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Angel of the night <6>

2006.03.24 01:0503.24

민영후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하얀 얼굴에 섬세한 이목구비, 짙고 뚜렷한 눈매에 쭉 뻗은 콧날, 약간 가는 입술이 어우러져 세련된 지식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늘 책방에 앉아있는 모습만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등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늘 목 뒤에서 하나로 묶은 모양새였다. 일어선 모습조차도 지난 5, 6년 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의 키가 190cm가 넘을 정도로 크다는 사실도 어젯밤에 정신병자와 싸우는 걸 보고서야 처음 알았다.

물론 그가 그렇게 강하다는 사실도, 정신병자 살인범과 알고 지낸다는 사실 역시도 처음 알았지. 여진은 침을 삼키고서 불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당신 어제 왜 거기 나타났던 거야? 그 정신병자랑 어떻게 아는 사이인데? 당신들 좀 이상해. 도대체 뭐야?"

그가 다시금 바닥에 피를 뱉은 다음 인상을 찌푸린 채 입가를 닦았다. 보통 때는 무표정하긴 해도 왠지 상냥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인상을 찌푸린 데다가 입가에 피까지 묻어 있으니 마치 영화에 나오는 깡패 같아 보였다.

"몸은 이제 안 아파?"

질문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그녀는 잠깐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많이 좋아졌다. 아까 전까지는 죽을 것 같았었는데.

"몸 안에서 자가 치료라...... 뱀파이어도 아닌데. 이 가게에 꾸준히 드나든다는 거랑 이상한 책을 죽도록 열심히 본다는 걸 빼면 지극히 정상인데."

"당신 생긴 거랑 다르게 말버릇 진짜 고약하네."

여진이 인상을 찌푸리고 팔짱을 끼다가 웃옷이 딸려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도로 내렸다. 그것을 눈치챈 것처럼 영후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딱히 가리지 않아도 돼. 어쨌든 앞으로도 종종 볼 일이 있을 테니까."

정신병자의 친구는 역시 정신병자가 아닐까? 여진은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청바지를 끌어당겼다. 바지에까지 피가 번져 있는 걸 보니 도로 입기는 어려울 것 같았으나 계속 벗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개새끼가 널 찾아올 거야. 널 찍었으니까. 감히 내 걸 건드리려고 수작을 부리다니, 돈 게 분명해."

"저기, 잠깐만. 누가 누구 거라고?"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비뚜름한 표정이 하도 시니컬해 보여서 하마터면 그녀는 미안하다고 사과할 뻔했다.

"어쨌든 할리퀸 새 거 들어왔어. 그 이야기 하려고 며칠 전에 나온 거였는데."

"이 가게 도대체 고정적인 운영 시간이 있긴 있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이고서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여진은 가만히 앉아서 뭣 때문에 며칠 전 경찰청에서 저 사람의 정체를 숨겨주었을까 고민해 보았다.

물론 5, 6년이나 거래해 온 헌책방 주인이 갑자기 그녀가 위험할 때 나타나서는 정신병자를 두들겨 패고 구해주었다고 말하는 건 어쩐지 웃기는 일이었다. 그 헌책방 주인이 정신병자와 잘 아는 사이 같더라, 그런 말을 하면 그녀까지 의심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입을 다물고 혼자 달려온 거지만 지금 생각하니 바보짓을 한 것 같았다.

하반신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정체불명의 헌책방 주인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바보 같고.

"일어날 수 있어?"

그녀가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자 영후는 3초쯤 지켜본 다음 다가와서 번쩍 안아들었다. 맨살로 드러난 엉덩이에 그의 손이 닿자 그녀는 화를 낼까 하다가 방금 전에 벌어진 일을 떠올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의대 안 간 아들을 둔 병원집에 시집가려고 했는데 글러버렸네."

"지금은 왜 학교 안 다녀?"

그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여진은 고개를 들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은 짙은 속눈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초승달 모양을 그리고 있는 눈썹에 손을 댔다가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어, 나도 모르게......"

