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21.시간을 거슬러 가다



2주 후, 겨울의 시작에서 나는 신문 반면을 채우고 있는 책의 광고를 보았다.

‘이제 우리는 순수한 한 영혼의 속삭임을 듣는다.’

상투적인 광고 문구에 웃음이 나오는 것보다 먼저 눈에 띈 건 광고 왼쪽에 박혀있는 내 이름이었다.

역자 이나경. 번역가이기보다 작가라고 불러야 할 그녀는 국내에 주옥같은 신작들을 보급해온 ‘청랑’의 대표적인 주자다. 영국과 미국의 신진 여류작가들의 글을 번역해온 그녀의 글은 완전히 그 작가들의 원문을 살려내면서 또 그녀의 향기를 갖고 있다. ‘바람 아래에 서다.’, ‘가을 여행길’, ‘나는 소피스트가 되고 싶다.’ 등을 번역해온 그녀의 글은 ‘시간을 거슬러 가다’에서도 변함없이 빛난다.

…이게 내가 맞을까. 내 이름 위에 적혀 있는 작가의 소개란을 나는 읽을 수가 없다. 대신 나는 청랑에 전화를 걸었다. 두어번 벨이 울리자 마자 최소영의 음성이 들렸다.

“저, 이나경인데요.”

“아- 이나경씨, 그러잖아도 태하에서 연락왔었는데요. 이나경씨한테 연락이 안된다구요.”

핸드폰을 꺼놓았던 것은 그들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도망치고 싶었던 사람들은 따로 있다.

“이런 식으로 광고한다고는 이야기를 못들었어요.”

“광고 보셨군요? 요샌 그게 특별한 것도 아니래요. 그리고 그 작가가 국내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니까요. 태하에서 욕심이 좀 많이 나나봐요.”

“하지만,”

“이진희씨 전화번호 알려드릴께요. 그리고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요새 갈수록 출판계에서 판촉이 중요해지고 있어서 그러니까요.”

최소영이 불러준 전화번호를 적고 전화를 끊었다.

급히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서 [시간을 거슬러 가다]를 찾았다. 완이 언젠가 신간을 싸게 살 수 있다며 권해준 서점에선 초기화면의 추천도서에 떡하니 그 책이 올라와 있었다. 책의 광고라는 것은 다른 광고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는 부풀려지게 마련이겠지만, 그 광고를 읽다 보니 내가 번역한 책은 미국의 어떤 젊은 여류작가와도 다른, 독특한 감수성을 가진 최고의 책인 것 같았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조만간 번역이 될 예정이라는, 내가 들은 바 없는 내용까지 덧붙어져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식으로 주목받아도 되는 것일까. 오랫동안 꺼놓았던 핸드폰을 켜놓고 문득, 나는 집 전화를 누구에게도 알려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언젠가 장난전화 퇴치를 위해 전화번호를 바꾼 뒤로 나는 일을 위해서건 개인적인 일을 위해서건 핸드폰 번호만을 알려주곤 했었다. 꽤나 조바심이 났으리라. 태하 출판사, 혹은 이진희가. 전화를 켜놓은지 얼마 안되어서 막 음성메시지가 들어왔다는 알림이 들어왔다. 꺼놓은 며칠 동안에 서너개의 음성이 들어 있었다. 심한 것은 4일 전부터. 이따금 완이 집으로 전화를 할 때마다 전화기 좀 켜놓으라고 투덜거리곤 했지만 나는 그냥 웃어버리곤 했다. 아마 완도 알고 있을 것이다.

[ 저 이진희에요, 태하의-. 전화 주시겠어요? 초판이 나왔는데, 10부 정도 보내드리려구요. 오늘부터 광고 나가는데요. 의논드릴 것도 있으니 연락 주세요. ]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하나 더 있었고, 그리고 막 들어온 오늘의 음성이 있었다. 한참의 숨소리 끝에 전화가 끊어졌다. 목소리는 없지만, 그 숨소리가 귀에 익었다. …그래, 너구나.

시계를 보니 슬슬 학교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문을 잠그고 집을 나왔다. 이런 날엔, 뭔가 챙겨먹는 것처럼 성가신 것도 없다.



학교 수업에 뭘 하고 있었는지, 하루종일 정신이 딴 곳에 팔려 있었다. 태하에 전화를 걸어야 했겠지만 이미 늦어버린 것 하루 빠르고 늦는 것도 별로 의미 없을 거라는 체념. 기말고사 직전의 어수선한 분위기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녹초가 되어버렸다.

