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로봇을 연행하셨다면서요?"
이제 막 경찰서로 돌아와 자리에 앉으려는 - 자리라고 해봤자, 무슨 제도판처럼 기울어진 40인치 LCD모니터에 의자가 고작이지만 - 내게 로봇협력팀의 채영은 부팀장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날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난 목구멍을 넘어오는 짜증을 참으며 대답했다.
"예. 그랬습죠."
비록 놀라 일어는 섰지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정후정이 가입한 보안회사로부터 온 회신내용과 자료를 보고 있었다.
회신내용은 범죄장면이 전송되지 않았다는 것과 이 사건은 자사와 무관하게 벌어진 일로 자신들의 보안사항이 유출된 건 아니라는 변명치고는 당당하기까지 한 회신이었다.
"이봐요."
채영은 부팀장은 제법 화난 듯 다시 나를 불렀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들어 채 부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경찰서에 어울리지 않는 의사 같은 흰 가운에 안에는 무진복(먼지가 발생되지 않는 작업복)을 입고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문설주에 기대어 서있었다. 예쁘게 차려입고 있었다면 섹시하게 보이기라도 했을 텐데, 사실 그녀는 항상 그런 차림이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지난 로봇관련교육을 받을 때, 그녀는 그 의상이 로봇생산공장의 근로자들이 입는 작업복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차림이 로봇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고 했다. 모든 게 로봇이 우선인 여자다. 그녀는 로봇을 배려하느라 사람에 대한 배려는 잊은 듯했다.
"무슨 혐의죠?"
"글쎄요."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허튼 수작 부릴 생각말고, 어서 대답이나 해요."
그녀의 강압적인 태도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로봇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인간에게 풀고 있다.
"말 그대로죠, 글쎄요. 아직 확실한 건 없어요. 하지만, 살인 용의자중 하나죠."
"뭐요?"
채영은 부팀장은 나의 말에 발끈했다.
"당신은 로봇이 살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면 말고요. 뭐 사실 지금 상황에선 현장에 있던 유일한 증인? 증보? 정도 될까요. 하지만, 진술에 따라 입장이 바뀔 수도 있어요."
나는 한 발 물러섰다.
"그럼 좋아요. 우리가 심문하죠."
"오오. 그건 곤란하죠. 녀석은 살인현장에 있었어요. 개나 고양이가 죽은 게 아니라 사람이 죽은 현장이요."
"내가 다시 우리 경찰이 US 로봇사와 맺은 계약을 당신한테 얘기해야 하나요?"
그녀의 입으로 장황하게 듣고 싶진 않았다.
"로봇을 심문할 땐 US 로봇사의 로봇심리학 과정을 이수한 사람이 심문하고 사건 종결 후, 심문 내용과 결과를 US 로봇사에 제공한다. 기타 등등."
투덜거리며 말하는 내게 채 부팀장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 알고 있군요."
"너무 잘 알아서 내 머리를 깨버리고 싶군요."
"좋을 대로해요. 그럼 계약에 따라 US로봇사가 의료비를 제공해 줄 거예요."
"병 주고 약주는 군."


결국 심문은 그녀의 요구대로 강력반의 취조실이 아닌 로봇협력팀의 면접실에서 열렸다. 그곳은 취조실과는 달리 거울 반대편에서 심문과정을 볼 수 없고 대신 건넛방에서 3차원 홀로그래피 영상으로 지켜 볼 수 있었다. 그건 로봇이 적외선 탐지 기능으로 거울 반대편에 있는 형사들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로봇의 심문이 취조실이 아닌 면접실로 정해진 이유이기도 했다.

- 안녕? 이름이 뭐지?
채영은, 그녀는 로봇에게만큼은 상냥했다.
- 도미. 도미입니다.
- 도미? 예쁜 이름이네.
- 도련님이 지어주셨죠.
로봇이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 주인님과 새 마님은 그냥 이봐, 아줌마라고 부르곤 했지만, 도련님은 늘 도미라고 불러주셨죠. 도우미라고 부르기 힘드시다면서……, 오래 전 일이죠.
로봇은 마치 회상에라도 젖은 듯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 좋아. 난 채영은이라고 해. 이곳 로봇협력팀의 부팀장을 맡고 있어. 이제부터 내가 너한테 몇 가지 질문을 할거야. 이건 널 돕기 위한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만 얘기하면 돼. 물론 네가 사실만을 말하리라 믿어. 그렇지?
