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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당신이 사는 섬 3부

2006.04.21 23:0404.21



돌아온 남자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자신의 옛집을 찾는다. 버스에서 내려 작은 골목들을 지나 해안가에 있는 자신의 집을 향해 남자는 거침없이 걷는다. 예전에 남자가 아버지에게 끌려가고 처음이다. 문에는 자물쇠도 걸려있지 않다. 남자가 집 문을 연다. 하지만 살지 않은지 오래 돼서 그런지 처음에는 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힘을 쓰자 그제야 문이 긁히는 소리와 먼지를 날리며 열린다. 남자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안으로 들어간다.
차갑고 눅눅한 공기가 무겁게 깔린 집안을 남자는 구석구석 살핀다. 변한 건 없다. 먼지가 많이 쌓이고 눅눅한 공기에는 기분 나쁜 비린내가 날 뿐이다. 남자가 쭈그려 앉아 손으로 바닥의 먼지를 훑는다. 그리고 훑은 먼지를 손가락 끝으로 매만진다.
남자가 일어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아 버린다. 자물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문을 잠근다. 문을 잠근 남자는 집을 한 번 보더니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디론가 간다. 남자의 코트 자락이 바닷바람에 펄럭인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노인의 집이다. 남자는 얼굴에 웃음을 띤 채 노인의 집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응답이 없다. 남자는 조금 전보다 더 세게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집에 들어서며 남자가 노인을 부른다.

“할아버지?”

대답은 없다. 남자는 노인의 침실로 들어간다. 좁은 침실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침대에 노인이 누워있다. 혈관이 비춰 보일 것 같은 새하얀 얼굴에 핏기 없는 입술에 가슴까지 덮은 이불은 미동도 없다. 남자의 얼굴이 순간접착제보다 빠르게 굳는다. 남자는 천천히 노인에게 다가간다. 남자가 발을 딛을 때마다 바닥이 삐걱거린다. 그리고 멈춰선 남자는 누군가 줄로 억지로 잡아당긴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팔을 들어올린다.
노인이 격하게 기침을 한다.

“쿨럭! 쿨럭 우욱~ 쿨럭 쿨럭!!”

기침을 한 노인은 몸을 일으켜 옆에 놓여져 있던 나무통에 가래를 뱉는다. 한동안 호흡을 진정시키던 노인이 남자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한다.

“오, 지금 왔냐?”

남자의 얼굴이 풀어진다. 남자는 의자 하나를 끌어 와 앉으며 묻는다.

“네, 지금 왔어요. 감기는 아직도 안 나으신 거예요?”

“나이가 드니까 병이라는 게 쉽게 떨어지지가 않더구나. 그래, 마음은 좀 가벼워졌니?”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노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다시 폐가 튀어나올 것 같은 격한 기침을 한다. 남자가 걱정스러운 듯 노인의 이마에 손을 대 본다. 그러더니 크게 놀라며 묻는다.

“열이 이렇게 높은데 지금까지 계속 누워만 계셨던 거예요? 병원은 가 보셨어요? 아니, 지금 저랑 같이 가세요.”

“괜찮아, 약 먹고 있으니까 금방 나을 거다.”

“안돼요. 빨리 일어나세요.”

“이 놈 호들갑은. 다 쓴 몸뚱이 아픈 게 당연하지. 뭐 하러 이런 몸뚱이에 쓸데없이 돈을 써. 약 먹고 있으니까 한 며칠 누워있으면 나을 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그저께 찬바람을 좀 맞아서 그래. 괜찮아.”

노인이 고집스럽게 자리에 돌아눕는다. 남자는 한숨을 쉬고는 이불 하나를 더 꺼내 노인에게 덮어준다.

“옆에 계속 있고 싶은데 아버지 때문에 이만 일어나봐야 되겠어요. 수건에 찬물 적셔 놓을 테니까 그거라도 이마에 덮고 계세요. 제발 몸조리 좀 잘하세요.”

“그래, 쿨럭 쿨럭.”

