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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den verses; 공유하지 못하는 음악





01. -그들에 관한 이야기.



처음으로 숨겨진 구절을 발견했을 때 K는 자신의 귀를 믿지 않았다.

그 경험을 할 때 대부분의 경우 그는 혼자 있었고 잠이 막 들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꿈이거나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횟수를 더해 그런 현상을 경험할 때마다 K는 점점 그날의 피로에서 오는 그저 그런 착각현상이 아닌 어떠한 새로운 경험의 일종으로서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열 다섯번째로 그것이 찾아왔을 때 K는 몇 번이고 플레이어의 되감기 기능을 이용해 자신이 들었던 구간(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되찾아 들었다.

하지만 열이면 열 전부 헛수고였다.

이상한 것은, 그런 식으로 숨겨진 구간을 들으면 상식적으로 재생시간이 늘어나야 함이 분명한데도 음악의 재생 시간은 똑같았다. 그  구간을 들었다는 정확한 시간적인 데이터라도 있으면 모를까, 스스로의 착각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숨겨진 구간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도 언제나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짧고 강렬한 여운을 남기며.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더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정말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항상 이어폰을 귀에 달고 사는 학우를 통해 어찌어찌 흘러간 음악 동아리에서 만난 형우는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녹음 연주 재생기를 가지고 있었다.

-좋은 기계네요

-아 네

-처음보는 기종인데... 어디서 사셨어요

-....용산이요

-비쌌겠어요 비싸보여요

-.....

-무엇을 녹음하려고 사셨어요

-......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타인의 일에 확실히 선을 긋는 K가 집요하게 질문을 한건 이유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형우도 수시로 음악을 들으면서 구간반복 재생을 반복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영어학습 파일이라도 듣는가 했지만 이민 2세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형우의 기종은 그 당시에는 정말로 최신인데다 수요가 적고 홍보성조차 떨어져 생산 기피 대상의 한 종인 전문성을 띈 음향녹음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소리를 녹음하는 데에 아주 특화된 재생기였다.

K와 형우는 얼마 가지 않아 그 일에 대해 의기투합하는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만나면 그 경험에 대해서 의논하느라 밤을 지새곤 했다. 그리곤 둘다 아마추어인 것에 한계를 느끼며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곤 했다.

-결국, 그건 소리가 아닌 거 같아요.

-소리가 아니면...?

-귀로 음악을 듣고 있으니까 들린다고 착각을 하는 거에요.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건데.

-녹음할 수 있는 게 아니군요.

-그래요. 그래서 요즘 같은 세상에도 아무에게도 공유되지 않은 거에요.

-하긴 누군가 그걸 음원으로 떠서 인터넷에라도 올리면 분명 같은 경험자가 벌떼같이 몰려들었을테지요.

-하지만 여전히 그건 존재하고, 그것을 알고있는 누군가도 분명히 더 있어요. 소수일 테지만.

막막한 사막같은 데에서 만나 공감대를 형성한 데에 그치고 만 형우와 K에게 나현이 찾아온 것은 그 이후로 몇달 후였다.

나현은 남대문 전자상가에서 작은 코너에 악기와 음향기기를 수주해 팔고 있는 말하자면 잡상인이었다. 나현은 그들이 가게 앞에서 나누는 대화를 듣고 몰래 뒤를 밟고 말았다고 고백했다.
K와 형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현의 증언에 의하면 대화는 대충 이러했다.

-사실 그 소리같은 것이 녹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란 것을 저는 거의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런 비싼 기계를...?

-네. 그렇지만 단 한번이라도 그 음원을 떠서 녹음하고 싶다는 충동을 멈출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아아, 알것 같아요. 솔직히 한번만 듣고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음색들이지요.

-그래서 우리들도 아직까지 무언가 녹음할 수 있을만한 장비들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지 않겠어요.