- 물론입니다. 저는 진실만을 말하죠.
- 그래, 좋아.
- 그런데, 그전에 제 예측 프로그램에서 제 활동가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혹 조사를 받으면서 제가 충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가능하면 외부비상전원도 얻었으면 합니다. 급히 나오느라 챙기지 못했거든요. 이곳은 모든 게 인간 범죄자들에게만 맞춰져있어, 로봇이 충전하면서 쉴만한 곳이 없더군요.
- 저런, 미안하구나. 바로 조치해 줄게.
- 감사합니다. 그리고 윤활유도 필요해요. 1년째 교환을 하지 못했거든요. 주인님이 ……
- 그래, 알았어. 걱정하지마. 우린 널 돕기 위해 여기 있는 거니까.

"완전히 로봇 호텔이군."
반장이 테이블 위에 투영된 심문과정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채영은의 모습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로봇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나를 찾아왔을 때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심문은 1시간이나 겉돌았다. 시시콜콜한 정후정의 가정사로 1시간을 넘겼다. 그나마 수확이라면 도미의 진술로 우리는 용의자에 그동안 정후정과 거래했을 법한 절도범들 외에 도박 빚이 많은 아들 정태영과 정후정의 아내 변지영의 정부이자 정후정의 고문 변호사인 최도웅을 용의자선상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는 정도였다.
나는 왜 최도웅이 조 형사의 전화에 심드렁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의뢰인의 아내와 바람을 피다니, 그건 변호사 면허가 취소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살인범으로 몰아세울 증거는 없었다. 더군다나 최도웅은 이런 지저분한 사건에 재능이 많은 거물급 변호사였다.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계속된 로봇의 진술로 용의자가 하나둘 늘어갔지만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도미의 혐의 역시 완전히 풀린 것도 아니었다. 그때까진 증인(?) 신분이었지만 정후정의 집에서 보낸 지난 10년의 세월이 그에게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는 게 의혹을 사기 충분했다.

- 자, 이제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강화 터치 스크린의 전자노트에 심문 내용을 기술하던 채영은도 마침내 지친 듯 말했다.
- 전 일어나 장군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어요.
- 장군?
- 순수혈통의 진돗갠데, 아침마다 산책을 해요. 전 하루에 두 번 집을 나서는데 그 중 한 번은 장군이와 산책을 할 때고, 한 번은 오후에 장을 보러 나갈 때죠. 그리고 정확히 1시간 후, 집으로 돌아와 대기모드로 있었어요.
- 돌아와서 집을 살피진 않았니? 적외선 모드 같은 걸로.
- 아, 죄, 죄송해요. 전 잠금 장치에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의심하지 못했어요. 아아, 제가 조금만 의심이 많았다면 주인님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의심을 갖는 사람은 좀처럼 실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말 가식적이군."
조 형사가 모니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는 US 로봇사의 로고가 선명한 전자노트를 내게 건넸다. 난 노트의 모서리를 문질러 화면을 넘겼다. 노트에는 그간 US사와 정후정과의 거래 내역과 로봇의 업그레이드 내역이 적혀있었다. 그중 내 관심을 끈 건 정후정이 새 모델 HK-190x의 가정부로봇을 주문한 계약서였다.
"이건 어때요. 자, 보세요, 로봇이 인간을 해칠 수 없다지만 어떤 오작동이나 과실에 의해 상해를 입힐 순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광적인 집착 같은 걸로. 그러니까 새 로봇을 구입하는 주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정후정을 공격했거나 방조한 거죠."
그러나 아무도 조 형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로봇 3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조 형사 역시 방안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때 상황이 돌변했다.
심문을 받던 로봇이 갑자기 진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조 형사의 이야기를 듣느라고 제대로 보지 않고 있었다. 그건 우리가 바란 일은 아니었고 조 형사가 예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방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조 형사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심문하던 채영은 부팀장도 매우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우리 같은 강력반 형사들이야 미란다 원칙이며, 묵비권 운운하는 놈들뿐만 아니라 거짓말까지 일삼는 강력범들을 숱하게 상대해왔지만 그녀는 늘 진실만을 말하는 로봇만을 상대했기 때문에 감히 묵비권이라는 말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무시됐던 조 형사의 의견에 대해 사람들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헛소리, 아니, 저게 무슨 젠장."