“잠깐만, 집으로 택배 왔는데.”

경비실의 아저씨가 나를 보곤 반갑게 일어났다. 우편함에 우편물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어머니는 아직 퇴근하지 않으신 모양이다.

“고맙습니다.”

예감은 언제나 맞는다. 나는 커다란 박스로 도착한 두 개의 택배물을 보았다. 하나는 서울- 태하에서. 하나는, 신이의 어머니에게서. 아저씨가 집앞까지 박스를 들어다 주고, 안에다 들여놓아 주었다. 라면박스 하나와 조금 작은 박스 하나. 태하의 것은 예상대로 [시간을 거슬러 가다] 10권이었다. 번역한 사람에게 내 주는 책 치고는 - 그리고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완에게, 현진에게, 그리고…누구에게? 이 책을 선물할 사람 몇 명을 꼽아 보다가, 피식 웃었다. 효정에게 한 권을 보내야겠다. 이제는 또 방향을 급선회해서는 중문과를 생각하고 있다는 효정은, 중국어보다 중국 문학쪽에 관심이 많다 했다. 제대로 말을 하지는 않아도 그 아이가 아마도 번역에 뜻이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의 흉내내기인지 아닌지는 조금 지켜봐야 하겠지만, 최소한 영문학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나는 안심하고 싶었다.

신이의 어머니가 보내준 박스를 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도 우리와 연락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신이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겠다고, 장례식장에서 당신은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모양이다. 유난히도 불안해하던 딸의 결말을 아직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일까. 1년이었다. 시간이 감정을 무디게 해 준다는 것은 거짓이다. 단지 익숙해질 뿐이다. 휘몰아치듯이 무언가를 다시 ‘기억’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눌러 놓았던 것까지 한꺼번에 일깨워지는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어느날 더 이상 신이의 방을 견딜 수 없어졌을 것이다. 신이의 옷가지를 태워버리고 신이의 가구를 처분하고- 그렇게 그 방에서 신이의 흔적을 지워가면서 당신은 어쩌면, 자신만이 이렇게 고통받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왜 그 짐을 내게 돌리는 건가, 당신은. 당신도 내가 신이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주섬주섬 박스안의 물건들을 꺼냈다. 신이의 책과 노트들이 대부분이었다. 마지막까지 들어내고 나서야 맨 밑바닥에 깔린 당신의 편지를 발견했다. 포장하면서 위아래를 잘못 생각했거나, 혹은 이 짐을 모두 내지 않고 버릴 사람에겐 편지를 읽게 하고 싶지 않았거나. 어느쪽이든 상관없지만.

[ …이제야 그 애의 방을 치울 수 있었어요.
언젠가 딸애가 이런 말을 했었어요. 자기가 죽으면, 다른 건 몰라도 노트랑 책은 나경양에게 주고 싶다고.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고 꾸짖었지만, 이상하게 소름이 끼쳤지요. 부담스럽다면 없애버려도 됩니다. 딸애는 그저 저한테 나경양에게 이걸 주고 싶다고 했을 뿐이고, 나경양에게 이걸 가지고 있어달라고 말하지는 않았을테니까요.

요즘은 내 딸애가 정말로 여기 있었는지 믿을 수 없어집니다. 이렇게 방을 치워내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내가 그 아이를 낳고, 기르고, 울고 웃고 했던 일이 꿈처럼 멀어질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요, 나는 그 애의 아이도 사랑할 수 있었는데. 그 아이가 내 인생을 그대로 물림한 것 같아 가슴은 아프겠지만. 그 애는 왜 그렇게 가 버렸을까요.