K는 나현이 정말로 그 숨겨진 구절들을 말하는 것인지 저 정도의 대화만으로는 알수 없다고 판단해 나현의 연락처를 받아놓고 돌려보냈다.

형우는 그것들에 대해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으니 나현에게 연락을 하자고 했다.
K가 쥐어짜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냥 따기 힘든 음원에 대한 이야기일 뿐일수도 있잖아요. 그런 작은 상점을 하는 아가씨라면 장비를 하나라도 더 팔아보기 위해 따라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어요.

그러나 형우는 그 소리를 녹음하고 싶다는 열망이 더 강한지 나현에게 연락하기를 계속 고집했다.
K는 자신의 동의 없이 나현을 끌어들이면 더 이상은 형우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숨겨진 구절의 공감대에 첫번째로 금이갔다.

그런 와중 먼저 연락을 취한 건 나현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K와 형우가 만나서 주로 그 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카페에 불쑥 나타났다. K와 형우는 그날도 어김없이 그 숨겨진 구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또 뒤를 밟아서. 하지만

그 와중에 불쑥 나타난 나현을 형우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괜찮아요. 어서 앉아요.

K가 형우를 노려보자 형우가 말했다.

-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 판단하면 되잖아.

나현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처음으로 그 소리를 들은 것은 중학교 때였고 소리가 들리는 것이 신체리듬과 거의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거의 십여 년 간을 그 소리와 함께해 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소리를 악보로 받아적는 방법을 배워 수도없이 시도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인간의 손으로 옮겨진 그 소리는 어설프고, 둔탁했으며 그 빛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그 소리 때문에 힘들여 부모님을 졸라 늦은 나이에 음대로 전향을 했고 단지 그 소리 때문에 음향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가능한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만나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에 동의를 해온 것은 사람들로부터 망상벽이 심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아동복 디자이너 한사람 뿐인데다 이야기를 해보니 자신의 경험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음대를 졸업했지만 그 소리에 대한 갈증은 풀길이 없어 생각 끝에 모든 정상적인 길을 포기하고 남대문에 작은 악기상을 차렸다.
부모님으로부터는 그동안 투자했던 학비를 물거품으로 만들 생각이냐며 절연에 가까운 상태로 악화되었지만 철든 이후부터 인생을 함께했던 그 소리의 정체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K와 형우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형우가 입을 떼었다.

-우리 모임에 드디어 프로가 한명 들어오게 되었군요.

셋은 느닷없는 그 말에 한동안 멀뚱히 얼굴을 마주보다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숨겨진 구절의 초창기 멤버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멤버가 구성된 이후로도 별 다른 일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그들은 악기상에 모여 교대로 가게를 보며 새 멤버의 조우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와중 시간적으로 가장 나중에 그 소리를 접한 K의 감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모임도 거의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사실상 대부분 나현과 형우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한 데에 있었다.

나현-다시 돌이켜보면 그건 역시 소리라기 보다는 일종의 전파에 가깝지 않을까요? 음악을 들을 때 들리곤 하지만

형우-그럼 역시 음악은 그것을 느끼게 해주는 촉매제에 불과한 걸까요

나현-확실히 그냥 일상 생활을 하면서는 여간해서는 들리지 않으니까요.

K-하지만 그 전파같은 것 역시 음악이잖아요. 내 경우엔 듣고있는 음악의 단순한 변주에 지나지 않아요. 대부분. 특이할만한 점은 그 변주된 부분이 오리지널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우수하고 훨씬 완벽하다는 것.

나현-전... 처음에 그래서 일종의 마약같다고 생각했어요. 뇌내 마약같은 것.

K-중독되면 큰일이겠네요. 폐인이 되도 고칠 방법이 없잖아요. 머릿속을 들어내지 않는 한.

형우-저는 사실 들으면 들을 수록 그것이 걱정되서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동지들이 있다면 최소한 어떤 이유로 죽어가는 지는 알것 아니에요.

