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세티는 이드를 뒤로하고 창가에서 물러 나왔다. 맵싸한 담배의 내음,  그리고 그 사이에 옅게 풍기는 민트향, 어울리지 않았던, 금속 빛의 눈.
두툼한 카펫이 깔린 호화스러운 비행선의  복도를 걸어간 세티는 어느  한 방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짙은 갈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어제 자신이  졸업생들의 이름이 적힌 파일을 들고 들어갔던, 바로 그 이드의 방,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어제의 어시스턴트가 아닌 그의  세큐리터. 습관적으로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세티는, 가만히 그 문을 두드렸다.
똑똑.

" 누구냐? "
" .. 세티입니다. "
" 들어와 "

조심스럽게 문을 밀자, 묵직한 나무로 된 문은 의외로 부드럽게 지잉 하는 낮은 진동음을 내며 열리었다. 그러자  세티의 눈앞에 파란 하늘과,  녹색의 바다, 그리고 그 앞에 선 흑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방의 한쪽 면이  완전히 투명한 창으로 변해 있었고, 이드는 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갈아입었는지 푸른빛의 슈트가 아닌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실내복차림이었다. 처음 보는 그의 약간은 풀어진 듯이 가벼워 보이는 실내복차림에 세티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 문을 닫고 허리를 굽혔다.

" 부르셨습니까 "
" - F타입 제복을 입지 않겠다고 했다면서? "

이드가 세티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녀가 입은  M타입 제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언제나의 무표정, 언제나의 무감정한 어조. 그래, 나의  주인은 이런 사람.

" ..그렇습니다 "
" 가까이 와라. "

의자에 앉은 이드가 세티에게로 손을 뻗었다. 이 방에서 그와 세티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10미터 가량의 거리와 그 사이의 커다란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테이블 뿐, 그 테이블 너머,  바다와 하늘이 보이는 전면창 앞에서  그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세티는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4년전에는- 세큐리터가 되기 전에는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언제나 멀리서.. 그에게서 떨어져서... 그의  세큐리터들에게 가로막혀서...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어이스턴트로는, 접근할 수 없이 까마득히 먼 사람. 하지만.. 지금, 세티는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한 발작, 두 발작, 두 사람의 거리는  점차 가까워져갔다. 마호가니 테이블을 돌아 그의 앞까지 다다르자 이드는 세티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쩌면 그 순간에 반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카나. 세큐리터가 지켜야 할 솔브의 알카나. 그런 생각에 세티가  반사적으로 그의 힘에 몸을 맡긴 사이 순식간에 이드와  세티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드는  일어선 채로 세티의 손목을 잡고 있었고, 세티는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있던 의자에 파묻히듯이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 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눈, 그때와 같은 새까만 ..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 눈이 세티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의 한쪽 손이 세티의 머리카락을 잡고, 반쯤 뒤로 쓰러진 세티의 상반신을 끌어당겨 그대로 키스했다.
하야린의 열에 들뜬 입술이 아니었다. 그의 서투른 키스가 아니었다.  분명 따스한 온기는 있지만 지금 자신의 입술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그때의 서투른 소년의 키스가 아닌, 능숙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이드의, 성인의 키스.
반항할 수 없다. 이드에게는, 그는 나의 주인이고-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며- 나에게 명령할 수 있는 자다. 그러니까..그러니까....

" -여전히 뻣뻣하군 "

꽤나 긴 키스가 끝나고 이드가 입술을 떼며 묘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머리칼을 잡고 있던 한 손으로는 세티의 어깨를 누르며 남은 손으로 목을 감싸고 있는 제복의 깃을 만지작거렸다. 무언가 조심스러우면서도,  지배적인.. 손의 움직임.

" 남자의 옷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도착하는 즉시 F타입  제복으로 바꿔 입도록. "
" ... 명령이십니까? "
" 그렇다. "
" ..... 알겠습니다. "

이드는 그 대답을 듣고서야 겨우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어깨에 얹혀져 있던 손이 사라진 것 뿐, 그대로 몸을  의자에 앉은 세티에게 굽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이나 감정이 자제된 새까만 눈동자.
빨려들 것만 같은... 암흑의 눈동자.

" .. 놀랍다. 이렇게까지 자라날 줄은, "

세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드의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 그의 낮은 저음을 듣고 있을 뿐.

" 4년 전에도. 그리고.. 너를 처음 맡게 된 6년  전에도, 이렇게까지 자라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네가 언젠가는 솔브의  일원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의 세큐리터로,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내게 오다니, 정말 기대 이상이다, 나는 아주 만족스럽다 세티."

