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권철기 대장군, 어떻게 해서 언어 변환기가 그들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인지 알려 주시겠소. 이왕이면 나 역시 대외 업무를 총괄하는 그대에게 듣고 싶소. 나조차도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고 싶소이다."

사령관은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철기 대장군에게 아주 정중히 부탁하듯 말했다. 그러나 누구라도 무감각한 멍청이가 아닌 다음에야 사령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에서는 아주 비꼬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사령관의 말에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누구보다도 자존심 강한 그였기에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인간에게 조롱 받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끔찍한 현실은 사실이었고, 결국 그는 조금이라도 죄를 덜기 위해서라도 비참하게 변명거리를 늘어놓아야 했다.  

"저......저도 확실히 모릅니다만...... 아마 점령 부대에......보급 물자를 운반하는 과정에서......아마......수송 대원들이 습격을 받아......납치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그 역시 사람인지라 절제 없이 밀려드는 공포와 두려움을 어쩌지는 못한 것 같다. 어리석게도 그는 당연한 사실에 주절 없이 '아마'라는 단어를 붙여서 죄를 좀 덜어 볼까 했지만 그것은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잘못만 모두에게 각인 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불쌍하게도 자신감 넘치던 그의 얼굴은 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주체 없이 흘러내리는 식은땀 때문에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

"쯧쯧. 자네답지 않네 그려. 확실히 말하게. 수송대원들이 납치 당했었다는 건가?"

"그......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사령관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난 자네에게 그런 보고를 들은 적이 없네! 설마 자네가 나를 기만한 것인가, 그런 건가!?"

"아......아닙니다. 납치 당했던 부하들이 무......무사히 돌아와서 굳이......사령
관 님을 신경 쓰시게 할 필요가......없다는 생각에......"

"멍청하긴!"사령관이 그에게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자, 한참이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던 장군들이 크게 놀라 웅성거렸다. 아무리 사령관이라고 해도 바로 다음 계급인 대장군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조용히! 조용히 하시오. 권철기 대장군은 충분히 이런 말을 듣고도 남을 만한 짓을 했소이다. 그렇지 않은가!?"

"맞......맞습니다"참으로 비굴한 모습이었다. 수안은 그의 대답을 듣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남자다운 기상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비단 수안 뿐 아니라,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마저도 그 모습에 아연실색한 듯 했다.

그의 대답이 무척이나 흡족했던지 사령관은 회의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질 정도로 호탕하게 웃어댔다.

"좋아, 좋아. 자네가 이렇게 솔직하니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원정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어느 정도의 징계는 받아야 하네."

사령관이 선심 쓰듯 말하자, 그는 여러 차례 굽실거리며 사령관의 황송한 처사에 감사했다. 만약 그가 앞날을 위해 이렇게까지 행동한 것이라면 그는 정말 대단한 야심가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강한 자존심까지 버린 까닭에 심한 처사는 면하게 됐으니 말이다.

"좋아. 어차피 지나 간 일이고, 권철기 대장군도 이렇게 솔직히 말해주니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겠다. 모든 처분은 본국에서 사리에 맞게 결정할 것이다."사령관이 모두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어찌나 창피했던지 권철기 대장군은 사령관이 말하는 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꽉 감고 있었다."수석 보좌관, 앞으로의 대책은 세웠나?"

"물론입니다. 오늘 아침부터 언어 변환기의 송수신채널을 비밀채널로 전환시켰습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과오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 조심만 한다면 더 이상 우리의 내부 상황이 저들에게 노출되지는 않겠지요."수안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는 권철기 대장군을 흘겨보며 말했다.

