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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4일째.
우리는 정태영을 만나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그가 이제 말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됐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US사의 영업사원이 그와 함께 있었다.
정태영은 아직 성대가 완치되지 않아 갈라진 목소리를 냈지만 밝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놀랍죠? 반세기 전만 해도 이 정도면 생사를 헤매고 반 이상이 죽어나갔을 텐데."
그는 상의를 걷어올려 자신의 상처를 보이며 말했다.
분명 반세기 전이었다면 치명상이었을 목과 배에 난 세 군데의 칼자국이 세포 치료법(Cell Therapy.)덕에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로봇이 응급조치를 해줬다면서요."
US사의 영업사원이 자신의 직분에 맞는 말을 꺼냈다. 그는 자사의 제품에 대해 칭찬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예. 그랬죠. 제 비명을 듣고 로봇이 왔어요. 전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죠.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헤헤, 이렇게 멀쩡하네요. 전치 1주라고 해서 1주일동안 병원에 있어야하는 줄 알았는데 흉터까지 없어지는데 1주라더라고요. 놀랍죠?"
우리는 대답대신 정태영에게 몇 가지 묻기 위해 우선 US사의 영업사원에게 자리를 피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죠. 수고하세요. 아. 그리고 다시 한 번 도전해 보세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이런 뜻밖의 경험을 경영진도 좋아할 거예요. 아, 물론 부모님 일은 조의를 표합니다. 그럼, 이만."
US사의 영업사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뭘 도전한다는 거죠?"
조 형사가 물었다.
"US 로봇사에 취직하라고요. 예전에 US사에 취직하려고 했다가 떨어졌거든요."
정태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US사에요?"
"예전 일이죠. 저도 잠깐 로봇공학을 배웠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우선 어제 있었던 변지영의 살인 사건부터 묻기 시작했다. 조 형사가 기록을 위해 소형 카메라를 귀에 얹고 물었다.
"우선, ……어제 왜 로봇을 막지 않았죠?"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지만 우리가 제일 궁금했던 일이었다.
"무슨 뜻이죠?"
정태영이 되물었다.
"왜 어머니가 로봇에게 죽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냐는 겁니다."
"막을 수 없었으니까요."
정태영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전 그 전에 복도에 나와 있었죠. 경관님께 담배나 한 대 얻을까 하고 복도에 나가 있었죠. 그때 갑자기 경관님이 무전을 받더니 제게 병실로 들어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전 병실로 들어와서 화장실에 갔죠. 그리고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나와보니 도미가 어머니 침대 곁에 서 있었어요."
"그때 경관은 어디 있었죠?"
"문 앞에 있었겠죠. 제가 경관을 불렀을 때 바로 들어왔으니까요. 그리고 바로 두 분이 뒤따라 들어오셨죠."
"로봇에게 왜 명령하지 않았죠?"
조 형사가 힘주어 물었다.
"네?"
"당신 로봇이잖습니까. 외부명령 중에서 당신의 명령이 최우선일텐데요."
"전 당황했어요."
정태영은 결백을 주장하듯 손을 펴 보이며 말했다.
"왜요?"
"네?"
"왜 당황했죠?"
"형사님이라면 당황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전 겁이 났어요. 로봇이 성난 얼굴로 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 더구나……"
"왜 로봇이 당신을 화난 얼굴로 바라봤을까요?"
내가 물었다.
"글쎄요. 그건 모르죠. 우리 가족들에 대해 무슨 불만이 있었는지는 로봇에게 물어보세요. 하여튼 전 죽은 어머니 곁에 서있는 도미를 보고 도미가 저까지 죽이진 않을까 두려웠어요."
"아, 어머님 일은 참 안됐습니다."
나는 뒤늦게 생각난 듯 건성으로 말했다.
"흥, 별로…… 어차피 제 14번째 생일 선물일 뿐인데요."
"생일선물이라고요?"
조 형사가 물었다.
"네. 제 14번째 생일에 아버지는 내 생에 최고의 선물이라면서 새어머니를 데려오셨죠. ……그리고 그 다음 날, 둘이 결혼식을 하더니 바로 혼인신고를 하더군요. 130을 바라보던 나이에 턱시도 입은 신랑을 보셨어요? 노망든 영감."
"그랬군요."
조 형사는 잠시 입술을 문지르며 그의 대답을 곱씹었다.
"아 참, 듣자하니 도미가 증언을 거부했다면서요?"
정태영이 뒤늦게 생각난 듯 물었다.
"네. 왜 그랬을까요?"
