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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집어삼키는 늑대

겨울, 342년.

깊은 밤.
아문은 지친 다리를 억지로 떼며 걸음을 옮겼다. 등뒤로부터 불어오는 매서운 북풍이 날카로이 손톱을 세우고 계곡을 할퀴어대는 것이 마치 그를 재촉하는 듯 하다. 안개처럼 내리깔린 어둠 속에서는 몇 걸음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천길 낭떠러지를 옆에 두고도 그는 가파른 경사를 잘도 걸어간다. 그의 시야는 달의 축복을 받은 달바람족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문은 달바람 족 특유의, 달빛을 받으면 야행성 맹수의 그것처럼 발광하는 두 눈으로 발밑을 조심스레 살피며 걸었다. 혹 발이라도 헛디딜까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경우엔 그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면 그만이니까. 애초에 그가 달바람족의 오랜 숙적인 인간, 곧 달바람 족의 언어로 [날개 없이 땅을 더럽히는 무리]들이 그러하듯 두 발로 걷고 있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아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그의 등에 업혀, 접힌 두 날개 아래에 감추어진 그녀가 아니었다면, 오늘같은 날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더운 피 그득한 전장에서 서로의 칼이 부딯히며 흘리는 쇠의 울음에 그의 심장이 거칠게 약동했을 때, 맞닿은 칼날 너머로 그녀의 거친 숨결을 들이켰던 바로 그 때부터 아문은 이와 같은 날이 이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종족간의 오랜 증오를 뒤로 하고, 서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예상하며 그녀와 짝짓기의 의식을 치렀을 때, 그는 이미 그와 그녀의 삶이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음을 알았다.

그래서 아문은 이마에 찍힌 [버림받은 자]의 낙인도, 또  대추장과 장로들의 명으로 내려진 [달신의 은총이 바람 위에 떠도는 도시] 타마할룸에서의  추방령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러한 고통과 수모는 그가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였으니까.

그러나 운명은 참으로 오묘하지 않은가! 방랑의 길에 오른 아문은 달바람족인 그와 인간인 그녀 사이에서, 단 한 번의 관계로 인해 생명이 잉태되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의 아이를 잉태한 그녀가 배반자를 처단하려는 동족에 쫒겨 달바람족의 영역으로 도망하리라고는 더더욱.

[새들의 고향] 바르달문과 인간의 땅 이스타르옌의 경계에서 그녀와 그녀의 추적자들은 달바람족의 순찰대와 조우했고, 일족의 전사들은 인간들을 도륙하고 [피에 물든 장미를 갑주에 꽃은 마녀] 아하스마룬 이스타르옌을 노획하였다. 그리하여 타마할룸의 대광장에서 이뤄진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그녀가 이미 추방당하고 없는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일족은 그녀에게 형벌을 내렸다.

그리고 아문의 평정은 그녀에게 내려진 형벌에 의해 조각났다.

바람결에 그녀의 소식을 들은 그가 그녀를 찾아내었을 때, 그녀는 두 눈을 잃고 팔다리를 결박당한 채 거친 돌길을 따라 “끌려” 가고 있었다.

사슬을 잡아당기며 가축처럼 그녀를 끌던 달신전의 집행자들을 모두 죽이고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 아문은 그녀의 빈 동공과 부른 배를 보고 오열했고, 벗겨진 그녀의 등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는 전율했다. [영혼을 삭이는 땅속의 불]이 그녀의 피부 위에서 살아 타오르고 있었기에.

그리고 오늘까지 일주일간의 도주.

'아마 지금쯤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챘겠지.'

아문은 쓰게 웃으며 돌출된 바위 아래 자리를 폈다. 마음이 초조하더라도 쉬어야 했다. 그는 진작부터 등에 업힌 아하스의 몸이 차가워져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아문은 조심스레 날개를 펼치고 그녀를 등에서 내려 눕혔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부른 배를 꼭 감싸안은 그녀의 두 손을 아문은 꼭 쥐었다 놓았다. 있었다. 분명 손으로 만지면 오한이 들게 차가운데도 그녀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그녀의 몸 뒤을 살피다 흠칫 떨었다. 등의 날개뼈 사이에서 시작된 문신이 어느새 그녀의 뒷목까지 뻗어있었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했다. 이 붉은 문신이 그녀의 정수리에 닿는 순간 완성된 저주는 그녀를 죽일 것이다.

"아하스…"

아문은 [영혼의 날개를 꺾는 광풍]이 그녀를 실어갈 때가 시시각각 다가옴을 느끼며 초조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르가옌의 주술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또 빠르게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마 강한 항마력을 지닌 그의 두 날개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죽은목숨일 것이다.

아문이 재차 불러도 아하스는 마른 입술만 달싹일 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문은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상처를 내고 지체없이 아내의 입술 사이에 선혈을 흘려내었다.  

