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정훈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는다.
"와, 44시간이나 계속 쫓고 계신 거예요? 혼자서? 파트너는요?"
"병원."
"아아."
정훈은 이제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로봇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내 눈살을 찌푸린다.
로봇이 사람을 해친다?
로봇이 도둑질을 했다거나 사기를 쳤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순간, 정훈의 눈이 번쩍이더니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는다.
"그럼 혹시, 이게 그 동안 US로봇사에서 숨겨온 비밀이라는 거와 무슨 관련이 있나요?"
"비밀?"
도열이 별 시답잖은 소리 다 들어본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는다.
"왜 있잖아요. 로봇 태권 V를 실제 만들었다느니, 대통령이 로봇이라느니, 영원한 생명을 꿈꾸던 US사의 창업자가 자신의 뇌를 로봇의 머리에 이식해서 영원히 회장직을 하고 있다느니, 하는 그런 거요."
도열은 어이없다는 듯 코방귀를 끼고는 다시 정훈을 바라본다.
"미치겠군. 아주 소설을 쓰지, 그래. 자넨 저런 가정부 로봇이 그런 거대한 음모와 관계 있을 거라고 보나?"
도열이 앞서 달리는 로봇을 가리킨다.
정훈도 도열을 따라 로봇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놈은 최신형도 아니다. 그렇다고 로봇 태권 V처럼 거대하지도 않다. 고작 160cm 정도의 구식 가정부 로봇이다. 특이할 것도 없다. 기껏해야 안면에 인조피부를 붙인 최초의 모델이라는 것, 그래서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 또 그래서 베스트셀러였다는 게 특이사항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더 평범한 로봇이다.
"그런데 왜 44시간이나 좇고 있는 거죠? 설마 녀석이 선배님 파트너를 해쳤을 리도 없고, 만약 그랬다면 세계 3대 기업인 US사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죠. 자기들 이미지도 있을 테니까, 벌써 우리 몰래 회수해서 박살내버리고는 모르는 척 했을 텐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도열의 애매한 대답에 정훈이 다시 고개를 돌려 도열을 바라본다.
이야기가 여기서 멎으면 안 된다. 그러나 도열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무슨 뜻이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정훈이 물었다.
"녀석은 지금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만큼 멍청이가 아니라는 소리야."
"허, 그래요? 도대체 얼마나 똑똑한데요? 그래봤자 로봇은 로봇이죠."
정훈은 어림없다는 듯 말했다.
"과연 그럴까."
도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저보다야 많이 기억하고 계산도 잘 한다는 거, 그건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로봇이 명령하면 명령하는 대로 따라야죠. 그것도 우린 당당한 경찰인데."
정훈이 외투 속의 경찰 휘장을 보이며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로봇이라는 게 대체 뭔가?"
"주인이 명령하면 그대로 따른다. 경찰의 명령도."
정훈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좋아, 아주 단순하군. 명령에 따르면 되니까.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로봇 얘기하다가 무슨 세상 얘기예요. 물론 세상은 복잡하죠. 하지만 로봇은 단순하죠. 물론 만드는 건 복……"
"그래, 자네 말처럼 단순할 수도 있지. 단순할 지도 몰라. 특히 가정부 로봇의 삶이야 정말 단순하지.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사고, 하지만 세상은 복잡하고 녀석의 머릿속도 복잡해. 자네 머릿속처럼 단순하지가 않아."
도열은 정훈의 말을 자르며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님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요?"
정훈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과연 그럴까?"
도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가 뭘 아냐는 듯한 비웃는 미소다. 순간, 정훈이 발끈했다. 꼭 보여주고 말겠다는 듯 도열을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고는 운전석 쪽의 사이드 창을 내린다.
어느새 굵어진 빗방울이 차안으로 들이친다. 자동차의 안전시스템이 경고음을 내지만 정훈은 상관하지 않고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는 앞서 달리는 로봇을 향해 소리친다.
"야, 너 당장 거기 안 서."
빗방울이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를 더해가며 거세게 정훈의 얼굴을 때린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로봇은 여전히 속도를 유지한 채 앞서 달린다.
"젠장."
자동차의 안전운행시스템은 계속되는 정훈의 돌출행동에 경고를 내린다.
[운전석에 앉으십시오. 사고의 위험이 높아집니다. 운전석에 바르게 앉으십시오.]
그러나 정훈은 허리춤에서 경찰 휘장을 꺼내 보이며 다시 소리친다.
"야, 당장 거기 안 서. 이건 명령이야. 우린 경찰이라고."
로봇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마치 미친 사람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어린 소녀 같은 표정이다. 아니면, 마치 '너도냐.' 는 듯도 하다.
뒤늦게 뭔가 깨달은 정훈은 다시 운전석에 앉고 말없이 창문을 올린다. 얼굴이며 옷은 흠뻑 젖었다. 도열이 말없이 수건을 건넨다. 정훈이 손을 내밀며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도열의 입에서 먼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정훈은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다.
"킥킥킥, ……큭큭, 아, 아, 정말 미안하네. 하지만, 정말 웃겼어. 빗속에서 그렇게 소리치다니. 킥킥킥, 우린 경찰이다. 하하하."
도열이 정훈을 흉내내며 웃었다.
그 웃음을 언짢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정훈은 문득 머릿속에 44시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제가 네 번째군요."
"크크크."
"저 로봇한테도 네 번째고요."
"하하하, 미안하네.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난 비가 와서 자네가 안 할 줄 알았어."
도열은 코미디 같은 정훈의 행동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요, 그렇죠, 맞아요. 한 제가 바보죠."
"너무 자책하진 말게."
도열이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띄고 정훈의 어깨를 잡아 토닥이며 말했다.
"아, 물론이죠. 자책하진 않아요. 하지만, 저 녀석은 절 바보로 보겠죠?"
정훈도 단단히 삐진 듯했다. 그러나 도열은 심드렁히 대답했다.
"모르지. 저 녀석 머릿속을 모르니."
"젠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로봇이 경찰의 명령을 듣지 않다니."
정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도열이 피식 웃으며 묻는다.
"자네 왜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먹었는지 아나?"
"뱀이 유혹했잖아요."
"그것과 좀 비슷하지."
"무슨 소리죠?"
"자네가 네 번째지. 자넨 좀 운이 좋은 것 같군. 내가 원래 말주변이 없는데, 이 얘기를 지금까지 세 번했거든. 그래서 이번엔 조금 재밌게 얘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도열의 말에 호기심이 생긴 정훈이 빤히 도열을 바라본다.
도열은 정면의 로봇을 바라보고 있다.
"일주일 전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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