남자는 화장실로 가 찬물에 수건을 적셔 가지고 와 노인의 이마에 덮는다.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자 몸을 몇 번 부르르 떨던 노인은 아까보다는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든다. 남자는 가만히 노인을 바라보다 편치 않은 얼굴로 노인의 집을 나선다. 그리고 걸으면서도 몇 번이나 노인의 집을 돌아본다. 하지만 남자는 작게 한숨만 쉴 뿐 다시 노인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남자는 아까처럼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도착하니 남자의 아버지가 문 여는 소리를 들은 듯 방에서 나온다. 그리고 말없이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그런 아버지를 무시하며 코트를 벗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남자의 아버지가 코트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고 있는 남자에게 말한다.

“잘 갔다 왔냐?”

“네.”

“여행은 즐거웠니?”

“네.”

“어디로 갔는데?”

“그냥 여기 저기 돌아다녔어요.”

남자는 아버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리를 펴기 시작한다. 그런 남자를 보며 남자의 아버지가 말한다.

“그래서 네 엄마는 찾았니?”

자리를 펴던 남자의 손이 멈춘다. 하지만 곧 다시 손을 움직여 자리를 편다. 자리를 편 남자는 자리에 눕고는 머리 위까지 이불을 덮는다. 남자의 아버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남자가 덮고 있는 이불을 거칠게 걷어낸다. 남자는 옆으로 누운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 그런 남자를 향해 남자의 아버지가 말한다.  

“아버지가 묻는데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몸을 웅크린 채 풍선의 찢어진 틈새로 바람이 새는 것 같은 목소리로 남자가 대답한다.

“저 피곤해요. 나가주세요.”

남자의 아버지는 남자의 말은 듣지 않고 말한다.

“넌 항상 이런 식이었지. 그래, 네 엄마랑 똑같아. 소름 끼칠 정도로 말이지. 날 항상 불쌍한 사람 취급하며 애써 외면하는 척 무시했어. 난 그 눈빛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넌 점점 네 엄마의 행동, 눈빛을 그대로 닮아갔어. 그 빌어먹을 늙은이하고 히히덕거리는 것까지!!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모두 다!!”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자 고성이 좁은 방안에 가득 채운다. 그 무게에 남자는 더욱 움츠러든다. 흥분에 거친 숨을 쉬던 남자의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그런 네가 기억해야 될 게 있다. 네 엄마는 날 버렸고 날 버린 순간 너도 버렸다. 그리고 그 늙은이는 말리지도 거기에 대해서 말도 하지 않았어. 그들은 우리의 원수다. 평생 증오하고 미워해야할 원수란 말이다.”

남자가 아버지를 등진 채 일어선다. 일어선 남자는 속은 비운 오뚝이처럼 불안해 보인다. 남자가 말한다.

“그만하세요.”

“뭐?”

남자가 더 못 참겠다는 듯 아버지를 향해 돌아서며 소리친다.

“이제 그만 좀 하시라고요!”

남자의 아버지도 소리친다.

“뭘 그만하라는 거냐! 내가 뭘 했다고!”

“지금 하고 계신 것들이죠! 이제 제발 제가 사랑하는, 제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부숴버리고 절 아무도 없는 세상으로 내 몰지 마시라고요!”

남자의 아버지는 당황스러움에 아무 말도 못한다. 남자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제 그만 제가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남자의 아버지가 남자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친다.

“나가! 당장 내 집에서 나가!!”