그 애는 살아있었던거죠? …]

긴 편지의 중앙에 있는 문구가 당혹스러웠다. 언제인가 들은 기억도 났다. 굳이 내가 자신의 집에 찾아가는 것을 꺼리던 신이가 얼마만큼 자기 어머니를 두려워했던지. 당신 딸의 친구에게 이렇게 존댓말의 편지를 보내실 정도의 깔끔한 분, 유복자인 딸을 혼자서 키워내었던 강한 분. 나는 그 아이의 어머니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 병원. 어머니가 아시면… 우실까. 그 사람에게 말해야 하나. /

다이어리에 쓰여 있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멍하니 노트와 책들을 내려다보았다. …벗어날 수 없다, 너에게서. 다른 사람의 일을 나는 알 수 없다. 시현은 이제 여신이 생각을 하지 않고 잘 지내는지. 혜정은 이제는 나를 여신이 때문에 미워하지 않게 되었는지.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겉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 완이 며칠전 보인 행동. 여전히 죽음에 대해서 심하게 두려워하고 있는 완처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나 적어도 그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여신의 힘으로 얽히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끈을 꿰어 허공에서 꼭두각시 인형을 조정하는 것처럼 신이는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그녀를 잊을 때마다 아직은 안된다고, 아니 영원히 나는 너를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말하듯이 나를 일깨우곤 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것을, 자신은 나를 너무나 좋아했다는 것을- 결국 나 때문에 죽음을 택할 때까지도. 박스 안에서 꺼낸 노트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명체처럼 나에게로 스물스물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버리자- 그러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너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

하지만. 나에게만 신이가 이러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나는 그 애의 목소리를 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유일하게 내게만 말하고 있는 거라면. 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눈을 떴다. 환상은 사라지고 내가 꺼낸 그대로의 상태로 노트와 책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책들을 한쪽으로 다시 쌓아놓고 노트들을 집어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바람이 있는 풍경’이라는 대학 노트가 있었고- 그리고. ‘포렌로우 대륙 이야기’ 라는 노트가 보였다. -포렌로우.

피식, 웃음이 나더니 왈칵 눈 앞이 흐려졌다. 흐린 눈으로 보는 노트에는 몇 번이고 고쳐쓴 붉은 펜자욱이 원래 글보다도 많았다. 그리고 그 글의 원 글씨가 붉은 펜의 글씨와는 다르다는 것도 금새 알 수 있었다. 검은 흘려쓴 글씨에 붉은, 한글의 가지체를 닮은 글씨. 그 두 글의 주인공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류시현 당신?

포렌로우. 금박으로 박혀 있던 거창한 그 글자를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책은 끝내 내용을 읽지 못하고 혜정의 평만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그랬구나. 글과는 상관 없어 보이던 시현이 글동에서 글을 쓰게 되고 그 글이 출판되는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여신의 노트를 내려다보고 벽에 등을 기댔다. 이렇게 애써 고쳤더라도 신이는 이 노트를 돌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노트가 여기에 있는 것을 보면 신이는 이 내용들을 결국 새로 타이핑해서 보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아마 미안한 듯 웃는 시현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볍게 대답했을 것이다. 괜찮아, 즐거웠어.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어서 기뻐.

나는 눈을 부비며 일어나 한 손에 노트를 쥔 채로 집을 박차고 나선다. 아파트 가까이에 있는 도서 대여점에 언젠가부터 환타지 소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 너덜너덜한 ‘포렌로우’를 찾는 것은 간단했고 주민등록증을 잠시 보여주는 정도로 회원가입을 하고 나는 천원짜리 한 장과 책을 교환해 왔다. 1권만 빌려오는 것으로 충분했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것처럼, 신이가 고쳐놓은 그 노트의 붉은 글씨들과 소설의 내용은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왜 죽어버린 거야. 니가 새로 쓰다시피한 글은 타인의 이름으로 책이 되었고, 네 치부恥部는 저렇게 니가 아끼던 동생의 이름으로 드러났는데. 살아 있었더라면- 너는 ‘바람이 있는 풍경’을 저 모습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건데. 너는, 적어도 너는, 그런 앤데. 책을 던져버리려다 나는 책 앞면을 편다. 흐리게 나온 사진 속의 시현은 내가 아는 시현이 아닌 것처럼 몽롱하고 분위기있는 모습이다. 자평을 슬쩍 훑어보았다. 처음 열정만으로 쓴 글이 이렇게 책으로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는 그 말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핸드폰을 들어서 이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울림 끝에 이진희의 경쾌한 음성이 들렸다.

“저, 이나경인데요.”
“아 이나경씨? 지금 어디세요? 부산이시죠?”
“네.”

당연한 것을 왜 물을까- 라다가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잠시 잊는다.

“…며칠 전에 곤란한 소식이 들어와서요, 혹시 <별빛 이야기>라고 들어보셨어요?”

그 제목을 이진희에게서 언젠간 듣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소 이르다.

