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최도웅의 말에 난 달력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이내 난 뒤통수를 강하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정후정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분명 그곳에 도미와 범인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도미는 정후정의 집 앞 모퉁이에서 자신이 살던 집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도미를 손짓해 불렀다. 도미는 순순히 다가왔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잔뜩 주눅든 얼굴로 힘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 3보 앞에 멈춰 섰다.
"이게 너와 나의 평형점인가?"
도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번보다 가까워졌군."
도미는 대답이 없었다.
"정태영이 너한테 지켜달라고 했지?"
도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떨군 시선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곧장 정후정의 집, 아니 정태영의 집으로 들어갔다.
정태영은 태연히 나를 맞았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집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돼있었고 인테리어까지 모두 바뀌어있었다. 병원에 일주일을 있으면서 그는 많은 일을 한 듯했다.
"무슨 일이시죠?"
"범인을 잡으러 왔습니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부러뜨리고 싶은 화를 참으며 말했다.
그러나 정태영은 살짝 취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설마, 또 보안시스템이 먹통이 됐나요? 키키키. ……아니면 뭔가 오해를 하셨나보군요. 지금 이 집엔 저밖에 없는데."
"그거 잘 됐군요. 난 또 당신이 누군가를 위협해 도미가 말을 듣게 하지나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허, 그래요. 근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실까."
정태영은 마약에라도 취한 듯 소파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당신을 체포하겠다는 뜻이오."
"오, 이런. 난 정말 불쌍해. 아버지 잃고, 어머니까지 잃었는데 감옥까지 가야하다니."
정태영은 빈정거리며 말했다.
나는 화가 났다.
"당신은 변지영과 곽태만, 변지영과 최도웅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었어. 그리고 변지영이 곽태만을 시켜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 것도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막지 않았어. 당신에게 한 푼도 안 주려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아버지가 죽게 나뒀어."
"헛소리."
정태영은 여전히 고개를 젖히고 히죽거리며 말했다.
"헛소리? 안 그럴걸. 잘 들어. 당신은 곽태만과 강성진이 집을 나가자 변지영의 방으로 가 변지영의 목을 찔렀지. 하지만, 이미 변지영은 도미를 부른 뒤였지. 그리고 도미가 내려와 당신을 막고 변지영을 구하려고 했어. 그때 당신은 기발한 생각을 했어. 자해하면서 협박을 한 거지. 어제 곽태만을 죽였을 때처럼 말이야. 도미는 자해하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 다가갔어.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되며, 또한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해를 당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로봇 1원칙 때문이었지. 그러자 당신은 당신 방으로 도망쳤어.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지. 변지영이 피 흘리고 죽을 시간 말이야. 그리고 또다시 로봇 1원칙을 교묘하게 이용했어. 당신은 도미에게 지켜달라고 말했지. 아마 당신은 잡히면 사형을 당할 거라고 했겠지. 그리고 친족살해는 최고 사형이기도 해. 그래서 도미는 당신이 죽는 걸 막기 위해서 진술을 거부한 거야. 도미는 사형이 죄에 대한 처벌이라기보다 사람이 죽는다는데 더 비중을 두고 판단한 거지."
"흥, 그 걸로는 내 죄를 입증하진 못 해. 증거도 없고."
"그럼 2086년 14번째 생일 얘기 좀 해볼까?"
나의 말에 정태영은 어금니를 힘껏 깨물더니 잠시 비죽거리고 말했다.
"젠장, 2086년은 내 생애 최악의 생일이었는데……."
"오히려 최고의 생일이었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정태영은 마치 자신만이 정답을 알고 있는 수수께끼를 내며 맞춰볼 테면 맞춰보라는 듯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의 생일은 2072년 음력 5월 1일이지. 하지만, 출생신고는 양력으로 되어있더군. 양력으로는 6월 16일. 그리고 당신의 그 빌어먹을 14번째 생일은 2086년 6월 11일, 변지영 씨가 당신 아버지 정후정 씨와 혼인신고를 한 날은 다음날인 6월 12일. 그래서 당신은 변지영의 친양자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어. 그리고 변지영씨는 2087년 6월 12일 당신을 친양자로 입적했더군. 더 얘기해야하나?"
정태영이 피식 웃더니 잠시 입술을 비죽거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아버지는 내 생일 선물이라고 근사한 양복을 사주셨지. 근데 그게 아버지 결혼식 들러리 복일 줄이야, 빌어먹을. ……그러면서 내게 새어머니를 선물이라면서 소개시켜주더군. 내 기분이 얼마나 더러웠을지 생각해봐요. ……그리고 다음날, 혼인신고를 하고 9박 10일짜리 세계일주 신혼여행을 떠났죠. 난 혼자 집을 지켰소. 그리고 툭하면 둘은 여행을 다녔지. 의사가 잦은 여행이 심장에 좋지 않다고까지 했는데, ……그 여자는 처음부터 아버지가 죽어 나자빠지길 바라고 결혼한 거요. 나한텐 눈길 한 번 안 줬지. ……그랬던 여자가 갑자기 결혼 1주년 선물이라면서 아버지에게 절 친양자로 입양하겠다고 하더군. 쇼였지. 그 해 내 15번째 생일은 열흘전인 6월 1일이었으니까. 그 여자도 만 15세가 넘으면 친양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내 15번째 생일이 지났으니 신청해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고 한 쇼였지. 하지만, 멍청한 그 여자는 내 생일이 음력이라는 걸 몰랐던 거지. 그만큼 내게 관심도 없었던 거고."
