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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높은 성에서(2) - 머리

2005.08.29 02:1008.29


(2)


*

장르란 항상 현실을 변용하는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예술을 진리에 대한 미메시스로 규정한 인간을 기억하는가.
무언가의 반영. 진실과 현상의 분리. 증상으로서의 현재.
그에 따라, 나는 흡혈귀에 대한 수많은 대중적 이미지와 변용이
굉장히 사실에 근접해 있으며 또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들의 생태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생략하도록
하겠다.

그래도, 어느정도 즐거움과 개연성을 위해.
대략 블레이드류의 흡혈귀라고 나를 상상하라.

하긴 알게뭐람. 내가 지구 최후의 흡혈귀인데.



*

지구상의 흡혈귀는 모두 멸종했다. 내가 최후의 생존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나중에 슬슬 얘기하도록 하자.
문제는 다음과 같다. 저번에 작은 아버지 집에서의 대화를
기억하는가. 나는 한번도 피를 빨아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한번도 파트너를 만들어본적이 없다.



*

"우리 누나야, 실연의 아픔에 그렇다지만,
형은 왜 파트너를 안만드는건데?"

우걱우걱 음식을 먹으면서 - 아, 물론 그냥 보통 인간들도
먹는 그런 것들이다. 오늘은 프랑스식 만찬이군.
흐흠..작은 아버지가 정말 유럽에서 넘어온게 맞나?
겉모습은 동양계인데? 워낙 뻥이 심한 분이시라...
- 사촌동생이 물었다.

"파트너라는 것은 영원히 같이 해야할 반려자이니까
신중해지는 것도 당연하지"

작은 아버지가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에휴, 알았어요, 알았어. 사실은 또 두분 사이
자랑하려고 그러는거죠?"

사촌동생은 넌더리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자랑할 것 있니? 우리 부부금실을 모르는 흡혈귀들이
있을까?"

작은 어머니는 늘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이런 대화를 듣고만
있다. 집사가 - 한국에서 집사라니. 도대체가 작은 아버지의
허세란..- 조용히 먹은 그릇들을 치워간다.

작은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녀가 흡혈귀가 되었던
때는 그녀가 가장 아름다울때였다. 하긴 흡혈귀가 선택하는
파트너는 항상 최고의 생명력을 자랑해야 한다.

"아무튼, 평생의 반려자를 선택할 때 신중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너도 어느정도 꽤 나이가 차지 않았니?
병역의 경험도 있고, '혈족의 다툼'에서 공훈도 세웠고,
죽음과 부활도 6번이나 겪었는데 말야. 너 정도면
충분히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작은 어머니가 나직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나에게 말했다.

"글쎄요. 아직 메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요"

"나원참, 형, 고리타분하게. 요즘엔 파트너를 만든다고
반드시 영원을 약속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사촌동생의 말을 시작으로 시작되는 '결혼의 미덕'운운..
나는 그냥 건성건성 그 말들을 흘려들으며, 젊고 이쁜 작은 어머니와
그보다는 약간 나이가 든 사촌누나의 모습을 비교해가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다시 집사가 지나간다. 아, 집사 얘기를 안할 수 없군.

피를 빤다고 모두가 흡혈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흡혈귀가 되기 전 작은 어머니는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아이도 있고
남편도 있고, 꽤 수도 되는 가족이었다고 한다. 작은 아버지는 닥치는대로
그들의 피도 빨았다. 단지 이번엔 허기를 채울 뿐이었지만.
아, 그 과정에 살아남아 무사히 흡혈귀가 된 사람이 한 명 더 있구나.
그녀의 전남편, 현재 이 집의 집사.




*

우리 일족의 사랑이 피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로맨티시즘이 자기 중심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사촌누나는 옛사랑을 못잊어, 항상 그 남자의 머리를 방에 두고 기일이
다가오면 눈물을 흘리곤 한다.
"뭐 가끔 웃기도 하더라"
사촌동생이 초치는 소리를 하는군.
아무튼, 온 김에 헌혈용 피 한 팩을 누나에게 얻어가기로 했다.
같이 따라들어온 사촌동생이 벽에 걸여있는 누나의 정인의 머리를
툭 건들여본다.
"헤이, 잘 있었어?"
"으어.."
머리가 대답하려는데, 앙칼진 누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야, 너 제발 머리 건들지 말랬지!!"
"우웨..어때, 얘도 심심할 거 아냐"
사촌녀석의 느글한 목소리.
"야, 너 나가. 나가!!"
"후훗..아직도 사랑하나봐~ 널 잊지 못하나봐"
순간 그녀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사촌녀석의 목을 쥐고 있다.
조금만 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면 분명 사촌녀석의 머리는 박살나겠지.
나는 그녀와 참가했던 그 전쟁들을 떠올렸다. 쉬이 죽지 않는 종족들이
서로를 헤치던 초현실적이고 지루하던 살육의 밤. 그녀의 손과 손톱은
악명을 떨쳤었지. 사촌동생이 아직 흡혈귀가 되기 전의 일이다.


*

"케켁..죽을 뻔했네"

사촌동생이 너스레를 떤다.
녀석이 겁을 먹었냐고. 그럴리가. 물론 그는 전쟁을 모른다.
나와는 다른 세대. 하지만 그는 '무자비한 이빨'의 일원이고
그건 어떤 흡혈귀도 그와 대적할때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는 경멸과 애정을 담아, 그녀의 의붓누나에게, 혹은 그를
흡혈귀로 만들었던, 하지만 그를 반려자로 선택하지 않은
그녀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녀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

어느날 피에 취해, 나에게 본심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가 더 나았는데 말야. 그 비리한 녀석보다.
그런데도 자기가 택했기 때문에, 자기가 선택한 남자가
최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저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거라고."

모르지. 나르시즘에 비롯한 비방인지. 어쩌면 사촌이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그를 선택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남자의 마음은 보통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선택한 남자가 자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안심하면서, 그래서 오히려 더 동정하고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확실한 것은 그 남자의 목을 꺽은 것이 그녀란 것.
그건 유명한 얘기다.



(계속)






mood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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