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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5일째.
우리는 최도웅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가 변호사라는 이유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연 관계였던 변지영의 죽음 이후 그를 용의자에서 제외시키고 있었다. 내연의 변지영이 죽은 이상 금전적인 이득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성진이 최도웅과 같은 거물을 변호사로 고용하기 위해선 최도웅, 혹은 최도웅의 주요 고객과 강성진이 어떤 연관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최도웅의 주요고객은 20여명에 달했고, 대부분 정후정과 같은 작물아비나 사채업자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수사범위가 너무 커져버려 한숨을 내쉬게 됐다.
그렇게 무심히 자료를 넘겨보던 내게 곽태만이라는 구 강남의 작물아비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변지영이 죽던 날, 병원 주차장에서 급히 차를 몰고 사라진 자였다.
우리는 그때부터 도미를 배제하고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로봇이 살인의 목격자, 혹은 용의자라는 것 때문에 로봇에 집착하다가 오히려 사건의 방향을 잃고 교란 당하고 있었다. 만일 과거 로봇이 사기 사건에 이용됐듯이 이번 사건에서도 로봇이 이용됐다면?!
사건을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파트너 조 형사의 입원으로 반장님과 함께 사건을 이야기했다.
"최도웅이 변지영의 정부였고, 정후정의 유언장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곽태만에게 청탁해 강성진을 시켜 정후정을 죽일 가능성이 있겠죠?"
나의 추측에 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왜 변지영까지 해쳤을까요?"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겠지. 최도웅은 영리하니까. 변지영과 정태영이 용의선상에 오를 거란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반장의 추측은 나와 같았다.
"그러려면 정태영은 해치지 않는 게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요."
"그건 너무 노골적이지. 그보단 정태영을 조금만 다치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변지영이 죽었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거지."
반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곽태만은 왜 병원에 나타났던 걸까요?"
내가 물었다.
"강성진에게 시킨 일이 잘 처리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아니면 변지영에게 일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겠지."
그때 강성진을 미행하던 팀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강성진을 구 강남지역에서 놓쳤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신 강남에서 미행은 감시카메라로 표적을 추적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구 강남처럼 감시카메라가 부족한 곳에서는 직접 용의자의 뒤를 미행해야했고, 감시카메라에 많이 의존해온 신참형사들은 가끔 미행에 실패하곤 했다.
나는 곧바로 구 강남을 담당하고 있던 제 1 강남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강력반 형사는 처음부터 짜증을 냈다.
"사람 찾는 게 그쪽처럼 쉬운 줄 알아요. 여기는 신 강남처럼 골목골목 감시카메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밤엔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곳이에요. 젠장, 벌써 작물아비 하나 죽어 나자빠져서 바빠 죽겠는데 지원이라니."
"작물아비라고 했소?"
나는 불안했다.
"예, 꽤 알아주던 놈인데, 그러고 보니 그쪽에도 작물아비 하나 죽었죠?"
"정후정이라고 꽤 알아주던 놈이었죠."
"아, 아. 그 좀비 영감?!"
"그런데 설마 죽은 작물아비가 곽태만은 아니겠죠?"
"어, 아니긴요. 그 놈이 맞는데, 설마 곽태만을 찾는 겁니까?"
"젠장!"

나는 곧장 구 강남의 살인현장으로 갔다.
12층 짜리 낮은 건물의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이었다. 신 강남으로 상권의 대부분이 이동하면서 많은 건물의 지하주차장들이 이렇게 작물아비나 범죄자들의 창고로 많이 쓰이고 있었다. 창문은 아예 없고 출입하는 차량이 많아 경찰의 감시를 피해 물건을 옮기기가 편하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나는 지하 3층 주차장으로 곧장 내려갔다. 이미 현장에 도착한 감식반이 어찌된 일인지 곽태만의 시신 부근에서 야시경을 쓰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곽태만은 아예 조명을 설치하지 않았더군요. 침입자들이 야시 장비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게요. 하지만, 그게 용의자에게도 도움이 된 것 같더군요. 같이 보시겠소?"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는 담당형사가 내게 감시 카메라의 작은 프리즘 메모리 스틱을 흔들어 보이더니 휴대용 홀로그레이어에 삽입해 사건 당시의 홀로그램을 보여주었다.
"젠장."
