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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8년 9월 12일 금요일. 사건 발생 첫째 날.
씁쓸한 우스갯소리로 21세기 신격언 중에 부자는 타나토스(그리스 신화의 죽음의 신)도 비켜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부자도 칼 앞에서는 무력했다.
당시 정후정은 불법 텔로미어(Telomere ; 종말체(終末體),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그 길이가 짧아져 생명시계라고도 불린다.)시술로 이미 140세였다. 그의 가족력으로 볼 때, 그의 수명은 오늘날의 첨단 의학으로도 100세까지가 적당한 수명이었다. 어쩌면 그는 22세기를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21세기의 신격언은 이렇게 어긋나면서 당황한 건 그도, 과학도 아닌 경찰이었다. 한국의 최고 부촌 신 강남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긴 수명만큼 악명 높은 작물아비이자 사채업자인 정후정의 집에 들어섰을 때 내 눈을 제일 먼저 잡아끈 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핏자국이었다. 계단을 오르내린 발자국이 도장의 인주처럼 붉은 피로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 중 하나는 발 모양으로 봐선 로봇의 발이 분명했다. 나는 그 핏자국을 따라 문이 활짝 열린 서재로 갔다. 로봇은 어두운 서재의 한 가운데 동상처럼 서있었다. 감식반은 탑돌이 하듯 로봇을 맴돌며 현장을 샅샅이 훑고있었다.
"왜 이리 어두워?"
"자외선 감식한다고 불 껐어요."
먼저 도착한 파트너 조남식 형사가 스위치를 찾는 내 손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나는 문 앞에서 역겨운 피비린내를 참기 위해 입을 오므리고는 껌을 씹으며 껌의 향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좋아. 이제 불 켜."
감식반의 반장 김대응 반장이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뭐 좀 찾았어요?"
"요즘 강도들이 뭐 남기는 거 봤어?!"
"그래도 예의 상 물어보는 거죠. 집안의 감시용 홀로그레더(사물을 3차원 홀로그래피 영상으로 녹화하는 장치)는요?"
나는 천장에 부착된 스캔용 레이저를 가리키며 물었다.
"놈들이 완전히 부셔버렸어."
김대응 반장이 구석의 프리즘 조각들을 가리켰다. 고의가 아니고선 쉬 부서지지 않는 강화 플라스틱 소재의 메모리 스틱이었다. 물론 예상한 일이었다.
"보안회사 서버로 전송된 게 있을 텐데요."
"그건 자네들이 알아봐야지. 내가 그런 자네들 서류작업까지 해줘야 해?"
"그건 아니죠."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말게. 오늘 보안서버를 교체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5분인가 10분 정도 서버가 다운된다고 들었는데."
"그래요? 어떻게 아세요?"
"우리 집도 여기랑 같은 보안업체를 쓰거든."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다른 가족은요?"
"부인과 아들이 있는데, 부인은 목이 찔리고 손이 부러졌어. 출혈이 심해서 좀 위태위태하지만. 아들은 운이 좀 좋았지, 목과 배를 찔렸고 전치 1주의 중상이지만 의식도 있고, 저 로봇이 응급처치를 했다더군."
김대응 반장이 건넨 전자노트에는 정후정과 동거인들의 이력이 나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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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세의 아버지와 13년 전 결혼한 38세의 4번째 부인,
3번째 아내에게서 얻은 27세의 아들.
구입한 지 10년 된 HK-100 모델의 가정부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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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레더는 부술 시간이 있고 여자와 아들은 죽일 시간이 없었다?! 아니면 홀로그레더를 부술 때 부인과 아들이 들어왔다? 그것도 아니면 아들이 강도로 위장해서 벌인 근친살해가 아닐까? 유산문제 같은 게 있잖아."
140세까지 죽지 않는 부자 아버지에 새어머니까지 있다면 빈털터리 아들이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문제였다.
"꼭 그런 것 같진 않아요. 선배 오기 전에 최도웅이라고 정후정의 고문변호사와 얘기해봤는데……"
"최도웅?"
나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지저분한 사건 전문 변호사? 그런 놈이 유언장도 관리하나?"
"원래 정후정이 지저분한 일을 했으니까요. 뭐 그런 인연으로 맡았겠죠."