"아하스마룬 이스타르옌, 눈을 떠! 나보다 먼저 죽으려 [내 피묻은 깃털을 받아볼 이]가 된 건 아니잖아!"
"아.. 아문... 추워... 몸이, 가슴이..."
"조금만 더 견뎌줘… 하루, 딱 하루만!"
"아문... 아… 아기는, 알에서 나올까? 날개가… 있을까?"

그녀는 한차례 몸을 떨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목 언저리의 문양이 벌레처럼 꿈틀대며 귓가까지 올라왔다. 아문은 소스라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는 날개를 펼치며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잠시 후, 계곡을 휘젓는 북풍을 타고 붉은 날개가 활개쳤다.


아문은 자신을 둘러싼 네 쌍의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존경, 실망, 그리고 경멸이 한데 뒤얽여 발광하는 그들의 눈빛에서 아문은 분노나 절망보다는 현기증을 느꼈다.
“하! 달신의 아들로서 [날개 없이 두 발로 땅을 더럽히는 무리]의 암컷을 자신의 [피묻은 깃털을 받아볼 이]로 선택한 것이 부끄럽지도 않소? 하물며 [피에 물든 장미를 갑주에 꽃은 마녀]라니! 당신과 [날개를 나란히 하고 활에 은촉을 단]이들이 알면 배를 잡고 웃을까? 아니면 날개를 땔 만큼 분노할까?”

라후눔은 아문의 오른편에서 회색 날개를 펄럭이며 조롱했다. 그러나 말투와는 달리 눈빛은 싸늘했고, 한 손은 이미 허리춤의 화살통에 닿아 언제라도 아문의 심장을 노리고 시위를 잴 태세였다.

        “라후눔, 나서지 마라.”

아문의 정면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머리가 희끗한 전사가 라후눔의 입을 막았다.

        아문은 이 노전사를 잘 알았다. 그가 새끼였던 시절 그에게 [날개를 펼치고 바람의 소리를 듣는 법]을 가르치고, 나이를 먹어서는 전장의 이치를 손수 가르친 이가 바로 그의 앞에서 부유하는 이 노장었이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다오, 마가훔. 너희는 나와 [날개를 나란히 하고 활에 은촉을 단] 이들이 아닌가.”

“…우리는 이번 임무를 자청해 맡았소. 아문 바라흐만!”

마가훔이 굳은 얼굴로 말하며 손짓하자 나머지 두 전사가 무기를 뽑았다. 은철로 된 창검의 표면 위에서 달빛이 어지러이 춤추었다.

“전령이자 집행자로서 대추장의 명을 전하겠소. [바람을 타고 달의 노래를 듣는 문Mun의 아들] 아문, 이 명을 듣는 즉시 부족의 축복 없이 당신의 [피묻은 깃털을 받아볼 이]가 된 [걷는 자]의 암컷을 직접 죽이고, 그 수급을 들고 타마할룸으로 돌아와 용서를 구하라. 그리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불문에 붙일 것이나, 불복할 경우 [영혼의 날개를 꺾는 광풍]을 내리리라.”

아문에게서 대답이 없자 그의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장의 명을 따르십시오, 아문! 당신은 그 암컷을 버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달바람 부족의 아르하스가 되어 [날개 없이 걷는 자]들을 몰아내는 게 달신이 부여한 당신의 사명이 아닙니까!”

“닥쳐, 사이누! 그는 인간의 암컷을 살리려 우리의 형제들을 죽였어! 아문! 일주일 전 바르달문의 경계에서 그대가 죽인 집행자 중의 하나는 내 피형제였소!”

아문은 대답을 않았다.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이마의 낙인이 사고를 마비시키며 그는 시키기라도 하는 듯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시시각각 차가워져만 가는 이란하스의 몸을 느낄 뿐.

네 전사는 아문의 입이 열리길 말없이 기다린고, 공기중에 팽배한 긴장감에 북풍조차 자리를 피해 잦아들었다. 아문은 가만히 고개를 숙여 품에 안긴 이란하스의 얼굴과 텅 빈 동공을 보고, 상의를 찢어 그녀의 몸을 자신의 허리에 단단히 묷었다.

“어리석은 선택이로군.”

마가훔은 그를 쏘아보며 그의 무기를 들었다. 아문은 그 대도를 잘 알고 있었다. 저 피묻은 칼날은 몇 번이고 그의 목숨을 구했던가!

        “한편으론 바라기도 했던 일이오. 이왕이면 직접 당신을 [광풍에 실어보내고] 싶었으니.”

아문은 지끈거리는 이마의 통증을 억누르며 초생달을 닮은 그의 도를 손에 쥐었다.

“막는다면 죽이겠다. 나는 그녀를 버릴 수 없어.”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요!”
풀잎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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