나는 기가 막혀 말이 안나왔다. 로봇이 진술을 거부하다니.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인데요."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반장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만약, 정말 로봇이 범인이라면 보급된 로봇의 수를 생각해볼 때,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차들이 GPS에 자동운전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교통사고가 없는 건 아니죠."
우리는 우선 홀로그레이어를 되돌려 조 형사가 방에 들어온 후, 우리가 놓친 부분이 뭔지 찾아보았다.

- 그래, 정후정씨의 살해 장면을 목격했니?
- 아니요.
- 그럼, 변지영씨와 정태영씨는?
- 두 분은 죽지 않았어요.
- 그래, 알아. 미안하구나. 그들이 칼에 찔리는 건 봤니?
로봇이 이상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 미안, 미안. 너무 힘든 기억을 꺼내게 했나보구나.
- 아니요. 기억해내는 건 힘들지 않아요. 어차피 로봇이니까요.
- 그럼, 왜 말하지 않는 거지?
- 전 두 분을 살릴 수 있어요.
- 살리다니, 무슨? 도미, 걱정하지마. 두 분은 무사하시니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
- 아니요. 그걸로는 부족해요.
- 네가 주인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네가 보고들은 걸 말하지 않거나 데이터를 우리에게 주지 않으면 두 분이 더 위험해질 거야.
-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 절대?
- 제가 여기서 누가 그랬는지 말한다면 주인님은 죽게 될 거예요.
- 왜? 누구한테?
- …….

우린 채영은 부팀장과 함께 회의에 들어갔다.
반장은 방 안을 서성이며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놈한테 진술이 법률상 의무라고 말했소?"
"그런 말은 안 했지만 그게 통할지 모르겠네요. HK-100모델 이상의 양자두뇌를 가진 로봇은 필요하다면 법도 어길 수 있거든요. 하지만, 자기 주인이 죽었는데, 이런 경우에도 진술을 거부할 줄은 몰랐어요."
"젠장, 로봇과 법 사이의 문제는 해결된 거 아니오?"
"사실 그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아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젠장, 빌어먹을 US."
나는 화가 났다.
"US사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법을 어기지 않으면 로봇 제 1원칙을 수행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채영은 부팀장은 한숨을 내쉬고는 담담히 말했다.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 혹은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해를 당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이슨-사사키 사건 때문에 우리는 그 원칙이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됐죠."
제이슨-사사키 사건. 두 사건은 모두 이 로봇 1원칙에 대한 기준이 얼마나 난해한 것인가를 알게 했다.
"각기 독립적인 사건이었지만 로봇공학에선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죠."
남식의 말에 채은영 부팀장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최초의 인간형 로봇은 로봇 3원칙 안에서 제 1원칙이 최우선이었죠. 그 결과 로봇을 이용한 교묘한 범죄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제이슨이라는 자가 자신의 상황을 속여 로봇이 자신을 위해 음식을 훔쳐오게 했죠."
"자기는 놀고 먹으면서."
제이슨 사건은 한때 US  로봇사의 서버를 다운시키고, 로봇에 대한 검문검색이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당시 US사는 제이슨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로봇의 업그레이드를 실시했다. 그러나 일부 범죄자들이 자신의 로봇을 업그레이드시키지 않고 유사한 범죄를 계획했고 실행했다. 당시 경찰은 거리에서 모든 로봇을 검문해 업그레이드가 됐는지, 안됐는지를 체크했고, 나 역시 그 일에 지원을 나가야했다. 만약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았을 경우, 우리가 직접 업그레이드를 시키고 로봇의 주인에게는 벌금이 부과했다.
"맞아요. 주인은 일도 안하고 놀면서 로봇에게 자신이 굶어죽을 것처럼 거짓 정보를 제공했죠. 결국 로봇은 주인을 살리기 위해 음식을 훔쳐왔고. 그 뒤로 잘못된 정보를 이용해 로봇을 사기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나왔죠. 그래서 US 로봇사는 준법수칙을 강화하고 인간과 인간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선 가급적 간섭을 배제했죠. 그런데 뜻밖에도 준법에 대한 포텐셜 값이 과도하게 높아져서 도주하던 강도의 차량이 공을 줍기 위해 도로로 뛰어든 사사키라는 소년을 덮칠 때 옆에 있던 로봇이 소년을 구하지 않았죠.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분명히 구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그 로봇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 법을 어겨야 했지만 절대로 법을 어길 수 없도록 업그레이드 됐기 때문에 소년을 구할 수 없었던 거예요. 당시 로봇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법을 어긴 사람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고 있었죠."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군."