하지만 잘 생겼다고! 그녀는 속으로 미친 듯이 변명했다. 뭐라고 해도 의대 4년 간 그녀가 본 거라고는 배 나오고 피곤에 절은 좀비들 뿐이었으니 이렇게 드물게 그녀보다 키까지 큰 미남을 보면 손이 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은 왜 학교 안 다니냐고."

그가 안으로 들어가며 인내심 있게 다시 물었다. 가게 안쪽에는 조그만 문이 있고 아마도 창고였던 것 같은 작은 방이 있었다. 방안에는 작은 좌탁과 나무로 된 무거워 보이는 옷장, 80년대 초반의 물건 같아 뵈는 TV가 있었다.

영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피에 젖은 청바지를 여전히 꼭 움켜쥔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여진은 그의 시선을 깨달았다.

"돈이 없어서 휴학 중인데...... 그런데 나 학교 안 다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냄새가 다르니까."

그가 자신의 코를 툭 쳤다. 여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한테서 냄새 나?"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영후는 돌아서서 옷장 문을 열면서 나직하게 대꾸했다.

"전에는 소독약 냄새가 났는데 작년 중순부터 역한 기름 냄새가 나. 고기 냄새랑."

여진은 인상을 찡그리고서 한숨을 쉬었다.

"맥도날드가 그렇지, 뭐. 그래도 제복 입으니까 그렇게 심하진 않을 텐데."

"냄새는 피부와 머리카락에 배."

그가 옷장 안쪽에서 헐렁한 운동복 바지를 꺼내서 던졌다. 여진은 회색 바지를 들고서 의심스럽게 관찰했다.

"새 거야. 근처에 있는 옷가게가 문 닫으면서 남은 걸 주위 가게들에 하나씩 돌렸어."

옷을 받아든 채로 고개를 들어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는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며 바닥에 앉았다. 허리를 편 꼿꼿한 자세에 그녀는 눈을 굴렸다.

"여기서 살아?"

"필요할 때만."

"그럼 가게문 안 열 때는 다른 데 가 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들고 있는 옷을. 그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생겼다.

"옷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아니, 그게......"

여진은 난감한 얼굴로 운동복을 보았다. 영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속옷도 없이 어떻게 입어?"

생각도 못 해 본 것처럼 영후가 그녀를 빤히 보았다. 불빛은 흐릿하지만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고 그녀는 맹세할 수 있었다. 사람을 때리는 건 아무렇지 않게 하더니 속옷 이야기에 얼굴이 붉어져?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자 그가 홱 돌아앉아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운동복을 쳐다보며 속옷 없이 입어봤자 아직 피가 멎지도 않았으니 버리기만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안 돼."

영후의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울리자 그녀는 슬쩍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핸드폰에서 가느다랗게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진은 바싹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좀 가지요. 바로 앞입니다. 별로 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안 된다고 말했어, 방금. 다음에 와."

"벌써 앞이라서요.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여진이 인상을 찌푸리고 영후를 보았다. 설마. 저 사람이 그 사람과 알 리가 없다.

영후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날카롭게 말했다.

"여자 속옷을 사 와. 그럼 문을 열어줄 테니까."

잠시 전화기 안에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속옷이요?"

"그래. 알았으면 꺼져."

핸드폰을 부서질 듯 내려놓는 모습을 보며 여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버릇이 나빠서 장사할 땐 말을 안 하는 거야?"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보았다.

"할 말이 없으니까."

"합계액이 얼마인지도 말 안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이미 알고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여진은 포기하고서 운동복을 움켜쥔 채 앉아 있다가 얼굴을 붉히며 그를 보았다.

"화장실 어디야?"

"나가서 오른쪽. 뜨거운 물은 안 나오는데."

어깨를 으쓱이고서 여진은 간신히 운동복 바지로 몸을 가린 채 방을 나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녀 쪽을 돌아보지 않고 핸드폰만 노려보고 있었다.
댓글 2
  • No Profile
    진아 06.04.30 06:30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
  • No Profile
    디안 06.05.18 11:00 댓글 수정 삭제
    와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 한번에 첫화부터 다 읽어내릴 정도로 흥미진진했습니다. 다음편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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