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

온 세상을 어둠이라는 물속에 잠가둔 듯 캄캄한 밤. 쥐 한 마리 숨 쉴 수 없어 어디론가 숨어버린 칙칙하고 무거운 밤공기에 실린 침묵이 안개처럼 거리에 퍼져있다. 빽빽이 들어선 조그만 집들과는 확연히 드러나는 격 차이를 내비치듯 집들이 비치된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화려한 색조와 장식들로 치장한 3층 고급저택 한 채가 나름의 위용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이 침묵을 즐기는 어둠은 저택의 튀는 모양새가 싫은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요기를 저택 안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봐 샘, 오늘 교대시간에 좀 늦은 거 같은데 무슨 일이야? 혹시 어젯밤에 정력을 너무 소비했나?”

저택 크기만큼이나 높이 솟은 철문. 누구든 허용치 않겠다는 듯 기세당당하게 제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헌데 그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듯 그 앞에 경비병까지 세워놓았다. 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왼쪽에 있던 파란 눈에 얼굴에 칼자국이 진득하게 그어진 경비병이 칙칙한 분위기가 무료했던지 옆에 있는 동료에게 음담해소를 넌지시 꺼낸다.

“뭐, 좋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 그냥 다 그런 거지.”

오른편에 있던 붉은 눈에 샌님같이 생긴 경비병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호오~. 이 친구 갑자기 왜 이러신가. 한두번 한 것도 아닌 사람이. 왜? 어제 고년이 빼던가? 엘리 고년, 생긴 건 고만고만해도 몸매 하나는 끝내준단 말야. 캬~ 고 야들야들한 살결에 하늘하늘한 몸짓, 고 도톰한 입술을 요렇게 오므려가지고 내 사타구니를..... 오! 이것보게. 생각만 했는데도 반응하는 걸.”

칼자국은 빳빳이 고개를 쳐든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리키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샘은 칼자국의 하부를 잠시 훑어보는가 싶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그러니까 사내에서 호색이라는 소릴 드는 거야.”
“정말 왜 이래. 설마 그곳이 안 서기라도 했던 거야.”

칼자국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샘의 하부를 쿡쿡 찔러댔다. 샘은 기분이 상한 듯 칼자국의 손을 탁 치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계속 이럴 거야.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경계나 서!”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상대의 반응이 너무 진지해져 더 이상 흥미를 잃어버린 칼자국은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자세를 잡고 앞을 바라봤다. 잠시 칼자국을 노려보던 샘도 자세를 바로 잡고 경계에 신경을 모았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그새를 못 참고 칼자국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군.”
“그러게 말야. 연대에서 순찰 돌 시간인데 보이지 않군.”

화가 풀렸는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는 건지 샘이 칼자국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순찰은 무슨. 연대 새끼들 낮에만 지역관할 순찰 돈다고 폼 잡고 돌아다니는 거지. 실제로 하는 게 뭐 있다고. 시 치안대가 있건만 뭐가 부족해서 자유 수호 연댄가 지랄인가가 또 돌아다니냔 말야.”

칼자국은 뭔가 불만이 있는지 마른 가래침을 타악 뱉었다.

“그래도 시에서 자치적으로 결성한 조직이야. 함부로 뭐라고 할 대상이 안 된다고.”
“헹~ 개뿔.”

샘의 말에 칼자국은 콧방귀를 끼었다. 그러다 칼자국은 허리춤에 묶어둔 가죽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건……?!”

무심결에 시선을 돌린 샘의 눈동자가 순간 커졌다. 칼자국은 히죽 웃으며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한 대 필텐가?”
“이거 어디서 난 건가?”
“사르틀 해역 상인에게 2천 제르 주고 한 주머니 산거야. 그동안 꽁꽁 숨겨둔 비상금 다 털었지.”
“안… 걸리던가?”

샘이 뭔가 불안한 듯 어조가 많이 떨렸다.

“걸릴 게 뭐 있다고. 지들은 안 피는가?”

