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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높은 성에서(3) - 불꽃

2005.08.29 02:1208.29

(3)


*

"어머, 아직 졸업안하셨어요?"

책을 반납하는데 그녀가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 뭐, 어쩌다보니..참 오랜만이네요, 지금 몇학년?"

"이제 4학년이에요. 코스모스죠. 이번학기가 마지막"

"이여,,졸업반에게 도서관 근로를 시켜줘요?"

"뭐, 워낙 성실하다보니 후후"

그녀와 즐거운 대화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뒤에서 사람들이
인상을 쓰며 기다리고 있으니. 이 사람들이, 줄도 긴데,
좀 자동기계에다 반납하면 안되나? 문명의 이기가 생기면
좀 써먹으라고.

그나저나, 저 애가 신입생일 때 처음 만났는데 벌써 4학년이라니.
내가 참 학교를 오래 다니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니까.
이런 대화가 몇번째야. 어디보자..내가 이 학교에 온지 약 50년전이니..




*

아직 글의 초반이니,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하지만.
나는 지구 최후의 흡혈귀이다. 이빨도 충분히 날카롭고,
피에 대한 굶주림도 충분한 건강한 흡혈귀. 다만 아직까지
피를 빨아본 경험이 없다. 물론 그걸 조롱하듯 말할 다른
흡혈귀도 없으니 상관없겠지만.

나와 함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어떤 흡혈귀의 말이 떠오른다.
숨을 가르릉 거리며, 피 냄새를 풍기며, 녀석이 말했지.

"이봐, 좋은 여자 만나라고. 아무튼, 너에게 우리 일족의
부흥이 달렸어"

"좋은 여자란 뭐지?"

"알잖아"

녀석이 음흉하게 웃는다.


"피가 맑고 성격좋은 여자?"

나도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물었다.


"ㅋㅋ 그래..남자가 원하는건 다 그거지"

"글쎄..둘 다 갖춘 여자가 있을까."

"뭐. 정 안되면 예쁜 불꽃을 가진 여자를 만나라고"

"성격은 어쩌구"

"쳇, 결국 물리고 나면 너를 좋아할텐데. 어쩔 수 없잖아?
니가 그렇게 설정하면 되잖아"





*

자유의지란 신기한 개념이다. 특히나 사랑에 있어선.
인간들이나 흡혈귀들이나, 남녀간의 관계를 '먹이'를 매개로 한
거래라고 생각하는게 훨씬 객관적일 때가 많다. 아, 물론 그만큼이나
격렬한 반감도 존재하고.
구애의 과정들. 신호를 보내고, 반응을 가리고,..다시 신호를 보내고..
이 과정들에 대해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사랑은 '기술'의 문제가
되고, 그렇지 못하다면 '운명'의 문제가 되겠지. 하지만, 흡혈귀들에겐
그런 구분은 무용하다.. 결국 피를 빨리면 기억도, 습관도, 취향도, 성격도
모두 흡혈귀의 통제아래 들어오니까. 그러면 프로그래밍을 하듯,
자신의 소망을 짜집기해서 새로운 흡혈귀를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그리고 보통 그 통제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다른 흡혈귀들에게 경멸 받았다.
그래, 문제가 되는 것은 희생자가 아니라, 흡혈귀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하는거지.

작은 아버지는 작은 어머니를 흡혈귀로 만들면서, 절대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도록 '설정'했다. 그녀의 전 남편에게 짜집어넣은
명령은 '충성'이었고. 어떤 것이 더 그를 비웃게 했는지 잘 모르겠다.





*

도서관의 4층 화장실은 사람이 없는 편이어서 방심하고 있었다.
세수를 하고 얼굴을 드는데 거울에 내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학생이 흘낀 나를 보다가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즉시 파장을 조절하여서 거울에 내 모습이 보이도록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무엇때문에 상대를 필요로 할까.
끝이 나지 않을 질문이다. 오래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우리 흡혈귀들이 어디서 왔는지 말해주지 못했다.
또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말해줄 수도 없었다.
죽음은 현상일뿐, 햇빛이 지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한줌의 잿더미.
그것이 우리의 도착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거기다 유물론적 해석에 심취하면서부터, 아예 이런 개념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까 그 여자애는 참으로 건강한 불꽃을 지니고 있었다.
불꽃이라니 이런 얼마나 진부한 은유인가.
단지 흡혈귀가 보는 파장이 인간과 다를 뿐이다.
물론 그게 적외선을 주로 포착하는 우리의 시감각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그래도 불타는 피가 끊임없이 순환하는
모습은 꽤나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인간을
잘 이해하게 해주는 단서가 될 수 있긴하다.
피의 흐름, 심장박동의 변화. 그 외에도 그 인간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자잘한 파장이 몇개 더 있다. 조금만 경험이 쌓이면
그 신호들을 해석하는데 익숙해 질 것이다. 몇 백년만
주의깊게 관찰한다면, 예측도 할 수 있다. 어린 것들이나
공포 같이 뚜렷한 패턴에 매혹되지..

그래, 각 생명체는 자신의 감각기관에 기초한 미의식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 기원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인간과 흡혈귀는 꽤나 겹쳐있다. 누가 먼저일까.
우리는 저주받은 존재인가? 아니면 외계인이 만들었을까?
돌연변이일 뿐인가? 어느 종이 프로토타입일까?


해가 지고 나서의 학교의 모습을 바라본다.
대낮의 잔재가 이리저리 불타는 얼룩을 만들어내고,
윤곽을 드러낸다. 이런 저런 건물들이, 그 재질과
위치, 이런저런 차이때문에 다양한 속도와 모습으로
식어가고, 품었던 열을 방출하고, 현란한 패턴을
드러낸다. 달이 뜨면 새로운 건물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스러진다. 도서관에서 나오거나, 버스를
기다리거나, 혹은 걸어가는 인간들은 더욱 뚜렷하게
그들만의 열패턴을 뿜어낸다.
솔직히 말해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흡혈귀의 미의식은 어느 정도 동일선상에 있다.
그네들이 묘사하는 - 아, 이건 내가 인간일때의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들의 미의식을 간접적으만 체험할
수 있기에 그렇다 - 수 많은 미의 표징들은, 우리네 종이
선호하고 숭상하는 패턴들과 겹쳐진다. 물론, 나는
그 아름다운 불꽃들이 어디서 온지 안다. 영양물질의
분해와 연소. 우리의 생존을 위해, 번식을 위해
가장 적합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단서들.
물론 이런 생물학적 잣대를 가지고 자신을 고찰하는
흡혈귀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 역사도 짧았다.
그리고 아무리 명쾌한 설명도, 복잡한 삶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의심'을 금지한 작은 아버지와 '사랑'이외엔 그 어떤
감정도 불가능한 작은 어머니. 사촌누나의 방에 놓여있던
한 남자의 머리.





(계속)





mood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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