나현-그렇지만 그런 종류의 치명적인 독성은 없지 않나요. 물론 이제와서 어느 날 갑자기 그 소리를 못 듣게 되면 확실히 금단현상처럼 괴로울 것 같긴 하지만....

형우-어어, 그건 부모님과의 절연상태로까지 상황을 몰고온 장본인이 할 소리는 아닌거 같은데 안그래요..

나현- 하하...

K-............

형우와 나현의 사이에도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K는 이미 자신보다 소리에 대한 경험이 약간 더 긴 그들을 보면서 종종 소외감을 느끼곤 했다.

그는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애써 무시하면서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숨겨진 구절들도 무시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다 나현이 나타난 이후의 변화였다.

마침내 K가 모임에 더 이상 나가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나현과 형우가 동시에 거의 같은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챈 이후였다.

그런 현상을 먼저 느낀 것은 나현이었다.

나현은 항상 K보다는 형우와 대화하고 붙어 지냈으며 친밀함을 표시하는 데에도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사귀게 된 후 형우의 묘사에 의하면 둘이 같이 음악을 듣고 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평소에도 어느 한 쪽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아주 희미하게 그쪽이 느끼고 있는 숨겨진 구절들이 자신의 머릿속에도 겹쳐 울려온다는 것이다. 마치 미니멈 볼륨으로 깔리는 백뮤직처럼.

그 경험을 묘사하는 형우의 얼굴은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행복한 표정이었다.


먼저 나현을 받아들인 것이 형우라고는 해도 K가 처음에 느꼈던 그 간극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벌어지기만 했다.
나현과 형우가 본격적으로 사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무렵 K도 거의 숨겨진 구절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약혼식을 마지막으로 K는 자신이 더 이상 숨겨진 구절을 들을 수 없어진 것 같다고 고백하고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들이 파혼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K는 모임의 중단을 계기로 음악에 종사해오던 길을 접고 완전히 다른 직종에서 새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 미지의 소리들과 음악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이십 대에 향수를 날리며 형우와 나현의 관계에 대한 미묘한 강박관념이 사라지고 스스로 돌아볼 여유가 생길 무렵 그 소리는 다시 자연스럽게 K를 찾아왔다.

K는 자신의 정말로 그 소리를 좋아했는지 어땠는 지에 대한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다시 그 소리들을 천천히 음미하기 시작했다. K는 스스로 신경쓰인 존재가 형우였는지 나현이었는지 조차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나현로부터의 연락이 다시 온 것은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나현은 여전히 미혼상태였고 부모님과 절연 상태였으며 젊고 예뻤다. K는 다시 찾아온 나현이 반가운 건지 그 반대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녀가 K를 만나 처음으로 물어본 것은 의외로 형우의 소식이었다.

-형우의 소식은 알아요?

K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약혼했던 건 그쪽이잖아요.

K는 그렇게 말하고 남녀 관계가 깨지면 더이상 왕래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 대해 재삼 상기하고 어딘가 실수한 기분에 말을 정정했다.

-저는 약혼식 이후로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어찌 된 거죠.

나현은 K의 그 말을 듣자 다소간 안심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약혼한 이후로 형우는 변했고 그 소리에 대한 집착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결국 손찌검을 하는데 이르러 파혼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놀란 얼굴로 K가 자세한 사항을 물어보자 나현에 의하면 형우는 결국 중독자 레벨에 이르려 버렸던 것 같다는 것이다.

형우는 소리의 공유에 대해 처음엔 기뻐했지만 날이 갈수록 공유도에 대해 욕심을 냈으며 결국 자신의 공유도가 나현의 부분을 완전히 넘을 정도로 더 높기를 바랬다.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 나현의 소리의 질이나 내용이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더 좋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하며 자신의 음색이 더 우세해 질때까지 극심하게 공유하고 또 공유하기를 강요했다고 했다.