남식이 품에서 프리즘 형태의 소형 메모리 스틱을 꺼내 소형 홀로그레이어(녹화된 홀로그래피 영상을 재생하는 장치)에 집어넣었다. 이내 최동웅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테이블 위에 나타났다.
최도웅은 무척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최대고객 중의 한 명인 정후정이 다시는 소송할 일이 없어졌으니.

- 강남서 강력반 조남식 형삽니다. 정후정씨의 고문 변호사시죠?
"조금 전에 병원에서 연락 받았소. 죽었다지요?"
- 예, 그래서 수사에 도움이 될지 몰라 연락 드렸습니다. 정후정씨의 유산 같은 건 어떻게 처리돼나요?
"고인의 뜻에 따라 처리됐겠죠. 유언장이 있으니까, 곧 발표할 겁니다."
- 그런데 이 사건은 아시다시피 살인사건입니다. 내용을 미리 좀 알았으면 하는데요.
"제 기억으론 변지영 씨에게 모두 돌아갈 겁니다."
- 부인에게요?! 음, 그렇군요. 그럼 정태영 씨에게 돌아갈 유산은 어느 정도죠?
"정후정씨는 3년 전 다섯째 아들이 죽은 뒤, 유서를 다시 고쳤소. 그때 도박에 빠진 개망나니 아들에게는 땡전한푼 줄 수 없다고 했소."
- 정태영 씨 말인가요?
"그렇소. 다른 아들들은 다 죽었으니까."
- 정태영 씨도 알고 있었나요?
"알고 있었을 거요,"
- 재산은 얼마나 되죠?
"대충 재산은 250억 이안(EAN : 동아시아 통합 화폐.)에 세금 낼 잔돈 몇 푼,"
- 꽤 많은데, 혹 소송을 통해 받을 수도……
"유언장에는 모두 아내에게 준다고 유서에 썼고, 내가 공증했소. 심지어 아들 정태영에게는 땡전한푼 안 준다고 명시했지."
- 그 정도입니까. 그럼 혹 그 점에 불만을 품고 아들이……, 그것도 충분한 살인 동기가 될 수 있겠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겁쟁이는 아버지가 자기보다 더 오래 살길 바랬소. 다른 형들이 먼저 죽었듯이 자기도 아버지 보다 먼저 죽고 싶어했지. 그래야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도박 빚을 갚아줄 수 있을 테니까."
- 그럼 변지영 씨와 정태영 씨가 죽으면 유산을 물려받을 다른 사람은 누군가요?
"난 정후정 씨의 변호사지 변지영 씨의 변호사가 아니오."
- 정후정 씨의 친척들 중에 원한을 살만한 사람이 있나요?
"정후정은 140세요. 정태영을 빼고는 자식들도 먼저 다 죽었지. 며느리와 손자들은 아들이 죽으면 다 내쫓았소. 그 사람들만 해도 대략 열 명은 될 거요."

"변지영 씨나 그쪽의 가족은 어때?"
나는 통화내용이 끝나자 남식에게 물었다.
남식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변지영 씨 쪽은…… 깨끗해요. 우선 변지영 씨의 양친은 모두 돌아가셨고 동생이 한 명 있긴 한데, 변남석이라고 정신병원에 있어요. 완전히 돌아서 금치산자 선고까지 받았더라고요.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변남석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면서 입원해 있는 병원에 재산을 위탁을 했어요. 그래서 그 병원이 변지영 씨 부모님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죠. 결국, 변지영은 정후정과 결혼하기 전까진 무일푼이었고요. 다른 친척은 없고요."
"그럼 유산은 어떻게 되는 거야?"
"우선 변호사 말대로 정태영에게 돌아가는 게 없고 변지영이 전부 가졌으니 동생이 상속 받아야 하는데 동생의 재산은 모두 병원에 위탁되니, 병원이 받겠죠."
"그럼 원한 관계로 생각해봐야 겠군."
나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자네들이 밝혀야지."
감식반의 김대응 반장이 다가와 통화내용을 다시 들어보며 말했다.
"신고는 누가 한 거죠?"
김대응 반장은 서재 한가운데 망부석처럼 서있는 로봇을 가리켰다.
"조심해.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야. 우리가 현장에 왔을 땐 녀석이 칼까지 들고 있었어."
"칼이요?"
조 형사가 물었다.