그의 입술이 세티의 뺨에 잠시  머문다. 그의 길고 검은  생머리가 세티의 몸 위로 늘어진다.
그는 세티의 마스터, 솔브의 메이저 알카나,  에오더드의 마스터, 그리고 세티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후원자. 그러니까... 세티가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하는, 지킴을 받아야 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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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시간의 비행 후, 세큐리터들과 이드가 탄 비행선은 범아 연방 솔브 지국 빌딩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른 4명의 세큐리터들도 각자 자기의 주인들과 함께 헤어져갔다. 각자의 자리로...
..마지막까지 카율은 세티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 역시 어떤 알카나의 세큐리터로 가겠지. 그리고, 같이 세큐리터가 되었어야 할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그 친구의 졸업에 방해가 되었을 한 여자아이를, 원망하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 자존심만큼이나 중요했을 친.구. 였을 테니까. 나는, 그런 의미에 끼이고 싶지 않았다. 상처  입힌 건 나지만. 접근한 건  그들이다, 내가... 그렇게나 오지 말라고, 나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나  비행선에서 세단으로 갈아타고, 이드의 집으로 옮겨갈 때까지, 세티는 카율의 눈동자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 암갈색의 눈동자가 겹쳐 보이는 것 같은 그 원망의 눈동자를.
솔브 지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드의 집은 깔끔한 오피스텔이었다. 작업실과, 세큐리터들의 숙소와, 그리고 이드의 개인적인 공간까지 겸한. 그에게 어울리는, 세련된 마천루의 한 부분.
세티는 자신의 공간인 7평 남짓한 방의 침대에 놓여진 F타입 제복을 바라보았다. 같은 검은빛에 깔끔한 타입이지만  M타입에 있는 칼라대신 가슴께가 V자로 패어지고 바지대신 탄력 좋은 레깅스로 대체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제복, 명령이니까, 입어야겠지.
어시스턴트일 때는 그다지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자애들과 같은 여유 있는 트레이닝복과 어딜 봐도 고등학생용인 블레이저에 바지가 고작이었을 뿐. 그러나 옷을 갈아입고 보니 4년사이 자신의  몸은 눈에 뜨이게 변화해 있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생활로  몸에 딱 붙어 만들어진  근육과,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여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근육 위를 덮은 지방의 고운 선. 제복의 파인 옷자락으로는 그다지 크지 않은 가슴이 1/3쯤 드러나고  그 아래로 뻗어 내린 너무 가늘지 않고 선이 고운 다리에, 딱 달라붙은 레깅스,  그리고 벨트로 단단히 조인 허리.  모든 것이 4년전의 성징이  나타나지 않던 몸과는 확연히 틀렸다.
익숙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 모든 일은 세티가 바라던 일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익숙한 상황은 아니었다. 혼자뿐인  빈 방, 여자의 몸, 여자의  제복, 그리고 마스터인 이드, 선배인 에오더드, 모든 것은 그녀를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방향인지 현실은 아직  그녀에게 판단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녀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마치 실 끝에 매어 달린 인형을 움직이는  사람을, 인형은 인식하지 못하듯이.  연해 몰아붙이고 그리고 과거를 잃어버리도록...
입학할 때, 나는 과거를 지웠었다. 그리고 졸업을 하여 세큐리터의  이름을 받고나서는... 학교를 잊도록... 상황이 움직여간다.

" 보기 좋군 역시 "

에오더드 특유의 비꼬는 듯한 목소리, 생각에  잠겨있던 세티는 자신도 모르게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제복을 걸친 자신의 몸을 움츠리며 그  목소리가 난 뒤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사이 와 있었는지,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문가에 몸을 기대고 하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에오가 또 그 스캔하는  듯한 시선으로 세티의 제복차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

다행히도 자신의 목소리만은 평소의 그 무감정함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세티는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에오는 빙긋 웃으며  물고 있던 담배를 손끝으로 비벼 끈 다음 세티의 방구석에 놓인 더스트 슈트에 던져 넣고, 세티에게 조그마한 물체를 던져주었다 손가락 두 마디  만한, 광택을 없앤 둥글 납작한 기계.

" 마스터나 다른 멤버들 간의 통신장비다, "

그것을 받아든 세티가 잠시 가만히  있자 에오는 또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녀에게 다가와 왼쪽 어깨에 손을 짚은 뒤 그녀의 손에서 그 기계를 가로채어들었다.

" 써 본 적은 없나보군, 이건 이쪽 어깨견장에 이런 식으로 끼우는 거다. "

에오는 그 조그만 기계를 제복의 왼쪽 어깨에 달린 견장에 능숙하게  끼우고 몇 가지 세팅을 손보더니 그대로 한  손으로 세티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이드 때와 마찬가지로 세티가 무어라 반항이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에오는 견장을 손보기 위해 세티의 어깨 위를 감싸듯이 숙인 자세 그대로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살짝 핥았다.
선뜩한 감촉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자 세티는 자신도 모르게 에오의 손을 뿌리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 무슨 짓이십니까 선배님. "
" .. 뭐 오늘밤이면 알게 될 거다 "

에오는 여전히 웃으면서 알 수 없는 그 한마디만을  던질 뿐, 세티의 뿌리침이나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안쪽 포켓에서 또 새로운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물고 불을 당길 뿐.

" ... 저는 마스터의 것입니다. "
" 알고 있어 "

빙긋, 그의 입가에 맺히는 기묘한 미소, 그리고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담배연기. 그 맵싸한 내음. 그리고... 어울리지 않은 옅은 민트향.

" 짐 정리나 끝내고 있어라. 정리할 것도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 통신장비의 왼쪽버튼을 누르면 이 건물 지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저녁식사는  20시, 그 이후에 간단한 브리핑이 있을 거다. "
" 알겠습니다. "
" 그럼- "

에오는 담배의 내음만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남겨진 세티는 그의 타액과 담배의 내음이 아직 남아있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쓰윽 훔치고, 얼마 안돼는 짐을 정리했다. 침대와 테이블, 작은 서랍장 그리고 간단한 단말기가  다인 썰렁한 방. 세티가 통신장비의 왼쪽버튼을 누르자 지잉하고 3D의 지도가 그녀의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7층 건물의 여러 가지 통로와, 각 방의 위치, 이드의 이동경로, 그리고 그녀가 커버해야 할 구역. 세티의 머릿속으로 정리되어져 들어오는 정보들은 조금  전 그녀가 에오더드에게 당했던 불유쾌하고 쓸데없는 기억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로 들어왔다. 그리고 하나씩 차근차근, 숙달된 판단력으로 단련된 세티의 기억 속으로 정리되어 담겼다.
익숙해 져야 한다 이곳이 이제 세티 루릭의 자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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