홀로그램에 나타난 용의자는 출입구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마스크에 장갑, 그리고 야시경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영상 스캔용 레이저가 아무리 많아도 이래선 용의자의 얼굴을 정확히 그려내지 못했다. 입은 마치 달걀귀신 같았고 눈과 코는 야시경 때문에 마치 뿔이 난 것 같았다. 더구나 지하 주차장의 스캔용 레이저는 고작 4개만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도 고작 출입구 쪽에 있는 3개를 빼면 천장에는 달랑 하나만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쌓아놓은 상자들 때문이라도 천장에는 5개 이상의 스캔용 레이저가 있어야 했지만 작동하는 건 고작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작동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범인은 분명 이곳을 잘 아는 자였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대담하게 들어와 살인을 할 수 없었다.
그때 영상을 보던 나를 당황하게 만든 건 로봇의 등장이었다. 그 로봇은 도미처럼 다리를 절고 있었다.
로봇은 마스크를 쓴 용의자와 함께 동시에 곽태만을 덮쳤다. 그렇게 가장 중요한 살인 장면을 가려버렸다. 확실히 분간할 수 있는 장면은 쓰러지는 곽태만의 옆모습이 전부였다.
"젠장, 빌어먹을 로봇."
담당형사가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 뽑으며 소리쳤다.
"저 녀석이 완전히 가려버렸잖아."
"잠깐만 다시 돌려볼까요."
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담당형사는 다시 화면을 되돌려 보여주었다. 로봇은 분명 왼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젠장, ……아직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저 로봇은 정후정의 집에 있던 도미 같군요."
"도미?"
"정후정의 집에 있던 가정부로봇의 이름이죠."
"젠장, 그런데 왜 여기 나타나서 영상을 망친 거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역시 왜 이곳에 도미가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묻고 싶었다. 복수라도 하려는 것일까?!
"놈이 어디 있는지는 아시오?"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홀로그래피 영상에선 곽태만의 피가 바닥을 번지고 있었다. 도미는 분명 용의자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용의자가 달아나자 도미는 곽태만을 살펴본 뒤 용의자가 사라진 출구로 사라졌다.
"놈의 고유번호는 알겠죠?"
담당형사가 물었다.
분명 위치추적을 위해 물어보는 것이었다.
"놈은 위치추적기가 없어요. 스스로 제거해 버렸죠."
"뭐요? 빌어먹을, 그게 말이 되요?"
"말은 안될 것 같은데, 일을 그렇게 되더군요."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때 감식반의 누군가가 홀로그래피 영상을 가리키며 우리를 불렀다.
"이것 좀 보세요. ……여기요. 여기 누군가 있는데요."
구석에 놓인 박스들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반쯤 나타났다. 잠시 잠깐이었지만 한쪽 눈과 코가 선명하게 잡혀있었다.
"누군지 찾을 수 있겠소?"
"이 정도면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용의자를 천 명 내외로 줄일 순 있을 거예요."
영상을 실물크기로 확대하며 감식반원이 말했다.
"우선 전과가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빨리 뽑아줄 수 있겠소?"
"한 시간 안에 해드리죠."

감식반원의 예상대로 용의자는 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나는 쉽게 용의자를 골라냈다. 제일 첫 장에 강성진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일거요. 우리가 찾던 녀석이죠."
우리는 바로 감시 카메라를 이용해 강성진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만에 찾아낸 강성진은 감시카메라가 적고 서울을 벗어나는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자동운전 시스템이 해제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만약 자동운전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우리는 도로교통시스템에 요청해 그를 바로 서로 연행했겠지만 이미 해제된 상태라 우리는 급히 순찰차를 출동시키고 도로를 통제해야했다. 다행히 순찰대는 서울을 벗어나기 전에 강성진의 차를 따라잡았고 약간의 추격전이 있었지만 도로가 봉쇄되자 강성진은 순순히 연행에 응했다.
나는 재빨리 현장으로 가 강성진을 서(署)로 연행했다. 제 1 강남서에서 강성진을 인계해줄 것을 원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강성진을 심문해야했다. 우리에겐 아직 정후정 살인사건과 관련해 강성진을 잡아둘 증거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성진은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자네가 왜 잡혀왔는지 잘 알겠지?"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뇌파 판독기에는 그의 거짓말이 뚜렷이 나타났다.
"뭘 모른다는 거야?"
"……."
"좋아. 말하기 싫다면 넌 듣기만 해. 넌 5일전 곽태만의 사주를 받고 정후정의 집에 침입해 정후정을 죽이고 변지영과 정태영에게 상해를 입혔어. 하지만 로봇에게 들키고 말았지. 그래서 넌 어제 그 로봇을 없애려고 했던 거야. 그리고 오늘은 곽태만을 찾아갔지. 하지만 곽태만은 대가를 주려고 하지 않았어. 네가 오히려 일을 망쳤기 때문이지. 그래서 넌 곽태만까지 죽였어."