남자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다 조용히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선다. 남자의 아버지는 남자가 나가고도 한참동안 남자의 방에 서 있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다시 집을 나온 남자는 걷기 시작한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고 버스가 지나다니는 길을 따라서 계속해서 걷는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진다. 걸어가는 남자의 옆으로 버스가 지나가며 남자의 머리와 코트 자락을 어지럽힌다. 버스가 지나가고 남자는 잔뜩 일어난 먼지에 얼굴을 찌푸린다. 몸을 한껏 움츠린 남자는 다시 걷는다.
남자는 다시 노인의 집을 찾는다. 남자가 아까처럼 노인의 집 문 앞에 서자 아까와는 다르게 격한 기침 소리가 난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죽을 만큼의 상처를 입고 울부짖는 것 같은 기침소리다. 남자는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남자가 노인의 방을 도착하니 노인은 격한 기침을 끝내고 바닥에 가래를 뱉으려 하던 중이다. 노인은 ‘카악’하는 소리와 함께 가래를 뱉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눕는다. 노인이 뱉은 가래는 끈적끈적 한데다 녹슨 쇳빛이라 알려지지 않은 위험한 미지의 생물을 보는 듯 하다. 노인은 오한이 나는지 이빨을 따닥따닥 부딪치며 온몸을 떤다. 남자는 서둘러 노인의 이마를 짚는다. 그리고는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노인을 흔들어 깨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지만 노인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실눈을 뜨고 띄엄띄엄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미안....... 나는, 사랑해. 미안하다. 사랑했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빌어먹을, 할아버지 정신 좀 차리라고요!!”

남자의 울부짖음에도 노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할 뿐이다.

“미안해. 찾으러 가야하는데....... 여긴 너무 추워. 추워서 움직일 수도 없어. 이제, 이제 날 그만 용서해........ 그 아이도 나 때문에 파멸했어. 더 이상은 안 돼. 미안 용서해, 용서해줘. 더 이상 찾으러 갈 수 없어.”

남자는 노인을 흔들어 깨우다 무언가 생각난 듯 거실로 간다. 거실에는 전화기가 있다. 남자는 서둘러 119에 전화를 한다.

“119죠? 여기 해리 149번지에요. 빨리 좀 와주세요. 해리 149번지라고요. 네, 빨리 와 주세요. 사람이 죽어가요. 젠장, 자꾸 기다리라고 하지 말고 지금 빨리 오란 말이야! 사람이 죽는다고!”

남자는 전화를 끊고는 다시 노인에게로 간다. 노인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다. 남자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쉴 새 없이 식은땀을 흘린다. 남자의 손은 계속해서 이마와 얼굴을 매만진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노인의 몸부림 덕에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서 화장실로 가 찬물에 적셔온다. 수건을 적셔온 남자는 열이 나는 노인의 몸을 찬 수건으로 닦는다. 그리고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깨닫지도 못한 채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중얼거린다.

“죽으면 안 돼요. 이렇게 죽으면 안 돼........”

하지만 응급차가 올 때까지도 노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응급차에 태워진 노인은 남자와 함께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다. 남자는 ‘보호자냐’는 의사의 질문에 신음처럼 들리는 대답만 겨우 한다. 그리고 누워있는 노인을 젖었다가 바싹 마른 휴지 뭉치처럼 굳은 얼굴로 바라본다. 그런 남자의 모습은 긴장하고 윽박지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대조 되며 어느 폐교의 건립기념 동상처럼 보인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남자와 노인 두 사람만이 그들만의 깊은 정적 속에 놓여진다.



“폐렴입니다.”

금테 안경을 끼고 뾰족한 턱을 가진 의사가 차트를 뒤적이더니 말한다. 의사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환해진다. 하지만 의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는다. 의사가 말한다.

“폐렴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닙니다. 이 환자같이 나이든 분들은 폐렴으로도 목숨이 위험하단 말입니다. 게다가 할아버님께서는 폐렴 말고도 다른 합병증 증세도 보이고 있습니다. 상태가 심각합니다. 뭐라고 말씀드릴 단계는 아닙니다만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해두셔야 될 겁니다.”

순간 남자의 눈이 커지며 다급히 묻는다.

“할아버지가 죽는다는 말인가요?”

순간 의사가 당황하며 말한다.

“아, 반드시 그럴 거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제 말은 상태가 심각하니 마음을 굳게 먹고 환자에게 힘을 주라는.......”

남자가 몸을 앞으로 더 내밀더니 의사의 말을 자르고 다시 묻는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의사가 난처하다는 듯이 안경을 올리며 대답한다.