"글쎄요.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서겠죠. 제 3원칙."
우리는 서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혹시 집에서 일어나 사건의 범인은 보셨나요?"
정태영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혀요.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셨거든요. 사실 제가 좀 중독기가 있어서……헤헤,"
정태영은 알잖냐는 듯 히죽거리며 말했다.
"게다가, 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죠. 원래 잠버릇이 그런 건 아니었는데, 아마 범인이 절 찌르기 전에 뒤집어 씌웠나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조 형사가 물었다.
"로봇의 말이 주인이 지켜달라고 했다던데, 혹 정태영씨가 그랬나요?"
정태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정신이 없어서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그때 병실로 최도웅 변호사가 나타났다. 그는 형사 소송전문 변호사답게 사납게 우리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의뢰인을 보호하듯 내몰았다. 마치 타고날 때부터 경찰을 싫어하는 사람 같았다. 우리 역시 범인을 보지 못했다니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었다.
"퇴원 축하드려요."
막 병실을 나설 때 조 형사가 정태영을 향해 말했다.
"네?"
조 형사는 대답대신 침대 밑의 가방을 가리켰다.

"젠장, 사람이나 로봇이나 그 집 사람들은 한결같이 장님에 귀머거린가 봐요."
조 형사가 병원을 나서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근데 변지영이 죽었으면 이제 정후정의 유산은 정태영이 물려받는 거 아닌가요? 정후정이 정태영에게는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고는 해도 변지영이 우선 상속받은 거고, 나중에 변지영이 죽었으니 법적으로는 상속을 받은 상황이고, 그리고 변지영의 양아들인 정태영이……"
조 형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것 같아.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경우의 사건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새어머니의 재산은 피가 섞이지 않은 양자에게는 한 푼 가지 않아. 근데 그걸 모르고 양자가 새어머니를 죽인 사건이었지."
"그럼 이번에도 정태영이 한 푼도 못 받나요?"
"응, 물론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정태영이 말했지. 변지영이 자신의 14번째 생일 선물이고 혼인 신고는 그 다음 날 했다고 했어. 그건 곧 정태영이 변지영의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얘기야."
"어째서요?"
조 형사가 궁금한 듯 물었다.
"정태영이 변지영의 유산을 상속받으려면 단순히 새어머니가 아니라 친자에 준하는 친양자가 돼야하는데 배우자의 자녀를 친양자로 받아들이려면 1년 이상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해. 그리고 아이가 만 15세미만 이어야하지. 아이가 15세가 넘으면 민법상 친양자가 될 수 없어. 결국 정후정과 변지영이 혼인한지 1년이 되면 정태영은 만 15세가 넘어서 친양자 신청을 할 수 없어. 그리고 친양자가 아니라면 변지영이 죽어도 정태영은 유산을 한 푼도 못 받아. 모두 변지영의 가족들이 받게 돼. 결국 동생이 입원한 병원이 위탁을 받게 될 것 같군. ……14번째 생일 선물에, 다음날 혼인신고라. 결국 변지영도 정후정의 재산을 노리고 있었다는 얘긴가."
조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 도미가 했던 지켜달라는 말이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현장의 상황을 봐선 정후정이 했을 말 같았는데, 범행순서를 봐선 정태영이 했을 것 같아요. ……누구로부터 지켜달라는 걸까요? 범인? 하지만 보지도 못 했다잖아요."
"그래, 그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제 생각엔 정태영은 로봇에게 협의를 두고 있어요. 딱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그러니까, 로봇이 정태영을 죽이려하자 지켜달라고 한 걸까요? 그래서 병실에서도 그 명령 때문에 정태영을 살려준 걸까요?"
"하지만, 칼에 찔리는 위급한 상황에서 보통은 살려달라고 하지 않나?"
조 형사의 물음에 나는 되물었다.
"처음엔 그렇게 말했겠지만 소용이 없었던 거죠. 살려달라는 말은 명령이라기보단 애원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때 로봇이 정신을 좀 차린 거죠."
"그래서 응급조치를 해줬다?"
"그렇죠."
"그리고 다시 미쳐서 변지영을 죽이고? 하지만, 서(署)에서는 정상적이었어, 채 부팀장도 그 점은 인정할 걸. 물론 진술을 거부한 건 황당했지만 말이야."