"말도 안 돼. 거긴 감시 카메라가 있어요. 그걸 보면 내가 아니란 걸 금방……"
"그래, 너도 알다시피 거긴 감시 카메라가 있어. 그래서 넌 마스크를 쓰고 들어갔지."
"젠장. 그건 내가 아니에요. 증거를 조작하려고 하지 말아요. 난 목격자지 살인자가 아니라고요."
강성진의 뇌파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 좋아, 그럼 말이 좀 통하겠군. 왜 곽태만을 찾아갔지?"
"젠장, ……돈 좀 빌리려고요."
강성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얼마나?"
"뭐, 그냥, 한 10만 이안정도."
"살인의 대가로는 꽤 적군."
"젠장, 난 안 죽였어요!"
강성진은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럼 왜 곽태만이 돈을 줄거라 생각했지?"
"……젠장, 변호사나 불러줘요."
강성진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건 우리에게 유리한 반응이었다. 좀 더 몰아세운다면 사건의 윤곽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최도웅이 서에 도착했다.
내가 최도웅을 대기실에서 만났을 때 그는 매우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경찰도 아닌데 매일 경찰서에 출근해야겠소? ……내 의뢰인은 어디 있소? 설마 자동운전 시스템 좀 망가뜨렸다고 구속시키려는 건 아닐 테고, 대체 무슨 수작들이지?"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를 또 다른 취조실로 안내했다.
텅 빈 취조실에 들어서자 최도웅은 피식 웃으며 여유 있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신들 미쳤어? 내가 누군지 잘 알텐데."
"잘 알기 때문에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거요."
"흥, 그래? 그럼, 어디 좋아. 얼마나 빨리 옷을 벗고 싶은지 말해보라고."
최도웅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물며 등받이에 기대고는 문 담배를 입술로 치켜올렸다. 나는 그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자료팀에 도미의 심문 자료를 준비해달라고 요청하고는 최도웅을 마주하고 앉았다.
"최도웅씨, 당신은 이 순간부터 정후정씨 살인사건의 용의잡니다."
최도웅은 잠시 얼굴이 굳더니 이내 기가 막힌다는 듯 코방귀를 끼고는 테이블에 기대며 내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당신 지금 나한테 겁주려는 건가?"
이번에는 내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변지영씨와는 언제부터 관계를 가지신 거죠?"
그제야 최도웅이 미간을 찡그렸다.
"고객의 아내와 관계를 가지면 변호사 협회에서 좋아하나요?"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도미 잘 아시죠? 정후정씨 댁의 가정부로봇. 아, 변지영씨 댁이라고 해야 금방 알아들으시려나. ……그런데 그 도미가 당신 얘기를 많이 하더군요. 못 믿으시겠다면 도미의 심문자료를 보여드릴까요?"
홀로그레이어를 통해 도미의 심문내용이 담긴 홀로그램이 테이블 위해 투영됐다.
"도대체 날 협박해서 얻으려는 게 뭔가?"
최도웅은 심문내용을 듣지도 않고 허공에 투영된 영상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을씨년스럽게 말했다.
"당신을 살인범으로 감옥에 보내는 거지."
"어림없는 소리. 난 정후정의 죽음과는 무관해."
"당신은 정후정의 유언장을 관리하면서 그의 전재산이 변지영에게 돌아간다는 걸 알게 됐어. 그래서 변지영과 짜고 정후정을 살해했지. 강성진을 시켜서."
최도웅은 어이없다는 듯 비웃었다.
"그 멍청이를? ……미쳤군. 내가 시키려면 제대로 된 프로를 시켰지. 그런 멍청이를 시켰겠나."
"그는 또 다른 하수인일 뿐이지. 원래 정후정과 경쟁 관계인 곽태만에게 시켰어. 멍청한 곽태만이 어수룩한 강성진을 시켰고, 그래서 당신 같은 거물이 강성진의 변호를 맡은 거고."
"형편없는 추론이군."
큰 한숨을 내쉬며 최도웅이 말했다.