“자꾸 이렇게 흥분하시면 본인은 물론이고 환자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보호자 분이 침착하셔야 환자도 힘을 내지요. 일단은 저희도 최선을 다 할 테니까.......”

“그럼 살 수는 있는 겁니까? 그것만 확답을 해주세요.”

남자의 말에 의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의 눈을 피할 뿐이다. 남자가 기어코 소리를 지르며 의사의 멱살을 움켜쥔다. 의사가 크게 놀라며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 하지만 남자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남자가 소리친다.

“네가 의사야! 요즘 세상에 폐렴으로 죽는다는 게 말이나 돼! 너 돌팔이지! 돌팔이지, 이 새끼야!”

남자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멱살을 쥔 남자의 손도 점점 거칠어진다. 의사가 겁에 질려서 소리친다.

“기, 김 간호사! 김 간호사!”

의사에 외침에 간호사가 황급히 뛰어온다. 방에 들어온 간호사는 잠시 놀랐지만 황급히 의사에게서 남자를 떼어놓으려 한다. 하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어느새 남자의 외침은 울부짖음으로 변하고 순식간에 방안은 남자의 고성으로 가득 찬다.

“죽으면 안 된단 말이야! 죽으면 안 돼! 저 사람은 절대로 죽으면 안 돼!!”

하지만 남자의 난동은 오래 가지 않는다. 결국 남자는 멱살을 잡던 손을 풀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남자는 무릎을 꿇으며 끊임없이 말한다.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남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의사도, 간호사도.






노인이 눈을 뜬다. 다시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며 몸을 일으키려던 노인은 격한 기침을 한다. 그리고 거북하게 무언가 들끓는 소리를 내더니 커다란 가래를 뱉는다.
노인의 기침 소리가 남자가 깬다. 남자는 다급히 노인에게 다가간다. 가래를 뱉은 노인은 추운지 아래턱을 심하게 움직이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남자는 노인의 이마에 손을 댄다. 그리고 더욱 걱정스러운 얼굴이 된다. 노인이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실눈을 뜬 채 남자에게 웃음을 보인다. 남자도 따라 웃는다. 하지만 웃음 짓는 입과는 다르게 남자의 눈시울은 붉어진다.

“제가 그래서 제때 병원 가라고 했잖아요.”

남자의 말에 노인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도 웃으며 말한다.

“네가 한 번이라도 내 고집 꺽은 적 있냐.”

“없죠,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기나 하세요.”

노인은 다시 눈을 감는다. 아까보다 추위를 더 느끼는지 몸을 와들와들 떤다. 남자는 의자를 끌어다가 노인이 누운 침대 옆에 놓고 앉는다. 그리고 팔꿈치를 침대에 기댄 채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자지 않고 노인을 지킨다. 노인은 오한에 몸을 떨고 가끔씩 헛소리만 할 뿐 별다른 증상은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피곤한 듯 눈가를 손으로 문지른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일어서서 팔을 휘젓고 허리를 돌리며 몸을 푼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남자가 문 쪽을 바라보니 아까 남자를 말리던 간호사가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남자가 묻는다.

“무슨 일이시죠?”

“아, 저기....... 피곤하시죠? 여기는 제가 있을 테니까 어디 잠깐이라도 바람 좀 쐬고 오세요.”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그런 실례를 할 수는 없죠.”

간호사가 웃으며 말한다.

“지금 쉬는 시간이에요. 제 개인 시간 쓰는 거니까 상관없어요.”

그리고는 남자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병실로 들어온다. 남자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 일단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한다. 그리고 자신은 접는 의자 하나를 새로 펴서 옆에 앉는다. 간호사는 남자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고 조심스런 동작으로 의자에 앉는다. 의자에 앉은 간호사는 노인의 이마를 짚어보고 눈을 본 다음 심장박동 측정기를 검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액이 잘 되는지 확인한다.
남자는 그런 간호사를 한 발짝 물러난 시선으로 바라본다. 노인의 상태를 점검한 간호사가 남자에게 말한다.