칼자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주머니에서 꺼낸 식물의 마른 잎 같은 걸 동그랗게 말아 물었다.
탁, 탁.
품속에서 꺼낸 불에 달군 조약돌 두 개를 요란하게 교접시켜 불씨를 만들어낸다. 행여 불씨가 달아날까 칼자국은 잎 끄트머리를 들이밀었다. 샘은 칼자국이 하는 양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흐으읍~. 하아~.”

긴 숨을 들어 마시며 남자는 뭔가에 취한 듯 나른하고 늘어지는 표정을 지었다. 샘은 동료의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은가?”

동료의 염려어린 물음에도 칼자국은 별반 대답 없이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너른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면서 품속에서 또 하나의 말아 논 잎을 샘에게 건넸다. 샘은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잎을 받는다.

“흐~, 겅저마. 항대 피다고 거리지 안으니. 흐흐흐(걱정마, 한 대 핀다고 걸리지 않으니.)”

칼자국은 흐물거리는 웃음을 질질 흘리며 혀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말로 했다. 샘은 칼자국한테 받은 잎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뭔가 결심을 한 듯 잎을 둥글게 말아 물었다.

탁, 탁.

부싯돌이 경쾌하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일었다. 불꽃송이는 행여 사라질까 두려워 얼른 잎의 끝자락에 엉겨 붙었다.

“흐으읍. 후~.”

깊은 숨을 들어 마시며 잎에서 나온 연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샘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때? 조오치~.”

칼자국이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 샘도 같이 웃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둘은 어느새 자신들의 직분도 잊어버린 채 쪼그리고 앉아 시답지도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헤헤 웃어 젖혔다.
푸득푸득. 푸득푸득.
두 경비병이 넋이 빠져있는 사이 어디선가 가파른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날개소리는 숨죽이는 어둠을 요란하게 찢으면서 점점 늘어나갔다. 잘 들리지 않던 날개소리로 이루어진 양탄자는 허공에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허나 연기 속에 녹아든 환각에 취한 이 어리석은 두 얼간이들은 어떤 조짐조차 느끼지 못한 듯 했다.
뚜벅뚜벅.
날개소리를 전주삼아 낯선 발자국 소리가 무겁게 바닥에 울린다. 검은 인영의 걸음에 맞춰 박쥐들이 꽃가루를 흩뿌리듯 흩어진다. 인영은 걸음을 저택의 문으로 맞췄다.
뚜벅뚜벅.
뭔가가 다가온다는 걸 느낀 두 얼간이, 아니 경비병들은 인영이 전방 5미터 정도에 도달했을 때야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고, 몸도 굼떠 있었다.

“어이, 친구, 가치 하지~.”

칼자국이 헤벌려 웃었다. 샘도 같이 웃었다.
후두득.
인영의 대답을 대신 하는 듯 인영 주위에서 날던 박쥐 떼들이 안개처럼 퍼져나가 두 경비병을 감쌌다.
아작아작.
박쥐들이 가운처럼 온 몸에 들러붙어 살을 뜯건만 두 바보들은 여인의 손길이라도 되는 양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영은 두 사람을 무시하고 물이 빨려 들어가듯 안으로 들었다. 두 바보 경비병들은 바닥에 흐느적 주저앉아서 멍하니 허공에다 시선을 두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모르고 헤벌쭉 웃는 모습으로.




앙리에르 자작은 가벼운 나이트가운을 걸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에 금박을 입힌 소파나 비취와 조개껍데기들로 장식된 테이블이 그의 재력이 웬만큼 잘 사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대변해주고 있었다. 자작이라는 직책이 가지기에는 너무 과분할 수준의 가구들이었다. 그건 비단 그가 테이블과 소파만이 아니었다. 방에 있는 서랍이라던가 램프 스탠드등불도 그에 맞붙을 만큼 호화가구였다. 이와 비슷한 방이 5개 정도 있고, 침실은 이보다 더 화려하다 하면 이미 말은 다한 것이다. 그의 재력이 비단 녹봉뿐 아니라 뒷주머니를 따로 차고 있다는 걸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자작은 품속에서 번데기모양의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며 주어 없는 육두문자를 씹어뱉었다. 감춰진 주어 속에는 요 며칠간 그의 불면증을 유도한 어떤 존재에 대한 불만이 가득 서려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내가 누구라고 감히. 하찮은 장사꾼 놈들이 돈 좀 번다고 감히 나를 물로 보는 건가.”