반장의 말에 우리 강력반 모두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나 반장은 웃는 우리를 쏘아보고는 물었다.
"하지만, 융통성 같은 걸 가르쳐 해결된 문제 아닌가?"
"그랬죠. 저 도미에게 사용된 것과 같은 자율 발전형 양자두뇌에게 법에 대해 교육하고, 준법성에 대한 포텐셜 값은 제 1원칙과 제 2원칙 중간에 배치되도록 설정해서 해결했죠."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하는 것 같나?"
"당시엔 해결했다고 믿었는데 그게 모든 경우에 적용된 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그렇게 가르쳤다고 믿었지만 로봇은 아직 이런 경우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거죠. 결정은 로봇이 내리는 것이니까요. 결국 인간을 보호해야하는 제 1원칙과 법, 아니면 1원칙과 명령에 복종해야하는 2원칙의 중간값에서 눈치를 보는 것 같아요."
"눈치?"
"제가 생의학을 전공하지 않아서 딱, 눈치라고 말할 순 없지만, 지금 반응을 설명할 만한 단어가 눈치라는 거죠."
"로봇이 눈치를 본다? 정말 웃기는군. ……아니, 도대체 왜 쓸데없이 눈치보는 로봇을 만든 거요?"
나는 어이없어 웃었다. 그리고 빈정거리며 물었다.
"가장 인간다우니까요."
채 부팀장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가장 인간다운,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넘쳐나는 게 인간이다.
"어쩌면 장난일 수도 있죠. 사실 이런 양자두뇌는 간단한 피드백 시스템의 오류를 가정한대서 비롯됐어요. 그러니까 간단한 에어콘 같은 피드백 시스템에서 온도가 기준치 이상으로 올라가면 냉방을 하고 낮으면 냉방을 멈추고 대기 상태에 들어가죠. 하지만, 만약 온도가 높다는 신호와 낮다는 신호가 동시에 들어오면 어떻게 할까요?"
"그럴 리가 있나."
"기계적으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죠. 일어나더라도 드롭(Drop)시키면 되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늘 일어나는 일이죠. 어른들이 아이한테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고 묻는 것처럼요. 그때 도미처럼 양자두뇌를 가진 로봇은 순식간에 1제타 큐빗 (제타 ; Zetta: 10의 21승 / Qubit - quantum bit - 양자 비트 - 양자 전산에서 디지털 컴퓨터의 bit에 해당하는 정보의 최소 단위.)이나 되는 수십 만 가지 경우의 수를 1분 이내에 걸러내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게 되죠. 만약 그걸로도 부족하면 계속 검색하면서 더 많은 정보의 입력을 기다릴 수도 있고요."
"그럼 어떻게 한다는 거요?"
로봇이 인간처럼 눈치를 보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난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지금 눈앞에 보고 있잖아요."
채영은 부팀장의 간단한 대답에 조 형사가 이의를 달았다.
"좋아요. 그럼 채부팀장님 말대로 녀석이 눈치를 보고 있다 치죠. 그러니까 저 로봇이 아빠가 좋다고 할까, 엄마가 좋다고 할까 고민하고 있는 거잖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건 단순히 입력된 조건이나 주변 상황에 대한 반응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싶은 건, 그 조건을 입력한, 그런 상황을 만든, 그러니까 엄마냐, 아빠냐를 물은 상대가 누구냐는 겁니다."
그때 채영은 부팀장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글쎄요.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그건 범인이겠죠."
"범인?"
채영은의 말에 강력반 형사들은 모두 경악했다.
채영은은 손을 들어 형사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만약 살인범이 당신에게 입을 다물지 않으면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해치겠다고 협박을 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나는 그녀의 입가에 번졌던 미소의 의미가 뭔지 그 순간 깨달았다.