“제목은 들었어요. 무슨 일인가요?”

그건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애써서 별빛 이야기의 표현을 피해 ‘시간을 거슬러 가다’를 번역했으니까. 그러나 이진희에게 그러한 속사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나 자신부터 신이의 글이 신이의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셈이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 팬클럽 쪽에서 우리 책을, 그 책의 표절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인터넷 게시판 여기저기로 옮겨지고 있는 모양인데….”

“하아.”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커지고 있었다. 팬클럽이라. 계속해서 효정의 집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혜정은 이 일을 이미 알고 있을까.  

“처음엔 그냥 웃어넘겼는데, 저희 쪽에서 그 책을 구해서 읽어보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더라고요. 이쪽에서 강경 대응을 할 생각이니까…, 혹시 이나경씨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서요.”

“…피해요?”

“이나경씨 이메일 주소가 공개되어 있으니까 그 쪽으로 혹시나 험한 소리가 가지나 않을까 해서요. 혹시 그런 일 없었나요?”

“모르겠어요. 확인을 해보지 않아서.”

출판사 쪽에서 묻는 바람에 바다넷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긴 했지만 번역을 들어간 이후로 그쪽 메일을 열어본 적이 없다. 나는 한 손으로 노트북을 열고 스위치를 올렸다. 전화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는지 이진희는 잠시 침묵한다. 이진희의 예상대로 메일함에는 백통에 가까운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아니 내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누군지 알 수 없는 익명의 메일이 대부분이었다. 언젠가 완에게 인터넷에서 익명이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들은 적이 있었지만 컴퓨터를 문서 편집기로 쓰는 내가 그 방법을 알 리 없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라든가 아주 정중한 협박이라든가- 적어도 한 두 사람이 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메일은 참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맞춤법을 지키지 않은 말들, 아스키기호로 표현한 다양한 표현들. 그럼에도, 그러한 욕설의 대상이 바로 나인데도 나는 이상하게도 담담했다. 한참 소리가 없자 이진희는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호흡을 고르는 소리로 보니 내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듯. 하, 하고 웃음도 한숨도 아닌 소리가 새어나왔다.

"통신하는 사람들이 흥분하면 말이 험해져서-"
"그러네요."

말을 가볍게 끊어버렸다. 이진희가 내게 변명할 필요는 없으니까.

"증거제시도 되어 있군요. 재미있네요. 안티사이트라."
"안티 사이트요?"

그녀는 몰랐던 내용인가보다. 그냥 덮어둘 걸 그랬을까. 아니, 아니다.

"네, 누가 주소를 남겨 놓아서 지금 보고 있어요. 두 책 비슷한 구절마다 서로 비교를 해놓았네요."

덧붙여서 나는 이진희에게 그 안티사이트의 주소를 불러주었다. 마음 속에서 악의가 꿈틀거리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포렌로우를 기억하라. 바람이 있는 풍경을 기억하라. 그 책들이 누구의 이름으로 나왔는지를, 그들이 그 아이의 글에 무슨 짓을 한 것인지를, 기억하라. 전화기 저편에서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배경음악이 들린다. 이진희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 내 심장소리가 지금 그쪽으로 들릴까봐 걱정이 된다.

"고마워해야겠는걸요."

이진희의 목소리는 밝았다. 나는 들리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건 우리쪽 증거라고 해도 되겠어요. 원문이랑 나란히 세 개 실어놓으면. 일단 자료는 제 PC에 저장해 두었어요."

"잘 됐네요."

"메일에 너무 신경쓰지 마시구요. 생각보다 강하게 대하셔서 다행이네요. 그럼 상황 변하는 데로 알려드릴께요."

"예."

이진희가 들뜬 상태로 전화를 끊었다. 돌아설 길은 없다. 그 원고를 넘겼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내 나름의 방식으로 신이를 위해서, 신이가 원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 하는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들은 원문을 모를 것이다. 특별히 주문하지 않는 한 번역되지 않은 외국의 소설을 구할 방법은 거의 없다. 이진희의 말대로 원문과 내 번역과 별빛이야기를 나란히 실으면 오히려 표절로 몰릴 것은 그 쪽이다. 가능한한 의역을 삼가고 원문에 충실하려 한 것은, 조금이라도 별빛 이야기와 비슷한 표현을 쓰지 않기 위해서였다.

/ 그들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

나는 도망친다. 맞섬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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