정태영은 갑자기 키득거리며 웃었다.
"4일이 남아서 다행히 친양자 신청이 된다는 법원 직원의 말에 그 여자가 어찌나 놀라던지. 당신이 봤으면 내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텐데. 크크크. …… 모든 건 그 여자가 자초한 거요. 그 뒤로 그 여자는 곽태만을 시켜서 내게 마약이며 도박이며 계집질까지 모든 걸 가르쳤지. 원래 유혹은 달콤한 거 아니요. ……그 덕에 아버지는 날 싫어하셨고, 뭐 원래 자식들에게 정이 없으셨지만."
"그래서 아버지가 죽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나?"
"친양자가 뭔지 몰랐을 땐, 아버지가 죽지 않게 텔로미어 시술을 계속 받게 했지. 삶이 지루하다고 죽고 싶어했을 때도 난 마치 뒤늦게 철든 효자처럼 계속 주사를 놨어. 물론 아버지는 그걸 저주했지만,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그때까진. 그러다 최도웅이 그 여자한테 유언장 얘길 하는 걸 들었지. 사실 그 여자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다 지쳐서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아버지 고문 변호사를 유혹한 거지. 이혼 소송에서 유리하도록 말이지. 그런데 최도웅이 유언장 내용을 흘리더군. 죽으면 전재산이 당신 몫인데 왜 이혼을 하냐고. 그리고 뻐기면서 말하더군. 자기처럼 훌륭한 변호사를 둔 아버지를 상태로 이혼하면 땡전 한 푼 못 받을 거라고. 그러면서 내 아버지를 독한 늙은이라고 욕했어요, 그 뒤로 그 여자는 전재산이 자기 몫이라는 얘기에 혹하더니 이혼할 마음을 바꾸고 아버지를 죽일 생각을 하더군. 그때 난 아버지 재산을 한 푼이라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알아보다가 친양자가 뭔지 알게 됐지. 어렸을 땐 친양자가 뭔지도 몰랐는데……, 그때부터 나도 아버지가 죽는 게 낫더군. 아버지의 유산을 그 여자가 다 물려받아도, 그 여자가 죽으면 다시 그 여자의 재산을 내가 다 물려받을 수 있으니까. ……모두 아버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요. 또 죽길 원하기도 했고. 그래서 난 변지영이 아버지를 죽일 때 가만히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곽태만과 강성진이 집을 나가자 변지영을 죽이려고 했고."
"동시에 죽으면 곤란하니까, 구급차가 올 때까지만 목숨이 붙어있길 기도했지."
기도라는 말에 목구멍에서 욕지거리가 울컥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흥, ……이제 어쩔 거요? 날 체포할거요? 이런 정황만으론 법정에서 날 이길 수 없어."
"밖에 증인이 있지."
나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
"도미? 흥, 과연 도미가 제 1원칙을 깨고 증언할 수 있을까? 차라리 교황청에서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하길 바라는 게 나을 거요."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도미는 법을 지키기 보다 저 빌어먹을 인간을 보호하려들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도미가 충전할 때 US사에 요청해 네트워크로 증언하도록 명령할 거요."
나는 자신 있게 말했지만 정태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로봇공학과 로봇심리학에 대해 배울 만큼 배웠죠. 로봇이 명령에 복종하는 건 제 2원칙 때문이죠. 하지만, 제 2원칙도 1원칙에 어긋나면 수행하지 않아요. 아무리 US사의 명령이라고 해도 도미는 인간을 지켜야 한다는 1원칙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면 수행하지 않죠. 결국, 도미는 영원히 내 주위를 맴돌 겁니다. 나를 지키는 제 1원칙과 내가 죽일 또 다른 누군가를 지키는 제 1원칙 사이에서 영원히 내 주위를 맴돌겠죠."
"영원이라는 건 없소."
"물론 그렇죠. 하지만, 도미가 당신보단 오래 버틸 겁니다."

나는 정태영의 집을 나서며 여전히 골목 모퉁이에서 집 안을 살피고 있는 도미를 바라보았다. 움찔하며 나의 눈을 피하는 도미를 보자, 나는 문득 그리스 신화 속, 아스트라이아라는 여신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신들이 지배하던 황금시대에는 인간들에게 정의와 덕을 널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자 황금시대가 끝났고, 신들은 인간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중 제우스와 정의의 여신 테미스의 딸인 아스트라이아는 마지막까지 인간을 정화시키려했지만 끝내 타락한 인간은 그녀를 거부했고 결국 아스트라이아는 신들 중 마지막으로 인간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밤하늘의 별자리가 되었다. 처녀자리가 그녀의 모습이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왠지 지금 도미의 모습과 같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도미를 보며 실제로 타락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타락한 신이 천국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로봇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사라져야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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