채영은은 이미 로봇이 범인의 눈치를 본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면서 우리에게 감추고 있었다. 스무고개를 하면서.
"젠장, 그래도 그렇지. 어차피 범인은 죄를 저질렀고, 그럼 범죄자를 보호할 이유가 없잖소. 더구나 로봇 제 1원칙에 보면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되며, 또한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해를 당하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맞아요, 그거예요."
채영은이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반색하며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죠. 하지만 만일 동일범에 의해 또다시 범죄가 일어난다면 벌어질 일은 막아야하는 거죠. 이미 살인은 일어났고, 그래서 저 로봇은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살인을 막으려는 거예요.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살아있다고 했죠? 그들은 다치긴 했어도 죽진 않았죠. 만약, 범인이 도주하면서 자신을 본 얘기를 하면 다시 와 가족들을 마저 죽이겠다고 협박이든 사정이든 어떻게든 말을 했다면 로봇은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진술을 거부할 수도 있는 거예요. 혹은 저 로봇일 수도 있겠죠, 꼭 살인이 아니더라도 로봇이 다치는 것도 로봇 주인에게는 재산상의 해(害)니까, 이땐 제 1원칙과 자신을 보호해야하는 3원칙이 동시에 작용하는 거죠. 그래서 말하지 못하는 거예요."
"말도 안 돼. 범인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이요."
듣고 있던 내가 어처구니없어서 소리쳤다.
"기본적으로 로봇은 사람을 믿고 그 명령에 따르게 돼있어요."
나는 채영은의 대답에 화가 났다.
"젠장, 세상에 믿을 게 따로 있지. 사람을 믿다니. 놈한테 가서 똑똑히 말해요. 놈이 또 살인을 하고 안하고는 저 쇳덩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자신이 망가지든 말든, 젠장 인간을 구해야지. 그게 제 1원칙 아니오? 빌어먹을, 그렇게 잘났으면 처음부터 살인을 막았어야지. 어이가 없군. 당장 데이터를 토해내지 않으면 박살낸다고 전해요."
"그건 곤란해요. 그럼 로봇이 불안해할 거예요. 괜히 로봇의 제 3원칙의 포텐셜 값만 끌어올릴 수 있어요. 그럼 상황은 더 복잡해 질 수……"
"그 딴 건 관심 없소. 지금 애들 장난하는 줄 알아요. 이건 살인 사건이요.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의 문제도 아니고, 에어컨이 켜지고 말고의 문제도 아니라고."
더 참을 수 없어 나의 언성이 올라가자 채영은 부팀장의 언성도 높아졌다.
"그건 단순히 예를 든 거지. 꼭 그렇다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이야말로 왜 그래요. 애처럼."
"애? 애가 어떤지 한번 제대로 보고 싶소?"
그때 조 형사가 파트너답게 내 편을 들었다.
"맞아요. 어쩌면 효과가 있을 수도 있죠. 만약 제 3원칙의 자기방어에 대한 퍼텐셜이 증가하면 자기 방어를 위해 제 1원칙을 무시하고 입을 여는 거죠."
"들었죠?"
"그건 말도 안 돼요. 제 3원칙의 포텐셜값은 제 1원칙의 포텐셜값과 같아질 순 있어도 능가할 순 없어요."
채영은 부팀장이 반대했지만 우리 강력반은 놈을 인간처럼 대하기로 했다. 더 이상 기계덩이로만 취급할 순 없었다. 그 일이 과연 로봇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는가, 안 됐는가는 추후 채영은의 보고서에 기록될 일이겠지만, 당시 우리는 90% 자신했다.
우린 놈을 윽박지르고 달래는 전형적인 범인 심문 방법을 택했다. 물론 내가 놈을 윽박질렀다.



"당장 듣고 본 걸 얘기하지 않으면 네 놈을 공범으로 구속시킬 수도 있어. 그럼 네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나? 아니지 혹시 네가 죽인 건 아니야?"
나는 면접실로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로봇을 몰아붙였다.
"전 주인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전 절대 주인님을 해칠 수 ……"
로봇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 그래? 그럼 누가 죽였지?"
"……"
"오호라. 이거 공범이 확실하군, 그래."
"뭐라 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전 주인님을 지켜드리려는 거예요."
"누구로부터? 네 자신으로부터? 아니지, 네 자신을 지키려는 것 아닌가? 이 쇠붙이야."
