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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쯔트도 날 인정했지. 그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문-웰레이즈의 시대다.”

  록울이라는 작은 마을에 하나 있는 펍에서 들린 여린 음성에 마스터는 술잔을 닦는 것을 멈췄고,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는 시시껄렁한 술주정뱅이 셋은 컵을 들어 올리려는 손을 허공에 띄운 채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젖내 나는 애송이 엘프를 바라보았다. 얼굴과 몸이 여자처럼 곱상하고 가늘었다. 피부는 투명하다고 할 정도로 창백한 탓에 인간이 본다면 병약하게 느껴질 것이다. 입술은 연지를 잔뜩 칠한 것처럼 붉다.

  주정뱅이 하나가 손가락으로 엘프를 가리키며 묻는다.

  “네가 영웅이라는 것이냐? 이 애송아.”

  그러면서 몇 번 머리를 쥐어박자 엘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손바닥을 그가 쥐고 있는 컵에 가까이 가져가서 집중을 한다. 잠시 그대로 있는 듯싶더니, 컵이 둥실 떠올랐다. 손을 움직이는 대로 컵이 움직였다. 주정뱅이의 머리 위에까지 가져가서 손바닥을 홱 뒤집으니 컵이 빙글 돌면서 맥주가 머리 위로 뒤집어 씌워졌다. 날벼락 같은 맥주 세례에 주정뱅이가 당황하는 사이에 엘프는 몇 마디 남기고 도망간다.

  “영웅에게는 시기하고 좌절시키려고 쫓는 자가 있기 마련이지. 난 그만 간다.”

  옆문으로 나감과 동시에 펍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가볍게 무장한 네댓 명의 엘프들이 들이닥쳤다. 인근 숲에 살고 있는 문엘프들이었다. 의심스런 눈초리로 펍 내부를 싹 훑는 가 싶더니, 그중에서 대장으로 짐작되는 자가 마스터에게 묻는다.

  “여기에 어린 엘프 한 놈 오지 않았소?”

  마스터는 옆문을 가리키면서 방금 전에 저리로 나갔다고 알려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들어온 문으로 나가려는데, 당겨지는 것이 있어 돌아보니까 좀 전에 맥주 세례를 받은 술주정뱅이가 엘프 대장의 갑옷 끈을 잡고 있었다. 그는 술 냄새 섞인 입김을 뿜으며 옷값을 물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에 엘프 대장은 불쾌해하지 않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문엘프 식 해결책을 조언했다.

  “냇가에 한번 뛰어들었다가 햇볕 아래에 누워 말리게.”

  화가 난 주정뱅이가 욕을 퍼부을 찰나, 섬광 하나가 그의 눈 사이로 파고들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엘프가 주정뱅이의 미간을 향해 롱소드를 한 번 휘저은 뒤였다. 주정뱅이는 코를 감싸 쥐고 뒹굴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으나 콧등에 가로로 길게 상처가 났다. 엘프 대장은 비웃는 웃음을 흘리며 부하들을 이끌고 펍을 나가버렸다.

  “낮부터 술만 마시는 게으른 자와는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주정뱅이는 문 쪽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마스터는 물론이고 두 친구들마저 하나같이 “네가 잘못했다.”라고 하며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전력으로 도망쳤다. 사람들을 이용하여 시야를 어지럽히고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장애물로 삼을 수 있는 시장 길로 유도하기도 했고, 건물 사이로 들어가기도 했다. 록울 마을에는 몇 번 와본 적이 있어서 어디로 통하는지 알고 있는 골목길이 군데군데 있다. 어린 엘프는 추적자들을 따돌리려고 모르는 골목길도 들어갔다. 작은 마을이지만 골목길은 어두웠다. 쫓기는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마을 추적단의 고함 소리와 가죽 부츠 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을 보니 성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짐승의 배설물 냄새와 퀴퀴한 냄새가 더해져서 악취가 풍기는 곳이었지만 붙들려가는 것보다는 나아서 꾹 참고 골목에서 웅크리고 한동안 은신했다. 이윽고 추적자들의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다. 조용히 일어나서 고양이 발걸음으로 큰 길 쪽으로 움직였다. 그와 함께 뒤통수에 내리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조카야. 내 가르침을 잊은 모양이구나. 시가지에서는 머리 위쪽도 조심해야한다.”