"이런 게 아닐까요? 폐쇄공포증처럼 평소에는 정상적이지만 어떤 자극이 전해지면 극도로 불안해하는 거죠. 그러니까 로봇은 정후정의 가족들에게 그런 공포를 느낀 거예요. 산책을 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뭔가 두려워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리고 그 두려움의 대상을 없애야 했던 거구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정태영이 지켜달라는 명령을 내린 거예요. 그러자 2원칙의 포텐셜 값이 증가했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3원칙과 평형을 유지한 거죠. 하지만, 여전히 공포 대상이 제거되지 않았고, 그 결과 계속 정태영을 맴도는 거죠. 탑돌이를 하듯이."
"하지만 자네의 그 얘기는 모두 로봇 제 1원칙에 위배되잖아."
"그렇긴 한데…… 지금 상황에선 제 3원칙의 과도한 포텐셜 값의 증가. 그것만이 해답인데. ……어쩌면 정후정을 통해 학습한 결과일 수도 있죠.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그러니까 준법에 대한 포텐셜 값이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거예요. 피해망상증 환자처럼. ……사람도 처음부터 사람을 죽인 건 아니잖아요. 어느 때부터, 그러니까 극도의 공포가 통제되지 못하면서……"
"그건 너무 지나친 비약이야. 아무리 인공지능 로봇이라도 공포를 느낀다는 건."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대답이 아닐까요? 로봇 심리학이 왜 있겠어요. 공포라는 말이 로봇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자기보호는 어때요?"
그때 나는 도미를 발견했다. 도미는 길 건너 가로수아래서 고개를 들어 병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확히 어디를 보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젠장, 저 자식이!"
조 형사도 도미를 발견하고 으르렁거리더니 도미를 향해 내달렸다. 도로의 차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조 형사는 곧장 도로를 건넜다.
나 역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그러나 역시 도미를 쫓는다는 건 무리였다. 그때 인근의 경관이 쫓아와 도미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경찰이다! 당장 거기 서."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도망치던 도미가 그 자리에 멈춰선 것이다.
사실 로봇이 경관의 명령을 따르는 건 당연했지만 그 동안의 과정을 볼 때 도미가 멈춰 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바로 우리 앞에 멈춰선 건 아니다. 도미는 여전히 우리와 대략 7, 8 보의 거리를 유지하고 서있었다. 우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도미는 태연했다. 머뭇거리던 우리 대신 경관이 조심스럽게 도미에게 다가가 수갑을 채우려 했지만 도미는 여전히 7, 8 보의 거리를 유지했다. 7, 8 보. 그 거리가 도미에겐 제 2원칙과 제 3원칙의 평형점인 듯 보였다.
조 형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서며 아기를 달래듯 말했다.
"우리는 너를 도우려는 거야. 넌 지금 혼란에 빠져있어. 잠시 생각을 해봐. 네가 계속 도망치는 건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제 2원칙을 계속 어기는 거야. 그리고 우린 널 해치지 않아. 우리가 보호해 줄게."
그러나 도미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힘주어 말했다.
"인간은 로봇을 보호해주지 않아요! 마치 장난감 인형처럼 실증이 나면 버려버리죠. 심지어 자신이 로봇 공학자인 것처럼 분해를 해요. 마치 아이들이 레고를 부숴 놓듯이."
"아니야.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아. 우린 절대 널 해체하지 않을 거야."
조 형사는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그러나 도미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의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당신을 속일 것이다."
"의심하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2057년 휴고상을 받은 로건 프린스가 그의 소설 [그림자 로봇]에서 한 말이죠."
도미가 대답했다.
"그럼 우리도 널 의심해야 하는 건가? 넌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했지. 그 말도 의심해야 하는 거야?"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로봇은 거짓말하지 않아요. 로봇이야말로 참다운 자. 한결같은 자. 속이지 않는 자예요."
도미는 억울하다는 듯 울먹이며 소리쳤다.
나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버럭 소리쳤다.
"젠장. 그럼 당장 범인이 누군지 말해. 그게 너라도 범인이 누군지 말하란 말이야. 네가 말하지 않으면 사람이 죽어. 그럼 넌 네 그 빌어먹을 제 1원칙을 어기는 거야."
내가 호통치자 도미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정, 정말 또 사람을 죽일까요?"
"물론이지."
또 살인이 일어날 거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희망이 서려있었다.
도미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난 조급한 마음에 물었다.
"그래, 이제 말할 생각이 들어?"
"두려워요. 정말, 정말 그렇게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도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역시 여러분은 제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고는 도미가 획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검은 트럭이 인도를 덮쳐왔다. 트럭은 곧장 도미를 향해 덮쳤다. 그러나 도미는 재빨리 건물 벽으로 뛰어올랐고 트럭은 도미의 뒤에선 조 형사를 덮쳤다. 그 아찔한 순간, 건물 벽으로 뛰어올랐던 도미가 이미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트럭보다 먼저 조 형사를 덮쳤다. 둘은 차도 위로 떨어져 굴렀다. 트럭은 가로등을 들이박고 멈춰 섰다.
