비해왔다고, 우리를 그렇게 떠나려고 치밀하게 준비해왔었다고. 그러나 나는 자살이라는 말에 호흡이 가빠진다. 아직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애가 그렇게 죽은 이유가 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언니는 굉장하다니까요…, 뭐야, 꼭 선생님이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말해놓구선.”
"하하…."

헛웃음을 짓는 나에게, 효정은 또 웃었다.

"모진 말도 못하잖아요, 선생님은. 무서운 척 하고 있어도 하나도 안 무서운걸."

/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잖아. 얼마나 찬바람이 부는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했다니까. /

"수업. 이제 해도 되지?"

효정은 아, 네. 하고는 주섬주섬 책을 챙겨 내놓았다.




거의 2주만에 바다넷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혜정이 대표시삽에 출마했다는 것이었는데 이미 선거는 끝나있었다. 2명이던 후보 중에 한 명은 중간에 기권을 하고 선거는 찬반투표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투표자의 67%의 찬성을 얻어 당선이 되고, 혜정은 당선소감을 짤막하게 발표해 놓았다. 대표시삽이 된 것을 축하한다는 글도 간간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최근의 글 중에 '그들'의 잡담들을 훑어냈다. 시현, 혜정, 그리고 완.

[ 진실한 마음은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닫힌 문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드린지 100일.
백합 향기로 네 눈물을 감싸고 싶었다.
얼음의 심장을 온기로 녹여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좋다. 너만 행복하면.
내 피 위를 디디고 부디 웃어다오. ]

시현의 마지막 글은 수능이 있었던 날 밤 자정 직전에 쓰여진 글이었다. 나와 광안리 바다를 보았던 날. 이 세상 마지막 로맨티스트라고 자처하는 시현다운 말이다.

[ 믿고 있었다는 나 자신이 미워서 미치겠어.
좋아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혐오로 바뀌어.
아직도 모자라? 한사람을 죽여 놓고도 또 다른 사람을 죽게 하고 싶어?
살인자.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해.
증거 인멸.
역겨워 죽겠어. 피해자인척 하는 꼴이라니.
보고 있으면 제발 꺼져줘. 숨죽이고 엿보는 꼴이 더 보기 싫다니까.
뭐라고 한마디 해 보지 그래? 하긴, 무슨 할 말이 있겠어? ]

같은 날 혜정의 글이었다.

[ 대표시삽님. 공인으로서 잡담을 자제해 주시지요.
개인 아이디로 올라온 글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방이 불쾌할 글 올리시는 것 보기 좋지 않습니다.
시삽이기 전에 개인이라고 해도, 특정인을 향한 듯한 비난의 강도가 지나치게 높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회원들이 그런 글을 많이 올리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제 글은 부시삽으로서 올린 글입니다. ]

그 다음날, 완의 글.

통신망 안도 작은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누구였더라. 아마도 신이겠지만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은 통신에서의 인간관계 역시 소중한 것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사회에서 생긴 불협화음이 통신 속에서 역시 생길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되었다. 존댓말을 쓰고 격식을 갖추어도 그 본질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한꺼풀만 벗기면 매서운 칼날로 심장을 노리는 것일 뿐이다. 나에게 역겹다고 말하는 혜정이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시현이나 결국 나를 원망한다는 점에서 같은 것처럼.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없었다. 완이 혜정에게 하는 저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나는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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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여행 04.10.15 11:30 댓글 수정 삭제
    이제 절반 왔습니다. 반 남았네요.
    또 며칠 앓았습니다.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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