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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높은 성에서(4) - 요약

2005.09.02 22:5109.02

(4)


*

우물 밑바닥에서, 가만히 조그만 밤을 쳐다보고 있었다.
구름은 불타며 흘러가고 있었다. 지상에서 복사되는 열들이 구름의 층에
부딛쳐 흩어지고, 반사되고, 식어가면서 이루어내는 흔적들. 느릿하게
이어지다가 점점 사라져버리던 불길. 강물에 떠내려가는 섬처럼,
단단하고도 고독한 감정들. 나는 문득 일어섰고, 손톱을 세우고,
우물의 돌벽에 박아넣었다. 충분한 강도를 유지하는 재질의 암석들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반대쪽 손으로 벽을 움켜쥐었다.
돌가루와 파편들이 흘러내렸다.
그런 식으로 벽을 타고 우물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

나는 그녀에게 사귀자고 말했다. 이미 그녀는 내 품에 안겨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게 부정이 아니란 것을
알수 있었다.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새삼스레,
그녀가 못생겼다고 느꼈다.




*

"전 아무래도 노골적이고도 즉각적인 칭찬을 바라는 것 같아요."

내 말에 상담자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각정보의 모드를 적외선에서 인간들의 영역과 근사한 파장으로
바꿔주는 렌즈를 착용하고 있었다. 직접 파장대를 골라내는 바이오피드백
보다 훨씬 편하다. 인간의 가시영역으로 파악되는 상담자는 40대 후반의
인자하지만,어느정도 우울한 미소를 지닌 여자였다.

"늘, 뻔하니 자기 존중감, 인정의 문제..이런 것들이겠죠"
다시 약간의 냉소적인 뉘앙스를 나는 덧붙였다.

"항상 그렇듯 자신의 감정에 분석하고 요약하지 않으면 안되는군요?"
상담자가 다시 한번 지적했다.




*

불사란 웃기는 개념이다. 우리는 불사에 걸맞는 인내심을 소유하지 못한 종이다.
우리는 순간에 메여 있는 종이다. 아니, 추동이 좀더 간결해진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변하는 것은 없다. 흡혈귀가 되었을 때의 성격은 인간일 때의 기본적
기질, 성향을 바탕으로 조합할 뿐이다. 물론 정교한 조작을 통하면 전혀
반대의 효과를 낼 수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건 일종의 트릭일뿐.
예를들어, 작은 어머니의 애정은 다음과 같은 수순으로 발현된다.
혐오 - 그리고 그런 감정에 대한 '억제'와 '전환'을 명하는 작은 아버지의
<명령> - 혼란 - 그 혼란된 감정에 첨가되도록 심어진 몇 가지 단서들 -
<오해>체계의 작동 - 사랑.

파트너에 대한 선호도 그렇다. 흡혈귀에게 성교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른바 전설상의 '최초의 흡혈귀'가 아닌이상, 일반적인 흡혈귀들의
생식세포는 인간의 유전체계를 기반하고 있다. 흡혈귀끼리든,
인간끼리든, 일반적인 성행위를 통해서 태어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다. 다만 바이러스성을 지닌 흡혈귀의 피가 곧 태아의 피를
점령하고 그 결과 유사흡혈귀가 탄생할 뿐이다.
그래서 '영혼'이란 개념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이런 유사흡혈귀와
정상적인 파트너십으로 탄생한 흡혈귀 사이에 일종의 우월-열등
감정층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꼭 파트너가 이성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건 인간일 때의 성적 선호도일 뿐이다. 어느 고명하신
흡혈귀께서는 인간보다 더 본능에 솔직하고 과감한 존재라며
그 생명력과 삶에 방식에 대하여 자화자찬하기도 했지만,
한 개쳬의 개별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기억이라고
할 때, 흡혈귀의 '기억'은 단지 인간의 '기억'의 연장과 변형일
뿐이다.

그래서, 혹자는 논증한다. 흡혈귀를 흡혈귀 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피라고.

끈적거리고 선명하게 타오르는 피에 대한 욕구.





*

그녀의 입술은 축축했다. 더듬더듬 자신의 혀를 내 입속에 넣었다.
그녀의 입에선 양파냄새가 났다. 나는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어느정도 어루만지다가 가슴으로 오른손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깜짝놀라며 눈을 뜨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 처음인데.."