"나도 내 고객 하나가 죽어 나자빠져서 기분이 매우 안 좋아. 자네도 알다시피 정후정은 1년에 한두 번은 꼭 소송을 당하지. 그것도 꽤 큰 걸로. 정말 아까운 고객이야. 게다가 오늘 또 곽태만이 죽었고, 둘 다 내 고객이었어. ……둘이 친했던 건 아나? 하여튼 나도 내 고객을 죽인 놈을 잡아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싶어. 하지만, 그런 억지로는 곤란하지. 좀 더 머리를 쓰라고. 김 형사, 풋내기처럼 굴지말고 말이야."
"흥, 지금 날 놀리는 거요?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이제부터 용의자고, 강성진과 공범이지. 게다가 고객과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변호사 자격도 박탈당하겠지. 당신은 강성진을 이제 만날 수 없소."
"자네 정말 실수하는 거야."
최도웅은 여전히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변호사나 구하시지."
그제야 최도웅의 얼굴이 굳었다. 천하의 최도웅이 당황한 듯했다. 흔치않은 구경거리였다. 나는 마치 사건을 해결한 듯한 뿌듯한 기분으로 그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최도웅이 긴장한 듯 테이블을 손가락을 펴 두드리더니 문을 나서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좋아. ……강성진이 자백하게 도와주지. 대신 변지영과의 일은 덮어주게."
"흥, 글쎄요. 당신도 이제 공범인데."
최도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했다.
"자네, 정말 실수하는 거야. 나와 강성진이 하는 얘길 다 들어도 좋아. 난 결백하니까. 됐나?"

"제가 죽인 건 아니에요. 이건 분명히 해야 되요."
강성진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빚이 좀 많았어요. 곽태만한테요. 도박 빚이었죠. ……곽태만이 제게 제안을 했어요. 좋은 일거리가 있다고, 간단한 일이라고 했어요. 그냥 보안 시스템만 해체하면 된다고 했어요. 보안 네트워크가 서버 증설로 5분 동안 정지되는 시간을 이용해서요. 사람이 죽을 거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들어갔는 지부터 이야기해 보겠나?"
"문은 그 여자가 열어줬어요."
"여자가?"
강성진의 대답에 나는 변지영의 홀로그램을 보여줬다.
"네. 이 여자요. 곽태만은 자기 마누라라고 했어요. 전 그 말을 듣고 그냥 곽태만의 집인가 했어요. 멍청했죠. 정부였는데,"
나는 최도웅을 힐끗 바라보았다.
최도웅은 눈살을 찌푸리며 강성진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변지영과 곽태만의 관계는 모르고 있었던 듯했다. 그렇다면 그 역시 변지영에게 이용당한 게 분명해 보였다.
"그 여자는 보안시스템이 서재에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전 서재로 갔죠. 근데 거기에 그 늙은이가 있었어요."
정후정의 홀로그램을 보여주자 강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 곽태만이 다짜고짜 그 영감한테 달려들었어요. 그리곤 칼로 찌르더니 저보고는 조심성이 없다고 막 뭐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 때문에 일을 망쳤다면서 네트워크가 다시 되기 전에 빨리 메모리 스틱을 없애라고 했어요. 전 서둘러 시스템을 해체하고 메모리 스틱을 깨버렸죠. 그리고 막 나오는데 여자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곽태만이 여자의 옆구리를 찌른 거예요. 난 미쳤냐고 했는데, 오히려 그 여자가 안 그러면 자기가 오해받는다고 괜찮다고 했어요. 그리곤 어서 가라고 했어요. 로봇을 부른다고……"
"여자가 말을 했다고?"
"네."
"목을 찔렸을 텐데."
"아니요. 제가 봤을 땐 옆구리만 찔려있었어요. 멀쩡히 말도 했는데요."
"그럼 그 집 아들은 어떻게 된 거지?"
"아들이요?"
강성진은 마치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들은 보지 못했는데요."
"보지 못했다고?"
"네."
뇌파 판독기 결과는 모든 게 진실이었다. 99%의 정확도를 가진 판독기였다. 혹 1%의 오류일까?
"그럼 어제 로봇은 왜 공격했지?"
"그건, 신문에서 로봇이 증인이라는 기사를 봤어요. 그래서 없애려고 했죠. 하지만, 일이 잘못됐죠. 그 다음엔 곽태만이 변호사님을 보내 절 꺼내주고는 당분간 숨어 지내라고 했어요. 그래서 오늘 곽태만에게 돈을 좀 받아서 잠적하려고 거길 간 거예요."
"좋아, 그럼 곽태만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이곳 관할도 아니고 얘기하기로 한 것도 아니잖소."
잠자코 있던 최도웅이 끼어들었다.