그 소리를 타인과 문자 그대로 직접 공유한 경험이 전무한 K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 정도라도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고 나현은 말하며 눈물을 그렁였다.
같은 숨겨진 구절의 소유자로서 K는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갔다.

형우의 뒤를 알아보는 것은 이제 K의 몫인 듯 했다.

약혼을 앞두고 형우는 언제나 자신이 이민 2세이기에 군대 문제와 더불어 국적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 종종 고민하곤 했다. 연락이 그렇게 단절된 후 굳이 찾지 않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이 전무한 걸로 미루어보아 미국 국적을 선택해 진작에 건너가 버렸다고 막연히 짐작해오던 K였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형우는 뜻밖에도 정신병원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어렵게 연을 만들어 면회를 간 K는 옛 친구의 변한 모습에 완전히 아연실색했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하며 자기파괴적인 성향과 마약중독자의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환자의 신경을 자극할 만한 과거의 일이나 화제는 되도록 삼가해 주세요. 그 이전에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면의 이야기지만...... 그 보다 환자 분과의 관계는?

-아, 저 옛친구 입니다. 대학교 시절의.

-그렇다면 전 약혼자인 나현에 대해서 알고 있겠군요? 가장 기피해야 할 화제입니다. 아시겠지요.

-네?

수용소 담당 의사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환자는 일종의 정신 착란 상태에 오랜 시간 빠져있었는데 그중 가장 확연한 부분이 자신에게는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어떤 소리가 들린다는 증세였다. 정신착란 1차 환자의 전형적인 증상였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너무나도 굳게 믿은 나머지 자신의 환상을 남에게도 강요하기에 이르렀고 그 최대 피해자가 바로 약혼자 나현이었다고 한다.
그는 착란 증세가 심각해질 수록 약혼자의 동의를 강요했고 그것이 잘 통하지 않을 때마다 그녀에게 상습적으로 손을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약혼자 나현에게 일종의 피해 의식을 느끼고 있었는데 자신을 그런 수렁에 빠지게 한 당사자가 바로 약혼자 나현이라는 주장이었다. 형우의 그러한 증상은 너무나 확고하고 현실과 구분이 완벽히 불가할 정도로 동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 치료로는 도저히 완치가 불가능한 중환자로 분류되어 수감되었다고 한다.

물론 거기까지 오는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나현의 직접 증언이다.

K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현과 만나기 전의 K는 어느 모로 보나 정상이었다. 나현과 사귈 당시의 형우를 돌이켜 보아도 전혀 어떠한 이상 증세를 보인 적이 없었다.
단지 그 소리를 듣는다는 이유로 그가 정신병 환자라면 K 자신도 정신병 환자여야만 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공유한 숨겨진 소리에 대한 기억은 완전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모임의 존재에 대해서 병원 관계자측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K는 나현이 분명 일부러 누락했으리라고 확신했다. 거기까지 듣고 K는 형우 본인과 직접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형우와 직접 이야기 해야 겠습니다. 형우를 만나게 해주세요.

-그건 곤란합니다만. 중환자의 경우 일반인의 면회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금지되어 있습니다.

-선생님, 제가 정신병자로 보이십니까?

-네?

-전 형우가 주장하는 바와 똑같은 경험의 공유자 입니다. 그의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제가 정신병자로 보이십니까.

의사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K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K는 다시 한번 힘주어 부탁했다.

-부탁입니다. 형우를 만나게 해주세요. 꼭 그와 직접 이야기를 해야 겠습니다.

의사는 체념한 듯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열쇠를 따주며 당부했다.

-누차 강조하지만 정신병 일급 환자입니다. 환자에게 자극이 될 만한 말과 행동은 삼가하도록 주의해 주세요.

그렇게 십 여년 만에 만난 형우는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K는 그런 모습이나마 다시 보니 옛 시간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누가 뭐래도 형우는 젊은 시절 같이 밤을 새워 우정을 나누던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게다가 그들이 공유한 기억은 누가 뭐래도 특별한 그들만의 특징이 있었다.