괜찮아. 나는 일단 손놀림을 멈췄다. 이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 몇번 경험이 쌓이면 이런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

옛사랑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실일까. 지나고 나서의 감정들이다. 늘 현재의 상태에 따라
기억은 변한다. 이유도 변한다. 내가 그녀들에게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피였을까. 성적공상이었을까. 정서적 안정이었을까.
아니 도대체, 그런 것들을 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이런 문제는 깊이 파고들면 궤변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나의 말에 상담자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사실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죠. 음..제 생각에는요.
다만 이성에게 바라는 것은 그 중 몇가지일 뿐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전인격적으로 상대를 원해야 할 것 같다고 느껴진단 말이에요.
그 부담감이란.

약간 모호한 눈을 하고는 상담자가 다시 물었다.
그녀의 눈에 깃든 감정은 무엇인가? 질책인가? 여전히 어리다고,
나를 꾸짖고 있는걸까? 아니면 무엇. 아니 이 감정은 단지 내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의 반영일뿐인가. 이른바 투사라고.

"그야, 그런 식으로 깊이 생각하는 척하면 멋있게 보일까봐요"
약간 방어적이 되어서 비아냥거리듯 말하고 있는 나.

"이해할 수 없네요. 멋있게 보이다니요?"

"아..반어적인 수사법이이요"
급히 나는 덧붙였다.

"음..역시..전 제가 진지하다는 사실. 혹은 자의식이 과잉이라는 것,
그게 내 행동이 기본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가정하고 있다는데에서,
그리고 그런 자신이 왠지 나르시스트인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부끄러워하는...아 그게 ..왜이리 말을 전달하기가 힘들죠.
그러니까.."

제길. 나르시즘말야. 자기중심성. 그런 면이 깃들수 밖에 없는
감정과 수사법에 부끄러워한다고.


*

세상의 러브 스토리는 어떻게, 왜 사랑의 감정이 발생했는지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
단지 그 감정이 발생하기전의 상태와 그 후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기 전의 등장인물들이 있고, 사랑하고 나서 벌어지는 등장인물들의 독백과 같은 감정과
오해에 기반한 대화와 작가와 독자의 취향에 따른 결말이 있을 뿐이다.

도대체 자기변명적 해석 이외에, 감정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가?
왜 그애를 좋아하는거지?
아냐, 난 그애를 사랑해.
친구의 대답에 난 콧웃음을 쳤다. 그래, 그런 구분을 둔다면 그렇다고 해.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지. 너. 너의 감정에서 상대에서 비롯된 부분이 정확히
뭐지. 혼자 부풀린거 말고말야.



*

그녀에게 끌린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예뻤다. 나에게 웃어줬다.
그리고 나는 피를 원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간단하지가 않았다. 나는 흡혈귀. 초대를 받지 못하면
피를 빨수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존재. 나를 초대하고 나를 이해시키고
나를 표현하기 위해 내가 했던 많은 노력들은 그녀에게서 나를 멀어지게
했을 뿐이다.

"역시 내가 흡혈귀라는 것을 고백하지 말았어야 할까?"

"...."

"내가 불사라는 것을 자랑하려고 그녀 앞에서 내 팔을 잘라보인게
결정적이었던 걸까?"

"아니면, 내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한다고, 그녀의 피가 순환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의 열패턴이 얼마나 독특한지
말해서였을까?"

"...."

"아니면, 나는 밤에만 돌아다닐 수 있는 존재여서, 서로
만날 시간이 별로 없어서? 난 그애 때문에 낮에도 깨어있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래서 불면증까지 걸렸다고"

머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넌 쓸모가 없구나.
사촌누나를 기다리며, 그 남자의 머리에게 하소연을 해 보았지만
독백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의 얘기는 지루하고 서투른 감정과 행동들에 대한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제가 애인이 있어서, 우유부단하게 이러고 있는게 아니에요.
저도 제 감정에 솔직해야 할때는 솔직해요"

'그러면 왜, 그때는 왜, 나한테 왜 그런식으로?'

나는 그녀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유치한 대사지만,
그녀에게 말했다. 상관없어. 그냥,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준 것에
대해, 그냥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냥 한번만 안아보면 안될까.

나는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몸과, 심장소리를 기억한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녀는 그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서있기만 했다.
거기에 채색되는 내 감정은 항상 다르다. 서글픔, 안도, 분노, 수치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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