"응 범행에 쓰인 칼 같더군. 정확한 건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설마 로봇이 범인일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모르는 일이야. 예전엔 로봇이 도둑질도 했잖아."
"그건 그때고요."
예전에는 그랬다. 한 7년 전쯤이었다.
주인이 로봇에게 굶어 죽겠다는 핑계로, 자신이 두고 온 물건이라며 도둑질을 시키곤 했다. 게다가 로봇에게 거짓정보를 입력해 사기에 이용하기도 했는데, 인간의 말에 복종하고 인간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 순진한 로봇을 속이는 건 사람을 속이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들 모두 이번과 같은 강력범죄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로봇은 강도나 살인 같은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무서운 세상이야. 로봇까지, 하여튼 못된 것만 배워요. 쯧."
김대응 반장이 혀를 차며 돌아섰다.
나는 심문을 위해 소형카메라를 오른쪽 귀에 끼고 로봇에게 다가갔다.
로봇이 언제부터 그렇게 서있었는지 알 순 없지만, 넋이라도 나간 듯한 얼굴이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전 죽이지 않았어요."
로봇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내가 다가가자 나와 김대응 반장의 대화를 들은 듯했다.
"알아. 넌 그러지 못하게 만들어졌으니까."
나는 몰래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생각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
"그래, 봤나?"
난 소파에 앉아있는 정후정의 시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뇨. 제가 서재에 들어왔을 땐 이미 죽어 계셨어요."
"그랬군. 그럼 뭔가 이상한 낌새 같은 건, 눈치채지 못했나?"
"낌새요?"
"그래, 누가 침입하는 소리라든가, 다투는 소리 같은 거. 그런 게 네 머릿속에 저장됐다면 범인을 찾는데 도움이 되겠는데."
"잠시 검색을 해보죠. ……없네요. 다투는 사람도 없고, 모두가 일상적인 소리뿐이에요. TV소리와 커피 끓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네, 화장실문과 서재의 문이에요."
"정확한가?"
"예, 전 이 집에서 10년째 일하고 있어요. 물론 그 기간이 중요한 건 아니죠. 단지 그만큼 정확하다는 거예요."
"발자국 소리는 어때? 누군가 죽은 정후정씨 외에 서재로 들어오고 나가는 소리나 특이한 발자국 소리 같은 거."
"새로운 소리는 전혀 없었습니다. 일상적인 소리뿐이네요."
"혹, 누군가 네 기억에서 지운 건 아니고?"
"제 네트워크는 충전시에 전력선통신(PLC : Power Line Communication)방식에 의해서만 접속이 가능하죠. 그 외 어떤 외부 네트워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 기억의 일부를 지우려면 US 로봇 주식회사의 허가가 필요합니다만 지금까지 US 로봇사로부터 그런 명령을 듣지 못했고, 혹 해킹으로 제가 모르는 가운데 그런 일이 벌어졌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아시다시피 저희 US로봇사의 양자암호통신은 절대 해킹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난 눈을 내리깔고 손을 들어 로봇의 입을 가로막았다.
양자, 21세기의 혁명이라는 양자역학이 어떤 건지는 나 역시 궁금했지만 20세기 천재 물리학자들까지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21세기에 태어났다하더라도 내가 그 천재들을 능가할 순 없을 터였다.
그리고 US 로봇사가 양자암호화기술을 실용화해 세계 3대 기업이 된 건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다. 그들이 US 로봇사라고 이름지은 건 그저 일반 대중에게 로봇을 통해 친숙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다양한 로봇도 만들었지만 보안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렇군. 그럼 그건 그쪽에 문의해야겠군. 그런데 왜 여기 계속 서있는 거지?"
"사건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서죠."
"칼을 들고 있었다던데."
"네, 그렇습니다."
"왜 들고 있었지?"
"주인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죽은 주인을 보호하다니.
"자네가 보디가든가?"
"제게 학습한 내용 중에는 주인을 보호할 수 있는 기본적인 데이터가 있습니다."
로봇은 무시당했다고 여겼는지 제법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군. 하지만 그 내용이 그리 효과는 없었군."
갑자기 로봇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치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듯 보였다. 그러나 로봇이 죄책감을 느낄 순 없을 터.
"그런 표정 짓지마."
나는 소형 카메라를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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