"다행히 반군은 제압했다. 그러나 언어 변환기를 통해 먹을 것이나 마실 것 같은 보급물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우리와 정면충돌을 피하고 게릴라를 통해 보급품만을 집중적으로 약탈해 갔던 것이다. 그들의 작전은 너무나도 훌륭하게 적중했고, 덕분에 우리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사령관은 모든 이가 가장 의문을 가졌던 부분을 짧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모두에게 말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늘 그렇듯 순리가 없다. 어느 누가 그 훌륭한 권철기 대장군이 그런 실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겠는가? 수송대원들이 잡혀갔다 돌아온 사실을 미리 얘기만 했었더라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힘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게 전쟁이다."

사령관이 모두를 두루 바라보며 기운 찬 어조로 외쳤다. 그의 말에는 어느 누구에게는 엄청난 수치를 불러일으킬 만한 조롱과 조소가 잔뜩 배어있었다. 평소부터 권철기 대장군을 싫어했던 몇 몇 장군들은 사령관의 말에 권철기 대장군을 슬그머니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어댔다.

한편, 권철기 대장군과 그의 추종자들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비웃는 자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증오와 분노로 불타오르는 그들의 눈은 오로지 한사람 바로 수안만을 향해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수안을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는 약속의 표시처럼 빛났다.

"앞으로의 계획은 본국과 상의해서 결정하겠다."사령관이 권철기 대장군을 향해 나지막히 말했다."그 때까지 원정 나가있는 부대들이 쓸데없이 주둔지를 비우지 말도록 철저히 관리해야 하네. 그리고 물자 수송 시에도 더욱 유념해 주기를 바라네."언어 변환기의 유출 경로가 밝혀진 이후 사령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권철기 대장군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평소에 그였다면 사령관에게 내놓고 대들었겠지만, 지금 그가 그런 처지가 아니었기에 말없이 고개만 까딱해 알겠다는 대답을 대신 했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소형전함이 나타났다니 구체적으로 말해보게."사령관이 불안한 눈빛을 띠며 수안에게 말했다.

"정확히 5일 전에 우주 연합에 등록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소형전함이 이 레드라인의 중심부 근처에 착륙을 시도한 것 같습니다. 이걸 봐주십시오."수안의 말이 끝나자, 알파리아 대륙지도가 그려져 있는 영상스크린이 팍 하더니 다른 그림으로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사진이었다."이 사진이 바로 우리가 띄웠던 통신 위성이(알파리아는 전파장애가 심하기 때문에 행성 주변에 위성을 띄워 본국인 아시안 연방과 교신한다.)찍은 사진입니다."

황색 물감을 물에 탄 듯이 진하고 연한 황색과 하얀 물결이 아름답게 뒤섞인, 소박함이 물씬 풍기는 알파리아 행성의 큰 표면 위로 파리가 앉아 있는 것처럼 작은 까만 물체가 덩그러니 찍혀있었다. 다행이 영상스크린 워낙 큰 탓에 모두들 눈을 부릅뜨지 않아도 그 검은 물체가 전함이라는 사실을 힘들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터프라이즈 호에서 찍은 사진입니다."수안이 말하자, 스크린의 영상이 또 다시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바뀐 영상 역시 사진이었다. 아까 것과는 달리 그것은 바로 옆에서 찍은 듯이 작은 글자까지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생생한 사진이었다."이 소형 전함은 아주 오래 전에 단품 된 구식입니다. 저기 가장 작은 글씨가 제조회사를 표기한 겁니다."수안의 말이 끝나자, 그 부분만 확대되어 나타났다. 확대하자, 아주 크게 'GENERALS'라는 영문철자가 큰 스크린을 꽉 채웠다."'GENERALS'사는 30 년 전에 파산한 아메리카 자유국의 대표적인 기업입니다. 특히 우주 산업에 상당한 노하우를 지닌 기업이었습니다. 'GENERALS'사가 마지막으로 만들어낸 최신형 전함 중 하나가 바로 저 소형전함입니다. 이런 사실 외에는 눈에 띌만한 점은 없습니다. 아! 좀 특이한 영문철자가 있긴 있었습니다."