희뿌연 연기에 묻어 들어가며 불만이 허공에 퍼져갔다. 검은 그림자 상인 협회. 라냔시티의 실질적인 경제권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자작에겐 기껏해야 천민들이 살고자 발버둥치기 위해 아웅다웅 뭉쳐있는 허깨비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허깨비들이 감히 자신을 간과했다.

‘자작님, 자꾸 그런 식으로 하시면 난처해지실 겁니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인지하셔야죠.’

어제 오후 상회에서 온 남자가 가면서 한 말이었다. 그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퍽.
남자의 몸이 허공에 붕 뜨는 듯 하다 볼품없이 나자빠졌다.

‘건방진 새끼! 얼른 내 앞에서 꺼져!’

자작은 금방이라도 앞으로 달려들듯 한 기세에 낮게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남자를 위협했다.

‘………’
‘이것이 비단 우리만 좋은 꼴 보기 위해서 그런 건 자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다 이 시의 공․익․을 위해서죠.’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건방진 입을 나불거리고 있었고, 자작은 그런 남자를 가늘게 노려보고만 있었다. 상상은 언제나 현실의 틈새를 비집고 뚫지 않는가.

‘아무튼 하루빨리 저희의 뜻에 같이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자는 지린내 나는 웃음을 한 번 더 흘리면서 뒤돌아 갔다.
퍽.

자작은 남자의 모습이 사라질 때 즘 발 옆에 있던 화분을 걷어차버렸다. 애꿎은 화분만 땅바닥에 데구르르 굴러다니면서 자작에게 원망어린 울음소리만 나직이 낼뿐이었다.
빠지직.
화분에 이은 또 다른 희생양이 생겼다. 세상에 존재하는 선 중 가장 아름다운 선을 가졌다는 여인의 허리 모양을 본 딴 와인잔은 자작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애통한 비명을 지르며 하늘을 찢는 우레모양이 되었다. 갈라진 잔 틈 사이로 피인지 와인인지 모를 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런 우라질!”

제 분에 못 이긴 자작의 입에서 또 다른 육두문자가 외출을 했다. 깨진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짓가랑이로 쏟아진 와인을 털어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바지춤을 털어내며 자작은 무심코 깨진 잔을 바라봤다. 잔에 어제 오후 찾아온 남자의 얼굴, 상회에서 그가 알고 있던 인물들의 얼굴들이 하나 둘씩 맺혀갔다.

“내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 아느냐. 내가 누군데, 앙리에르 디 파세인이다. 한 때 이 로웬드 령에서 악명 높았던 그 철갑상어 앙리다. 그런 내가 너희 같은 하찮은 천민들에게 무너질 거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 암~ 어림도 없지.”

이를 갈며 나직이 중얼거리는 자작의 눈에는 결단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자작은 손에 묻은 액체를 닦기 위해 몸을 돌려 소파 뒤에 있는 장식장 앞으로 다가갔다. 장식장 위에 고이 접혀진 비단을 집어 손을 닦는 그의 눈에 문득 그동안의 삶이 하나의 영상처럼 스쳐지나갔다.
어렸을 적, 백작의 부인과 통정을 했다고 백작의 하수인들로 매 맞아 죽어가는 아버지를 숨어서 보며 백작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던 때, 백작의 하인으로 들어가 몇 년간 일하다가 어느 날 자고 있는 백작 부부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고 주저 없이 도망치던 때, 집도 절도 없이 헤매다 어느 유랑상인의 상단에 몸을 맡겨 전국을 떠돌던 시절, 상인이 죽자 그의 상단의 돈을 들고 달아나 이곳까지 온 때, 그리고 지금까지의 일들…….

