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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죽저] 1. 非 (03)

2003.11.05 00:0411.05

1. 非

 

1. (계속)


중기 시대에는 인간족 이외에는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종족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사람은 모조리 인간이었으며, 다른 종족들은 동물 취급을 받으며 하위의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물론 중기 시대의 말미로 갈 수록 인간족의 범위는 상당히 넓어졌다고 한다. 중기 시대의 반 이상,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자들과, 유채색의 피부색을 띈 자들은 편파적이며 편견어린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유일한 ‘사람’으로써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던, 나와 같이 생긴 '인간'족은, 그러나 후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보편적이며 유일한 '사람'의 위치를 잃고는 다종다양한 '사람' 속의 하나의 종(種)으로서 격하되었다.

사실 격하라는 표현이 적합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어떤 책을 읽다보면 그런 차별적인 표현과 함께 비분강개한 어투로, '오호라, 순혈 인간의, 순혈 인간을 위한 시대는 언제나 도래하는가..'라고 울부짖는 학자들이 아직도 상당수 있기도 하며, 그들은 메이지 양 같은 털복숭이족에 대한 엄청난 우월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자들이 격하라는 표현을 즐기고 있고, 또 그런 자들이 아직도 대륙에 꽤 많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 1차 대륙회의에서 결정되었던 '만인평등의 사상 선언문'을 휴지조각처럼 여기는 자들 중에는, 멀게는 잭슨빌 장군의 친구였으나 '순수의 시대'라는 글로써 잭슨빌 장군의 견해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밝혔던 오드리 J. 심프슨부터 근간에는 유명한 사회역사문화비평철학자라고 하는 주 W. 지브앙이 있다.

많은 생물공학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처럼, 어떻게 털복숭이족이 이 땅에서 사람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되었을까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가설이 존재하지만, 그런 추론 이전에 내 가장 친한 벗인 소울 메이지 양은 분명히 털복숭이족이며, 그녀의 아버지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 그리고 소시적 마을의 이러저러한 사건에 대부분 연루되어서 말썽꾸러기로써의 혁혁한 성과를 가지고 있는 마을 청년이라면 누구나 다 두려워하는 - 우리 마을의 유일한 보안관이고, 그들은 나의 생각과 행동거지와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친구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기시대적인 견해에 대해서 어이없어할 것이 분명하며, 그런 견해를 가진 사람을 싫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유? 나는 그들이 <그냥> 싫다.

내 하숙집 문앞에 서 있는 그 여자는 바로 민둥족이었다. - 민둥족이라는 족명은 털복숭이 족의 무수한 털에서 착안하여 잭슨빌이 처음으로 반차별적인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혹자는 잭슨빌 장군이 민둥머리인 그 자신의 머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그것도 평균적인 인간의 미적 기준에서는 상당히 예쁜. 4큐빗 정도인 나의 키에 조금 못 미치는 듯한 키에, 헐렁한 하얀 티에 헐렁한 하얀 바지를 입고 작은 흰색운동화에 흰색 양말을 신은 흰 머리의 할머니.. 아니아니 흰 머리끈을 한 검은머리의 여자였다.

[뭡니까?]

으음. 그런데 내 입에서는 낮선 사람에 대한 첫인상의 호감과는 배치되는 퉁명스러운 인삿말이 툭 튀어나왔다.

[당신이 아이스 C. 잭슨빌 씨고, 당신은 소울 메이지 씨로군요.]

낮선 사람은 살짝 웃으면서 우리 둘의 정체를 폭로했다. 으음. 이건 국가적인 기밀인데... 도대체 저 여자가 어떻게 극비사항까지 알고 있는 것이지?

[그건 제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군요.]

호감가는 인상과는 달리, 내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바로 저 여자의 무례함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서서...

[문은 내가 들어오면서 열어두었으르르.]

흠. 흠. 아무튼. 들어왔으면 자기 소개부터 해야지, 왜 우리 이름부터 아는 척을 하고 그러냔 말야!

[아.. 네.. 실례를 저질렀군요. 제 소개를 먼저 했어야하는데... 그만 반가운 마음에... 저는 한 주 전에 서쪽 절벽 근처로 이사 온 노멀 A. 바이러에요. 문이 열려 있길래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것이었는데, 그게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세요.]

어흠. 저렇게 바로 사과를 하면서 공손한 태도를 보인다면, 숙녀에게 대한 예를 갖춰야지.

[커흠. 아닙니다. 오히려 초면에 재가 좀 퉁명스러웠습니다. 성함이...?]

[네, 바이러에요. 노멀 가문의 A. 바이러라고 합니다.]



나는 그녀와 메이지 양을 번갈아 보았다. 나의 베이커리 B221 하숙집 2층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거실과 부엌을 겸하여 쓰는 홀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홀에 가구라고는 오로지 식탁 하나 밖에는 없는지라 광활하다는 표현보다는 황량하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듯한 곳이었다. 그 곳에 하염없이 손님을 세워둘 수 없는지라 나는 노멀 양과 메이지 양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물론 메이지 양은 손님이 아니지만 그녀만 세워둘수는 없잖은가? 두 사람에게 식탁의 자리를 권하면서 나는 부엌 옆으로 열려져있는 창문을 서둘러 닫고는 차를 대접하기 위해서 아궁이를 덥히기 시작하였다.

타닥! 탁! 타타탁!