나는 재빨리 파트너에게 달려가 조 형사의 상태를 살폈다. 조 형사는 발목이 삐고 약간의 타박상이 있었을 뿐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다.
그 사이 도미는 왼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도망치고 있었다. 트럭에 부딪힌 듯 보였다. 그렇다고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느리진 않았다.
내가 추격을 포기하고 트럭의 운전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경관이 트럭의 운전기사를 차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범죄행위였다. 자동 운전 시스템과 GPS로 유도되는 차가 인도를 덮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범인들이 도주용 차량에 하듯이 분명 시스템을 다운시키고 수동으로 시동을 걸고 수동 방식으로 운전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불법행위였다. 운전사는 곧장 서(署)로 연행됐다.
조 형사는 가벼운 발목 염좌(관절을 삐는 일.)였지만 3주 진단을 받고 입원해야했다. 뼈가 부러지거나 칼에 찔린 자상의 경우는 세포 치료술로 빨리 완쾌됐지만, 이처럼 단순히 관절이 삔 경우는 오히려 치료가 더뎠다.
조 형사를 입원시키고 나오는 길에 나는 병원으로부터 변지영의 부검 결과를 통보 받았다. 변지영은 나의 기대와는 달리 로봇의 손에 질식사한 것이 아니라 갑작스런 심장마비에 이은 호흡곤란으로 인한 쇼크사였다.
쇼크사라니? 하지만, 쇼크의 원인은 부검 결과 어디에도 없었다. 쇼크사. 내 눈에는 가장 무책임한 부검 결과처럼 보였다.

서(署)로 연행된 운전사의 이름은 강성진이었다. 그는 전직 US사의 기술직 직원이었다. 그의 전직 때문인지 채영은 부팀장은 내게 이일을 억지로 US사와 연관지으려고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강성진은 대부분의 범인들처럼 묵비권을 행사했다. 오히려 그런 그의 행동이 우리의 의심을 샀고, 곧장 그는 취조실로 옮겨졌다. 나는 피해 당사자 쪽에 해당했기 때문에 강성진의 심문과정에는 참관만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하며 뇌파 분석기를 통해 그의 대답보다 더 정확한 뇌파를 체크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뇌파분석이 여전히 증거로나 일반 진술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초기 수사 방향을 잡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의 반응 중에 우리의 관심을 끈 건 왜, 무슨 원한으로 조 형사를 덮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다. 분석기의 결과는 뜻밖에도 담담했다.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어떤 거짓말쟁이도 뇌파까지 속일 순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왜 로봇을 공격했냐고 물었다. 그제야 판독기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때 함께 심문과정을 지켜보던 채 부팀장은 그가 US사의 골칫거리인 로봇을 제거해 다시 US사에 들어가고 싶어 저지른 단순 범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건 사건의 담당자들이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만 볼 땐, US사에게는 오히려 도미가 좋은 홍보물이었다. 그런데 파괴하려하다니.
"그럼 아직 US사에 안 좋은 감정이 남아있나 보죠."
채 부팀장의 대답이었다.
이제 그녀는 도미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렇게 되는 게 그녀의 경력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살인흉기가 현장에서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또 병원의 변지영이 로봇의 손에 질식사 한 게 아니라 쇼크사라면 쇼크사의 원인이 도미라고 해도 단순히 도미 하나만 살인범으로 단정지을 순 없었다. 공범 혹은 로봇을 조정하거나 혼란에 빠뜨린 자를 찾아야했다. 그리고 그 단서가 될 강성진이 우리 손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한 그를 잡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구나 거주지도 일정치 않아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증거를 찾기에는 수개월, 혹은 수년이 걸릴 수 있었다. 결국 우린 그가 우리에게 열쇠를 쥐어주길 바라며 풀어주기로 마음먹고 그의 변호사를 기다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변호사는 죽은 정후정의 고문변호사인 최도웅이었다. 지저분한 형사소송에서 나름대로 명성이 있는 변호사였지만 대단한 전력이 없던 강성진에게는 과분한 거물이었다. 그는 우리의 기대대로 이번 일을 단순한 교통사고로 치부했다. 변호사로서는 당연한 주장이었다. 그렇게 강성진은 미끼를 물고 풀려났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우리가 바란 열쇠를 가지고서 다시 잡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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