그러나 강성진은 자포자기한 듯 계속 이야기했다.
"전 잠깐 화장실에 갔다왔어요. 그때 마스크를 쓴 자가 나타났죠. 그 사람은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어요. 조금 꽥꽥거리면서 얘기했는데, 곽태만에게 빚을 갚으러 왔다고 했어요. 근데 곽태만이 막 비웃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도 다 안다고 0을 두 개 더 붙여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자가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자기도 다 안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곽태만의 배를 찔렀어요. 그때 갑자기 로봇이 나타났어요."
"자네가 덮쳤던 그 로봇이었지?"
"네? 그, 그건 모르겠어요. 로봇이 다 비슷비슷하잖아요. 그 로봇이 그 남자를 막았어요. 그런데 그 자가 로봇에게 더 해치지 않을 테니 손을 놓으라고 했어요. 근데 정말 웃긴 건, 그 멍청한 로봇이 그 말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로봇이 물러서니까 그 남자가 다시 곽태만을 찔렀죠. 두 번째 찔렸을 땐, 곽태만은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졌어요. 로봇이 소리쳤죠. 안 해친다고 했잖냐고. 그러니까 남자는 웃는 건지 꽥꽥거리면서, 다신 사람을 해치지 않을 테니 자신을 믿으라고, 약속한다고 했어요."
"남자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그리고 로봇에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다 끝난 일이라고, 입 다물라고 했어요. 안 그러면 자기도 죽게 된다고, 자기가 해(害)를 당한다고 했어요."
"자기가 해를 당해? 그렇다고 로봇이 범인을 순순히 보내주던가?"
"그놈이 자기 목에 칼을 대고는 다가오면 찌른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로봇이 전혀 다가가질 못하더라고요."
"빌어먹을."
어처구니가 없었다. 놈은 로봇의 제 1원칙을 교묘히 이용했다.
강성진은 진술을 마치고 제 1 강남서의 경관과 함께 취조실을 나섰다. 최도웅도 그 뒤를 따라 나섰다. 그러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더니 돌아서며 말했다.
"예전에 동아시아 화폐로 통합되던 그 해, 증권거래소의 로봇이 화폐통합에 대한 정보를 잘못 입력받고 주식거래를 했다가 삼백 억 이안이 넘는 손해를 본 일이 있었지. 그 일로 담당자인 제이슨이라는 자가 해고됐지. 물론 손해배상 때문에 파산까지 했지. 그런데 그 자는 자신의 실수를 통해 한 가지를 알게 됐지, 잘못된 정보가 로봇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말이야. 그래서 그 제이슨이란 자는 로봇에게 거짓된 정보를 주고 도둑질을 시켰지, 그 뒤로 사기꾼들은 로봇을 사기에 이용하기 시작했어. 흔히들 말하는 제이슨-사사키 사건의 제이슨이 그 자였지. 그런데 그런 일이 왜 가능했는지 아나?"
난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된 정보라도 인간이 주는 정보를 로봇은 믿지. 마치 신을 믿듯이 말이야. 로봇 3원칙은 인간을 로봇의 신으로 만들었어. 그는 너무 아름답게만 생각했어. 1950년대엔 아시모프가 옳았겠지. 하지만, 그 뒤로 인간은 끝없이 추락했네."
"그래서 법이 있잖아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가 자네한테 법이란 말을 듣다니. ……이걸로 변지영의 일은 덮어두는 걸세."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하지만, 변지영에게 유언장의 내용을 공개한 건 아직 남았어요."
문을 나서던 최도웅이 다시 멈춰 서더니 피식 웃었다.
"흥, 그렇군. 난 한꺼번에 계산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다시 거래해보겠나? 내가 더 좋은 정보를 하나 주지."
나는 최도웅의 얘기를 듣고 판단하기 위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정후정은 아들의 생일을 모두 음력으로 챙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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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장편 뱀파이어 듀켈 <프롤로그> 김인화 2006.07.3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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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중편 영원한 이별은 오지 않는다1 바보 2006.07.27 0
196 장편 Adelra-in - 요괴왕 ..... <2> 어처구니 2006.07.11 0
195 장편 Adelra-in - 요괴왕 ..... <1> 어처구니 2006.07.11 0
194 장편 Adelra-in - 13 번째 폴리스 ...... <2> 어처구니 2006.07.11 0
193 장편 Adelra-in - 13 번째 폴리스 ...... <1> 어처구니 2006.07.11 0
192 중편 당신이 사는 섬 3부 김영욱 2006.04.2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