아궁이 속에서 들리는 불꽃 튀는 소리가 넓은 홀을 웅성였다. 서서히 주전자에서 하나 둘 씩 기포포가 올라오고 있었고, 두 손을 맞잡고 차분하게 앉아 있는 노멀 양과 양손에 바구니와 검붉게 채색된 식칼을 들고서는 쩔쩔매고 있는 메이지 양 사이에서 묘한 동질의 감정을 느끼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덜그럭. 채애앵.

나는 깜짝 놀라서 주전자를 흠칫거렸고, 메이지 양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식칼을 마룻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노멀 양은 자신의 한 마디가 두 사람의 행동에 일탈을 불러온 것에 대해서 기뻐해야할지 안타까와해야할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노멀 양은 안타까와하기로 했나보다.

[너무 말들이 없으셔서요. 잭슨빌 씨와 함께 있으면 결코 적적하지는 않을거라고 제퍼슨 씨가 말씀하시던데요. 꼭 그렇지는 않네요. 후훗.]

제퍼슨 씨?

[제 형을 만나보셨나요?]

몸이 경직되었다.

[사실 이 마을을 찾아오게 된 것도, 형 되시는 분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지요.]

쯧. 낮선 사람의 입에서 친숙하게 들려오는 형의 이름이라니.

[물론, 이 곳에 정착할 생각으로 아주 옮겨오긴 했지만, 굳이 이 곳인 이유는 제퍼슨 씨가 이 곳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요.]

아이스 C. 제퍼슨. 온 대륙에 명성이 짜르르한 탐자.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감성, 불타는 야성과 섬뜻한 이성>이라는 어이없는 사건일지의 주인공. 그리고 나는 그런 형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이비 탐자.

[네. 그러셨군요. 역시 형의 명성은... 이미 온 대륙의 하늘을 찔러대다가 핏빛 상채기를 주었지요.]

[역시, 아직도 형에 대한 열등의식과 상처로 자신을 채우고 있구르르.]

엥. 메이지 양, 거기서 네가 왜 끼어드냐, 끼어들긴!

스윽.

뭐 끼어들면 어떠냐. 니가 좋다면 상관없어, 메이지 양. 그러니 카... 칼은 좀 놓지 그래...

[형님 되시는 분도 여기 계신 분과 같은 말을 하시더군요.]

꼴꼴꼴꼴.

나는 치즈가루를 담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쳇. 그렇겠죠. 제 형되는 그 양반은 온 대륙의 사건 사고를 하나하나 다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지고 계시니, 세상에 저같은 사람의 마음 뿐만 아니라, 어느것인들 모르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으시더군요.]

쩔그렁. 나는 두 사람의 앞에 치즈차를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형의 이름만 들으면, 그 잘난척에 신물이 올라오고 손이 떨렸다.

[분명히 형님께서는 제가 지고 있는 짐을 덜어내시지는 못하셨습니다.]

노멀 양은 찻잔을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싸안으며 말했다.

짐, 이라고 말했다.

짐?

[오히려 형님께서는 잭슨빌 씨 당신을 찾아가보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식탁의 좁은 면으로 의자를 놓고는 의자 등받이에 양팔을 어긋 올려놓은 자세로 털석 주저 앉았다.

[저를요?]

[네, 형님께서는 제가 지고 있는 짐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잡지 못하겠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잭슨빌씨야말로 제 짐을 해결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오오, 형이? 이제서야 형이 사람이 되어가나보군. 동생을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훌륭한 심성을 얻다니.

[제가 진 짐은 잭슨빌씨같이 좌충우돌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그렇지. 쳇, 나 듣기 좋은 말을 했을리가 없지. 나를 인정해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야. 분명히 노멀 양의 사건이 귀찮은 짐일 것이라고 생각했나보군. 짐... 짐이라... 그나저나 상당히 상징적인 표현인걸? 사건도 아니고 문제도 아닌, 짐이라...

[사실 들어보지도 못한 잭슨빌 씨를 찾아와야할지 많이 고민했었는데, 어제 다시 제퍼슨 씨를 찾아갔더니, 밑져야 본전이라고 한 번 가보라고 하시더..]

[우어억, 놔 메이지 양, 내 오늘 형이라는 작자의 심장을 친견할테다!]

[참으르르, 잭슨빌. 참을 페이션트가 세 음절이면 죽음 저편에서도 참을 수 있다고 했으르르.]

[잭슨빌 씨, 잭슨빌 씨, 제가 무슨 말 실수를 했나요? 왜 이렇게 게거품을 물고 이러시지? 잭슨빌 씨...]

...... 그래 참자. 참아. 밑지면 손해라는 것을, 아니아니 밑지는게 남는 장사라는 것을 보여주지.

[..... 네, 밑지면 손해, 아니아니, 노멀 양, 여기 베이커리 가 221번지 2층의 아이스 C. 잭슨빌은 입이나 명성으로 사건을 해결하지 않고, 정열과 투지로 사건을 해결하니까 한 번 맡겨 보시죠. 그럼 당신의 문제, 아니 당신이 이고 있는 짐을 제게 내려보시죠.]

[내릴 수 없습니다.]

[흠...... 네...... 에......에?]

[내릴 수 없는 짐, 아니 내릴 수 있는지도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짐, 어쩌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짐. 이것을 찾아주세요.]


혼란, 매혹, 감금, 은닉, 그리고 낮 다운 밤인 꿈, 어둠의 다섯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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