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완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짧은 순간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잊을 만큼, 빗줄기가 여전히 우리 둘에게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잊을만큼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완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첫 번째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가을. 완은 첫날부터 늦게 자리에 나타나 멋적게 웃었었다. 나중에 완은 그 때의 내가 무서워 보였다고 이야기했지만 내가 처음 본 완은 전혀 나를 무서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준비해간 책을 내밀고는 한 번 읽어보라고 하자, 키 큰 사내아이는 가볍게 웃으면서 내 옆에 앉았다. …젊은 느티나무였나. 그에게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고 했던 것. 처음 만난 그 날의 완은 급한 중에도 세수는 하고 왔다며 웃었다. 그런 완에게서는 유아비누의 가벼운 향이 났었다. 다 큰 녀석이 뭔 유아비누야 하는 말을 한 건 그리고 1년 후의 일이다.

"발음 죽이죠?"

책의 한 페이지를 읽고 나서 완이 덧붙였던 말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소개 안 해 주실거에요? 저는 이 완…, 아 제 이름은 벌써 아시죠? 건영고등학교 다니고요. 2학년이고…, 이과고…, 아 전산부 부장이고…, 부반장이고, 생일은 4월 5일 양자리! 리더쉽과 야심과 열혈의 별자리래요."

"미팅 나왔니?"

"서로 많이 알면 좋잖아요, 뭐."

"…나는 이나경. 대학이랑 과는 알고 있지? 어쨌든 고3 금방이니까 열심히 하자."

"전주 이씨에요?"

"왕족은 아닌데. 경산 이씨야."

"다행이네, 동성동본은 아니네요 저는 벽산 이씨예요."

그 때는 동성동본은 결혼할 수 없다는 조문이 아직 살아있을 때였다. 너무나 갑자기 친근감있게 다가오는 완이 그 때는 부담스럽기보단 당황스러웠다. 등록금을 내가 벌어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관념이 아니었다면 그만두고 싶었을만큼. 그 애의 대화 패턴은 내게 낯설고 힘들었다.

그리고 첫 번째 기말고사가 끝난 어느 금요일, 완은 내게 웃으면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월급봉투인가 했더니 얄팍했다.

“뭔데 이거?”
"일요일날 콘서트 티켓이에요. 가실 거죠?"
"난 시끄러운 것 안 좋아해."
"동물원인데? 싫어하세요? 어쩌지, 두 장을 벌써 사버렸는데."

턱에 수염의 흔적이 꽤 진해지기 시작하던 무렵의 완은 그 즈음해서 슬슬 말투에 반말을 섞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따끔하게 야단을 쳐도 되었을 그 말투에 나는 그다지 입을 대지 않았다. 아마도 완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완과 개인적인 무언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항상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변화'라고 이름붙여도 좋을까.

그것이 완과 나의 첫 번째 데이트였다.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동물원의 "시청앞 지하철역"을 들으면서, 조금은 촌스런 노래를 흥얼거리는 완은 꽤나 진지해 보였다. 10대의 남학생이 좋아하기 쉬운 곡은 아닐 텐데.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내가 아는 완이라는 학생은 그저 놀기 좋아하고, 외아들이라 철이 없기도 하고, 머리는 나쁘지 않아서 설명한 건 대부분 머리로 기억해내는 괴짜였을 뿐이라서. 그 때 부터였을 것이다. 완을 생각하면서 혹은 완의 앞에서 웃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러다가 혜정이를 맡게 되었다. 두 사람을 동시에 맡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꽤 오래 완만을 가르치고 있어서 나는 혜정이를 맡을 때 많이 망설였었다.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치려 하는 것을 억지로 지웠다. 혜정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불안하던 눈빛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싫어서. …너는 나를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완을 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그런 너는, 지금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 아까처럼 손에 잡히는 것을 무엇이든 던져버리고 싶어할까, 아니면 통신상에서 그랬듯이 날선 말들을 쏟아낼까. 아니, 아닐 것이다. 너는 아마도, 그 때처럼 불안한 눈빛을 하지 않을까. 너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지는 않을까.