“어디 가서 쉬다 오세요. 제가 여기 있을게요.”

남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한다.

“불안해서요.”

“의사가 아니라서?”

“아니요. 꼭 간호사 분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할아버지를 지키고 있다는 게 불안해요.”

남자의 말을 들은 간호사가 누워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다. 남자도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방 안은 심장박동 측정기 소리와 시계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린다. 두 사람의 침묵이 젤라틴처럼 굳어 방안을 반 쯤 채웠을 쯤 간호사가 말한다.

“많이 소중하신 분인가요?”

반은 졸고 있던 남자가 놀라며 반문한다.

“네?”

그런 남자의 모습에 웃으며 간호사가 다시 말한다.

“많이 소중하신 분이냐고요.”

얼빠진 모습을 보인 자신이 부끄러운 듯 남자가 웃으며 얼굴을 매만진다. 남자가 말한다.

“뭐, 그렇죠.”

“사실 아까는 좀 놀랐어요.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 같기도 하고, 게다가 남자가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봤거든요.”

“흉한 모습 보여드렸네요.”

“솔직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흉한 모습도 아니었어요. 누군가를 잃을까봐 두려워한 거잖아요. 특히 선생님 같은 분은 그래도 되요.”

“저 같은 사람이라뇨?”

“많이 외로우시죠?”

“.......”

“제 짐작일 수도 있지만 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처음에 응급실에 와서 봤을 때도 아까 진료실에서도 그렇고. 외로워 보였어요, 많이.”

남자가 눈에 이채를 띠고 간호사를 쳐다본다. 간호사는 고개를 돌려 그런 남자를 향해 씩 웃은 다음 말한다.

“제가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죠? 왜냐면 저도 많이 외로웠거든요. 그래서 잘 알 수 있어요. 저 사람은 외로운 사람인지 아닌지. 눈만 봐도 알 수 있어요.”

“.......”

“외로운 사람은 권리가 있어요. 눈물을 참지 않고 흘릴 수 있는 권리. 소중한 사람이 떠나갈 때 그 사람을 끝까지 잡고 있을 권리. 오래.......혼자 견뎠으니까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네, 부담 갖지 마시고 편히 쉬다 오세요.”

남자는 병원을 나와 밖으로 나온다. 늦은 시간이기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 남자가 근처 편의점을 찾는다. 편의점에는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여학생이 카운터를 보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묘한 시선으로 주시하던 여학생이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남자도 머쓱하게 목례를 한다. 남자는 따뜻한 캔 커피 하나를 꺼내 든다. 그리고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600원이요.’ 라고 말하는 여학생에게 남자가 말한다.

“담배도 한 갑 주세요. 레종으로.”

‘레종으로’ 라는 말을 할 때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 여학생이 담배를 꺼내오자 남자가 뭔가 생각난 듯 말한다.

“아, 저기. 라이터도 하나 주세요.”

여학생은 남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라이터도 하나 꺼낸다.

“3400원입니다.”

남자는 5000원짜리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고 나온다. 어색하게 커피와 담배를 쥔 채 남자는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남자는 병원 근처 공원의 벤치에 앉는다. 캔 커피는 벌써 식어버렸다. 남자는 캔 커피를 따서 한 잔 마신 다음 담배를 빼 문다. 주위는 담배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하다. 몇 번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던 남자가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한다. 기침이 잦아들 쯤 남자는 다시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지만 또 기침을 한다. 남자가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신 남자는 기침을 어느 정도 멈춘다.
연기를 피우며 타들어가는 담배를 놔두고 남자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얇은 검은 천으로 싸인 듯 별 하나 제대로 보이지 밤하늘을 바라보며 남자는 조그맣게 한숨을 쉰다. 고개를 든 채로 남자가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담배를 핀다. 쿨럭 거리는 기침과 함께 남자는 마치 잠깐 한 눈을 판 사이에 유리잔을 떨어뜨리듯 눈물을 흘린다.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담배를 피며.

김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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