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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환국기] 0. 세성(歲星)

2005.08.25 01:1208.25




단 한 번 떨쳐 일어난 붉은 목숨이라, 붉은 목숨이라.
이에 그만 스러진들 티끌세상에 무삼 의미 있으랴.


::환국기 호곡편(換國記 號哭篇)::





0. 세성(歲星)

하늘이 검다. 달 없는 밤이었다. 계하(季夏)의 밤바람에는 어느덧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가을이 온다. 초목 잎새 흩어지고 벌레 울음마저 그치어 오래도록 고요할 가을이 올 것이다. 지효는 세상의 끝에 서듯 성벽에 올라 나아갈 곳을 오래 바라보았다.

멀리, 그러나 시선 닿는 거리에 있는 것은 수밀 화주의 외현성이다. 검은 하늘 아래 그것은 불그스레 희미한 빛무리로 떠오르고 있다. 발 디딘 이곳으로부터 그곳까지의 길은 짙은 어둠속에 잠기어 있었다. 그것은 한밤의 암흑만이 아니리라. 어김없이 천구가 돌아 푸른 새벽이 밝아와도 그 길은 그렇게 어둠인 것이라고 지효는 생각하였다.
나아갈 길이며 또한, 돌이킬 수 없을 길이다. 그리하여-,

「-이기리라 생각하시오.」

스스로의 입을 떠나 흘러나온 목소리가 지나치게 무감하였기로 지효는 소스라쳤다. 젊은 예후는 그런 지효를 향하여 소리없이 웃어 보였다. 그 또한 그저 담담하였다.

「이기게 해 주지 않을텐가? -그대가.」

덤덤하니 웃는 낯 그대로 그리 말을 꺼내어 놓고, 곧 얼어붙어버린 듯 한 지효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는 <실수인가-.>하고 생각했다.
지효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나이의 소녀답지 않게 아무런 장식 없이 그저 길게 풀어내린 머리채가 고갯짓에 따라 검은 밤 속에서 흩날렸다. 곧 눈물을 떨구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을 하였는데 결코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이미 텅 비어 버린 것이리라.

「-미안하……」

목소리는 바람에 날리어 스러질 듯 가늘었다. 그러나 예후 진성은 그것을 들을 수 있었고, 그래서 무심한 목소리가 그 미약한 소리의 끝을 삼켜버렸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면.」말하며, 진성은 웃고 있었다.「-그런 말은 하지 마라.」

그 어조에는 한 점 불안도 없다. 어찌 그리 할 수 있는 것인지 지효는 알 수 없었다.
예주의 병력은 애초에 넉넉한 편이 아니다. 변방의 외주였더라면 이족을 막노라 하며 군사를 기를 수도 있었을 터, 허나 서국 예주는 동으로는 수밀 화주에 접했고 북으로는 영산 자락에 닿았다. 전란을 접할 리 없는 곳이니 군사를 기를 명분도 없었다.
이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기실, 수밀 황군 단 1군만이 들이닥친다 하여도 전황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어찌 하여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지효는 그것을 잘 알았다. 진성 또한 어리석지 않았으므로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바라왔다 하여도 이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지효가 아는 진성은 이렇게까지 무모한 사내가 아니었다.
하여, 국경까지 군사를 몰아 수밀 외현을 바라보며 새벽의 개전을 기다리는 지금에도 현실감은 느낄 수 없다.

「성내(城內)는?」

지효의 복잡한 심정을 눈치채지 못한 듯, 혹은 눈치채고도 모르는 체 넘기는 듯 진성은 여상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묻는 것은 저 멀리 희미하게만 보이는 화주 외현의 정안성이다. 그러나 지효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므로 머뭇거림 없이 답하였다.

「조용하오.」

사령의 눈에 비친 정안성은 고요하기만 하였다. 수밀의 화주는 맞닿은 서의 예주와 크게 다르지 않아 서방으로 제후국 서국 예주가 있고 북방으로 영산 자락이 있다. 그러니 화주 내에서도 변두리인 정안은 전시가 아니라면 병력이랄 것이 없는 작은 외현이다. 그곳에는 곧 닥쳐 올 전화(戰火)를 알 리 없는, 영화(富貴)없으나 불안도 없었던 어리석은 삶들이 밤을 맞아 고이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 흐린 등불을 들고 순시를 도는 병사들이 있으나 그들의 손은 무기를 들기에는 이미 늙고 무디어 보였다. 그 허리에 검이라기보다는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처럼 매어 달린 쇠붙이는 언제 마지막으로 뽑아 보았을까.
그러하니 이 밝아오는 새벽 최초의 전투에서 예후는 이길 것이다.

「황군도 금군도 없는 것인가-.」

황군은 경주 황도(京州 皇都)에, 금군은 대주 소경(大州 小京)에 있는 것. -이 작은 외현성에 그런 군사가 있을 리가 없다고 알면서도 진성은 반 즈음 농을 섞어 그리 말했다. 지효는 감정없이 답하였다.

「있다 하면, 의미가 없지 않소.」

시작과 동시에 소멸하는 반란이로니.
냉정한 대답을 귓가로 흘리며 진성은 훌쩍 뛰어 성벽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들어 먼 눈으로 황제의 땅을 바라보던 그는 지나가는 어조로 툭, 던지듯이 말했다.

「허나, 아쉽군.」

「어찌 그리 말씀하시오.」

진성은 고개를 돌려 책망하듯 말하는 지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야말로, -쳐야 할 것은 황제의 군사가 아니던가.」

지효는 순간 파르르 떨려오는 손끝을 소맷자락에 숨기며 얼굴을 굳혔다. 화살을 맞은 것 마냥 심장이 아파왔다. 이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내 쳐야할 것은 분명 황제요. 허나 예후께서는-!」

「그대를 위해서가 아니야. 내가 바라는 일이다.」

「…….」

말문이 막혀버린 지효 앞에서 진성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조차 없는 검은 하늘에 불길한 별 하나 교교히 밝다.

「허나 그대도 조금은 기뻐하는 것이 어떤가. 저 수밀의 황도로 나아가는 길인데.」

「걸음마다 천 말의 피를 뿌릴 것이며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오.」

천 길 벼랑의 삭풍같은 지효의 목소리는 그러나 진성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 하였다. 진성은 동요없이 그대로 하늘만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것 쯤 굳이 술사의 예지를 빌리지 않아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천 말 백성의 피 뿐이려는가. 그 자신의 목줄기에서 아낌없이 쏟아질 피 역시도…….
<그러니, 아무려면 어떠한가-.> 하며 진성은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후회도 체념도 희구도 없이 그저 나아갈 뿐이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저 황제국의 하늘을 향하여.





개천(開天) 5131年 계하(季夏).
검은 밤하늘 아득한 천공에 세성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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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성(歲星): 목성의 다른 이름. 상고시대 천문학에서는
세성이 밝으면 전란이 있을 것이라 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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