"…누나?"

완의 음성이 들렸다. 위태롭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마술처럼.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나른하다.

아마도 깜빡 잠이 들었었나보다. 아니, 정확히는 잠과 깨어남의 중간지대에 나는 있었다. 몸이 스르륵 늘어져버린 후에 완이 나를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차에 태우는 것을,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생각하듯이 느꼈다. 완의 작은 차 뒷좌석, 중형차보다는 훨씬 작지만 그래도 넉넉한 그 자리에 나를 눕히고 완은 푹 젖어버린 내 코트를 벗겨서 손잡이에 걸었다. 조금은 센 듯한 히터의 온기가 젖은 몸으로 스미듯이, 완의 머뭇거리는 동작 끝에 코트에서 떨어지는 똑똑 하는 물방울 소리가 내 머리속으로 스몄다. 완이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을 만큼의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완의 차 백미러에 걸려있는 토토로 인형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신의 백팩에 걸려 있었던 토토로 인형, 완의 자동차 앞에 걸려있는 그 인형. 그 인형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행복하니.
…미안해.
넌 항상 내가 원하는 걸 가지는구나.
…그렇지 않아.

여신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긴 내가 있어야 했을 자리야.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니. 나는 처음으로 완의 차 안에서 가위에 눌렸다. 무거운 바위가 내 몸을 누르고 있는 듯이, 아니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하나하나 서로 다른 무게감으로 눌려,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누나?!”

목소리. 누굴 부르고 있을까.

“누나!”

춥다. 몸은 점점 더 잠으로, 그보다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따뜻한 손이 내 어깨를 붙잡고, 내 몸이 억지로 일으켜지고, 내 몸이 흔들리고, 귀가 울리고, 따뜻한 체온이 내 등을 감쌌다.

“나경아, 나경아?”

이 목소리, …아버지? 억지로, 힘겹게 눈을 뜬 앞에 흐릿한 얼굴이 보였다. 조금은 긴 얼굴 윤곽, 양복차림의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어디 아파? 응, 누나?”

아버지가 아니다. 완이다. 어느새 불쑥 커버린 완이다.

“아….”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 끝이 조금 움직여지고, 입 밖으로 말이 새어나왔다. 얼마만일까, 가위에 눌리는 것이.

“놔 줘…, 괜찮으니까.”
“응?”

화들짝 놀라며 완이 날 잡던 손을 스르륵 놓았다. 나는 푸슬푸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새로 앉았다. 눅눅하던 옷이 말라 있는 걸 보니 완은 꽤 오래 차를 그대로 둔 모양이었다. 서 있는 곳은 아파트 앞. 아무리 많이 잡아도 혜정의 집에서 4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다. 나는 슬쩍 팔목의 시계를 본다. 비도 멎었고 이미 해는 완전히 저문 여덟시.

“잠들었던 것뿐이야. 뭘 그렇게 놀라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위같은 것 눌리지 않은 듯이 위장한다. 완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못 본 듯이 일어나 차 밖으로 나온다. 완이 아직도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아직도 ‘죽음’에 대해서 강박증에 가까울만큼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외면한다. 그것은 나 자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완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완이 아직도 신이에게 짓눌려 있다는 것이.

“밥, 먹고 가.”
“으응.”

완은 앞서 걷던 나를 앞질러 걸어와 엘리베이터를 눌러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슬쩍 거울에 비친 완의 얼굴을 살폈다. 왜 완의 목소리를 아버지의 것으로 착각했을까. 두 사람은 전혀 다른데도. 완은 계속해서 나를 살피고 있다. 나는 좀 더 어깨를 곧추세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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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4.10.29 23:12 댓글 수정 삭제
    기다려도 다음편이 안올라오네요. 또 편찮으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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