처음에는 K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던 형우였지만 K가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말을 걸자 형우도 조금 씩 옛 친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허나 K가 형우에게서 알아낸 것은 놀랍게도 나현이나 의사들의 증언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나, 나는 그 소리들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했어....

-그게 사실이야? 나현은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어.

-그 여자야. K. 네가 옳았어. 우린 그 여자를 좀 더 의심해야 마땅했어….

마치 몇년 만에 정상적인 대화를 하는 듯한 형우가 어렵게 풀어낸 이야기에 의하면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나현은 숨겨진 소리를 듣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종의 헌터라는 것이다.
악기상에서의 만남은 우연이었을 망정 그녀의 접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녀는 보다 오랜 소리경험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의 소유자였고 형우는 처음부터 그녀의 타겟이었다. 모임을 갈라놓는 것 역시 그녀의 목적의 일부였다. 타겟을 고립시키는 편이 더 행동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소리의 공유가 본격적인 헌팅의 시작이었다. 그녀가 보낸 소리를 타겟이 느끼게 되면 그녀는 마치 처음인 것 처럼 동등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현의 수법으로 따지고 보면 형우는 언제나 그 소리의 공유에 주도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타겟은 서서히 그녀가 보내는 소리에 미치고 중독되게 된다.

의심을 하기 시작했더라면 애초에 간단한 이야기 였다.
그러나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중독시키는 나현의 그 이상의 목적은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어느 날인가부터 이상을 눈치채고 그녀의 뒤를 캐려다 그만 역으로 당했다고 한다. 형우는 뒤늦게 K를 찾기 위해 수소문했지만 이미 심하게 나현의 영향권 하에 있던 지라 노력은 물거품이었다. 결국 그는 숨겨진 소리를 듣는 능력을 상실하고 금단 현상이 찾아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고 했다.

그런 채로 몇 년이지나 거의 포기하던 마당에 마침 K가 나타나 주었다는 것이다.

형우의 믿기힘든 고백이 끝나자 면회 시간은 이미 훌쩍 넘어 있었다.

그는 떠나는 K에게 자신을 이곳에서 빼내달라고 신신 당부했지만 고의성이 짙은 나현의 증언들은 시간이 지나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만큼 병원 측의 태도는 완고했다.

K는 다음을 기약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뗄 수 밖에 없었다.

-나현이다. 항상 나현이 나타나면 모든 것이 깨어지고 만다.

K는 잠시동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누구 말을 믿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파트 앞에 나현이 서 있었다. K는 나현의 얼굴을 보자 폐인이 되어버린 옛 친구가 오버랩 되어 울화가 치밀었다.

K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나현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형우를 만나고 왔죠?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요.

K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 말문이 막혔다.

-문 좀 열어요. 들어가도 되죠?

그리고 다음 순간 K는 자기 집 소파에 앉아있는 나현에게 차를 내오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현은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맛있네요 어떻게 끓였어요?

K는 탁자를 주먹으로 치며 일어나 물었다.

-형우에게 도데체 무슨 짓을 한거야

나현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눈을 똑바로 뜨고 K를 보았다. 표정에는 어떠한 미동 조차 없었다.

-형우는 중독자가 되고 말았어요.

-중독자는 너야!

-네. 형우의 경우.. 밸런스 조절에 실패했어요. 보통은 거기까지 보내지 않는데..

-뭐?

-보통은 그저 소리를 듣는 능력을 상실한 채 가벼운 후유증으로 끝나고 말아요. 형우는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도록 놔둔 게 실수였어요. 안됬죠. 착한 사람. 결혼도 정말로 하려고 했었어요. 나도... 나이가 드니 녹슬었나 봐요.

K는 나현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로 놔두면 형우도 아마 헌터가 되었을 거에요. 죽이지 않으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어요.. 형우는 저에게 정말로 잘 해줬어요. 하지만 전 같은 헌터가 또 하나 생기는 건 원하지 않았으니..