그가 지금의 자리를 얻기 위해 흘린 피가 얼마였으며, 배신한 사람 또 얼마였는가.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꾹꾹 가슴에서 산화시키면서 이 악물고 지금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한낱 천인들의 장단과 조롱에 자신이 놀아난다니 절대 가만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로. 자작은 다시금 자신을 다졌다. 그들에게 칼을 들이댈 것을 씹고 또 씹었다.
스륵.
자작이 장식장 앞에서 회상에 잠겨 자신을 다지고 있을 때 어떤 기척이 소리 없이 방문 앞에 나타났다. 어둠 속에 묻힌 그림자는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자작에게 다가갔다. 그림자는 굽이 딱딱한 구두를 신었건만 허공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자작은 장식장에서 새 와인잔을 가지고 소파로 돌아왔다. 그림자는 조용히 자작에게 다가섰다. 자작은 새 와인잔에 술을 다시 따라 조심스레 음미하며 들이키고 있었다. 자작은 뒤에 누가 있다는 것조차 인지 못한 듯 느긋하게 술을 마셨다. 그림자는 자작을 가만히 내려 보고 있었다.
얼마나 마셨을까. 자작은 좀처럼 취기가 돌지 않는 걸 느꼈다.

“왜 그러지?”

문득 취하지 않는 거에 괜히 짜증이 난 자작은 와인을 병째 들이켰다. 평소라면 어찌 감히 귀족이 천민이나 하는 짓을 하느냐며 스스로 벼락을 칠 일이었건만 어찌된 건지 이번엔 그가 스스로 그런 짓을 했다. 술병을 물어 고개를 젖혀드는 자작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우구……?”

자작은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했다.
달그락.
푹신한 카펫 위로 병이 데구르르 굴러다녔다. 병은 그림자의 발 주위를 노닐었다. 그림자는 무감각한 눈으로 방금 숨통을 끊은 사냥감을 훑어봤다. 사냥감의 눈은 흰자위가 허옇게 커져 있었고, 입은 병을 문 모양 그대였다. 그의 얼굴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척이나 궁금한 표정이다. 그 대답은 그의 목이 가지고 있었다. 목과 몸통을 이어주는 곳, 가슴뼈가 이어지는 흔히들 천돌혈이라 부르는 곳에서는 그의 남은 숨결과 함께 밖으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자작의 숨이 완전히 넘어간 것을 확인한 그림자는 나타난 거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방안에 남아있는 피 비린내 나는 적막만이 식어버린 자작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그의 죽음에 애달파하고 있을 뿐이었다.




섀이드 12호는 건물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정문 쪽을 주시했다. 정문에서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이런?!’

12호는 나직이 이를 갈았다.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예상치도 못한 변수가 작용했다. 다른 누군가가 그보다 먼저 침입했다. 정문 앞에 쓰러진 두 명의 경비병을 보니 어떤 방법으로 처리했는지 모르나 이미 죽은 듯 보였다. 12호는 기척을 죽이고 벽에 몸을 붙인 채 천천히 정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알기론 이번 임무에는 그 혼자다. 길드에서 손을 써놔 수호 연대의 순찰도 없다. 모든 조건은 완벽했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 모르게 움직인 건가? 이곳 라냔 시티에서 이 업종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몸담은 ‘길드’밖에 없다. 그건 이 시티에서는 암묵적인 불문율이었다. ‘길드’에서 다른 인원을 투입하지 않았다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어떤 놈의 짓이니라. 12호는 우선 선수 친 놈을 처리하고 ‘길드’에 어찌된 영문인지 물을 것을 다짐했다. 그럴 리는 없을 테지만 행여 길드에서 그 모르게 다른 아울(owl, 밤의 사냥꾼이라는 의미로 어쌔신을 가리키는 은어)을 보낸 거였다 해도 정당방위였다.

12호는 정문 벽에 몸을 바짝 붙인 뒤 품속에서 재로 문질러 암회색을 띤 대거를 꺼냈다. 대거는 어둠의 공기를 음울하게 들어 마셨다. 12호는 특유의 호흡법으로 숨을 고른 뒤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비트는 순간, 자신의 목에 겨눠진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를 느꼈다.

“아울인가?”