  지붕 위에 엘프 대장이 오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은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맨손인데다가 적당한 무기도 없다. 엘프 대장이 휘파람을 휙 불었다.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그 소리를 모든 엘프 추적대가 들었다. 얼마 안가서 골목으로 추적대가 들이닥칠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추적대가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한 어린 엘프는 저항할 의욕을 상실했다. 뒤통수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초보 영웅에게는 갖가지 시련이 닥치게 마련이야. 강철 같은 몸을 힘들게 하여서 의욕을 없애는 것, 선하고 굳은 마음을 파괴해서 타락시키는 것, 어떤 것이든 이겨내야 진정한 영웅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 그래 이깟 시련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눈앞에 번쩍하고 불꽃이 튄다. 때린 녀석을 노려보니까 몇 대 더 주먹이 날아온다. 꿈틀거릴 수도 없었다. 왜냐면 진흙 골렘에게 단단히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날 놔줘! 이게 영웅의 꼴이라고 생각해?!”

  영웅을 동경하고, 염원하는 어린 엘프는 마을을 소란스럽게 한 추격전 끝에 사로잡혔고, 지금 마을로 끌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발버둥 쳤지만 무의미했다. 어른 엘프들은 듣고 있지도 않고 있었다. 대장이 작은 엘프의 귀를 당기면서 닥치고 가만있으라고 협박했다. 어린 엘프, 웰레이즈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존경하는 숙부님. 당신은 아시겠지요? 영웅을 꿈꾸는 이 조카의 야망을. 부디 절 놓아주세요.”

  대장 엘프는 돌아보지도 않고 헛방귀를 뀌었다.

  “사랑하는 조카야. 문엘프 일족이 자유롭게 숲을 나설 수 있는 때는 성인식 이후이다.”

  그러면서 긴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술은 성인이 된 후에나 할 수 있으며, 선하고 정의로운 자가 아니면 절대 사귀지 말 것, 자연을 사랑하라는 숲의 30개 율법을 늘어놓음으로서 어린 엘프의 귀를 괴롭게 했다. 성인식까지는 3개월 밖에 남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자유를 원하는 엘프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유달리 자유혼이 강한 이 어린 문엘프에게 마을에만 있으라는 것은 창공을 날고 싶은 큰 알바트로스를 좁디좁은 새장에 가두어 둔 것과 같았다.

  저항도, 발버둥 치는 것도 소용없다면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몸이 자라고, 충분한 힘이 비축되기를 기다려서 때가되면 일시에 몸을 묶은 족쇄를 끊는 것이 현명하다. 어린 새끼 때에 저항하면 족쇄는 몸을 죄어오고, 힘은 무의미하게 낭비되기만 한다. 어린 문엘프는 이것을 고전에서 읽었다. 적절하게 시기를 잘 파악하고, 대처하는 순발력은 영웅이 될 수 있는 자질이라고 어떤 왕이 말했었다.
네더릴의 군주 모르엔다르 3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간에 끌려 다니면 비천한 노예라 할 수 있고, 시간을 잘 조절한다면 비범한 자질이 보이는 모탈Mortal일 것이며, 시간을 지배한다면 다스리는 주인이다.


  그는 시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철학을 좋아했던 이 군주가 후세에 남긴 두 마디의 경구에 대해 네더릴의 역사서는 단지 두 줄을 할애하고 있다.


    시간의 쓰임은 중요하다는 옳은 주장을 하였으나, 일국의 군주로서 가질 미덕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도덕과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지, 철학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다.


  모르엔다르 3세는 그다지 현군이라고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말년에 아들의 반란으로 어두컴컴한 탑에 유폐되어 굶어죽었다고 한다.

  수백 년이 지나서 네더릴이 추락할 때에 도시의 파편, 왕이 갇혔던 탑은 문-포레스트 서쪽으로 떨어졌다. 부서지고 황량해진 채로, 이제는 토끼나 사슴 같은 온순한 동물들의 서식처가 되어 덩그러니 놓여있다. 석양이 아름다운 날에 가보면 서쪽으로 머리를 누인 탑 끝에 걸린 해가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 간혹 회상한다.
나길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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