그때 로봇이 쥐고 있던 충전케이블이 내 눈에 띄었다. 나는 죄수의 밥그릇을 뺐어 던지듯이 충전케이블을 억지로 뽑아 던졌다. 그걸 내 뒤에 있던 조 형사가 주워 로봇의 손에 다시 꽂아주며 달래기 시작했다.
"선배, 먹을 땐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자자, 겁내지 말고, 우리는 널 도우려는 거야. 네가 주인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아. 그래서 정태영과 변지영씨에게 응급처치도 했지? 너의 응급처치 덕택에 두 분은 무사해. 일찍 지혈을 한 덕이지. 전치 1주라더군. 목을 찔렸지만 말이야. 요즘 세상은 죽지만 않으면 자상(칼이나 창과 같은 예리한 물체에 찔려서 생긴 창상.)이라도 금방이야. 세상 좋지?"
"마님도 무사하신 가요?"
로봇은 변지영에 대해 다시 물었다.
"물론이지, 하지만 말이야. 네가 범인을 말해주지 않으면 다시 그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어."
"정말요?"
"그럼."
"……하지만, 말할 수 없어요."
"왜지?"
"주인님을 지켜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로부터?"
"……."
로봇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좋아. 범인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좋아. 그럼 이건 어때, 네가 정태영씨를 응급 조치할 때 정태영씨가 뭐라 한 말은 없니?"
"예, 있었어요. 주인님은…… 도미, 난 네 주인이야. 넌 나를 지켜야해. 지켜야해. 제발 지켜 줘. 라고 하셨어요."
"지켜달라고? 뭐로부터? 혹시 그때까지 범인이 집안에 숨어있었니? 정태영씨 옆에 범인이 있었던 거야?"
"아니요."
로봇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자 조 형사는 '옆에' 라는 말에 제법 신경이 거슬린 듯 다시 물었다.
"그럼? 앞? 뒤? 위? 아래? 젠장, 어디 있는 거야? 범인이 거기 없었던 거야?"
"……."
"코앞에 있었겠지."
내가 다시 로봇의 턱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리고 도미의 얼굴을 살폈다. 로봇은 겁에 질려 있었다.
"어때 이젠 좀 말하고 싶어졌나? 네 놈 머리가 자유 어쩌고하는 양자두뇌라면서?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네 눈으로 네 머릿속을 구경하게 될 테니까."
도미는 천천히 말했다.
"주인님은…… 도미, 난 네 주인이야. 넌 나를 지켜야해. 지켜야해. 제발 지켜 줘. 라고 하셨어요."
"젠장. 헛소리 집어치워!"
예상했던 것보다 로봇 1원칙의 포텐셜 값은 높았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6 중편 교망(皎望) - The Darkside of the stars - (1) 별밤 2008.07.30 0
215 장편 차원의 문 1.혼란 ② DAMN 2008.03.20 0
214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9 라퓨탄 2008.03.19 0
213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8 라퓨탄 2008.03.19 0
212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7 라퓨탄 2008.03.19 0
211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6 라퓨탄 2008.03.19 0
210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5 라퓨탄 2008.03.19 0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4 라퓨탄 2008.03.18 0
208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3 라퓨탄 2008.03.18 0
207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2 라퓨탄 2008.03.18 0
206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12 라퓨탄 2008.03.18 0
205 장편 차원의 문 1.혼란 ①2 DAMN…、 2008.03.16 0
204 장편 <TTHS>대악당 - 비행기 추락(2) 나길글길 2006.12.13 0
203 장편 <TTHS>대악당 - 비행기 추락(1) 나길글길 2006.12.13 0
202 장편 악마를 위하여 - Ⅰ. kyrie eleison 령아 2006.08.25 0
201 장편 뱀파이어 듀켈 제 1장 방랑자라는 이름의 어쌔씬 2 김인화 2006.08.01 0
200 장편 뱀파이어 듀켈 <1.방랑자란 이름의 어쌔신> 1 김인화 2006.07.30 0
199 장편 뱀파이어 듀켈 <프롤로그> 김인화 2006.07.30 0
198 중편 영원한 이별은 오지 않는다2 바보 2006.07.28 0
197 중편 영원한 이별은 오지 않는다1 바보 2006.07.2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