"특이한 영문철자!?"사령관이 짐짓 놀란 듯 되물었다.

"그렇습니다."이 말이 끝나자, 영상이 다시 바뀌었다."'XX-ROK'라는 영문글자입니다. 하지만 우주 연합의 개인용이나 사업용 전함 등록부에도 이런 이름을 가진 전함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수안이 말하면서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사령관과 이미 쉰이 넘어가는 장군들 몇 몇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러나 이 소형전함이 우리에게 위해를 가할 염려는 없습니다. 이것은 정원 100명 가량을 태울 수 있는 수송 전용 전함이니 말입니다. 이미 5일 전에 조사팀을 소형전함이 착륙했을 것 같은 근방으로 파견했습니다. 아직까지 뚜렷한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만, 곧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설마......그럴 리가 ......"사령관이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는 못 했다. 비단 사령관 뿐 아니라, 쉰이 훌쩍 넘어간 장군들 몇 명도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수안은 왜 사령관이 그토록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영상스크린에 생생히 나타나 있는 'XX-ROK'라는 영문글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그저 소형전함 이곳저곳에 써 있는 다른 글자보다 약간 특이할 뿐, 그다지 심각하거나 중요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자,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냅시다."

수안이 뭔가 말하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사령관이 날카롭게 외쳤다. 회의를 끝내라니......수안은 갑작스런 사령관의 결정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내비쳤다. 그러나 사령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이 놓여있던 서류뭉치를 급히 챙기더니 쌩하니 회의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처 장군들이 거수경례를 하기도 전에 회의장 밖으로 사령관이 나가버리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옆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깨를 들썩였다. 대장군들 역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령관이 나간 자동문을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모두들 회의가 끝났다는 걸 비로소 실감한 것인지 하나 둘씩 자리에서 무겁게 일어났다. 그들은 옆 사람과 심각한 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듯 회의장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붕어처럼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어느새 회의장 안은 한 사람 만, 아니 두 사람이 남아 있었다.

수안은 회의가 흐지부지하게 끝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수안은 자기자리로 돌아가 테이블에 어지럽게 널린 종이 쪼가리들을 긁어모아 툭툭 쳐 가지런히 모은 다음, 팔꿈치에 꼈다. 이러는 동안 수안의 뒤통수에 무거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건방진 자식!"

낯익은 목소리가 수안의 귀를 날카롭게 후벼팠다.

"권철기 대장군 님, 아니십니까?"수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꾸민 티가 무척 나는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안 나가셨습니까?"

"이 개자식! 내 경고를 무시했다 이거지!? 사령관이 언제까지 널 감싸줄거라 생각 하냐?"권철기 대장군은 이를 뿌드득 갈며 몹시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수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오히려 피식 웃었다. 수안 역시 배짱 하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인한 군인이었다."내 말 잘 들어라! 오늘 빚은 꼭 갚아 주겠어. 난 한 번 한다면 꼭 하지. 날 건드렸으니 그 대가는 목숨으로 갚아야 할거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횅하니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수안은 몸을 돌려 닫히는 자동문 밖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우습다는 듯이 귀를 가볍게 후볐다.
수안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회의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수안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한 초록색 제복을 입은 한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이내 수안의 앞에 도착한 그는 무척이나 힘들었던 듯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내 쉬더니 힘들게 입을 열었다.

"사령관 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사령관 님께서...... 무슨 일인가?"

"저는 잘 모릅니다. 수석 보좌관 님을 찾아 곧장 사령관 집무실로 오시라는 말씀만 전하라는 명령밖에 받지 않았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저는 이만."

제법 송글송글 땀이 맺힌 이마를 한번 소매로 싹 훔친 그는 왔던 길로 다시 뛰어갔다. 어찌나 빠르던지 그는 곧 점이 되어 수안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수안은 사령관이 자신을 급히 찾는다는 말에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급히'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사령관이 어지간히 중대한 일이 아니고서야 '급히'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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