어둠에 스며들 듯 낮고 무거운 음성이었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가는 목소리였다. 젠장, 언제 뒤에서 기습했지? 기척도 못 느꼈는데. 12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너도 아울인가? 어디 소속이지?”

12호의 목소리도 어둠에 스며드는 가늘고 작은 목소리였다.

“알 필요 없다.”

뻔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목적은 상대의 관심을 흐트러트리는 거였다. 12호는 말을 하면서 아래로 내려트린 대거를 거꾸로 쥐었다. 그대로 적의 옆구리에 쑤셔박을 심산이었다.
12호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후후,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남의 밥그릇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주제에.”


12호는 도발을 상대에게 날리며 빠르게 몸을 앞으로 숙이고 나갔다. 그러면서 몸을 틀어 놈의 복부를 노리고 손을 뻗었다. 12호의 눈에 잡히는 것은 놈의 갈비 사이. 칼날은 빠르게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푹.
외마디 파육음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어리석음.
12호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것이 그가 생에 남긴 마지막 표정이었다. 그것은 자조였다. 어쌔신의 기본 수칙 첫 번째, 상대를 가볍게 보지 말라는 거다. 특히나 상대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는 이런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두 번째, 일격필살의 기회를 잡는 예리한 감을 잘 살리라는 것이다. 기회가 아닌 것을 기회라 착각하고 공격하는 것은 곧 자기 무덤이 될 자리에 구덩이를 자기 스스로 삽질하는 것과 같다. 12호는 이 두 가지 실책을 저지른 자신을 비웃었다.
세상은 느리게 멀어져 간다. 늘어지는 도시의 정경 사이로 편편이 삶의 작은 기억들이 끼어들어갔다. 어린 시절 기억…, 도시에서 막역꾼으로 일했던 기억…, 어쌔씬으로 활동하던 기억들……. 죽음이라는 것에 다가서면 언제나 이렇게 볼품없이 감상적으로 변하는 걸까. 입가에 번진 자조는 미소로 다시 화장을 했다.
철퍼덕.
그러나 현실은 의식과 다르다. 12호의 의식 속에서 느리게 떨어지는 몸은 현실 속에서는 순간이었다.
얼굴 가득 어떤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12호의 시체를 사내는 무덤덤이 쳐다보고는 다시 뒤를 돌아 대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방금 전까지 조용했던 둔탁한 구둣발 소리가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듯 기지개를 펴며 어둠속으로 빠르게 활개를 쳤다.
사내의 신형이 어둠을 두른 안개 속에 스며들어갔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16 중편 교망(皎望) - The Darkside of the stars - (1) 별밤 2008.07.30 0
215 장편 차원의 문 1.혼란 ② DAMN 2008.03.20 0
214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9 라퓨탄 2008.03.19 0
213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8 라퓨탄 2008.03.19 0
212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7 라퓨탄 2008.03.19 0
211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6 라퓨탄 2008.03.19 0
210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5 라퓨탄 2008.03.19 0
209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4 라퓨탄 2008.03.18 0
208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3 라퓨탄 2008.03.18 0
207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2 라퓨탄 2008.03.18 0
206 중편 [탑돌이(Runround)] - 부제 : 달의 몰락 - 12 라퓨탄 2008.03.18 0
205 장편 차원의 문 1.혼란 ①2 DAMN…、 2008.03.16 0
204 장편 <TTHS>대악당 - 비행기 추락(2) 나길글길 2006.12.13 0
203 장편 <TTHS>대악당 - 비행기 추락(1) 나길글길 2006.12.13 0
202 장편 악마를 위하여 - Ⅰ. kyrie eleison 령아 2006.08.25 0
201 장편 뱀파이어 듀켈 제 1장 방랑자라는 이름의 어쌔씬 2 김인화 2006.08.01 0
장편 뱀파이어 듀켈 <1.방랑자란 이름의 어쌔신> 1 김인화 2006.07.30 0
199 장편 뱀파이어 듀켈 <프롤로그> 김인화 2006.07.30 0
198 중편 영원한 이별은 오지 않는다2 바보 2006.07.28 0
197 중편 영원한 이별은 오지 않는다1 바보 2006.07.2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