K는 천연덕스럽게 단지 자신의 권익을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고 고백하는 나현의 모습을 보고 울화가 치밀다 못해 허탈한 기분이었다.

K는 불현듯 이제와서 자신을 찾아온 나현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리고 곧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느닷없는 방문은 숨겨진 구절들이 다시 들리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나현은 K의 기분을 알아챘다 듯이 엷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형우 다음의 타겟은 당연하게도 K 당신이었어요.
간단할 줄 알았어요. 당신은 소리 경험이 비교적 짧은 편이고 그만큼 집착도 적었으니까.

K는 나현을 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현이 정색을 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의 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K는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그거 불행 중 다행인데

-그런 경우는 처음 이었어요.

나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난 당신이 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리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예요.

-그래서?

나현의 목소리는 좀 전과는 달리 일종의 다급함 마저 띄고 있었다.

-말해줘요. 어떻게 소리를 듣는 일을 중단할 수 있죠? 그리고 어떻게 다시 불러냈죠?

K는 놀란 얼굴로 나현을 다시 보았다. 나현의 표정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K는 자신이 옛날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그 정도의 일이었나 새삼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하게 옛날 일을 되돌아 볼 때가 아니었다.
친구를 폐인으로 만든 장본인이 지금 눈앞에 자신도 그렇게 만들려고 찾아와 앉아있다. 자칫하면 자신도 똑같은 구렁에 빠질수도 있었다.
K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허나 그렇다고 생각나지 않는 것이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리무중이었다. 더구나 좀 전까지는 의미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 이상 다른 대안이 K에게는 없었다.

-난... 몰라. 그런 방법 따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나현은 예상했다는 듯이 엷은 미소를 띄우며 천천히 일어났다.

-어차피 당신에게 선택권은 없어요. 당신은 이대로 나에게 소리를 빼앗기거나, 그 방법을 알려주거나 둘 중 하나죠.

K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서 그 소리를 머릿속에서 몰아냈는 지 생각해내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만약 이게 환타지 소설 속이라면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나현의 주변에 푸르스름한 섬광이 파지직 하고 타들어가는 게 보였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나현의 목소리가 단지 공기를 타고 조용히 울려왔을 뿐이다.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저항하려 하면 시간만 더 오래 걸릴 뿐이죠....

-이젠 날 협박하는 건가

나현은 다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협박할 필요가 있을까요..... 집중해서 눈을 감고 귀를 귀울여봐요.... 당신에게도 나눠 줄게요. 얼마나 멋진 경험인지를......

K는 나현이 아무런 위협 없이 조용하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데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의 원인을 알수 없는 공포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진작에 형우가 이런 식으로 당했으리라 어렵잖게 짐작이 갔다.
바싹 다가온 나현이 한쪽 팔을 잡자 K는 공포에 질렸지만 아무런 저항도 할수 없었다.
온 몸의 근육이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K는 눈의 흰 자위가 위로 가며 의식의 저편으로 부드럽게 침잠해가는 걸 느끼며 서서히 눈꺼풀을 감았다. 암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창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소파에 누워 잠이들어 있던 K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잠이 깼다.

그리고 K는 급히 자신이 어떤 식으로 잠이 들었는지 기억해내고 초조한 기색으로 소파에 똑바로 고쳐 앉았다.

하지만 머릿 속에 남아있을 법한 어떠한 새로운 멜로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완전히 제로였다.
오히려 원래 들려오던 K 자신의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유리 그릇들의 히스테리컬한 마찰음이 부엌에서 들려온 것도 바로 그 때 였다.

K가 퍼뜩 고개를 들자 부엌에 나현이 화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당신은 또 소리를 없앴어요.

K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나현은 K의 안도하는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아는 한 소리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도데체 정체가 뭐에요?

K는 나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침묵을 계속했다.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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